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옷장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자꾸 생각하게 된다. 주인공이 작가의 실제 모습과 얼마나 유사할지 아닐지.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라고 하면 코끼리 생각만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첫 작품이라는 <빈옷장>을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의 시초’라고 소개하고 있다. 시리즈 다섯 권중 <남자의 자리>를 먼저 읽고 이 책 <빈옷장>을 읽다보니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냥 작가의 이야기가 아닐까?’

 

 

<남자의 자리>를 먼저 읽지 않았다면 <빈옷장>은 ‘드니즈 르쉬르’라는 여자의 성장소설로 읽었을 것이다. <빈옷장>에서 아무리 르쉬르 식료품점이라고 불러도 <남자의 자리>의 그 식료품점이 연상되니 부작용이 컸다. 그러나 <빈옷장>을 먼저 읽었다 해도 자전적 소설이라는 소개가 작가와 드니즈를 동일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전적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를 계속 생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소설임에도 마치 에세이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장난스런 트릭인가 싶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등단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도 하루키의 모습이 많이 들어있다. 소설가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일정 부분 집어넣을 것이다. 본인의 함량이 몇 퍼센트 들어가 있는지는 작가만 알 것이고 독자는 알 길이 없다. 그러니 독자로서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의 모습이 <빈옷장>의 드니즈에게 얼마나 함유되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데 왜 나는 그것에 이렇게 천착하고 있는가......

......

......

찾았다!

내 글쓰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나는 책 리뷰에 몰두하고 있을 뿐 에세이는 쓰지 못하고 있다. 물론 리뷰 속에 내 경험이 들어가지만 그것은 책이라는 큰 산 뒤에 숨어있는 것이다.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에세이가 두렵다. 걸리는 게 너무 많다. 그럼 소설을 쓰면 되지 않냐고? 그건 일천한 경험과 부족한 깜냥으로 너무 힘든 일이다.

 

 

<빈옷장>을 읽으며 어린 아니 에르노를 생각했다. 생존에 아무 문제가 없었던, 안온했던 세계를 탈출하고 싶어했던 아니 에르노를. 그녀가 부모님의 식료품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들과는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이었다.

 

p.172

드니즈는 조용해요. 공부하거든요. 늘 공부를 잘 했어요. 다섯 살에 사전을 읽었죠! 그들은 평온했다. 그렇지만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드니즈, 자유롭고 행복한 드니즈라니, 그들은 매우 분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윤리 속에, 두려움 속에 나를 집어넣기 위해 나를 그들의 구유로 데려가서 더럽힐 것이다. 나 역시 두려워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성공할 수 없었다. 자신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녀는 부모가 사는 세계에서 차원이 다른 세계로의 월경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십대가 되었고 대학생인 그녀는 불법낙태수술을 받는다. 불결하고 시끄럽고 매너없는 르쉬르 식료품점이라는 세계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그녀가 넘어간 세계로 쉽게 편입하기 힘들었다. 대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낙태수술은 한 세계와의 결별에 종지부를 찍는 의식과도 같다. 소설의 시작이 수술을 받기 위해 다리를 벌리고 누운 장면이었고 르쉬르 식료품점이 늘 함께했던 십대시절로 돌아갔다가 마지막에 대학 기숙사에서 수기와도 같은 글을 이렇게 끝낸다.

그 부르주아들, 그 좋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지금 뱃속에서 내 수치심의 조각들을 힘겹게 꺼내는 것이라면, 나를 증명하기 위해, 구별되기 위해,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었다면…… 임신 그러니까 그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경비는 여전히 아래층에 있다.

일요일, 기숙사에서 1973년 9월 30일.

 

 

드니즈는 이로써 새로운 세계의 편입에 성공한 걸까? 더 이상 르쉬르 식료품점에 가지 않으면? 부모를 만나지 않으면?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데 그들의 생활태도를 고스란히 보고 같이 살았는데? 그녀는 이미 열다섯 살에 알고 있었으며 두려웠다.

 

p.129

어쨌든 그들은 늘 내부모이며 나는 그들의 푸념과 취향, 말하는 방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서 신분 상승하는 것을 막을 것이다.

 

 

다행이도 드니즈가 아닌 아니 에르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서슴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글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소설에 화려한 미사여구는 없다. 흔히 문학적이라고 하는 비유적 표현은 거의 없고 있는 그대로를 기술할 뿐이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였기에 자신의 삶에 분 바르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 것 같은데 오히려 감출 것 같은 부분까지 죄다 까발려 보여준다.

 

 

허나! 모를 일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름표의 무한 가능성을 그녀는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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