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 뉴스
셰릴 앳키슨 지음, 서경의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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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는 다양한 측면을 가진 이슈를 한쪽 측면에서만 보여주는 경향이 크다. 어떠한 논리적 접근도 배제된다. 공격 대상에 적용된 기준이나 판단은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세력과 그 동조 세력에게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

내러티브를 정의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이 거짓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진실된 정보조차 내러티브가 될 수 있는 경우가 세 가지나 된다.

첫째, 진실한 정보가 고의적으로 편향된 방법으로 제시되는 경우다.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실들에 혼란을 주거나 다른 사실들을 덮어버리는 식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량 살인범이 총을 사용한 것은 사실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범죄에 대한 기사가 총기 규제를 지지하기 위해서 그에 대한 반론은 배제해 버린다면 이 역시 내러티브가 된다.

둘째, 보다 확대된 스토리라인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개별 뉴스의 가치를 필요 이상으로 확대할 경우, 진실된 정보도 내러티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힐러리 클린턴 전 영부인이 계단을 내려오면서 발을 헛디딘 것은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이 클린턴이 심각하게 아프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암시하기 위해 다른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런 기사를 메인 뉴스의 헤드라인과 소셜 미디어의 트렌드 뉴스로 띄운다면 이 역시 내러티브가 된다.

셋째, 어떤 이슈를 재고할 필요도 없는 종결된 사건인 것처럼 서술하거나 그것과 반대되는 사실과 견해는 불법인 것처럼 서술할 경우 진실도 내러티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잦은 토네이도나 홍수를 지구 온난화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은 이론적으로 합당하다. 하지만 뉴스 분석가가 모든 기상 현상을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와 연결시키면서 마치 이를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이에 대한 과학적 반론은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내러티브가 된다.

내러티브가 일단 확립되면 일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막대한 노력이 투입된다. 내러티브에 반하는 견해, 사실, 과학 등은 모두 '메모리 홀'에 던져져서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리게 만든다.

정보화 시대에 이러한 선전선동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조직적 노력이 필요하다. 뉴스가 내러티브를 심화시키기 위해 이용될 때, 우리는 사실에 기반한 뉴스에서 심각하게 이탈되고 만다. 내러티브는 정보를 편파적으로 제시하거나 맥락에서 벗어난 사실을 제시하기 쉽다. 물론 전적으로 거짓인 뉴스를 내보낼 수도 있다. 불행히도, 점차 그런 추세가 늘고 있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내러티브가 이루어낸 가장 큰 승리인지도 모른다.

내러티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두 부정적이거나 사악한 동기를 추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내러티브의 심리학을 이해하는데 <1984>에서 시민들을 심리적으로 조종하기 위한 전술로 묘사된 '이중사고'의 운용이라는 개념이 도움이 된다.

오웰은 이중사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서로 상충하는 두 개의 견해가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둘 다 신뢰하며 동시에 수용하기, 망각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망각하기, 또한 필요하면 언제든 다시 기억 속으로 되살리기, 그리고 다시 즉각적으로 망각하기, 무엇보다 그런 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뉴스 기자와 전문가들은 양심의 가책 없이 내러티브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이중사고를 수용해야 한다. 그다음, 뉴스 소비자들이 지성과 이성을 거부하도록 이중사고의 사용을 종용해야 한다. 누구도 내러티브에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된다. 상반되는 사실을 수용해야 하고, 잘못된 사람들을 불신해야 한다. 이슈에 대해서 새로운 견해를 보이거나 토론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도록 대중을 조건화시켜야 하며, 그런 사람들을 실제로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한 전적인 지지를 보내야 한다.

내러티브를 심화시키는 것이 목표가 될 때, 진실과 정확성 그리고 신뢰도는 뒷전이 된다.

우리는 자신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은 일관되고 타당하며 신중히 생각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반론을 제기하면 자신의 관점을 능숙하게 변호해서 남들이 그 주장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여기에 의문을 품고 소설<1984>에서 이중사고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소설에 나오는 이중사고는 두 가지 모순된 신념을 동시에 마음에 품게 함으로써 객관적 현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자신이 부정하는 현실에 대한 설명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중사고는 사실이나 현실을 조작된 현실로 대체하고, 다시 하루아침에 다른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생겨난다. 명백한 사실 대신 터무니없는 조작을 믿는 것, 상식 대신 주입된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설에 나왔던 '전쟁은 평화, 자유는 속박, 무지는 힘' 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이중사고가 디스토피아 소설 속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도 존재한다는 게 작가님의 말이다.

어디에나 있고 흔하다. 현대인의 기본적인 관점은 '객관적 진실'이나 '보편적 사실'이라는 개념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내가 직접 겪은 경험을 논한다.

사람들이 객관적 잣대나 치우치지 않은 참과 거짓을 포기해버린다면 강력하고 사악하며 심리 조작에 능한 권력자가 자기 입맛대로 진실을 만들어내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진실이 인간의 도구에 불과하다면 힘 있는 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무기로 쓰일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진퇴양난에 빠진다. 진실이 객관적이라면 우리는 남들의 신념이나 행동이 틀렸다고 심지어 나 자신이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실이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면 우리는 진실이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질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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