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시간들
델핀 드 비강 지음, 권지현 옮김 / 문예중앙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누군가 내게 도시에서의 삶은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전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고, 그렇기 때문에 뭐든 혼자서 헤쳐나가야 하는 고독한 싸움. 이 고독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만이 도도하고 거만한 도시의 품 안에서 언제까지고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언제 도시의 품에서 내쳐질 지는 모를 일이다.

 나도 한때는 도시 생활이 퍽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학생 신분을 벗어나고 부모님의 간섭을 벗어나는 시기가 닥치자 나는 도시에서의 삶을 즐기는 '낭만인'의 모습보다는, 삭막한 도시생활의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야 하는 '포식자'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네가 죽고 내가 사느냐? 그렇다면 그 방법은? 양심의 가책은 느껴지는가? 도시의 삶 속에서 이는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곧 살아감의 방식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처음으로 접하는 프랑스의 여류작가 델핀 드 비강. 기욤 뮈소, 안나 가발다 등의 작가들과 더불어 <길 위의 소녀>라는 작품으로 프랑스에서는 꽤나 국민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대작가라는데 평소 프랑스 문학은 주로 고전 밖에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겐 무척 생소한 이름이다. 나는 본격적인 책을 감상하기 전에 작가의 이력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편인데 이 작가, 만만찮게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거식증을 앓아 학업을 중단했고 낮에는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치열하게 근무하는 커리어우먼으로서, 밤에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어머니와 글을 쓰는 작가로서, 말하자면 이중인생을 살았다. 이 작가에 대해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지하의 시간들>이란 작품 하나만으로 델핀 드 비강이라는 작가가 이뤄낸 전체의 작품세계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의 시간들>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나는 이 작가의 첫 작품을 이 작품으로 선택해서 참 다행이다,라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삶의 다양한 파편들, 그 속에서 마주하는 단상, 그리고 고독과 끊임없이 밀려오는 권태. 현대인들의 우울함과 갈증을 이토록 객관적이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작가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나는 삶에 대한 어떠한 찬란한 기대감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물론 내게도 인생이란 달콤한 슈크림과 같은 것,이라고 철없이 낭만적인 환상으로 부풀었던 시절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세월은 나를 그런 사람으로 곱디곱게 나이먹을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삶은 곧 현실이다. 특히 죽을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게 인생이란 끝없이 펼쳐진 선택과 다툼의 연속이다. 그 싸움 속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성공'이라는 키를 획득할 수 있고, 그렇기에 오늘도 도시 속의 수많은 사람들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시지프스의 삶을 떠맡은 채 살아간다. 그것이 비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삶에 영광과 행복, 희망이 존재한다면 때론 그에 반항하는 좌절과 실패와 불행도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그것으로 인생을 끝,이라곤 결코 단정할 수 없다는 것. 

 머리로는 빤히 알고 있어도 가슴으로 쉽게 인정하기 힘든 삶의 진리를 작가의 무덤덤한 문체 속에서 문득, 정말 우연히 문득 발견하게 되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나는 직장생활과 비열한 상사의 술수에 떠밀려 삶의 패배감을 맛보게 된 주인공 마틸드의 삶을 동정하지 않는다. 일방통행적인 사랑에 갈 길을 잃어버려 삶에 지친 티보의 모습을 위로하고 싶지 않다. 그 또한 너무도 현실적인 삶의 한 단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들의 행적을 내내 쫓으면서도 결코 이들을 동정하거나 연민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삶은 끝없이 펼쳐진 고독의 길과 다름없으며 무엇을 선택하든, 그 어떤 패배를 당하든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누구나 다 똑같이 외롭다. 자신을 패배자라고 느끼는 사람은, 비단 마틸드와 티보 뿐만이 아닐 것이다. 티보를 힘들게 하는, 그를 결코 이해시키지 못하는 그의 헤어진 연인 릴라 또한 가슴 속에 구멍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고, 마틸드를 사사건건 괴롭히는 직장상사 자크 또한 일 이외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못하는 지독하게 불행한 워커홀릭일 뿐이다. 작가는 이것이 그저 삶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끝없이 감내해야만 하는 어떤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에서든 역설적으로 희망은 존재할 수 있다. 티보의 눈빛이 마침내 지쳐버린 그녀, 마틸드를 발견하게 된 것처럼. 두 사람의 미래가 어찌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답은 오직 시간만이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시간조차 모를 수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 하나다. 끝없이 펼쳐진 삶이라는 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해야 할 것이며 그로 인한 무수히 많은 절망과 고독, 위기, 때로는 행복과 진정한 사랑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

 이 책에서 그려지고 있는 도시의 삭막한 풍경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숨죽인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것은 그 어떤 파리의 낭만을 노래한 책들보다도 훨씬 더 사실적이고 '프랑스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델핀 드 비강. 앞으로 계속 기억하고 싶은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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