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폐허 우리시대 질문총서 15
리사 요네야마 지음, 김려실 옮김 /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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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을 넘어 중국으로, 중국을 넘어 전 아시아를 호령하겠다.’는 야심찬, 혹은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시작된 일련의 전쟁들은 일본 제국을 패망으로 이끌었다. 그 중에서도 미국과 벌인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배가 결정적이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국가들은 각 국가의 독립운동가 혹은 지도자의 노력과 일본의 패망으로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뿐 아니라 일본이 벌였던 다른 전쟁에서의 전쟁범죄는 철저히 단죄되지 못했다. 일제의 전범 중에서도 그 과가 크다고 인정된 몇몇은 사형 등을 언도받고 죗값을 치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나치 독일의 전범재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다. 소련은 아시아 전선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신생 중국은 전후 재건과 공산당과의 갈등 및 내전을 처리하기에만도 바빴다. 태평양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미국이 발언권이 제일 셀 수밖에 없었다.

 일본 패망 이후 지금까지의 미국이 일본에 보인 관용적 태도에 대한 연구들은 대부분 같은 의견을 낸다. 나치라는 반인륜적인, 지구상에서 없애야만 하는 집단을 단죄하는데 성공한 후의 세상은 이념 대결의 장일 것이라는 미국의 예측으로, ‘대 공산권 블록의 전초기지로서 일본의 지정학적 중요성때문에 일본에게 관용을 베풀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이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태도로 인해 철저히 외면되어진 전쟁범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전쟁범죄의 당사국이자 가해국인 일본의 무책임에 대해서도 조명하고 폭로한다. 작가는 전쟁 이후 펼쳐진 냉전이 미국의 관용을 낳았고, 이는 결국 전쟁 시기에 발생한 끔찍한 범죄들을 덮을 수 있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미국을 비롯한 제1세계에게 있어서, 일본은 추악한 전쟁범죄의 가해국이 아닌 아시아 반공 블록의 선봉이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묻혔다. 2세계로 편입된 피해국 내의 피해자의 목소리는 제1세계까지 전달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피해국인 한국에서도 피해자의 목소리는 반공주의라는 기치 아래 묻혀버렸다. 반일감정을 자극해 반공전선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지도층과 미국을 위시한 제1세계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냉전은 피해국이 가해국을 단죄하거나 심판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시켰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이건 개인적 생각이지만, 책 제목이 냉전의 폐허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 심판받지 못한 온갖 범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책임이 희석되고, 사건의 존재마저 잊혀왔다. 냉전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냉전의 사고방식과 국제질서 그리고 책임 회피와 희석은 소련 붕괴 후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냉전이 현재에 남긴 폐허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작가와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내용도 이것이라 생각한다. 전쟁범죄들이 단죄되지 못하고 피해보상 이야기가 나와도 가해국이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냉전이 남긴 폐허때문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 책은 이미 지나가버린 냉전이라는 과거가 아직도 현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과거 속에서 정립하는데 실패해버린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들을 조명한다. 그리고 이런 과거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노력이나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노동을 해야 하는지 말한다. 냉전을 다룬 책은 한국에도 많은 서적이 나왔거나,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냉전이라는 과거가 현재의 정의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이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다른 책들과 차별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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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의 부산 우리시대 질문총서 18
구모룡 지음 /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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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제 2의 도시이자 한때 이 도시의 슬로건이기도 했던 다이나믹한 매력이 넘치는 부산. 한국인들은 고려시대 이래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 체제 아래서 살아왔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부산은 대도시이고 매력이 넘치는 도시이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부산을 주변부, 지방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부산을 그저 주변부, 지방으로 치환해서 바라보는 시선을 거부하고, 문학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부산을 다시금 바라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도시를 바라보고 연구하는 부산학이라는 학문이 나아갈 길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부산 지역이 문학 속에서 어떤 식으로 비춰져왔는가에 대한 책이 아니다. 본인도 이 책의 제목만 보고서 문학 속에서의 부산을 알아보는 책으로 생각했으나, 이 책은 그보다 더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문학 속에서 등장하는 부산은 부산이 가지는 여러 특징들(해양도시, 식민도시라는 태생적 한계 등...)에 대해 알아보는데 사용되고, 작가는 이를 통해 여러 이론들이나 사상들을 자신이 바라보는 부산의 특징에 접목시켜 부산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특징들을 설명해나간다. 이와 함께 부산과 부산학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찰한다. 가령 23페이지에서는

