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이 별을 떠날 때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독한 현실을 살았던 남자가 있다. 누군들 사는게 안 힘드냐며 타박하는 이도 있겠으나 현실속의 지독함이란 당사자에게는 큰 법이다. 예컨대 화물선에서 두어달 이상씩을 항해하는 이들의 일상을 며칠 겪어보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맨날 멋진 구경 하면서 그냥 타고 있으면 되는 거였네. 이제 고생한다는 말 하지마."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배 타는 게 지루할 거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어. 이런 시간들을 그동안 어떻게 견뎠어?"
전자는 아내를 배에 태워본 주인공의 동료들의 증언이고,  후자는 주인공 아내가 남편의 배에 처음 타보고 한 말이었다. 그는 돈을 많이 벌려고 선장이 되었고 아내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몇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아내와 애틋함까지는 아니어도 그리움 비슷한 감정은 있었으며 평범하다고 생각한 아내에게 저런 말을 듣고는 몹시 낯설다 느꼈다. 그리고 딸의 결혼식 자리에서 아내가 너무나 예뻐보여 낯설다못해 당혹스러움까지 느낀다.

p.106 멀어진 사람은 근사해진다. 낯선 느낌 때문에라도. 그러니까 비로소 아내가 아닌 한 여인을 발견한 듯했던 것이다. 사람이라는 게 알고 있는 것과는 정말 다르구나 하는 생각마저 새삼 들었다. 익숙한 존재속에 숨어있는 신비한 공간을 발견했다는 자각이랄까.

사실 이 부분을 읽고,
'음, 이것이 전조인가? 올 것이 오겠구나.'하며 지극히 진부하고 통속적인 상상을 했다.
'늘 같은 표정, 수수한 옷차림의 가구같던 아내를 재발견한 남편이 느끼는 이 이질적 감정이 뭐겠어. 당연한 수순을 밟겠군...'

작가를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다. 한창훈이라는 소설가와는 이 책으로 첫 만남이었다. 그래서 그의 글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가늠해보지 못한 상태로 읽다가 어설픈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고, 눈물이 차올랐다.

딸 결혼시키고 은퇴후 아내와의 생활을 꿈꿨으나 아내는 난소암으로 죽는다. 아내와 남편이라는 역할에만 충실했던 그들은 아내의 병실에서 처음으로 진심을 나누는 대화를 하게 된다. 둘의 결혼생활은 경제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지 몰라도 각자의 역할을 다하느라 마음이 얼마나 고됐는지는 서로가 몰랐다. 아내는 매일매일 퇴근시간이면 붐비는 주차장을 보며, 옆집 남편들이 퇴근하는 소리를 들으며, 외로웠다. 남편은 영원히 닿지 못할 곳을 평생 가야하는 절망감으로 수평선을 보며 선상생활을 했다고 말한다. 그 고백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침대위 모니터에 수평선을 긋고 떠나버린다.

이 소설의 한 축은 주인공의 이야기이고 한 축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의 이야기다. 주인공의 이야기는 현실의 이야기 같고 어린왕자를 만나는 이야기는 동화같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80년 후 지구에 다시 돌아와 주인공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반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원작의 어린왕자를 이 소설에 잘 살렸다는 출판사의 리뷰나 바닷가를 일만번 걷다가 문득 다가온 그 '무엇'으로 이 소설을 썼다는 작가의 말 모두 인정한다.

허나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란 말처럼 나는, 동화같은 어린왕자 이야기보다 주인공의 현실이야기가 더 공감이 되었다. 어린왕자 덕분에 바닷속 체험을 할 때 자신의 생에 주요 사건들이 하나씩 펼쳐졌고 아내와의 시간들 그중에서 자신도 몰랐던 이야기들이 영화처럼 보여진다. 생텍쥐페리가 말하던 어린왕자를 현대에 되살린 점도 중요하겠지만 어린왕자를 만난 주인공이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정리해본 것에 더 의미가 있는 듯 하다. 자신이 아내를 사랑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으니까...

수순대로 어린왕자는 자기 별로 떠나고 혼자 남은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이별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바다에 떠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오랜 시간 배 위에서 지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리라. 그리고 수평선을 향해 배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바다 위에 늘 있을 땐 절망이었던 수평선, 수평선을 그으며 떠나버린 아내. 이젠 그 수평선을 만나러 배를 타고 나가는 그는 아마도 매일 아내를 만나고 돌아오는 게 아닐까.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려고...

현실이 괴로울때 우리는 동화같은 세상을 꿈꾼다. 그곳에서는 고통도 없고 자신의 남루함도 씻겨질 것만 같으니까. 순수함을 찾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고 이런저런 경험도 해보았으며 책을 읽으며 내가 겪지 못한 타인의 독특한 삶도 내것인양 느끼게 되다보니 이젠 동화같은 환타지가 그리 와닿질 않는다. 주인공이 짧은 순간 아내와 교감한 장면에서 가슴 찌르르했던 것은 부러워서인가, 내가 늙어서인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