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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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란의 소설은 처음 읽어보았다. 이주란의 소설은 큼직한 사건에서 이야기가 가지를 치고 나간다기보다는 잔잔한 일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전형적인 사건 중신의 한국소설이라기보다는 아주 섬세하고 세세하게 인물의 마음을 쓰다듬으며, 독자에게 잔잔하고 촘촘한 위로를 보내는 소설들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결이 비슷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서 때로 헷갈리기도 했으나 모두 다른 잔잔함이었다.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사람들은, 여름밤이었다.

 

  「사람들은은 은영과 은영의 이야기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 두 명의 은영을 보며 나와 정말 비슷한 인물들이었다. 지인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딱히 할 말이 없다고, 나의 사소한 이야기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나는 주로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몇 년 전, 친구가 내게 "넌 이야기꾼은 아니잖아."라고 했던 게 이런 의미였을까.

 

  「여름밤사람들은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었다. 은영이 떠난 이후, 은영을 기다리는 은영의 이야기다. 기다림과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 여름밤을 떠올리면 어딘가 아련하면서도 행복하기도 쓸쓸하기도 할 텐데, 이 소설이 딱 그러했다.

 

  『별일은 없고요?라는 소설집은 여름휴가 때 잔잔한 소설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을 세밀하게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서로 신세 한탄도 하고 위로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만 너무 쉽게 부서진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P13

그러나 나 역시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친구들과 할 얘기가 없는 거구나 그런 걸 깨달았다. 나는 친구들의 일상 이야기를 듣는 걸 따라가기에도 벅찰 정도였다. 다 얘기한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얘길 한참 듣다보면 내가 먼저 지쳐 있었다. 말을 한 건 친구들이었는데 그랬다 친구들은 중간중간 음료를 마시며 잠시 쉬었고 그런 순간엔 나도 내 얘길 좀 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할 얘기가 없었다. - P55

우리는 가졌던 것을 잃었다기보다는 원래 없는 사람들이었고 삶 속에서 어떤 이야깃거리를 발견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듯하다. 그래서 몇 마디 한다고 하는 게 늘 싱겁기만 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 P81

보채지 말아요. 파 좀 늦게 썬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는다구요.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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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 부패의 역설이 완성한 중국의 도금 시대
위엔위엔 앙 지음, 양영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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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제와 관련된 뉴스, 지문, 단어 등을 유독 어려워한다. 언제까지 기피하며 지낼 수는 없으니 도전하는 마음으로 골라본 책이다. 경제, 정치 외교와 관련된 책은 난생처음 읽어보았다. 통계자료와 수치 비교, 그래프 이해, 생소하고 어려운 단어 등 난관이 꽤 있었지만 결국은 책을 끝까지 읽고 나름 이해하려 노력해 보았다. '나름' 이해한 내용을 정리해 보려 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중국 사회가 부패했음에도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담겨 있다. 부패의 종류, 중국의 부패에 대한 기존 연구의 한계 등이 담긴 1장은 어느 논문의 초입을 읽는 듯했다. 2장에서는 표준부패측정법(CPI)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신이 기준을 세워 측정한 부패지수(UCI)를 제시하며 중국의 부패와 경제 성장 이유를 자세한 근거를 대며 주장했다. 차분히 독자에게 설명하여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듣게끔 하였다. 3장에서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중국의 부패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4장에서는 중국 관료들이 이익을 챙기는 방식에 대해 언급한다. 5장에서는 자세한 부패 사례를 다뤘다. 6장에서는 시진핑의 반부패운동과 중국의 미래, 7장에서는 중국과 미국의 도금주의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한다.

 

  중국은 미국이 금을 캐던 그 시기, 부패가 만연함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성장한 것과 유사한 시기를 보냈다. 저자는 그것을 중국의 도금시대라고 표현한다. 중국, 미국의 부패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한다. 비슷한 점 하나를 꼽자면 저자가 분류한 부패 유형이 같다는 것이다. 바로 '인허가료'이며 이것은 건설, 부동산 등 땅과 관련된 사업과 연관되었다. 또한 한국과 일본 등의 나라도 인허가료 유형의 부패가 주를 이룬다고 한다. 인허가료 유형의 부패는 위기가 다가오는 순간 미국의 대공황(1839), 동아시아 금융위기(1997), 미국 금융위기(2008)와 같은 모습으로 찾아온다.

