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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말한다
김지원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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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조명 아래에서 무용가가 몸을 움직이면 손에 든 커다란 종이 다발이 함께 흔들린다. 가락에 맞추어 무용가는 종이 다발을 제 몸처럼 자유자재로 휘두른다. 어느 순간 무용가는 양손에 종이 다발을 든 채 두 팔을 활짝 펼치는데, 그러면 종이 다발은 마치 새의 날개처럼 절도 있는 곡선을 따라 허공을 가른다. 이윽고 무용가는 애도하듯 종이 다발에 얼굴을 묻더니 조심스럽게 다발을 내려놓으며 춤을 마무리한다.

이 춤은 2017년 한국전통춤협회 정기공연에서 강미선 무용가가 공연한 진도씻김굿의 '지전춤'이다. 공연을 촬영한 영상은 유튜브 등의 플랫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전'이라고 일컫는 종이 다발은 망자들의 저승화폐를 상징하는 것으로, 창호지나 한지를 접어서 엽전이 길게 꿰여 늘어진 모습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 지전춤이란 망자의 넋을 달래고 망자를 극락으로 천도하는 춤이다. 무용가의 몸짓은 절제된 동작으로 망자를 떠나보내는 한을 풀어낸다.

뻔한 이야기지만,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예술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 중 하나다. 어떤 이는 나와 생각을 달리해, 무용가가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무용가가 지전을 양손에 들고 펼치는 춤동작이 '새보다는 바람개비처럼 보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무용의 의미를 읽어내는 과정에서 무용과 관객은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데, 이 대화의 내용은 개인의 경험과 지식에 따라 무한히 많은 갈래로 확장될 수 있다. 무용이라는 예술 영역은 다양한 해석이 열려 있는 기호와 같다.

시대와 장르를 막론하고 춤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런 고민을 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춤을 일종의 코드로서 독해하게 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이런 점을 자신만의 고유한 문제의식으로 삼은 듯하다. 『춤은 말한다』는 어떤 방식으로든 춤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한 갈래의 의미 있는 접근법을 던져 주는 책이다. 무용가이자 무용 이론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무용을 기호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저자에 따르면, 무용의 의미를 형성하는 손짓과 몸짓 같은 요소들은 비구두적인 '언어'로서 해석될 수 있다. 무용은 '의사소통의 기능'을 수행하는 '몸짓 언어'다.

"언어는 약속된 체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가장 언어적인 속성이다.

그러나 무용 언어는 구두적 언어와 같이 확정된 약호도 의미의 공유도 아니다." (춤은 말한다, 68)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가 빌려 오는 모델은 대표적으로 소쉬르와 퍼스의 기호학 이론이다. 소쉬르의 기호 모델로 '몸짓언어'로서의 무용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저자는 무용의 동작 자체가 기표이며, 동작과 동작 간 차이의 구조가 기의를 낳는다고 말한다. 무용에서 기표는 신체의 몸짓으로 기의를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앞서 이야기한 예술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저자는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무용에서의 의사소통 또한 소통의 일치를 목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퍼스의 기호 모델에 '몸짓언어'로서의 무용을 대입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도상은 '대상과 유사성의 관계에 있는 동작기호'에 해당한다. 지표는 '대상과 인접성의 관계에 있는 기호'로서, 자연적인 인접성의 유추작용을 수반하는 동작, 의상, 소품 따위를 포괄한다. 상징은 '일반관념의 연상에 의하여 지시하는 대상을 표상하되 추상적 개념을 표의하는 기호'이다. '음양'을 상징하는 무용가의 호흡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저자의 무용이론은 무용의 가장 근본적인 기호학적 속성을 논의하기 때문에 한국 전통춤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시대 K-POP 아티스트들이나 팝 아티스트들의 댄스 퍼포먼스도 '기호'로 읽어낼 수 있다. 오히려 K-POP의 영향력이 전세계적으로 화두에 오르고 있는 이 시대에, 대중적인 무용으로 논의를 확장시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국내 12인조 걸그룹 '아이즈원(IZ*ONE)'의 첫 정규앨범 타이틀곡인 <피에스타> 댄스 퍼포먼스를 예시로 떠올려 보았다. <피에스타>에서는 1절과 2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안무가 있다. 한 멤버를 중심점으로 나머지 열한 명의 멤버들이 주위를 에워싸는데, 이 안무의 구도에서 시각적으로 꽃을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저자의 논의를 적용해 보면, 팔을 바깥쪽으로 뻗어 꽃을 피워내는 듯한 동작은 도상으로서 퍼포먼스의 기표로 기능하며, 이 동작소가 산출하는 일차적 기의는 '꽃이 피어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퍼포먼스의 기의는 '성숙함'이라는, 곡의 전체적인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으로 이어진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의 연구가 가지는 의미는 기존에 체계적 이론으로서 정립되지 않았던 무용기호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이다. 『춤은 말한다』는 기호로서의 예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논의에서부터 세부적인 무용 작품 사례 분석까지, 무용기호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내용들을 착실히 갖추고 있다. 몸짓을 통해 소통하는 무용 언어의 대화에서 무용가는 화자가 되고, 관객은 청자가 된다. 지전춤의 무용가가 새처럼 나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무언의 말'을 건네면, 관객은 귀를 기울이고 무용가가 하는 말을 듣는다. 망자는 한 마리 새와 같이 하늘을 누비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 애도의 몸짓에 비로소 눈을 감고 편히 쉴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사랑하던 이를 떠나보내는 한을 온 몸에 고스란히 간직한 무용가의 언어는, 오히려 직접 입을 열어 하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도 이 책의 제목을 『무용기호학』대신 『춤은 말한다』라고 붙였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1) 옴중은 옴이 옮은 중을 뜻한다.

