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의 단어들
이적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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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사가들의 언어, 작업방식, 생각이 궁금해서 종종 그들의 책을 읽는다. 이 책도 그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서평단에 신청했다. 그의 모든 음악을 들어보진 않았지만 <거위의 꿈>, <다행이다>, <하늘을 달리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정류장>, <달팽이> 등 유명한 노래의 가사를 떠올려 보았다. 쉽게 공감되는 상황이나 감정을 간결하게 묘사해 내면서도 깊이가 느껴졌다.


  뒤표지에는 이적이 소재 삼았을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지 궁금해하며 펼쳐보니, 일반 산문집은 아니었다. 한 문단 정도의 단상 모음집이었다.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그건 잠깐이었다. 읽어 보니 글 한 편 한 편 생각해볼 거리가 있었다. 재미있는 상상, 인생에 대한 고찰, 소름 끼치는 이야기,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의견 등을 읽으며 즐거웠다. 음악에 대한 글은 4부, <노래의 깊이>에서 읽을 수 있다. 자신이 작사한 가사에 얽힌 에피소드나 생각, 창작에 관련된 이야기, 춤, 악기······.


  나는 <멀미>, <시간>, <좀비>, <원만>, <고수>, <경우> 가 좋았다. <절연>은 좀 소름이 돋았고, 가사와 관련해서는 <하늘>과 <거짓말>이 좋았다. <시간>을 읽으며 한 생각은, 그러니 야구가 인생과 비슷하다고들 이야기하나 보다, 였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시간이 제한된 스포츠가 아니라 9회까지 진행하여 승부를 가려야 하고, 동점 상황이라면 12회 연장전까지 진행해야 하니까. 야구도 인생도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야구 이야긴 없어서 조금 아쉬웠던 야구팬).


  긴 글이 아님에도 이적의 생각을 충분히 접하고 느껴볼 수 있는 책이다. 가사에서 느껴지는 간결함과 담백함, 생각의 깊이가 그대로 느껴지는 책이었다. 자기 전 이부자리에서 가볍게 한두 꼭지씩 읽어도 좋을 듯하고.


 이적의 생각이나 상상이 궁금한 사람, 이적이 작사한 가사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한 팬과 작사가 지망생, 이적의 깊고 담백한 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서평단에 당첨되어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전하고자 하는 지혜란 고작해야 ‘짜파게티를 끓일 때 마지막 물양 잘 맞추기‘ 같은 것이 아닐까? 미리 얘기해봐야 직접 해보기 전엔 별 도움이 안 된다. 먼저 얘기해주지 않아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자기에게 딱 맞는 물의 양을 스스로 찾기 마련이다. 뭐, 전쟁을 막고 전 인류가 평화롭게 지내는 방법 정도 되면 좀 다른 수준의 지혜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건 어떤 세대도 몰랐던 것 같고. - P19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TV에서 멀미약 광고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장거리 여행을 갈 때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자연스레 멀미약을 먹였고, 간편히 귀 밑에 붙이는 제품은 등장과 함께 큰 히트를 치기도 했다. 그때의 아이들은 지금보다 멀미가 훨씬 잦았을까. 물론 버스나 승용차의 승차감이 더 거칠기도 했겠지만, 고도성장기 이른바 ‘마이카 시대‘로 진입할 무렵, 우리는 다가오는 세상의 속도감이 낯설어 몸과 마음으로 멀미를 겪어냈던 것 아닐지. - P37

농구 경기 중간엔 시계가 시시때때로 멈추지만, 축구 경기 도중엔 시계가 멈추지 않는다. 시간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흥미롭다. 인플레이가 아니면 유의미한 시간으로 세지 않겠다는 농구의 논리와, 시간은 좌우지간 흐르는 것이고 인플레이가 아닌 순간은 추가 시간으로 보상하겠다는 축구의 논리. 물론 실세계에서 시간은 멈추지 않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고 나중에 보충해주지도 않지만, 때론 생각한다. 우리 삶에도 농구 혹은 축구의 방식으로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택할지. - P47

줄리엣은 점액질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로미오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당신의 입술은 아직 따스하군요."
묘지 밖에선 야경꾼들과 캐플렛 부부, 영주와 아버지 몬터규가 아무것도 모른 채 다가오고 있었다. 바야흐로 베로나의 두 원수가문을 지구 위에서 완전히 소멸시킬 좀비 커플의 대폭주가 시작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 P73

