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 배달 사고로 읽는 한국형 플랫폼노동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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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르게 된 계기가 있다. 2021년 초, 겨울이었다. 야근하다 상사와 택시를 타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평소 막히는 길목이 아닌데 유독 막히는 게 이상했다. 택시가 천천히 주행했고, 오른쪽 도보와 가장 가까운 도로에 승용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근처에는 오토바이가 넘어져 있었고, 도로에 천으로 덮인 시신 한 구가 보였다. 상사는 배달 기사인 것 같은데 너무 끔찍하고 안타깝다고 말하면서도 시선을 돌리질 못했다. 나 또한 그랬다. 일이 너무 바쁘고 고되어 거의 매일 점심과 저녁을 배달시켜 먹었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졌다. 도로를 바쁘게 휘젓고 다니는 배달노동자들을 볼 때면 제발 사고 나지 않길 바랐다. 사고 목격으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지금, 산재 신청 기업 1위가 배달기업인 이유가 궁금했다. 배달노동자들이 이토록 사고에 노출되어 있는 데도 과속하고 신호를 위반해가며 위험하게 운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명하기 복잡한 배달업계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줄 책이 필요했다.

 

저자는 잠시 멈춰서서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정말로 운전에 능숙한지, 원동기 면허증은 취득했는지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배달노동자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위험 요소가 있는지 확인하고 관리해야 한다. 임금과 안전(생명)은 무관하지 않다.' 라는 것이다. 배달노동자가 주로 이용하는 오토바이 관련 사고와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배달콜, AI, 산재에 대한 이야기를 경험과 통계, 기사와 논문 등을 인용, 실험을 통해 풀어낸다. 이것을 토대로 배달업계에 5가지 제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플랫폼 산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 배달노동자들이 왜 항상 바쁜지, 위험하게 운전하는지 궁금했던 사람, 배달료 측정 기준이 궁금했던 사람 등에게 이 책을 추천해본다.

배달노동자들이 오토바이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 신호위반과 난폭운전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단계. 벌벌 떨면서 조심조심 운전하는 초보 시절부터 사고가 발생한다. 오토바이를 이용해서 일할 정도로 익숙한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생략됐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 P25

플랫폼회사는 이 최고의 공장을 짓고 관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도로를 깔고 정비하는 것은 국가가, 사고 예방을 위한 단속은 경찰이 한다. 배달 쓰레기는 공공의 세금과 시민들이 감당하고, 교통사고 처리는 배달노동자 스스로 해결한다. 배달업으로 발생하는 위험과 비용을 시민과 노동자가 책임진다는 사실은 해외 투자자들에게도 매력적이었다. 최근 합병과 상장에 성공한 배민과 쿠팡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투자 유치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화면으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배달기업은 얼마나 신속한 배달이 가능한지를 해외 투자자들에게 시연했고, 투자자들은 도시와 시민을 사유화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플랫폼에 열광했다. - P43

시민들이 안전하게 도로와 도시를 이용할 권리와 빠른 배달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은 배달기업의 이익이 충돌한다. 빠르게 배달받고 싶은 소비자의 욕망과 시민의 안전이라는 이익이 충돌한다. 여기에 빠르게 음식을 판매하고 싶은 가게 사장님의 욕망, 빠른 배달을 통해 많은 수익을 올리고 싶은 라이더의 욕망까지 뒤엉킨다. 이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라이더와 시민의 입장에서는 최악인 라이더가 동일 인물인 모순을 발생시킨다. - P44

정신이 번쩍 들었다가 이내 부끄러워졌다. 나는 배달앱의 알림에 아무런 분노도 슬픔도 느끼지 못했다. 사람 하나 죽었다고 배달산업이 멈출 리 없다. 다른 사람이 배달하면 그만이다. 죽은 이는 데이터에서 삭제될 뿐이다. 배달노동자의 사고와 죽음을 막는 건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지면서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는 구멍이 뻥뻥 뚫린 채 방치되고 있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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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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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집을 읽을 때는 차례 순서대로 읽는다. 그런데 처음 만난 작가이고, 도대체 제목과 같은 제목을 단 마지막 장은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블랙홀을 읽은 뒤 맨 뒤의 미확인 홀을 조금 읽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처음에 실린 작품의 외전 느낌이 나서, 스포일러를 읽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책을 살펴보니 이 책은 장편소설이었다. 혹시 이 리뷰를 책을 읽기 전에 접했다면 순서대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많은 인물과 장소를 설정하고 서사를 만들며 얼마나 세세한 설정을 하였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촘촘하게 짜인 소설이었다. 읽다 보면 여덟 편의 소설이 꼭 희곡의 ''처럼 느껴져서 연극으로 구성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혼자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술술 읽히는 장편소설을 읽게 되어 좋았다.