2) <피에스타>는 이전에 출시된 곡 <라비앙 로즈>, <비올레타>와 '꽃'이라는 같은 주제를 공유하며, 앞선 두 곡에 이어서 '꽃'으로 상징되는 그룹 멤버들이 마침내 전성기를 맞아 만개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모습은 '축제'로 비유되며, 이 축제는 꿈꾸던 미래가 현실이 되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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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속의 불만 문명텍스트 21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성해영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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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 유명한 계율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보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또,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쉬운 가르침을 따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알고 있다. 누군가를 미워한 경험은 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필요도 없고, 그 감정이 거창하고 대단한 원한일 필요도 없다. 포털사이트에서 아무 뉴스나 검색해 보아도 댓글 페이지에서는 이른바 '악플'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 이성이 얼마나 오랜 세월 과대포장되어 왔는지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이웃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일까? 그것 또한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생기는 자기혐오나,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느끼는 권태감,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환상적인 이미지에 자연스럽게 드는 박탈감 같은 것들은 점점 더 '나'를 사랑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불행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독 두드러지기는 해도, 비단 이 시대만의 어려움은 아닌 듯하다. 애초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도합 여덟 장으로 이루어진 『문명 속의 불만』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문명이라는 대주제로 이 물음에 대한 해설을 풀어 나간다. 프로이트의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흔히 '리비도'나 '남근선망' 같은 정신분석적 용어들만을 연상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단순히 모든 것을 성적 에너지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학자가 아니었다. 프로이트의 사상이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언급되며 연구되는 것은 그의 저작이 인간학적으로 유의미한 깊은 통찰을 곳곳에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 속의 불만』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문명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며 행복, 종교, 양심과 죄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책이다. 인간 삶의 의미란 언제나 해소되지 않는 갈증처럼 존재하는 질문이다. 그 답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독자라면 누구든 이 책을 기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첫째 장은 종교적 합일의 체험이 유아기의 무력감으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분석을 제시하며, 둘째 장은 문명 속 종교의 역할을 강조한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전제하는 것은 인간이 쾌락원칙에 따라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문명적 통제 하에서 행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방책 중 하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종교가 "인간들을 심리적 유아상태에 강제적으로 고착시키며 그들을 집단 망상으로 인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 신경증을 막아 준다"(문명, 79)고 주장하며, 종교적 행복의 환상을 비판한다.

세 번째 장부터 프로이트는 본격적으로 문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셋째와 넷째 장은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본질은 무엇인지 묻고 답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문명은 인간 공동체의 행복을 증대시키지만,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은 언제나 개개인의 자유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인류 투쟁의 역사 또한 이 양팔저울을 어떻게 기울일 것인지를 둘러싼 것이었다. 네 번째 장은 문명 형성에 요구되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로 노동과 사랑을 꼽는다. 에로스는 공동체적 결합의 근본이 되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적 에너지를 통제하여 노동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문명의 필요에 따라 성적 결합은 문명이 지정하는 특정한 형태로만 가능해진다. 문명과 에로스는 이렇게 필연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게 된다.

다섯 번째 장에 이르러서 프로이트는 비로소 그 유명한 계율을 언급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프로이트는 이 계율에 맞서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며, 그것이 주는 유익은 무엇이고,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에 답하는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이 공격성을 본능적 자질로서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숱한 세월 인간들이 자행해 온 약탈과 착취, 전쟁의 피로 얼룩진 인간사를 돌이켜보면 프로이트의 전제를 수긍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공격성은 '이웃을 사랑하기' 힘들게 만들고, 문명이 공격 욕동을 통제할 필요를 낳는다.

