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류진의 문장은 읽을 때마다 경쾌한 감각에 휩싸인다. 너무 시답잖아서 흘러가는 것조차 못 느끼는 작은 것들도 그는 예리하게 포착해, 자신만의 감각으로 만질 줄 안다. 그렇게 탄생한 공감이라는 키워드는 40대 독자인 내게 점점 그리움으로 바뀐다. 그 그리움은 참 익숙하다. 어찌 이럴 수 있을까. 못난 '나'는 어느덧 그의 젓가락에 의해 섬세하게 뼈와 살이 분리되어 오장 육부가 훤히 드러난다. 그러나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그의 젓가락질은 친절하고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라이딩 크루'의 나는 무력하게 그의 앞에서 옷을 벗었고, '동계 올림픽'의 나는 그의 앞에서 흰색 패딩을 입고 엉엉 울고 만다. '연수'에서는 '나'보다도 극 중 '준서맘'이나 '주연맘' 혹은 연수쌤에게 깊이 빙의되고 말았다. (그건 나이 탓일까)한편 '펀펀 페스티벌'은 20년 전 나의 신입사원 3주간의 연수원 시절을 순식간에 소환했다. 팀을 짜 프로젝트를 해내야 하는 사회 초년생들의 어설픈 모습들. 윗대가리들에게 폴더처럼 접히던 인사. 다들 좋은 점수를 따내고 싶었던 마음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그 시절은 이미 입사가 확정된 시점이었다는 것. 그럼에도 무언가 간절한 마음은 동일했다. 껍데기를 사랑한 나를 혐오하고 또 합리화하는 마음은 알듯 말듯 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미라와 라라'의 우리들은 철저하게 작가의 젓가락질에 무릎을 꿇고 자기 객관화라는 꽃을 피워야 할 때라는 것을 절감한다. "문장 한 줄도 제대로 못 쓰면서"이 오만한 연민은 실은 나를 향한 것임을.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깨닫는다. 나는 오만으로 범벅된 위선자였다. 작가가 잘 발라놓은 생선구이를 먹는다. 간이 잘 배었고 적당히 바삭하며, 살은 오동통하니 부드럽다. 실로 다행이다. 한국문학에 장류진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