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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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신작을 읽으며 이상한 안도감과 함께 이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또 다른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키워드가 그림자, 즉 마음이라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키워드는 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년 시절 정신적 유대를 쌓은 (지금은 연락이 끊긴) '글 쓰는 여자친구'와 가상의 도시에서 만난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녀를 기억한다. 그 도시에 가려면 그림자를 벗어야 하고, 그건 본연의 나를 잃어버리는 것을 뜻하지만 어느 것이 실제의 나인지 잘 모른다. 육체를 가진 나가 진짜 나일까? 빙산 같은 무의식이 진짜 나일까?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야” ​

벽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버티고 섰으며, 인간의 마음에도 우뚝 서있다. 마음의 저항감, 두려움, 공포, 양심의 가책..... 그 양상에 따라 허물어지거나 더 굳건해질 것이다. 또는 주인공처럼 그녀를 만나고 싶은 강한 의지가 있다면 물컹한 젤리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또 다른 결말'이라는 생각과 '안도감'이 들었던 이유는, 이번에야말로 작가가 원 없이 무의식의 세계를 여행했다는 생각에서였다.

원더랜드에서는 갈 수 없던 '세계의 끝'을 드나들며 그녀를 만나고, 무의식을 항해하며 심연의 밑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게다가 그림자와 이별하는 순간 현재로 돌아온다. 완벽한 상호보완이다. 씨실과 날실의 짜임처럼 탄탄하고, 그 격자무늬의 의식과 무의식을 유연하게 들고 난다. 내가 그림자인지 저쪽이 그림자인지 의심하며 읽는다. 진짜 나는 벽 안의 세계에서 이상적인 소녀를 만나 사랑하며 살고 있을 것 같다.

이번 작품을 읽으며 하루키가 꾸준히 말하는 무의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카를 융은 자신의 생애에 대해 '무의식의 자기실현'이라고 했다. 자기실현은 개인의 자아가 무의식의 바닥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열망하는 욕구를 실현하는 것이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노년의 작가가 한 평생 열심히 쌓아 올린 벽 안의 풍경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거기엔 세계에서 '동시의 존재'이길 원했던 소년이 있다. 소년은 고요한 바다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도, 꿈을 읽으러 도서관에도 가고 싶다. 그곳에는 소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된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내 의식과 내 마음 사이에는 깊은 곳이 있었다. 내 마음은 어떤 때는 봄날의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토끼이고, 또 어떤 때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가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다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다." p.754

그의 글 어디서도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그의 오랜 팬으로서 나는 어렴풋한 슬픔과 안도를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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