이렇게 문명적 필요로 통제된 욕동은 보다 '세련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승화되어 나타난다. 문명 공동체를 에로스로 결속시키는 방법 중 하나는 타자를 적대하는 형태로 공격 욕동을 방출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논의는 이단에 대한 종교적 불관용, 반유대주의, 소련에서의 부르주아 탄압과 같은 인간 증오의 역사를 해명하는 통로다.

여섯째 장은 문명 발달이 삶의 욕동과 파괴 욕동 사이의,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의 투쟁이라는 점을 분명히 주장한다. 일곱째 장부터 여덟째 장까지 프로이트는 억압된 인간 공격 욕동이 내면화되는 현상을 '양심'과 '죄의식'으로 설명한다. 문명적 억압을 통해 내부로 투사된 공격성은 그것이 본래 유래한 자아의 자리로 돌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초자아'다. 초자아와 자아의 긴장은 스스로를 처벌하려는 '죄의식'의 형태로 나타나며, 문명은 이를 통해 개인을 감시하고 공격 욕동을 정복한다. 특히 초자아의 권위는 개인이 어린 시절 경험한 아버지의 권위와 등치된다. 아이는 아버지의 권위를 공격하지 못하므로 그것을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여 곤란한 상황을 벗어난다. 그러나 이렇게 내면화된 권위는 초자아로 발달하면서 아동기에 품었던 공격성을 넘겨받는다. 프로이트의 이 서술은 문명과 개인의 발달사가 유사한 양상을 띠며, 개인의 초자아와 문명적 초자아 또한 '엄격한 이상적 요구'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 계율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율은 문명적 초자아가 요구하는 이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러한 이상을 '윤리'라고 부른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율은 인간의 공격 욕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어물이자, 문명적 초자아가 취하는 반심리학적 조치의 훌륭한 사례이다." (문명, 156) 프로이트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이 계율을 인간이 지키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율은 문명이 인간의 본능적인 공격 욕동에 가한 억압을 대변한다.

그리하여 『문명 속의 불만』이 수행하는 과제는 말 그대로 '문명 속의 불만'이 가지는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문명의 형성 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 문명 발전의 의미를 해석하며,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과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살핀다. 이 저작에서 프로이트가 내리는 결론은 문명이 인간의 욕동을 억압해야만 성립할 수 있었던 탓에, 문명 속의 인간은 항상 억압되어 불만스러운 상태라는 것이다. 문명의 발달 과정은 인간 개인의 발달 과정과 유사하다는 점 또한 프로이트의 고유한 통찰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인간 문명을 비판하는 관점을 취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문명 그 자체에 대해 어떤 가치 판단도 내리지 않으면서 단지 문명에 얽힌 질문들을 해명하려 할 뿐이다.

이 책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삶 속의 의문들을 직면하고 성찰할 계기를 열어 준다. 행복에 대한 2장의 고찰은 90년이 지난 지금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프로이트는 억제되었던 욕구의 일시적 만족을 통해서만 행복이 경험된다는 점을 들어, 행복은 그 본성상 지속적인 '상태'보다는 '대조'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행복의 가능성은 이미 체질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반면 불행은 훨씬 더 쉽게 경험된다." (문명, 67) 따라서 쾌락원칙이 요구하는 행복은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학부에 재학하던 시절, 나의 가장 큰 고민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대학에 진학하기만 하면 만사가 풀릴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내가 경험한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 공부도 생각한 것만큼 녹록치 않았고, 이것으로 밥벌이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으며, 고통을 견디고 하나의 목표를 이루면 또 그 다음 목표가 산 넘어 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행복의 이미지는 환상이며, 단지 큰 불편함이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라는 소극적인 결론을 겨우 도출했다. 출발점은 상이하지만 프로이트의 견해에 공감하기에 충분한 고민이었다.

우리는 종종 프로이트라는 이름에 담긴 학문적 무게만으로도 현기증을 느끼곤 하지만, 『문명 속의 불만』이 제시하는 다채로운 예시들은 결코 어렵지 않으며 흥미롭기까지 하다. 머리 아픈 정신분석학을 마주할 각오를 한 독자라면 프로이트가 들려 주는 인간사 해설이 생각보다 보편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점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이 서평을 계기로 더 많은 독자들이 프로이트의 사유의 깊이에 푹 빠져드는 시간을 갖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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