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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속의 불만 ㅣ 문명텍스트 21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성해영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 유명한 계율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보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또,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쉬운 가르침을 따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알고 있다. 누군가를 미워한 경험은 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필요도 없고, 그 감정이 거창하고 대단한 원한일 필요도 없다. 포털사이트에서 아무 뉴스나 검색해 보아도 댓글 페이지에서는 이른바 '악플'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 이성이 얼마나 오랜 세월 과대포장되어 왔는지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이웃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일까? 그것 또한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생기는 자기혐오나,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느끼는 권태감,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환상적인 이미지에 자연스럽게 드는 박탈감 같은 것들은 점점 더 '나'를 사랑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불행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독 두드러지기는 해도, 비단 이 시대만의 어려움은 아닌 듯하다. 애초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도합 여덟 장으로 이루어진 『문명 속의 불만』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문명이라는 대주제로 이 물음에 대한 해설을 풀어 나간다. 프로이트의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흔히 '리비도'나 '남근선망' 같은 정신분석적 용어들만을 연상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단순히 모든 것을 성적 에너지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학자가 아니었다. 프로이트의 사상이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언급되며 연구되는 것은 그의 저작이 인간학적으로 유의미한 깊은 통찰을 곳곳에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 속의 불만』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문명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며 행복, 종교, 양심과 죄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책이다. 인간 삶의 의미란 언제나 해소되지 않는 갈증처럼 존재하는 질문이다. 그 답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독자라면 누구든 이 책을 기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첫째 장은 종교적 합일의 체험이 유아기의 무력감으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분석을 제시하며, 둘째 장은 문명 속 종교의 역할을 강조한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전제하는 것은 인간이 쾌락원칙에 따라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문명적 통제 하에서 행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방책 중 하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종교가 "인간들을 심리적 유아상태에 강제적으로 고착시키며 그들을 집단 망상으로 인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 신경증을 막아 준다"(문명, 79)고 주장하며, 종교적 행복의 환상을 비판한다.
세 번째 장부터 프로이트는 본격적으로 문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셋째와 넷째 장은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본질은 무엇인지 묻고 답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문명은 인간 공동체의 행복을 증대시키지만,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은 언제나 개개인의 자유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인류 투쟁의 역사 또한 이 양팔저울을 어떻게 기울일 것인지를 둘러싼 것이었다. 네 번째 장은 문명 형성에 요구되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로 노동과 사랑을 꼽는다. 에로스는 공동체적 결합의 근본이 되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적 에너지를 통제하여 노동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문명의 필요에 따라 성적 결합은 문명이 지정하는 특정한 형태로만 가능해진다. 문명과 에로스는 이렇게 필연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게 된다.
다섯 번째 장에 이르러서 프로이트는 비로소 그 유명한 계율을 언급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프로이트는 이 계율에 맞서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며, 그것이 주는 유익은 무엇이고,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에 답하는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이 공격성을 본능적 자질로서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숱한 세월 인간들이 자행해 온 약탈과 착취, 전쟁의 피로 얼룩진 인간사를 돌이켜보면 프로이트의 전제를 수긍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공격성은 '이웃을 사랑하기' 힘들게 만들고, 문명이 공격 욕동을 통제할 필요를 낳는다.
이렇게 문명적 필요로 통제된 욕동은 보다 '세련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승화되어 나타난다. 문명 공동체를 에로스로 결속시키는 방법 중 하나는 타자를 적대하는 형태로 공격 욕동을 방출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논의는 이단에 대한 종교적 불관용, 반유대주의, 소련에서의 부르주아 탄압과 같은 인간 증오의 역사를 해명하는 통로다.
여섯째 장은 문명 발달이 삶의 욕동과 파괴 욕동 사이의,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의 투쟁이라는 점을 분명히 주장한다. 일곱째 장부터 여덟째 장까지 프로이트는 억압된 인간 공격 욕동이 내면화되는 현상을 '양심'과 '죄의식'으로 설명한다. 문명적 억압을 통해 내부로 투사된 공격성은 그것이 본래 유래한 자아의 자리로 돌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초자아'다. 초자아와 자아의 긴장은 스스로를 처벌하려는 '죄의식'의 형태로 나타나며, 문명은 이를 통해 개인을 감시하고 공격 욕동을 정복한다. 특히 초자아의 권위는 개인이 어린 시절 경험한 아버지의 권위와 등치된다. 아이는 아버지의 권위를 공격하지 못하므로 그것을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여 곤란한 상황을 벗어난다. 그러나 이렇게 내면화된 권위는 초자아로 발달하면서 아동기에 품었던 공격성을 넘겨받는다. 프로이트의 이 서술은 문명과 개인의 발달사가 유사한 양상을 띠며, 개인의 초자아와 문명적 초자아 또한 '엄격한 이상적 요구'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 계율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율은 문명적 초자아가 요구하는 이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러한 이상을 '윤리'라고 부른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율은 인간의 공격 욕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어물이자, 문명적 초자아가 취하는 반심리학적 조치의 훌륭한 사례이다." (문명, 156) 프로이트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이 계율을 인간이 지키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율은 문명이 인간의 본능적인 공격 욕동에 가한 억압을 대변한다.
그리하여 『문명 속의 불만』이 수행하는 과제는 말 그대로 '문명 속의 불만'이 가지는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문명의 형성 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 문명 발전의 의미를 해석하며,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과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살핀다. 이 저작에서 프로이트가 내리는 결론은 문명이 인간의 욕동을 억압해야만 성립할 수 있었던 탓에, 문명 속의 인간은 항상 억압되어 불만스러운 상태라는 것이다. 문명의 발달 과정은 인간 개인의 발달 과정과 유사하다는 점 또한 프로이트의 고유한 통찰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인간 문명을 비판하는 관점을 취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문명 그 자체에 대해 어떤 가치 판단도 내리지 않으면서 단지 문명에 얽힌 질문들을 해명하려 할 뿐이다.
이 책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삶 속의 의문들을 직면하고 성찰할 계기를 열어 준다. 행복에 대한 2장의 고찰은 90년이 지난 지금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프로이트는 억제되었던 욕구의 일시적 만족을 통해서만 행복이 경험된다는 점을 들어, 행복은 그 본성상 지속적인 '상태'보다는 '대조'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행복의 가능성은 이미 체질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반면 불행은 훨씬 더 쉽게 경험된다." (문명, 67) 따라서 쾌락원칙이 요구하는 행복은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학부에 재학하던 시절, 나의 가장 큰 고민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대학에 진학하기만 하면 만사가 풀릴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내가 경험한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 공부도 생각한 것만큼 녹록치 않았고, 이것으로 밥벌이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으며, 고통을 견디고 하나의 목표를 이루면 또 그 다음 목표가 산 넘어 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행복의 이미지는 환상이며, 단지 큰 불편함이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라는 소극적인 결론을 겨우 도출했다. 출발점은 상이하지만 프로이트의 견해에 공감하기에 충분한 고민이었다.
우리는 종종 프로이트라는 이름에 담긴 학문적 무게만으로도 현기증을 느끼곤 하지만, 『문명 속의 불만』이 제시하는 다채로운 예시들은 결코 어렵지 않으며 흥미롭기까지 하다. 머리 아픈 정신분석학을 마주할 각오를 한 독자라면 프로이트가 들려 주는 인간사 해설이 생각보다 보편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점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이 서평을 계기로 더 많은 독자들이 프로이트의 사유의 깊이에 푹 빠져드는 시간을 갖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