 

  책의 내용을 휙 건너뛰어 이야기하자면, 부패는 경제성장의 측면에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허가료 유형의 부동산 투자, 건설 사업 투자 유치 등을 통해 성장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부패는 경제, 사회에 전혀 이롭지 않다. 이러한 부패를 시진핑 정부가 반부패운동으로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성장이 더뎌진 것은 맞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마냥 부패를 목도하는 것보다는 나아 보인다.

 

  경제 혹은 정치 외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 현대 배경의 중국 드라마를 보며 중국의 부패가 궁금해진 사람, 중국의 급속한 성장 이유와 전망 궁금했던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중국과 가장 유사한 것은 19세기 말의 미국이다. 이 시기의 미국은 맹렬한 성장과 눈에 띄는 불평등, 그리고 재력가들과 결탁한 부패 정치인들로 특정 지어진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1978년 이후 중국의 ‘도금시대‘가 건설되는 과정이다. - P14

나는 어떤 종류의 부패는 심각한 위험과 왜곡을 가져올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P20

이런 종류의 부패는 시민과 업계에 비용을 유발하며 결국에는 세금의 성격을 띠게 된다. 특별히 빈곤층에게는 작은 규모의 뇌물도 참담한 수준의 부담이 된다. - P25

인허가료는 자원 배분을 왜곡하고 체계적인 위험을 잉태하며 불평등을 악화시킨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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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은 날아 차 - 작심삼일 다이어터에서 중년의 핵주먹으로! 20년 차 심리학자의 태권도 수련기
고선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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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성 심리학자가 태권도를 수련하며 심리학적 재미를 발견하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 라는 소개 멘트에 이끌려 골라보았다. 나도 국기원에서 심사받고 품증을 보유한 유품자다. 초등학생 때 약 3년 동안 태권도장을 아주 즐겁게 다녔던 기억이 있다.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나는 태권도를 배우며 운동도 하고, 또래와 어울리며 사회성을 배웠다. 사범님과 관장님으로부터 조금 더 깍듯하게 어른을 대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 태권도장을 다니는 수련생 중에 모난 사람은 없었으므로 인성교육을 정말 열심히 해주셨다는 걸 이제 와 새삼 느낀다. 태권도장을 다니며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간식과 밥을 잘 챙겨 먹은 만큼 움직여서 비만이 아니었다는 점(월수금은 태권도, 화목은 수영, 주말 중 하루는 등산하긴 했다), 키 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책에는 무엇이든 쉽게 시작하고 금방 포기해버리는 저자가 태권도는 1년 넘게 수련할 수 있었던 이유, 태권도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사상, 복장의 의미가 담겨 있다. 중간중간 MBTI, TCI가 언급되기도 하고, 태권도가 어떠한 면에서 치료가 되었는지도 저자가 셀프 분석하여 이야기한다. 5장에는 중년 태권도 수련생들의 간단한 인터뷰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여성이 자기 신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여기는지, 사회는 여성의 신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건강보다 미를 중요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자기 몸을 얼마나 긍정하는지, 얼마나 건강하게 몸을 움직이고 단련시키는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자가 새로운 분야인 태권도에 도전하면서 성취감과 재미를 느끼고 스트레스 해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다 개운했다. 몸이 조금 나아지면 나도 오랜만에 헬스장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심리학적으로 깊은 내용이 많지는 않아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운동하면 얼마나 좋게요! 하고 운동하게 만드는 에세이 같다. 저자의 농담이 재미있고 깔깔 웃을 만큼 웃겼지만 '발작 버튼'이라는 표현, 있어 보이는 어감이라는 이유로 '검은 띠', '밤 띠''블랙 벨트', '갈색 벨트' 라고 쓴 것은 좀 아쉬웠다.

 

  새로운 스포츠, 혹은 태권도에 도전해보고 싶은 여성,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몸이 굳는 것이 느껴져서 운동을 시작하려는 여성에게 이 책을 추천해보고 싶다. 책의 판형이 작고 서체의 크기가 넉넉해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약물과 디자인이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것은 덤이다.