 

상실과 향수 사이에서 요동하는 부산학은 이제 접어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

피란수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상기하면 비록 임시로 부여된 지위이지만 수도라는 중심성의 상실이라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중략)

이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중심주의를 만들 공산이 크다.”

 

라고 한다. 부산과 부산학이 (수도 지위 등의) 상실과 (공업와 상업 도시로 번영하던)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 지금 현재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부산을 재조명하며 부산학의 기틀을 새로이 재정립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부산이 식민도시로의 태생적 한계를 가졌으나, 그것을 직시하고 해양도시, 혼종도시 등으로서 부산이 갖는 정체성을 문학 속에 표현된 부산과 방대한 양의 배경지식을 통해 설명해나간다. 책의 끝부분에 다다라서는 낙동강 유역의 문학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부산 내의 로컬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는 로컬이라는 개념에 주목하면서 로컬은 단순히 주변부를 뜻하는 단어가 아님을 말한다. ‘한 개인의 신체적 삶이 펼쳐지는 가장 구체적인 공간인 로컬이 가지는 위상과 의의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끝으로 책을 마무리짓는다.

 이처럼 이 책은 단순한 부산문학 개괄서가 아니다. 단순 개괄서나 지역문학 소개서로 생각하고 읽으면 조금 당황스러울 지도 모른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방대한 양의 참고문헌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작가가 문학을 통해 바라본 부산의 특징을 서술한 부분에서는 여러 배경지식이 있어야 읽기가 수월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제국의 식민지에 건설된 식민도시 부산이 어떤 식으로 성장해나갔으며,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고, 나아가 다양한 성격을 지닌 도시가 되어가는 과정을 문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잘 서술했기 때문이다. ‘로컬이라는 단어가 단지 주변부가 아님을 말하며 로컬이 갖는 의의를 상기시키고, 중앙 집중 문제가 심각한 요즘 로컬이라는 단어에 집중함으로써 부산(에 대한 내용이지만, 다른 도시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특징을 잘 살려 정체성을 확립하고 현실과 맞서나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는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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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혁명 우리시대 질문총서 3
얀 지에론카 지음, 김남국 옮김 /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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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혁명’. 혁명이나 그것에 의해 이루어진 상태를 반대하거나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단어이다. 격동의 20세기보다는 훨씬 안온한 21세기를 사는 내 입장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현대사회에서는 듣기 쉽지 않은 단어이다. 그런 혁명이라는 단어를 약간 비튼 반혁명이라는 단어. 저자인 얀 지에론카는 1989년 동유럽에서의 혁명 이후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을 반혁명의 시대라고 정의하면서 왜 반자유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왜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자유주의는 쇠퇴하는지 고찰한다. 그렇게 최근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혁명적 사회변화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이 책에 담았다.

1989년의 동유럽 혁명은 약 40년간의 기나긴 냉전을 종식시키며 철의 장막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블록을 붕괴시키는 데에 일조했다. 당시 사람들은 더 이상 핵 위협을 포함한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되며, 자유주의에 입각한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모두가 낙관적으로 미래를 바라봤다. 하지만 약 30년이 지난 현재, 유럽에서는 반 이민, 반 세계화 등을 외치며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등,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30년 전의 혁명에 반()하는 포퓰리스트들이 득세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이 결국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평등과 자유라는 기본 원칙을 훼손할 것이라며 매우 우려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이 어째서 일어났는가? 다양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저자인 얀 지에론카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불평등의 확산, 그리고 그 상황속에서 자유주의 진영이 보였던 실책들 때문이라고 보았다. 70년대, 영국병, 오일쇼크, 그로 인해 일어난 스테그플레이션 등, 수정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났다. 이때 로널드 레이건, 마거릿 대처 등이 정권을 잡으며 밀어붙인 일련의 정책들이 있었다. 이는 레이거노믹스, 대처리즘 등으로 불렸다. 그렇게 80년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수정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해결해내며 수많은 찬사를 받았으나, 만만찮은 부작용이 속속 등장했다.

