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채성의 삶과 죽음 - 홍콩 무법지대의 전설 우리시대 질문총서 6
곽한영 지음 /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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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을 중학생 때 우연히 접한 이후로 홍콩은 나에게 신비롭고 매력적인 장소로 비춰졌다. 매혹적이다 못해 정신 사나울 정도인 화려한 네온사인, 정감 있는 광동어 방언, 세계 3대 야경으로 불리는 홍콩의 야경,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홍콩 영화까지. 이 책의 부제인 홍콩 무법지대의 전설이라는 어구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면 나는 홍콩의 화려한 겉모습만 알고 그 뒤에 감쳐진 이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구룡채성이란 당시 영국 영토였던 홍콩 내에 존재했던 명목상의 중국 영토였다. 하지만 중국의 영향력도, 영국의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 특수한 곳이었다. 15층 높이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햇빛도 잘 들지 않아 대낮에도 전등을 켜놔야 했던 곳이었던 이곳은 영국과 중국 양국의 의도적인 무관심 속에서 어떤 권력도 닿지 않는 치외법권이 되었고, 범죄를 지었어도 이곳으로 도망친다면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신화가 생기기에 이른다. 자연스레 범죄의 요새가 되어버린, 그야말로 마굴 같았던 이곳은 영국 통치하의 홍콩의 치부를 드러내며 중국의 홍콩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중국 당국의 프로파간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결국 1993, 홍콩 반환 전에 영국령 홍콩정부에 의해 철거된다.

저자는 이 구룡채성의 역사를 쭉 훑어보며 그것의 탄생과 소멸을 조목조목 설명해나간다. 구룡성채라고 불리던 구룡채성이 철거되고 땅속에 파묻혀있던 현판을 통해 비로소 구룡채성임을 알게 된 일부터, 중국과 영국간의 상호조약 간에 월경지로 남아버린 구룡채성의 이야기를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홍콩의 역사까지 조목조목 잘 설명해준다는 점이 굉장히 좋았다. 구룡채성의 역사와 홍콩의 역사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과장을 보태 구룡채성의 역사가 홍콩의 역사이기 때문일까. 책의 이름은 구룡채성의 삶과 죽음이지만 구룡채성을 홍콩으로 바꾸어도 제목에 위화감이 없을 정도이다. 좁은 땅 덕분에 살인적이었던 홍콩의 물가가 구룡채성 내의 무허가 식료품공장, 치과 등등 덕분에 어느 정도 잡혔다는 이야기, 삼합회와 홍콩 영화계간의 유착 사이에서 구룡채성을 영화 촬영장으로 쓸 수 있게 된 이야기 등등...... 인터넷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많은 점도 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곽한영 교수는 법교육으로 석사와 박사 과정까지 마친 사람으로, 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곽한영 교수가 국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권력이나 이해관계들 때문에 규범이나 보편적 가치가 왜곡되는 현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관심은 국가의 통제 없이도 하나의 공동체가 과연 잘 성장해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지배구조가 없는 공동체가 과연 잘 지속되어질 수 있는가. 이 의문은 결국 아나키 상태란 현실에서 존재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사례를 연구하기에 제일 좋은 곳은 구룡채성 이었고,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로 혼란한 홍콩 속에서 구룡채성을 답사하게 된다. 저자는 이후 몇 번 더 홍콩을 오가면서 답사를 하고자 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답사를 진행하지 못하게 되자 아쉽지만 그동안의 연구를 통한 결과물을 냈고, 그 결과물이 이 책인 듯 하다.

그래서인지 책에 인쇄된 사진의 선명도가 좀 아쉬웠다. , 저자는 계속 코로나로 인해 답사를 한번밖에 못한 점이 아쉬웠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국가의 통제와 공동체의 존속 가능성에 초점을 두어 책을 저술하고 싶어했던 것 같으나, 답사의 부족 등으로 구룡채성에 대한 역사책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현재 코로나19 사태가 점점 진정되어가는 분위기이다. 사진의 선명도를 개선하고 부족했던 답사를 추가로 진행하여 내용을 보완한 뒤 개정판을 내 준다면 좋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국내에 구룡채성을 다룬 서적뿐만 아니라, 홍콩의 역사를 다룬 대중교양서가 별로 없는 현실에서, 이 책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저자의 의도가 불완전하게 달성된 것이 사실이라 해도,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홍콩과 구룡채성의 역사를 뛰어난 저자의 필력과 함께 읽어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이 책을 구매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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