도장 밖으로 나가면 생활 영역 어디에서든 경험치가 쌓일 대로 쌓여 초심자의 마음을 갖기 힘들다. 칭찬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고 의사 결정에 따르기보다는 의사결정을 직접 해야 하는 나이다. 그렇다 보니 때로는 내가 틀릴지도 모른 채 지어놓은 매듭을 누군가가 달려와 후루룩 풀어 다시 매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사범님이 매듭을 풀어 다시 묶어주실 때, 중년의 태권도 수련생은 그런 생각에 종종 빠진다. - P58

추하게 늙지 말자는 결심은 자주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을 검열하게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가급적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게 되었다. 스스로 만든 제약 안에서 노화를 서글퍼만 하고 있는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이었다. - P124

나에게 적용해보자면, 나는 정서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과정 중 신체 감각을 통해 정서에 이르는 길에 두꺼운 셔터를 내려놓고 있었고 통증으로 몸이 소리치며 셔터문을 두드리기 전까지 신체감각이 내는 다양한 소리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나에게 태권도는 몸과 마음이 매우 민첩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마음에만 집중할 때는 알 수 없었던 해결책이 신체감각을 자극하고 몸을 제대로 쓰면서 발견되기도 한다는 걸 깨닫게 한 운동이다. 태권도는 아이들 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여러모로 특별한 치료법이 될 수 있다. - P136

수련 과정에서 내 몸을 단련하고 근육의 감각을 깨우고 조절하는 것은 내 몸의 운전대를 내가 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화의 폭풍우가 밀려와 파도가 얼굴을 때려도 예전처럼 많이 두렵지 않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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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 배달 사고로 읽는 한국형 플랫폼노동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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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르게 된 계기가 있다. 2021년 초, 겨울이었다. 야근하다 상사와 택시를 타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평소 막히는 길목이 아닌데 유독 막히는 게 이상했다. 택시가 천천히 주행했고, 오른쪽 도보와 가장 가까운 도로에 승용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근처에는 오토바이가 넘어져 있었고, 도로에 천으로 덮인 시신 한 구가 보였다. 상사는 배달 기사인 것 같은데 너무 끔찍하고 안타깝다고 말하면서도 시선을 돌리질 못했다. 나 또한 그랬다. 일이 너무 바쁘고 고되어 거의 매일 점심과 저녁을 배달시켜 먹었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졌다. 도로를 바쁘게 휘젓고 다니는 배달노동자들을 볼 때면 제발 사고 나지 않길 바랐다. 사고 목격으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지금, 산재 신청 기업 1위가 배달기업인 이유가 궁금했다. 배달노동자들이 이토록 사고에 노출되어 있는 데도 과속하고 신호를 위반해가며 위험하게 운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명하기 복잡한 배달업계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줄 책이 필요했다.

 

저자는 잠시 멈춰서서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정말로 운전에 능숙한지, 원동기 면허증은 취득했는지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배달노동자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위험 요소가 있는지 확인하고 관리해야 한다. 임금과 안전(생명)은 무관하지 않다.' 라는 것이다. 배달노동자가 주로 이용하는 오토바이 관련 사고와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배달콜, AI, 산재에 대한 이야기를 경험과 통계, 기사와 논문 등을 인용, 실험을 통해 풀어낸다. 이것을 토대로 배달업계에 5가지 제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플랫폼 산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 배달노동자들이 왜 항상 바쁜지, 위험하게 운전하는지 궁금했던 사람, 배달료 측정 기준이 궁금했던 사람 등에게 이 책을 추천해본다.

배달노동자들이 오토바이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 신호위반과 난폭운전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단계. 벌벌 떨면서 조심조심 운전하는 초보 시절부터 사고가 발생한다. 오토바이를 이용해서 일할 정도로 익숙한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생략됐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 P25

플랫폼회사는 이 최고의 공장을 짓고 관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도로를 깔고 정비하는 것은 국가가, 사고 예방을 위한 단속은 경찰이 한다. 배달 쓰레기는 공공의 세금과 시민들이 감당하고, 교통사고 처리는 배달노동자 스스로 해결한다. 배달업으로 발생하는 위험과 비용을 시민과 노동자가 책임진다는 사실은 해외 투자자들에게도 매력적이었다. 최근 합병과 상장에 성공한 배민과 쿠팡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투자 유치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화면으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배달기업은 얼마나 신속한 배달이 가능한지를 해외 투자자들에게 시연했고, 투자자들은 도시와 시민을 사유화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플랫폼에 열광했다. - P43