‘마른하늘‘이란 말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표현 외에는 잘 쓰이지 않는다. 한자로는 청천벽력일 테니, ‘맑은‘에서 기역이 탈락하여 ‘마른‘이 된 예일 것이다. 그걸 알지만 굳이 마른하늘을 달리고 싶었다. 마치 날벼락처럼 번쩍이고 싶었다. 영화 <스타워즈>의 스카이워커보다 한발 더 빠른 스카이러너가 되고 싶었다. 이카루스가 밀랍날개 다 녹을 때까지 태양을 향해 날았던 것처럼, 설혹 두 다리 모두 녹아내린다고 해도 태양 가까이 날아 그대에게 가고 싶었다. 나의 희망이자 구원을 향해.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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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 99가지 강박으로 보는 인간 내면의 풍경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민수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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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공포와 강박을 어느 정도 가지고 산다. 공포까지는 아니더라도 싫어하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은 우리가 한 번쯤은 느껴보거나 들어보았을 공포증과 강박증을 망라한 책이다. 증상과 관련된 흥미롭고 재미있는 기록을 풀어주고, 당시 전문가가 진단한 병명과 처방을 이야기 해준다. 생긴 지 오래된 증상의 경우에는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프로이트가 자주 등장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전혀 관계 없다는 생각이 드는 증상까지도 성적 욕망과 결부시키는 경우가 꽤 있어서 오랜만에 경악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공포증과 강박증이 사회적 상황과도 연관이 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즐겁게 읽은 부분으로는 곤충공포증, 비웃음 공포증, 휴대전화 부재 공포증, 발모벽, 불결공포증, 서적수집광, 저장강박증이었다. 나는 벌과 잠자리, 바퀴벌레를 무서워한다. 학창 시절 따돌림 받은 적이 있어 누군가의 비웃음에 민감하다.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다닌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발모벽이 잠깐 있었다. 물건 버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나에게 해당하는 내용들에 공감이 되어서 읽으며 재미있었다. 종종 유명인도 이러한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될 때가 있었는데, 해외 유명 인사들만 나오다가 갑자기 소지섭이 튀어나와서 약간 뜬금없었다.

 

  내지 중간중간 삽입된 약물들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그림체라서 좋았다. 공포증과 강박증을 이야기하는 책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어린 시절에도 이런 책들을 호기심을 가지고 아주 재미있게 읽곤 했는데, 어른이 되어 읽으니 그 당시보다는 재미가 덜 느껴져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나마 로알드 달의 글과 비슷한 느낌이 나서 읽으며 좋았다.

 

  내가 가진 공포증과 강박증이 궁금한 사람, 인간이 가진 집착들이 궁금한 사람, 로알드 달의 책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특정 대상을 피하려고 하는 강박이 공포증이라면, 광기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강박이다. - P13

오늘날 우리는 위험을 감지하면 구체적이고 반사적인 행동 반응을 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불안감을 분석, 설명, 날조, 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억할 뿐만 아니라 공상도 하고, 인식할 뿐만 아니라 머리도 굴린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갖 공포증에 시달리는 이유다. - P52

레인은 우리가 남다른 기질과 별난 행동, 일상의 감정을 타당한 이유없이 의학적 문제로 다룬다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 P125

역사적 사건이 우리의 행동과 인식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코로나19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보여줬다. 두려움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되었다. 다시 말해 두려워한다는 것은 논리적이고 양심적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제는 강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길이 된 것이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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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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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란의 소설은 처음 읽어보았다. 이주란의 소설은 큼직한 사건에서 이야기가 가지를 치고 나간다기보다는 잔잔한 일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전형적인 사건 중신의 한국소설이라기보다는 아주 섬세하고 세세하게 인물의 마음을 쓰다듬으며, 독자에게 잔잔하고 촘촘한 위로를 보내는 소설들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결이 비슷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서 때로 헷갈리기도 했으나 모두 다른 잔잔함이었다.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사람들은, 여름밤이었다.

 

  「사람들은은 은영과 은영의 이야기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 두 명의 은영을 보며 나와 정말 비슷한 인물들이었다. 지인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딱히 할 말이 없다고, 나의 사소한 이야기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나는 주로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몇 년 전, 친구가 내게 "넌 이야기꾼은 아니잖아."라고 했던 게 이런 의미였을까.

 

  「여름밤사람들은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었다. 은영이 떠난 이후, 은영을 기다리는 은영의 이야기다. 기다림과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 여름밤을 떠올리면 어딘가 아련하면서도 행복하기도 쓸쓸하기도 할 텐데, 이 소설이 딱 그러했다.

