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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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주변에서 들리는 신음소리>

   

p119. “그럼, 그래야지.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 테니까.”

   

소설 속 주인공인 한스 기벤라트는 결국 수레바퀴에 깔리고 말았다. 그리고 죽음과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무엇이 한스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장이 한스에게 했던 ‘수레바퀴’의 의미와 한스가 왜 자신의 길에서 이탈을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수레바퀴’가 경주마에게 씌운 ‘눈가리개’와 같다고 생각을 했다. 눈가리개는 말에게 앞만 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한정된 시각에 놓이게 된 말은 위협적인 상황에 노출이 되면, 주인의 채찍질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고, 더 빠르게 달리는 역할에 간접적으로 기여를 한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말의 의지’이다. 말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눈가리개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시각의 범위를 한정 시킨 것이 아니고, 사람(타인)에 의해서 좁은 시야만 보여 지도록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타인이 휘두르는 채찍질에 의해서 말은 불안감과 두려운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로 인하여 남보다 더 빠르게, 남보다 한 발자국 더 앞서 나가게 한다.

   

말에게 눈가리개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거세시킨 도구’인 것이다. 즉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 판단, 움직임에 대한 권한을 본인 스스로 양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 ‘수레바퀴’의 의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일 것이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제거 할수록 수레바퀴는 더욱 더 빨리 돌아갈 것이며, 그로 인하여 너는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사람이 될 것이야. 하지만 자유의지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너는 수레바퀴 아래에 깔린 벌레처럼 될 것이야.’ 라고 말이다.

   

이제부터 소설 속 주인공인 한스가 어떠한 상황을 겪어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다. 말에게 눈가리개가 시야를 좁히게 만들었다면, 한스에게는 주위 사람들의 조언들이 ‘공부만이 살길’ 이라는 한정된 시야만 보게 했다. 즉 그들은 한스가 공부를 잘해서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그 학교를 졸업을 한 다음 목사 및 교사가 되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과 지나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어린 한스에게 끊임없이 공부를 시킨다. 이러한 주변 사람들의 영향으로 한스 또한 ‘공부만 인생의 전부’라는 색안경을 끼게 된다. 여름방학 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공부를 한다. 즐거운 낚시조차도 자신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고는 낚시를 그만두고, 공부만 한다.

   

문제는 한스 본인이 ‘자기가 왜 공부를 하고, 왜 그 신학교를 가야하는지, 왜 나중에 교사, 목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주위의 사람들의 조언 및 ‘애정어린 조언’(?)에 의해서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은 타인의 채찍질의 의해서 더 빨리 나가게 되었지만, 한스의 경우는 ‘공부라는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채찍질을 가하면서 스스로 그 시각에만 머물게 만들었다.

   

  이러한 조치가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것인지를 그 다음에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서 선택 되어지고, 강요를 받는 한스가 그것을 잃게 되었을 때를 말이다. 한스는 신경쇠약이 점점 심해져서, 신학교에 수업을 수강할 수 없었다. 결국 신학교를 나오게 되었다. 한스는 집에 돌아와서 점점 삶에 회의감을 느끼고,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게 여기면서, 자살 준비를 하기도 했다. (한스는 자살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에마를 만나고 나서 한스는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갖지만, 그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그녀로 인해 받았던 감정들은 잊지를 못했다. 그 이후 한스는 공장에서 수습공으로 일하며 잠시 노동의 기쁨과 삶의 의욕을 느끼지만, 곧 힘든 일에 지쳐 용기를 잃는다. 그리고 공장 직원들과 술자리를 가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물에 빠져 죽는다. 한스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가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한정된 시각을 보여주고, 그것만을 믿게 만들면서, 그들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거세하게끔 만들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이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소설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 모습은 수레바퀴에 깔리기 직전과 깔린 이후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우선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유의지를 거세시키려는 자들부터 말하겠다.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은 ‘공부만이 살길’ 이라는 믿음과 사회의 시선에 따른 ‘두려움’을 느끼면서 하루 열시간 이상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 대학생들 또한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으려고 비싼 등록금을 어떻게 해서든지 마련을 하고, 취업준비를 필요한 자격증, 토익시험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의 자신에게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랑은 나에게 사치야, 지금 우선 회사에 입사해야 해”라면서 취업 및 돈 이외에 다른 욕망 (연애, 즐김, 낭만)등을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 결국 10,20대들은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으려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거세시키면서 공부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수레바퀴에 깔린 사람들도 있다. 한계레 신문 2013년 2월 5일자 <‘바늘구멍’ 공시에 지친 자들의 탈출구…“게임이 차라리 정직”>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이 기사는 현실 속 좁은 취업문에 따른 고통 받고 있는 공시생들의 인터뷰를 한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좁은 취업문’이 아니라 이들의 피시방 게임 속에 빠진 이유이다. 분명 이들도 앞서 얘기한 것처럼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을 것이다. 소위 사회에서 요구하는 스펙을 따기 위해서 불철주야 문제집과 씨름을 몇 년간 하고, 정규직 회사에 취업 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모색 했을 것이다. 즉 사회가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 애를 썼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PC방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즉 수레바퀴에 깔렸단 말이다. 과연 이들에게 문제는 무엇일까? 눈이 높아서, 너무 욕심이 많아서 일까? 아니다. 소설 속 한스에게 주변 사람들이 한정된 시각으로 몰아 넣고 그 이외의 것은 거부하게 만들었던 것 처럼, 이들 또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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