시민들이 안전하게 도로와 도시를 이용할 권리와 빠른 배달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은 배달기업의 이익이 충돌한다. 빠르게 배달받고 싶은 소비자의 욕망과 시민의 안전이라는 이익이 충돌한다. 여기에 빠르게 음식을 판매하고 싶은 가게 사장님의 욕망, 빠른 배달을 통해 많은 수익을 올리고 싶은 라이더의 욕망까지 뒤엉킨다. 이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라이더와 시민의 입장에서는 최악인 라이더가 동일 인물인 모순을 발생시킨다. - P44

정신이 번쩍 들었다가 이내 부끄러워졌다. 나는 배달앱의 알림에 아무런 분노도 슬픔도 느끼지 못했다. 사람 하나 죽었다고 배달산업이 멈출 리 없다. 다른 사람이 배달하면 그만이다. 죽은 이는 데이터에서 삭제될 뿐이다. 배달노동자의 사고와 죽음을 막는 건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지면서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는 구멍이 뻥뻥 뚫린 채 방치되고 있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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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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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집을 읽을 때는 차례 순서대로 읽는다. 그런데 처음 만난 작가이고, 도대체 제목과 같은 제목을 단 마지막 장은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블랙홀을 읽은 뒤 맨 뒤의 미확인 홀을 조금 읽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처음에 실린 작품의 외전 느낌이 나서, 스포일러를 읽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책을 살펴보니 이 책은 장편소설이었다. 혹시 이 리뷰를 책을 읽기 전에 접했다면 순서대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많은 인물과 장소를 설정하고 서사를 만들며 얼마나 세세한 설정을 하였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촘촘하게 짜인 소설이었다. 읽다 보면 여덟 편의 소설이 꼭 희곡의 ''처럼 느껴져서 연극으로 구성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혼자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술술 읽히는 장편소설을 읽게 되어 좋았다.

 

미확인 홀은 희영이 블랙홀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이 되었지만, 가장 최초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렇다. 그 이후부터 희영, 필희, 은정, 필성, 찬영, 순옥, 미정, 혜윤 등 인물의 마음에 하나씩 있는 정체 모를 미확인 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켜켜이 쌓인다.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우리의 마음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다양한 독자가 읽어보면 좋겠다. 책을 관통하는 이미지가 표지와 도비라에도 잘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은 도장이었다. 미정이 느낀 허탈감, 자신의 쓸모에 대한 고민 등은 언젠가 나도 느껴본 것이었다. 미정에 비할 수야 있겠냐마는, 지금까지 산 시간 동안 어렴풋이 느껴본 감정이었고, 꽤 진지하게 해본 고민이라서 공감할 수 있었다. 미정을 귀찮게 하는 주변인들을 보며 나도 덩달아 짜증을 냈는데, 조금 더 살아볼까? 마음을 먹은 미정을 보고는 나도 스르륵 녹았다. 왠지 반성도 하게 되었다. 나도 엄마 생각이 났나 보다. 엄마는 정말 다 계획이 있나.

 

마음이 허전한 사람, 그 허전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독이거나 채우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6)

물건에 깃든 추억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이고 지며 살았는데,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모든 추억이 하찮게 느껴졌다.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자. 엄마 것도 버리고 내 것도 버리자. 그렇게 미련 없이 버리다 보니 베란다 방이 볼펜 한 자루 없이 텅 비었다. - P51

연이은 부닥침으로 추락의 속도가 더뎌졌고, 미정은 그 모든 게 엄마가 마련해놓고 간 장치임을 깨달았다. (···)
미정은 허리 높이만큼 쌓인 쓰레기봉투 더미에서 어제 자신이 내다놓은 봉투를 찾았다. 익숙한 구두와 정장, 컵라면 용기와 축축한 휴지, 액자와 수첩 같은 것이 뒤섞여 있는 봉투 안에서 금빛 손톱깎이를 건져올렸다. 집에 하나밖에 없는 손톱깎이였다. 미정은 점퍼 주머니에 손톱깎이를 넣고 봉투를 다시 묶었다. - P78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것이 아닌 건 결국 잃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순옥은 살아왔다. 버리거나 버려지는 것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살다 보면 모든 걸 한순간에 잃는 것 같아도, 살아보면 어떤 걸 완전히 잃기까지는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고. 그러므로 완전히 잃지는 않을 기회 또한 여러 번 있다고. 때로는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상실을 막아주기도 한다. - P113

직원은 돈을 사양했다. 뜻밖의 호의에 놀란 혜윤이 직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서러움을 많이 삼켜본 눈이었다. 하지만 남의 서러움까지 받아줄 여유는 없는 눈. 그래서 조금 미안해하는 눈.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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