 

미확인 홀은 희영이 블랙홀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이 되었지만, 가장 최초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렇다. 그 이후부터 희영, 필희, 은정, 필성, 찬영, 순옥, 미정, 혜윤 등 인물의 마음에 하나씩 있는 정체 모를 미확인 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켜켜이 쌓인다.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우리의 마음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다양한 독자가 읽어보면 좋겠다. 책을 관통하는 이미지가 표지와 도비라에도 잘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은 도장이었다. 미정이 느낀 허탈감, 자신의 쓸모에 대한 고민 등은 언젠가 나도 느껴본 것이었다. 미정에 비할 수야 있겠냐마는, 지금까지 산 시간 동안 어렴풋이 느껴본 감정이었고, 꽤 진지하게 해본 고민이라서 공감할 수 있었다. 미정을 귀찮게 하는 주변인들을 보며 나도 덩달아 짜증을 냈는데, 조금 더 살아볼까? 마음을 먹은 미정을 보고는 나도 스르륵 녹았다. 왠지 반성도 하게 되었다. 나도 엄마 생각이 났나 보다. 엄마는 정말 다 계획이 있나.

 

마음이 허전한 사람, 그 허전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독이거나 채우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6)

물건에 깃든 추억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이고 지며 살았는데,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모든 추억이 하찮게 느껴졌다.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자. 엄마 것도 버리고 내 것도 버리자. 그렇게 미련 없이 버리다 보니 베란다 방이 볼펜 한 자루 없이 텅 비었다. - P51

연이은 부닥침으로 추락의 속도가 더뎌졌고, 미정은 그 모든 게 엄마가 마련해놓고 간 장치임을 깨달았다. (···)
미정은 허리 높이만큼 쌓인 쓰레기봉투 더미에서 어제 자신이 내다놓은 봉투를 찾았다. 익숙한 구두와 정장, 컵라면 용기와 축축한 휴지, 액자와 수첩 같은 것이 뒤섞여 있는 봉투 안에서 금빛 손톱깎이를 건져올렸다. 집에 하나밖에 없는 손톱깎이였다. 미정은 점퍼 주머니에 손톱깎이를 넣고 봉투를 다시 묶었다. - P78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것이 아닌 건 결국 잃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순옥은 살아왔다. 버리거나 버려지는 것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살다 보면 모든 걸 한순간에 잃는 것 같아도, 살아보면 어떤 걸 완전히 잃기까지는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고. 그러므로 완전히 잃지는 않을 기회 또한 여러 번 있다고. 때로는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상실을 막아주기도 한다. - P113

직원은 돈을 사양했다. 뜻밖의 호의에 놀란 혜윤이 직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서러움을 많이 삼켜본 눈이었다. 하지만 남의 서러움까지 받아줄 여유는 없는 눈. 그래서 조금 미안해하는 눈.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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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 - 언어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 쌓기의 기록
김지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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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더듬증, 다운 증후군, 중증 자폐성 장애, 무발화 등 다양한 증상과 사연을 가진 아이들을 만나 언어치료를 하는 저자가 쓴 수업 기록이다.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아이들의 성장 기록이다.

언어치료사인 저자는 아이들을 만나면 유심히 관찰하고 부모와 상담한다. 어떠한 진단을 받았는지, 어떠한 방식으로 언어치료 활동을 할지 세밀하게 대화한다. 어떠한 질환이나 장애, 환경으로 인한 것인지에 따라 활동이 미세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치료사와 치료를 받는 이, 보호자의 무수한 노력과 시도, 치료가 필요하지만, 저자를 비롯한 언어치료사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 꾸준한 마음과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대단해 보였다. 수업 기록이 마무리된 이후에는 저자가 아이에게 보내는 따뜻한 편지가 담긴다. 언어란 무엇일까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저자의 언어에 대한 사유와 세상에 대한 사유가 좋았다. 세상에는 무수한 언어가 있다.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눈짓, 표정, 손짓, 발짓을 포착해내는 언어치료사가 생각하는 언어란 무엇인지, 언어 치료를 받는 사람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 저자의 글을 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언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다고 표현한 제목이 참 좋았다.

한편으로는 정용준 소설가의 작품이 떠오르기도 했고, 학창 시절에 만난 자폐성 장애인이었던 같은 반 친구가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 나이로 14살이었는데, 학교에 오면 낯설어서 그런지 몇 가지 단어 말고는 얘기하지 않았다. 가끔 기분이 좋으면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에게 조금 더 살갑게 대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걸. 같은 반이었던 한 학기 동안 나와 내 친구들이 그 아이와 했던 것은 인사와 하이파이브뿐이었다. 무표정하다가도 하이파이브! 하면 엄청난 세기로 손바닥을 마주하던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을까.

