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잠 밀리언셀러 클럽 145
가노 료이치 지음, 엄정윤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사회파 미스터리, 개인의 욕망이 첨예하게 얽혀있는 장르.


추리 미스터리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주 전통적인 구조로, 탐정(탐정 역할)이 범인을 잡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범인인지 궁금하기 때문에 끝까지 보게 되죠. 하지만 끝까지 본다고 해서 무조건 재미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같은 구조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는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 그 자체를 재미있게 쓰기 위해 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탐정의 추리가 얼마나 독특하고 재미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탐정의 주특기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이때 탐정의 캐릭터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독자를 매혹시키는 지가 결정 나는 겁니다.


작품의 제목보다 주인공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시리즈물이 대체로 이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셜록홈즈 시리즈입니다. 이 구조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시 말해 셜록의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서 코난 도일은 뛰어난 감각과 추리력을 지닌 셜록의 곁에 그의 풀어진 이성을 부여잡아 주는 왓슨 같은 콤비를 붙여주었을 겁니다. 왓슨이 셜록의 추리를 돕는 역할만을 한다고 생각하셨다면 조금만 더 생각해 보세요. 왓슨 덕분에 셜록이 더 독특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느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실 겁니다. (물론 이 둘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죠.)


두 번째는 흔히 사회파 미스터리로 불리는데, 범인이 어떤 이유로 그 같은 범행을 저질렀나에 포커스가 맞춰진 이야기입니다. 이 경우, 범인을 추적하는 주체는 형사나 탐정처럼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가 아니라 평범한 개인일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공은 범인을 추적해 가며 그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어떤 이유로 이 같은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알아가게 되는데, 범인과 똑같은 사회적 환경에 처한 개인이라야 범인의 심리에 더 쉽게 이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구조가 덜 전통적인 이유는, 더 늦게 태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회가 다원화되었기 때문(혹은 다양한 원인에 관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귀족과 평민, 주인공과 악당,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많은 독자들이 알게 된 거죠. 사회란 선후를 파악하기도 이해관계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은, 개인의 욕망이 첨예하게 얽혀있는 곳이잖아요.


공항만이 아니었다. 도로 정비부터 시작해 지방 자치 단체나 관공서 등에서 만든 뒤 금방 폐쇄한 유원지 같은 시설도 그랬다. 항상 제일 우선시되는 건 관계자들에게 얼마만큼의 돈이 떨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 이용자의 존재 여부는 마지막에 가서야 고려되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객관적으로 왈가왈부할 수 있는 건 내가 제 삼자이기 때문이리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곳 사람들의 삶이 있는 법이었다. (46)


가노 료이치의 ‘창백한 잠’은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주인공인 다쓰미 쇼이치는 폐허가 된 다카하마 호텔에서 사진을 찍다 한 구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죠. 피해자는 아이자와 다에코라는 여성으로 다카하마 지역의 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모임에서 활동을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욕망, 삶을 버텨내게끔 하는.


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셔터를 누르는 주체인 나 없이 사진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 사진이라는 것은 인화지에 인화된 예술 작품이며 찍는 이의 사소한 주관 따위와 상관없이 훌륭한 예술 작품이 나올 수도 있는 법이라도 믿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58) 


주인공 다쓰미 쇼이치는 한때 사진 주간지에서 일하던 전직 카메라맨으로 사진을 조작했다는 누명을 쓰고 3년간 업계에서 퇴출당했습니다. 누명은 벗었지만 그 후로도 1년간 일을 구할 수 없었다가 이제야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지금 그는,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폐허를 찍고 싶어 합니다. 사진집의 표지로 사용될 폐허의 완전한 실루엣을 담고 싶어 하죠. 


이 마을 주변은 소문대로 폐허의 보물 창고였다. 

이 사실을 기뻐하는 건 나 같은 사람뿐이고, 주민들의 마음은 좋을 리 없었다. (60) 


사진을 찍다 시체를 발견한 후에도 폐허를 찍겠다는 그의 욕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독자 또한 폐허를 보고 보물창고라고 생각하는 그를 쉽게 욕할 수 없어요. 그 욕망이야말로 지금껏 그를 버티게 한 힘이니까요. 


