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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피로 사회-한병철
어렸을 때, 주말마다 가족들과 함께 관악산으로 등산하러 자주 갔다. 그때 나와 동생은 등산보다는 놀이공원에 더 가고 싶었다. 그래서 ‘주말에 산에 간다.’ 라는 말을 들으면, 나와 동생은 가기 싫다고 어리광을 부렸다. 아버지는 이런 우리 형제들에게 등산하러 가면 짜장면, 군만두와 탕수육을 사주겠다 라는 조건을 제시했고, 그 조건을 받아들여서 매주 가족들과 등산을 했다. 어렸을 때 등산을 하면서 의문이 생겼다. ‘산속에서 나무 밖에 없고, 길도 거칠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왜 오르려고 하는지, 그냥 집에서 tv보고 쉬는 것이 더 좋은거 아냐? ’는 의문을 가졌고, 이렇게 몇 주동안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힘이 부쳐서 되돌아야만 했다. 관악산에 6번째쯤 갔을 때, 드디어 관악산 정상에 도착했다. 그리고 정상에서 산의 전체 모습을 보니까, 산등선이 멋있게 뻗어나갔으며, 곳곳에 바위와 나무들이 있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멋있기도 했다.
지금 와서 되돌아 생각해 보니까, 그 당시 나는 두 가지 관점에서 희열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산 속으로 들어가면서 나무와 바위 그리고 꼬불꼬불한 길에서 3-4시간을 지내면서 점점 이 곳의 모습에 익숙해져 가는 관점이다. 두 번째는 산 정상에 올라가서 산속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전체적인 산의 모습을 보면서 희열감을 느꼈던 관점이다. 미시적인 관점과 거시적인 관점으로 본 산의 모습에서 나는 희열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위의 두 가지 관점으로 보면 어떨까?
서로 다른 위치에서 산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지금 이 사회의 모습도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우선 사회 속의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살률은 OECD 국가 중에서 1위, 출산율은 최저를 보여주고 있으며, 우울증 환자가 점차 증가함을 보여주는 기사들. 그리고 소득 불균등이 점점 커져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지니계수의 증가. 누구는 호위호식하면서 살고 있고, 다른 이는 하루하루 살기위해서 노동을 하고 있는 모습. 대다수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마치 백조가 호수에 뜨려고 쉼없이 물갈퀴를 움직이는 것처럼 이 사회 속 사람들은 ‘지금’ 생존하려고 애쓰고 있다.
나는 이 사회를 다른 관점에서 어떻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지금의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정의했다.
p6 특히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성과 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 책의 테제였다. 자기 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로서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린다. 그러한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 까지 가지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즉 피로사회는 자기착취의 사회이면서 그 속의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고 정의한다.
지금 이 사회는 예전의 사회에 비해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예전에는 타자에 의해서 강압을 받는 사회라면, 지금은 지나친 긍정성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하나의 예로서, 자기 개발서 서적을 보면, 자기 자신을 1인 기업이라고 명하면서 이렇게 하면 성공 및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방법대로 따라 하면 다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거처럼 말하고 있다. 독자로 하여금 “이렇게 하면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라고 독촉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에게 행위에 대한 당위성, 목적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자아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워서 자신의 성과를 향상시키라는 의미이다. 본인은 착취자인 동시에 피 착취자가 되는 것이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불가능 하지 않다”는 사회는 긍정성을 강조한 사회이다. 이 긍정이 점차 강조되면서 부정(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불가능함을 인지하는 것)이 약화된다. 즉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할수록 이 과정 속에서 방해되는 부정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 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사유할 시간이 없음의 의미하며,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 진다는 의미이며, 오직 계속 생각해 나가기만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긍정에 의한 활동 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 놓지 않는다.
지나친 긍정성을 가지게 하면서 성과를 추구하는 사회, 그 속의 개인은 점차 자기 착취를 스스로 하면서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섬뜩했다. 그리고 한번 생각해보면 “할수 있다. 너는 할수 있다” 라는 말 자체를 보면, 이 말을 듣는 청자를 벼랑 끝으로 밀고 모습이다. 주위에서 계속해서 “할수 있다. 할수 있다”라고 펌프질 부채질을 하면 할수록 점점 본인은 점점 할 수 없게 되는 과정에서 본인은 얼마나 괴로움을 느낄것이며, 본인을 얼마나 부정을 할 것인가? 말이다.
이런 성과사회에서 BURN-OUT이 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