의사소통 장애를 겪는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읽고 도움을 받아봄 직하다. 저자의 다른 책도 살펴본다면 좋겠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한 사람이 읽어보아도 도움이 될 듯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6기)



희아야, 지구는 빙글빙글 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고양이 한 마리도 절대 지구 밖으로 떨어지지 않아. 우리를 붙들고 있는 중력은 위대해. 왜 이런 말을 네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

그리고 희아야, 우주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별들은 소통하는 법을 몰라. 서로를 모르지.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 P64

아이들의 사고는 자기중심적이다. 모든 일의 원인을 자기로 돌린다. 그래서 부모가 싸우면 아이들은 잘못된 자기의 행동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쉽게 결론 내린다.
- P111

말은 강물과도 같다. 아이들의 말은 어른들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한다. 미숙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그래야 막히지 않고 유유히 흐를 수 있다. 앞으로 민이의 말도 그랬으면 좋겠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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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조금만 - 자부심과 번민의 언어로 쓰인 11인의 이야기
이충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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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코리아 등 잡지사의 편집장으로 오랜 기간 일해온 저자의 인터뷰집이다. 가수 최백호, 프로 야구선수 강백호, 법륜 스님, 코미디언 강유미,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정현채 교수,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 1세대 디자이너 진태옥, 피아니스트 김대진, 시인 장석주, 피겨 스케이팅 국가대표 차준환, 연극배우 박정자의 인터뷰가 담겼다. 내가 잘 모르는 인물이 많아서 약간의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다. 나에게 익숙한 인물은 강백호, 강유미, 강경화, 장석주, 차준환 정도였다. 다양한 연령대의 독자가 읽게 될 것 같다. 2021~2022년에 인터뷰를 진행한 것 같았다.

 

  저자는 인터뷰를 진행하며 인터뷰이만의 언어를 포착하고 채집하려고 집중한다. 보통의 인터뷰와는 다르게 이들의 불안을 보고 싶어 한다. 사람의 내면을 알기 위해서는 결핍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터뷰이들의 내면은 마냥 어둡지만은 않았다. 이들의 언어를 들으며 중간중간 정리하는 문장이 있었는데, 저자의 문장이 돋보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강백호, 법륜, 강유미, 강경화, 차준환이었다. 강백호는 개인적으로 좀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기아의 맹덴이 인터뷰에 언급되는 걸 보면 2021년에 인터뷰한 것 같은데, 도쿄 올림픽 전인지 후인지는 몰라도, 그 해에 유독 욕을 먹었던 게 기억난다. 그래서 더욱 말할 때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저자가 강백호가 축약하고 축약해서 단답형으로 말해서 쓸 것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걸 보니 더더욱 선수가 마음 고생한 게 느껴져 안타까웠다. 나는 법륜 스님을 잘 모르는데, 말씀을 읽고 있자니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 내 생각과 아주 잘 맞는 부분도 있었다. 강유미의 인터뷰는 중간에 너무 웃긴 지점이 있었다. "그 뒤론 제 차에 폭탄이 설치돼있나 괜히 뒤져보기도 하고, 이상한 영화적인 상상도 하고 그랬는데 저 같은 찌끄레기는 별로 신경도 안 쓰시는 것 같아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124)" ㅋㅋㅋㅋㅋㅋㅋ 난 강유미의 화법이 웃기다... 강경화의 인터뷰는 우아하면서도 어딘가 호탕한 기세가 느껴져서 좋았다. 아래에 인용한 문장 외에도 "저는 최초의 여성이 되고 싶어 했던 적이 없습니다. 그냥 저한테 기회들이 왔을 뿐이고, 이제는 그런 수식어가 필요 없는 세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186)" 등의 말이 좋았다. 차준환의 인터뷰는 담담하면서도 자신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보통 인터뷰집이라면 인터뷰이의 소개가 짧게나마 적혀 있을 법도 한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차례 면에 심플하게 인물을 나타내는 수식어가 있고, 인터뷰 시작 전에 사진 한 장, 그 아래에 인터뷰에서 추출한 말귀 하나가 적혀 있을 뿐이다. 질문은 조금만이라는 제목처럼 책의 디자인도 내용도 아주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조금은 색다른 인터뷰를 보고 싶다면, 혹은 11인 중 관심 있는 인물이 있다면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작가만의 문체와 언어가 느껴지는 인터뷰집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터뷰는 자기를 보호할 수 없는 장르라서 제대로 구사한다면 달려갈 곳도 숨을 곳도 없다. - P7