여기서 질문. 폐허 같은 삶을 버텨내게끔 했던 한 인간의 욕망이 다른 이의 삶을 무너뜨리게 된다면? 


다쓰미 쇼이치에게는 사진 말고 또 다른 욕망이 있습니다. 그와는 사귀는 사이라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우에하라 후지코라는 여성을 향한 욕망이죠. 그들이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후지코가 1년 전 헤어진 옛 남자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기고가로 이런 저런 기사를 쓰는 후지코는 사망한 다에코가 죽기 전날 그녀를 인터뷰 했고, 쇼이치가 다에코의 시체를 발견한 다음 날 이곳에 도착합니다.


다에코의 전 남편인 우카지 아키히로를 만나게 되며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하는 쇼이치. 그는 다카하마 호텔이 망하게 된 이유가 근처에 들어선 다카하마 관광호텔 때문이 아니라 화재 사건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한때 흥신소에 있던 탓에 본능적으로 사건을 파헤치긴 하지만 단지 사진을 찍으러 이곳에 왔던 쇼이치는 피가 끓을 정도로 이 사건에 몰입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다카하마 관광호텔에 묵고 있던 후지코가 창문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며 쇼이치의 태도도 바뀌게 됩니다. 


긴급 수술 후에 회복 중이던 후지코를 간호하기 위해 후지코의 어머니가 도착하고, 전직 간호사인 후지코의 어머니가 누군가 후지코를 살해하려한다는 것을 알아채며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대체 누가 왜, 이 마을 사람도 아닌 후지코를 해치려 하는 걸까요? 


“사람은 포도당과 수분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법이라 반드시 염화칼륨이나 나트륨 같은 전해질을 함께 넣어요. 그래서 그게 들어가 있는 건 문제가 아니예요. ...... 하지만 그렇게 노랗다니 이상해요. 아마도 무슨 실수로 원래 처방보다 염화칼륨이 많이 들어가 있었을 거예요......”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머님은 흘끗 나를 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알았다.

그녀는 실수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심장이 멈춰요.”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162) 



그러나 욕망은 삶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사진에 드러나 있지 않으나 사진에 가장 많이 드러난 것이 있습니다. 어디에 포커스를 둘 것인가, 어떤 장면을 찍고자 하는가, 바로 사진가의 욕망 말이죠. 사회파 미스터리의 가치와 재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발생시킨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사회파 미스터리를 읽는 독자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범인의 욕망과 내 욕망, 혹은 범인의 상황과 내가 처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나, 그랬다. 두 번 모두 나는 사진만 생각하고 있었다. 

베스트 샷을 찍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보이지 않았으리라......

실제로는 보였으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발이 미끄러져 질퍽한 언덕에 오른손을 짚었다. 

손에서 벗어난 우산이 바람에 언덕 아래로 굴러가 버렸다. 

주우러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산이 비에 젖도록 내버려 두고 나는 호텔 폐허를 바라보았다. (253)


후지코가 왜 이 같은 일을 당했는지 하나씩 추적해 나가던 쇼이치는 보였으나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를 알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결말까지 쉴 틈 없이 달려가며 다카하마 지역을 둘러싼 사건의 전말을 하나씩 밝혀내게 되죠. 삶을 버티게 한 욕망이, 평범한 인간이 가진 사소한 욕망이, 무언가를 파괴하거나 누군가의 삶을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것을 쇼이치와 독자 모두가 깨닫게 됩니다.


“혼자서는 나쁜 짓을 할 용기가 없어. 그러니 누군가를 끌어들이고 싶고, 나쁜 짓을 하기 전에 미리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 두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지. 아니, 나쁜 짓을 하는 자신을 막아줬으면 하고 자기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410-411)


소설 ‘창백한 잠’은 마을 사람들과 주인공 쇼이치를 통해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이 부딪히는 순간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동일한 테마가 인물에 맞게 여러 차례 변주되는데, 그러면서도 하나의 주제로 소급되는 솜씨가 놀라울 정도죠. 탄탄한 미스터리 구조와 강력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지닌 작품. 사회파 미스터리의 매력에 빠지셨거나, 이미 알고 계신 분이라면 소설 ‘창백한 잠’을 꼭 읽어보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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