 

  『별일은 없고요?라는 소설집은 여름휴가 때 잔잔한 소설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을 세밀하게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서로 신세 한탄도 하고 위로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만 너무 쉽게 부서진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P13

그러나 나 역시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친구들과 할 얘기가 없는 거구나 그런 걸 깨달았다. 나는 친구들의 일상 이야기를 듣는 걸 따라가기에도 벅찰 정도였다. 다 얘기한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얘길 한참 듣다보면 내가 먼저 지쳐 있었다. 말을 한 건 친구들이었는데 그랬다 친구들은 중간중간 음료를 마시며 잠시 쉬었고 그런 순간엔 나도 내 얘길 좀 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할 얘기가 없었다. - P55

우리는 가졌던 것을 잃었다기보다는 원래 없는 사람들이었고 삶 속에서 어떤 이야깃거리를 발견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듯하다. 그래서 몇 마디 한다고 하는 게 늘 싱겁기만 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 P81

보채지 말아요. 파 좀 늦게 썬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는다구요.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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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 부패의 역설이 완성한 중국의 도금 시대
위엔위엔 앙 지음, 양영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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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제와 관련된 뉴스, 지문, 단어 등을 유독 어려워한다. 언제까지 기피하며 지낼 수는 없으니 도전하는 마음으로 골라본 책이다. 경제, 정치 외교와 관련된 책은 난생처음 읽어보았다. 통계자료와 수치 비교, 그래프 이해, 생소하고 어려운 단어 등 난관이 꽤 있었지만 결국은 책을 끝까지 읽고 나름 이해하려 노력해 보았다. '나름' 이해한 내용을 정리해 보려 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중국 사회가 부패했음에도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담겨 있다. 부패의 종류, 중국의 부패에 대한 기존 연구의 한계 등이 담긴 1장은 어느 논문의 초입을 읽는 듯했다. 2장에서는 표준부패측정법(CPI)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신이 기준을 세워 측정한 부패지수(UCI)를 제시하며 중국의 부패와 경제 성장 이유를 자세한 근거를 대며 주장했다. 차분히 독자에게 설명하여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듣게끔 하였다. 3장에서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중국의 부패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4장에서는 중국 관료들이 이익을 챙기는 방식에 대해 언급한다. 5장에서는 자세한 부패 사례를 다뤘다. 6장에서는 시진핑의 반부패운동과 중국의 미래, 7장에서는 중국과 미국의 도금주의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한다.

 

  중국은 미국이 금을 캐던 그 시기, 부패가 만연함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성장한 것과 유사한 시기를 보냈다. 저자는 그것을 중국의 도금시대라고 표현한다. 중국, 미국의 부패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한다. 비슷한 점 하나를 꼽자면 저자가 분류한 부패 유형이 같다는 것이다. 바로 '인허가료'이며 이것은 건설, 부동산 등 땅과 관련된 사업과 연관되었다. 또한 한국과 일본 등의 나라도 인허가료 유형의 부패가 주를 이룬다고 한다. 인허가료 유형의 부패는 위기가 다가오는 순간 미국의 대공황(1839), 동아시아 금융위기(1997), 미국 금융위기(2008)와 같은 모습으로 찾아온다.

 

  책의 내용을 휙 건너뛰어 이야기하자면, 부패는 경제성장의 측면에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허가료 유형의 부동산 투자, 건설 사업 투자 유치 등을 통해 성장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부패는 경제, 사회에 전혀 이롭지 않다. 이러한 부패를 시진핑 정부가 반부패운동으로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성장이 더뎌진 것은 맞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마냥 부패를 목도하는 것보다는 나아 보인다.

 

  경제 혹은 정치 외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 현대 배경의 중국 드라마를 보며 중국의 부패가 궁금해진 사람, 중국의 급속한 성장 이유와 전망 궁금했던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중국과 가장 유사한 것은 19세기 말의 미국이다. 이 시기의 미국은 맹렬한 성장과 눈에 띄는 불평등, 그리고 재력가들과 결탁한 부패 정치인들로 특정 지어진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1978년 이후 중국의 ‘도금시대‘가 건설되는 과정이다. - P14

나는 어떤 종류의 부패는 심각한 위험과 왜곡을 가져올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P20

이런 종류의 부패는 시민과 업계에 비용을 유발하며 결국에는 세금의 성격을 띠게 된다. 특별히 빈곤층에게는 작은 규모의 뇌물도 참담한 수준의 부담이 된다. - P25

