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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 개정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북스토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최악으로 치닫는 세사람의 역경속에서 느끼는 최고의 속도감.]
얼마 전, 오쿠다 히데오 [최악]의 책 포스터 공모가 있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형제가 작지 않은 상금에 혹했다. 구상과 스케치를 반복하고, 또 반복해 멋진 포스터 한 장을 선보였다. 인생 최대의 역작이란 탄성과 ‘형제는 용감했다.’ 라는 함성이 뒤따랐음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지금의 책표지는 우리의 그 긴 노력이 물거품이 됐음을 알려줬다. 잠깐의 행복. 밀려오는 아쉬움과 큰 기대로 인한 큰 실망감, 형제는 소심했다.
하지만 이것이 그와의 또 한번 만남의 계기가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얼마나 잘 만들었기에 우리의 역작을 떨어뜨렸는지도 궁금했지만(떨어질 만 했다) 코믹작가가 보는 최악이란 어떤 것이며, 또 어떤 전개로 꾸려나갈지가 궁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까지만해도 그에 대한 것이라곤 ‘볼만한 코믹소설 작가’가 전부였다.
우선, 책 포스터를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저자 오쿠다 히데오는 1997년 소설' 우람바나의 숲'으로 데뷔 38살이란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나오키상 수상과 더불어 한국에는 '공중그네' 부터 알려지기 시작해 베스트 셀러 작가라는 타이틀을 목에 건 상태에서, 그와 처음 만났다. 화려한 문체와 미사어구. 작가 그들만의 언어로 소설과의 접선을 피하기만 하던 때, 엉뚱한 정신과 의사 이라부의 등장은 산뜻함을 불러 일이키기 충분했다. 일률적으로 반복되는 고루한 일상에 단비와 같은 산뜻함이라고나 할까? 책을 접했던 환경이 의무라는 타이틀을 벗 삼아 20대의 젊은 청춘들을 모아두었던 곳이라 더욱 그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와의 첫 만남은 신기함과 더불어 한잔의 청량음료 같았다.

하지만, 그 산뜻함이란 깊은 감흥과는 거리가 멀다. 그 산뜻함은 갑갑한 일상 속에서의 휴식시간과도 같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아쉬움과 허탈함은 ‘그냥 볼만한 코믹소설의 작가’ 라는 꼬리표를 그에게 달아주게 된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가벼움은 앞으로 그와의 만남은 없을 것이라 다짐하기에 이르게 된다. 가벼움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 차라리 만화책을 보지. 포스터 공모전의 아쉬움과 함께 다시 만난 책[최악]은 그때까지의 쌓였던 그의 이미지를 단숨에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탈락의 아쉬움도 함께 말이다.
최악의 상황이 나에게도 있었나?
어떤 상황에 '으아!! 최악이다.‘ 라는 말을 입에 담게 되는 걸까? 수능시험에 낙방했을 때? 30대를 앞에 두고 번듯한 명함을 손에 쥐지 못했을 때? 애인의 변심? 과연 어떤 상황을 두고 최악으로 치닫는 단어를 쓸 수 있는지 궁금하다. 최악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만큼 그리 큰 기복은 다행이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내겐 남아있다. 하지만 내 주위를 맴돌며 언제가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나는 건 아닐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황상태로 나를 이끌고, 주위의 모든 것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행해져 끝내는 처참한 결과에 승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최악의 꼭지점 으로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지 않는 세 명의 위인이 약속이라도 한 듯 달려간다. 그곳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를 잊는 작가]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오쿠다 히데오가 함께 한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의 직격탄의 회오리 속에 바둥 거리며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들의 몰락이 줄 두려움, 그리고 그것의 현실화가 가져다 준 정신적 충격에 또 다시 허우적 거리는 47세의 영세 철공소 사장 가와타니 신지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기에 자유와 방종의 삶을 영위지만 그곳에서의 허탈함과 공허함의 두려움과 자신의 선택 하나 하나에서 파생된 결과에 목이 조여가는 20세의 떠돌이 양아치 노무라 가즈야, 평범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지만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 속에 갑자기 찾아온 성추행의 충격으로 그곳에서의 달콤한 일탈을 꿈꾸는 23세의 평범한 은행창구 여직원 후지사키 미도리.
공통점이라고 한 가지도 찾을 수 없는 이들 세 사람의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옴니버스[omnibus]식 소설로 전개된다. 그들 세 사람의 삶은 저자 오쿠다 히데오의 역량과 더불어 빈틈없는 구성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600페이지를 넘는 분량을 읽는데 조금의 여유도 허용치 않는다. 서로 다른 그들 세 사람이 하나가 되어 최악의 한 점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은 빠른 템포의 속도감, 긴장감 속에 최고의 흥분과 몰입도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저자 오쿠다 히데오 가 가진 문제의 힘과 역량이다.
우리네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과 오버랩 되는 무능력한 가장, 결손가정의 삶이 가져다준 방황 속에 허덕이는 양아치, 일률적인 삶의 무료함서의 달콤한 일탈을 꿈꾸는 은행원이라는 그들의 삶은 독자들에게 우리네 삶의 다른 장을 바라보게 만들어 이질감을 최소화 한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겪는 삶의 고통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사실. 인생의 낙오자들의 어두운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통해 느끼는 살아 있는 현실감은 삶을 비판적 시선의 한계에서 그 의미를 결정지어 버리는 오류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이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오쿠다 히데오의 진정한 힘이 느껴지는 책이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때론 갈증을 해소 시켜주는 청량음료로, 때론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의 장을 마련해 준다. 무거운 눈꺼풀과 졸음이 가져다 준 힘겨움은 한편의 영화와 같은 긴장감과 속도감 속에 잠들어 버렸다.
끝을 알리는 여름날. 함께 하기엔 최고의 책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