그 중 제일 심각한 부작용은 바로 빈부격차 문제였다. 저자는 책에서 타 국가에 비해 심한 폴란드의 빈부격차와, 서유럽 특히 독일로 부가 쏠리며 EU 내에서도 심해지는 빈부격차를 꼬집으며 양극화가 심해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별다른 조치 혹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시간을 끌며 시대상황에 편승해버렸던 지금까지의 기성 자유주의자 및 정치인들 때문에 반혁명 세력이 대중들을 휘어잡기 쉽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108페이지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으로의 자유는 임금인상을 억제할 자유를 의미한다. 규제로부터의 자유는 강을 오염시키고, 노동자를 위험에 빠트리고, 부당한 금리를 부과하고, 낯선 금융기관을 고안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세금으로부터의 자유는 사람들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하는 분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 조지 몬비오 (George Monbiot)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자유가 이렇게 선택적으로, 좋지 않게 말한다면 편협하게 사용되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2008년의 경제위기와 그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죽어났던 것은 일반 서민들과 가난한 나라들이었다고 말한다. 이후 안 그래도 심했던 양극화는 더더욱 악화되었고,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점이 있는 신자유주의를 왜 아직도 세계는 고수하는 것일까. 저자는 기성 자유주의자들로 대표되는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인기와 표가 떨어지는 것을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사태를 방치했다고 힐난한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EU의 무능함도 같이 꼬집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반혁명의 물결에서 벗어나 자유주의의 회복을 꾀할 수 있을까. 저자는 21세기 유럽에 걸맞는 새로운 자유주의의 의제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이민자들에 대한 원색적 비난보다는, 전 국민이 함께하는 이민 문제에 대한 열린 대화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이처럼 특히 저자는 비판과 대화 및 토론의 힘이 자유롭게 사용되는 열린 사회를 주술적인 힘에 복종하는 부족 사회와 비교한다. EU의 무능함을 꼬집기는 했으나 저자는 여전히 EU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의 초국가적 규제를 실험하고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여 ‘EU가 무엇인가를 해야 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현재의 수직적인 EU가 아닌, 수평으로 구성된 다양한 네트워크들을 갖춘 EU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노력을 전제로 저자는 유럽과 자유주의의 부활을 조심스럽게 확신하고 있다.

이 책은 평범한 대중교양서는 아니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유럽의 정세 및 정치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고,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읽기 좋은 책일 듯하다. 유럽의 반혁명 적 기조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고, 흥미가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8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유럽의 반혁명세력의 현주소를 먼저 살펴보는 초반부, 유럽의 반혁명세력과 반혁명운동의 기원을 알아보는 중반부를 넘어, 반혁명세력에 대처할 자유주의 진영의 해결책을 알아보는 후반부까지의 짜임새가 튼튼하여 쉽게 몰입하여 읽을 수 있다.