인허가료는 자원 배분을 왜곡하고 체계적인 위험을 잉태하며 불평등을 악화시킨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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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은 날아 차 - 작심삼일 다이어터에서 중년의 핵주먹으로! 20년 차 심리학자의 태권도 수련기
고선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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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성 심리학자가 태권도를 수련하며 심리학적 재미를 발견하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 라는 소개 멘트에 이끌려 골라보았다. 나도 국기원에서 심사받고 품증을 보유한 유품자다. 초등학생 때 약 3년 동안 태권도장을 아주 즐겁게 다녔던 기억이 있다.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나는 태권도를 배우며 운동도 하고, 또래와 어울리며 사회성을 배웠다. 사범님과 관장님으로부터 조금 더 깍듯하게 어른을 대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 태권도장을 다니는 수련생 중에 모난 사람은 없었으므로 인성교육을 정말 열심히 해주셨다는 걸 이제 와 새삼 느낀다. 태권도장을 다니며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간식과 밥을 잘 챙겨 먹은 만큼 움직여서 비만이 아니었다는 점(월수금은 태권도, 화목은 수영, 주말 중 하루는 등산하긴 했다), 키 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책에는 무엇이든 쉽게 시작하고 금방 포기해버리는 저자가 태권도는 1년 넘게 수련할 수 있었던 이유, 태권도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사상, 복장의 의미가 담겨 있다. 중간중간 MBTI, TCI가 언급되기도 하고, 태권도가 어떠한 면에서 치료가 되었는지도 저자가 셀프 분석하여 이야기한다. 5장에는 중년 태권도 수련생들의 간단한 인터뷰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여성이 자기 신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여기는지, 사회는 여성의 신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건강보다 미를 중요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자기 몸을 얼마나 긍정하는지, 얼마나 건강하게 몸을 움직이고 단련시키는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자가 새로운 분야인 태권도에 도전하면서 성취감과 재미를 느끼고 스트레스 해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다 개운했다. 몸이 조금 나아지면 나도 오랜만에 헬스장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심리학적으로 깊은 내용이 많지는 않아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운동하면 얼마나 좋게요! 하고 운동하게 만드는 에세이 같다. 저자의 농담이 재미있고 깔깔 웃을 만큼 웃겼지만 '발작 버튼'이라는 표현, 있어 보이는 어감이라는 이유로 '검은 띠', '밤 띠''블랙 벨트', '갈색 벨트' 라고 쓴 것은 좀 아쉬웠다.

 

  새로운 스포츠, 혹은 태권도에 도전해보고 싶은 여성,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몸이 굳는 것이 느껴져서 운동을 시작하려는 여성에게 이 책을 추천해보고 싶다. 책의 판형이 작고 서체의 크기가 넉넉해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약물과 디자인이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것은 덤이다.

도장 밖으로 나가면 생활 영역 어디에서든 경험치가 쌓일 대로 쌓여 초심자의 마음을 갖기 힘들다. 칭찬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고 의사 결정에 따르기보다는 의사결정을 직접 해야 하는 나이다. 그렇다 보니 때로는 내가 틀릴지도 모른 채 지어놓은 매듭을 누군가가 달려와 후루룩 풀어 다시 매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사범님이 매듭을 풀어 다시 묶어주실 때, 중년의 태권도 수련생은 그런 생각에 종종 빠진다. - P58

추하게 늙지 말자는 결심은 자주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을 검열하게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가급적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게 되었다. 스스로 만든 제약 안에서 노화를 서글퍼만 하고 있는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이었다. - P124

나에게 적용해보자면, 나는 정서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과정 중 신체 감각을 통해 정서에 이르는 길에 두꺼운 셔터를 내려놓고 있었고 통증으로 몸이 소리치며 셔터문을 두드리기 전까지 신체감각이 내는 다양한 소리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나에게 태권도는 몸과 마음이 매우 민첩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마음에만 집중할 때는 알 수 없었던 해결책이 신체감각을 자극하고 몸을 제대로 쓰면서 발견되기도 한다는 걸 깨닫게 한 운동이다. 태권도는 아이들 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여러모로 특별한 치료법이 될 수 있다. - P136

수련 과정에서 내 몸을 단련하고 근육의 감각을 깨우고 조절하는 것은 내 몸의 운전대를 내가 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화의 폭풍우가 밀려와 파도가 얼굴을 때려도 예전처럼 많이 두렵지 않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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