강백호를 만나기 전에 공포 하나가 있었다. 어떤 질문을 해도 오래 고민하다가 완전히 축약된 단답으로 말하면, 나는 쓸 것이 없는 말들에 너무 괴로워하다가 시간을 다 쓸지도 모른다는. 강백호는 어휘를 뚜렷하게 발음하지 않았다. 악센트를 강조하지 않아 문장이 전부 섞인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요즘 소년들의 세태를 다 섭렵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어느 순간, 그 얼굴에 눈 앞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어 단어를 찾는 성장기 소년이 보이자 공포가 싹 달아났다. - P63

"저 힘든 세월 많이 겪었습니다. 이제는 법 제도 면에서, 평등 관련해서 웬만큼 갖췄다고 생각하는지 인식은 아직도 갈길이 멀죠. 제가 외교부 장관으로 있는 동안, 같은 값이면 중요한 자리에 여성들을 많이 등용했습니다. 근데 제가 퇴임하는 날, 퇴임식도 못하고 그냥 쭉 돌면서 계단에서 간부들하고 사진 찍고 차 타고 나왔는데, 나중에 보니까 제 뒤에 다 남자였어요."
대한제국 단발령 반대 구호가 100년 뒤에 들리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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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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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정전이, 소음(폴터가이스트), 인공피부, 크고 작은 구원 서사, '염'을 하는 로봇의 헤아림. 생각보다 장르와 소재가 다양해서 짧은 시간 만에 읽을 수 있었던 앤솔러지였다. 연인과의 애정, 우정,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과 환대, 헤아림. 우리가 요즘의 삶을 살아가면서 추구하고, 그래야만 하는 가치가 여기에 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여러 가지 소재로 그려낼 수 있다니. 감탄하고 공감하며 읽었다.


  이유리 작가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에서는 마지막에 마음이 쿵, 했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내용은 더 말하지 않겠지만, 그 순간 수진이 느낀 감정은 나보다 더 크지 않았을까. 김서해 작가의 「폴터가이스트」에서는 현수에게 괜스레 고마웠다. 세인의 이야기를 남에게 듣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어서. 김초엽 작가의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속 서술자의 태도에 동의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좋았다. 설재인 작가의 「미림 한 스푼」에서는 미림과 주경이 서로를 구원하는 서사가 참 좋았다. 특히 미림이 주경을 떠올리며 무엇을 해줘도 아깝지 않은 마음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에 울컥했다(인용 212쪽). 천선란 작가의 글은 이제 두 번 읽어보았는데, 결말에서 또 울 뻔했다. 결말 장인이신가. 「뼈의 기록」에 등장하는, 누군가를 헤아릴 줄 아는 로비스가 죽음을 깨닫는 장면이 유독 슬펐다.


  이다지도 소중한 감정들을 담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서 기쁘고 행복했다. 노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가 자꾸만 떠오르고, 인물들이 떠올라서 다시 읽게 될 것만 같다. 자이언트 픽을 다시 만나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니 아쉽다. 앤솔러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내게 있는 사랑의 총량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남은 사랑은 모두 다 너에게 줄게." 할 것만 같아서 마음이 벅차다. 다 읽고 나서 금박이 반짝거리는 이 예쁜 책을 한참이나 빛에 비추어보며 만지작거렸다. 곧 발렌타인데이이니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좋겠다. 같이 읽고 사랑에 관해 이야기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이 책을 초콜릿처럼 꺼내먹어요···. 큼큼.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성재를 안은 팔에 힘을 꽉 주며 생각했다. 바깥에서 어떤 고통과 수모를 겪어도 나는 견딜 수 있다, 성재가 기다리는 이 집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든 성재를 만날 수 있고 성재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몸을 씻은 뒤 잠을 청할 수 있다. 오늘도, 내일도, 아마 죽을 때까지 평생. 그 사실을 되새기자 기쁘고 행복해서 마음 깊은 곳이 파들파들 떨렸다. 감히 내가 이런 걸 누려도 될까. - P26

"애들이랑 있다가 너랑 있으면 물에 딱 들어갔을 때랑 비슷해." - P108

언젠가는 다시 그 거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싫지 않았거든요.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자기 온몸을 바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요. (···)

다른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수브다니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예요.

- P167

너를 위해 누군가가 시간과 힘을 쓰는 날이 생길 때도 있단다. 그것이 금세 무용해진다 하더라도 그 누군가는 별로 상관하지 않고, 그저 네가 원했으니까, 너라는 사람이 이 결과를 필요로 했으니까 노력을 기울였을 거야. 살다보면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을 마주하는 때가 있어서, 그게 나머지 오천이백만 겁의 허름하고 꾀죄죄한 결들을 잊게 만들지. - P212

로비스의 전원을 끄기 직전, 로비스는 모미가 이제 성간우주에 돌입했다는 계산을 해냈다. 그리고 그 순간 로비스는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죽음이란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다르며, 볼 수 없는 존재의 삶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뼈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로구나.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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