읽기 쉬운 책이 아니라고 하여 못 읽을 만큼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논문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유럽 내 반혁명운동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글임을 생각하면 오히려 읽기 쉬운 편에 속한다. 이 글을 이런 책으로 내 주어 논문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나 같은 일반 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준 출판사에게도 감사를 표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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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채성의 삶과 죽음 - 홍콩 무법지대의 전설 우리시대 질문총서 6
곽한영 지음 /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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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을 중학생 때 우연히 접한 이후로 홍콩은 나에게 신비롭고 매력적인 장소로 비춰졌다. 매혹적이다 못해 정신 사나울 정도인 화려한 네온사인, 정감 있는 광동어 방언, 세계 3대 야경으로 불리는 홍콩의 야경,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홍콩 영화까지. 이 책의 부제인 홍콩 무법지대의 전설이라는 어구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면 나는 홍콩의 화려한 겉모습만 알고 그 뒤에 감쳐진 이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구룡채성이란 당시 영국 영토였던 홍콩 내에 존재했던 명목상의 중국 영토였다. 하지만 중국의 영향력도, 영국의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 특수한 곳이었다. 15층 높이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햇빛도 잘 들지 않아 대낮에도 전등을 켜놔야 했던 곳이었던 이곳은 영국과 중국 양국의 의도적인 무관심 속에서 어떤 권력도 닿지 않는 치외법권이 되었고, 범죄를 지었어도 이곳으로 도망친다면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신화가 생기기에 이른다. 자연스레 범죄의 요새가 되어버린, 그야말로 마굴 같았던 이곳은 영국 통치하의 홍콩의 치부를 드러내며 중국의 홍콩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중국 당국의 프로파간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결국 1993, 홍콩 반환 전에 영국령 홍콩정부에 의해 철거된다.

저자는 이 구룡채성의 역사를 쭉 훑어보며 그것의 탄생과 소멸을 조목조목 설명해나간다. 구룡성채라고 불리던 구룡채성이 철거되고 땅속에 파묻혀있던 현판을 통해 비로소 구룡채성임을 알게 된 일부터, 중국과 영국간의 상호조약 간에 월경지로 남아버린 구룡채성의 이야기를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홍콩의 역사까지 조목조목 잘 설명해준다는 점이 굉장히 좋았다. 구룡채성의 역사와 홍콩의 역사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과장을 보태 구룡채성의 역사가 홍콩의 역사이기 때문일까. 책의 이름은 구룡채성의 삶과 죽음이지만 구룡채성을 홍콩으로 바꾸어도 제목에 위화감이 없을 정도이다. 좁은 땅 덕분에 살인적이었던 홍콩의 물가가 구룡채성 내의 무허가 식료품공장, 치과 등등 덕분에 어느 정도 잡혔다는 이야기, 삼합회와 홍콩 영화계간의 유착 사이에서 구룡채성을 영화 촬영장으로 쓸 수 있게 된 이야기 등등...... 인터넷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많은 점도 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곽한영 교수는 법교육으로 석사와 박사 과정까지 마친 사람으로, 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곽한영 교수가 국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권력이나 이해관계들 때문에 규범이나 보편적 가치가 왜곡되는 현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관심은 국가의 통제 없이도 하나의 공동체가 과연 잘 성장해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지배구조가 없는 공동체가 과연 잘 지속되어질 수 있는가. 이 의문은 결국 아나키 상태란 현실에서 존재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사례를 연구하기에 제일 좋은 곳은 구룡채성 이었고,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로 혼란한 홍콩 속에서 구룡채성을 답사하게 된다. 저자는 이후 몇 번 더 홍콩을 오가면서 답사를 하고자 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답사를 진행하지 못하게 되자 아쉽지만 그동안의 연구를 통한 결과물을 냈고, 그 결과물이 이 책인 듯 하다.

그래서인지 책에 인쇄된 사진의 선명도가 좀 아쉬웠다. , 저자는 계속 코로나로 인해 답사를 한번밖에 못한 점이 아쉬웠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국가의 통제와 공동체의 존속 가능성에 초점을 두어 책을 저술하고 싶어했던 것 같으나, 답사의 부족 등으로 구룡채성에 대한 역사책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현재 코로나19 사태가 점점 진정되어가는 분위기이다. 사진의 선명도를 개선하고 부족했던 답사를 추가로 진행하여 내용을 보완한 뒤 개정판을 내 준다면 좋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국내에 구룡채성을 다룬 서적뿐만 아니라, 홍콩의 역사를 다룬 대중교양서가 별로 없는 현실에서, 이 책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저자의 의도가 불완전하게 달성된 것이 사실이라 해도,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홍콩과 구룡채성의 역사를 뛰어난 저자의 필력과 함께 읽어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이 책을 구매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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