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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최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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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영사』는 여러 이야기가 무작위로 섞인 독특한 형식의 책이다. 출판사 책소개처럼 나도 책을 읽으면서 무질서에 나름의 질서를 부여하게 됐는데, 그건 『부영사』를 두 가지 이야기로 나누는 것이었다. 하나는 캘커타의 걸인 여자 이야기였고, 나머지 하나는 부영사와 안-마리 스트레테르를 포함한 대사관의 백인들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이런 구분에는 물론 장소나 인종같은 특징이 영향을 끼쳤겠지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내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의 슬픔(고통)을 얼마나 이해하는가'였던 것 같다.

"초기에 겪었던 굶주림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부영사』는 한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소녀는 캘커타에 사는 한 걸인 여자의 과거이다. 소녀는 임신한 몸으로 집에서 쫓겨났고, 캄보디아의 바탐방에서 인도의 캘커타까지 계속해서 길을 걷는다. 걸인 여자의 이야기는 전체 책의 분량에 비해 짧지만,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동안에는 끊어지지 않는다. 소녀의 걸음을 따라가며 나는 여자가 어떻게 걸인이 됐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소녀의 시선으로 구더기가 나오는 발과 슈거애플나무의 그늘을 전부 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잊은 채 '바탐방'을 외치는 여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요."
반면, 걸인 여자와 철책을 사이에 두고 그 안에 있는 백인 인물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들 같았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다른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또 그만큼 백인들은 모이면 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특히 '부영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부영사는 라호르에서 '의문의 사고'를 친 후 캘커타로 옮겨져 처분을 기다리는 인물이다. 사람들은 사고의 근원을 알기 위해 부영사의 과거를 궁금해하고, 부영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주시하고, 부영사에 대한 소문을 퍼나른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알 수 있는 그런 정보들은 알맹이가 없어서 내가 그를 이해하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렇게 부영사에게 쏠린 사람들의 궁금증과는 달리 정작 부영사가 다른 사람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땐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부영사와 협회장의 대화에서 부영사는 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협회장은 관심이 없어보인다. 협회장은 하품을 한다. 그리고 협회장은 부영사가 때때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단 한 번만이라도 여기 남아 있게 내버려 두시오."
팔각의 무도장에서 펼쳐지는 연회 장면은(p.101~) 내가 부영사를 알아가는 것을 책이 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파티에서 부영사와 안-마리 스트레테르는 대화를 나누지만, 이 대화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으로 조각조각 찢겨진다. 부영사는 이전에 협회장에게 안-마리 스트레테르를 두고 "나는 그녀를 슬픔으로 이해할 겁니다."(p.88)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연회장에서 이 마음을 안-마리 스트레테르에게 전하고자 하는 부영사의 모습은 장면 사이마다 삽입되는 '사람들은 말한다'라는 텍스트 자체에 의해 저지된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말을 붙이며 나와 부영사 사이에 벽을 만든다. 슬픔을 나누려는 부영사의 시도는 뒤이어 사람들이 그를 연회장에서 쫓아내면서 이야기 속에서도 저지된다. 부영사는 자신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나는 남아 있겠소!"라며 소리치며 운다. 이 외침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돌연한 분노'가 되어 라호르에서 벌어진 사건의 증거가 될 운명을 획득한다. 이 지점에서 부영사가 참 쓸쓸해보였다. '안-마리 스트레테르를 슬픔으로 이해하겠다'는 말 속엔 '자신도 슬픔으로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부영사는 캘커타의 백인 사이에서 쫓겨나고, 그는 나에게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끝났다.

망망대해 같은 평원에선 슬픔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고 꽉 닫힌 팔각형의 무대에서 슬픔은 조각난다. 이 두 이야기의 대비를 보며 나는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걸인 여자의 과거 이야기는 정말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녀의 이야기는 피터 모건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피터 모건은 부영사를 쫓아낸 안-마리 스트레테르 무리에 속해있다. 왜 피터 모건은 걸인 여자에 대해서는 그토록 알고 싶어하면서도 부영사에 대해선 알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왜 걸인 여자의 슬픔(고통, 광기)은 재현할 만한 대상이고 부영사의 슬픔은 쫓아내야 할 대상이었을까. 옮긴이의 말에서처럼 부영사의 파괴적 행위가 그들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걸인 여자와의 다른 점일까.또 철책 안의 사람이 궁금증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는 과연 여자의 슬픔을 담고 있을까. 여자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가공된 것이라면, 결국 내가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은 슬픔의 조각일 뿐일까.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알아보고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들이 많아졌다.

책의 특이한 형식만큼 읽을 때마다 집중되는 포인트나 감상이 달라질 책 같아서 다시 읽고 싶다. 재독할 때는 정말정말 알 수 없었던 인물인 안-마리 스트레테르에 집중해서 읽고 싶다. 그리고 『부영사』의 인물들이 나오는 『롤 V. 슈타인의 황홀』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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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프
김사과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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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인물들은 '하이라이프'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마약을 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에 몰두한다.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가 하면 '보헤미안' 친구를 사귄다. 하지만 다들 도시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서문에서 작가는 도시에서 오래 산 인간은 쥐와 귀신으로 변한다고 밝힌다. 쥐와 귀신은 땅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도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지 쥐와 귀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내내 '하이라이프'를 포기하지 않는다.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진정한 일꾼은 나와 같은 소비자이지, 노동자가 아니라!
<하이라이프>에서

-여행 중에는 언제나 이런저런 신선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법이잖아?/ 그리고 물론 사진들! 수백 수천장의 사진들!/ 어떤 사진을 업로드하고, 또 어떤 건 삭제해야 할지, 고르는 작업은 지겹지도 않았어. 심지어 끝도 없게 느껴졌으니까.
-근데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 게 아니겠어?/ 사진 밖의 나를 누가 기억하지? 넌 기억하니?/ 난 안 나. 사진 밖의 너란 존재, 나에겐 귀신보다도 낯설어.
<♡ 1 0 0 4 7 9 ♡ >에서

무서웠던 건 '하이라이프'를 향한 인물들의 몸부림이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면서 볼 수 있는 익숙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인물들과 나를 분리하고 비난하기엔, 끝없는 소비와 SNS 속 사진은 이미 우리의 삶과 너무나도 가깝다. 어쩌면 삶 자체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낯선 점은 소설은 나에게 익숙한 삶을 그리고 있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찝찝함은 일상 속에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우습다. 하지만 절대로 웃음을 터뜨려서는 안 된다." 그건 아마도 아무도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아무도 웃지 않으니 우스운 것도 진지한 것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하이라이프》는 아무도 웃지 않는 정적을 깬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웃기게 돌아가는지 신랄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세상을 깔깔 비웃는다. 고층 아파트의 행복, 인스타의 멋진 사진 속 행복, 쾌적한 쇼핑몰의 행복을 비웃으면서 끝없는 행복을 간편하게 가질 수 있다는 행복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행복이 무너져도 마음은 더 편하다. 허상의 행복보다는 행복하지 않은 것이 낫다는 것을《하이라이프》를 읽으며 알 수 있었다.

(출판사 서평 이벤트를 통해 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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