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술에 취해, 취리연구회.


여기, 재수 끝에 고향을 떠나 도쿄에 있는 한 대학에 입학한 사카즈키 조코라는 신입생이 있습니다. 한때 잘 나가는 아역배우였으나 소녀와 어른의 경계에서 일이 줄어 은퇴를 한, 조금은 쓰라린 경험이 있는 여학생이죠. 그런 과거가 있어선지, 조코는 청춘이라는 찬란한 시간을 빛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춘은 긴 터널이다.

누구나 눈을 꼭 감고 싶어질 정도로 밝은 빛을 향해 달리고 있을 터지만, 

터널 한 가운데에서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저 마구 달리는 이름 없는 영혼인 것이다. (9)


미스터리 마니아인 조코는 입학하자마자 대학 내 유명 추리연구회에 가입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죠. 조코가 가입하게 된 동아리는 ‘추리연구회’가 아닌 “취취취취! 취하면 이치가 보인다!”는 ‘취리연구회’였거든요.


“여긴 추리연구회죠?”

“보시다시피, 여긴 취리연구회지.” (17)


소설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는 취리연구회와 함께 한 일 년간 조코가 겪게 되는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과 어울리는 술판이 벌어지고 그때마다 미스터리한 사건이 일어나죠. 조코는 이 사건들을 하나씩 풀어 나가고, 독자는 그런 조코의 추리에 동참하게 됩니다.


에피소드 내내, ‘취리 연구회’ 사람들은 내내 술을 마시고 내내 취해 있습니다. 어찌나 마셔 대는지 읽는 사람까지 술에 취한 듯 착각을 하게 될 정도예요.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들 술을 마셔대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왜 그렇게들 술을 마셔대는 걸까요? 


술을 맛으로 마시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고로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거잖아요. 조코는 이곳이 술을 마시는 ‘취리연구회’임을 알고도 동아리에서 나가지 않습니다. 청춘이라는 빛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조코로서는 무언가에 몹시 취하기라도 하고 싶었던 것 걸까요?


하지만 주조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탓에 술을 물처럼 마셔온 조코는 술에 취하지 않는 체질입니다. 

그런데 왜 동아리에서 나가지 않는 거죠? 혹시... 술 보다는 다른 것에 취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청춘에 취해, 미키지마 선배.


술과 청춘의 공통점을 알고 계신가요? 지나고 나면 자세한 사건보다 어떤 분위기만 기억이 난다는 것, 그게 이 둘의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에 취한다, 청춘에 취한다고 표현하죠. 


그리고 취했을 때 가장 많이 일어나는 사건은? 네. 바로 연애입니다.


이쯤에서 조코가 ‘취연’에 들어오게 된 계기를 소개해드리면 좋을 것 같네요. 추리동호회 간판을 찾고 있던 조코에게 ‘취연’ 플래카드를 들이 밀어 착각하게 한 남자, 조코의 표현에 의하면 바다 밑바닥 같은 눈동자를 지닌 이 남자, 미키지마 선배 말이죠.


신기한 눈동자였다. 

바라보고 있는데 동시에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으면서, 

그런데도 조금도 모질고 정이 없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바다 밑바닥. 

나는 그 눈동자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17)


게다가 취연의 첫 술자리에서 미키지마 선배는 조코의 정체를 알아챕니다. 두꺼운 안경과 앞머리로 아역 출신이었던 걸 숨기고 있던 조코는 당황할 수밖에요.


선배는 재빠른 동작으로 내 안경을 벗기더니 말했다.

“역시 너, 그 사카즈키 조코지?” (18)


이뿐만이 아니라, 첫 번째 미스터리 ‘꽃에 취하는 로직’을 풀어가는 도중에 미키지마는 조코가 마시고 있는 물이 술이라는 것 까지도 알아챕니다. 조코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죠. 


사실은, 취해 있던 거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주제에, 취해 있었다. (52)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술에 취한 듯, 청춘에 취한 듯. 그렇게 조코는 미키지마에게 취해갑니다.



술도 청춘도, 신나게 취할 수 있다면야.


술에 취한 것인지 청춘에 취한 것인지, 취연이 좋은 건지 미키지마 선배가 좋은 건지, 어느새 조코는 호접몽 속 나비가 되어버립니다. 저는 그저 부럽더군요. 술이든 청춘이든 신나게 취해 버리는 조코가 말이죠. 


나는 미키지마 선배 옆에서 

계속 잠들지 못하고 파도 소리를 듣고 있던 탓에 

지독한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도, 영혼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쿄행 오도리코 호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서서히 내 감정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내 교만함의 모순에. 더 이상 아역배우도 뭣도 아닌 내가, 

지금 취하게 만들고 싶은 건 단 한 사람뿐인지도 몰랐다.

옆자리에서 마찬가지로 별로 잠에 들지 못한 것 같은 

미키지마 선배의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 안에서 아직도 폭죽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있었고, 

밀려드는 파도 소리는 전차 안의 소음을 지워 버릴 정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달과 바다 소리를 오가는 바람, 

넓적다리에 달라붙어 푹 쉬는 모래들. (141)


‘취연’과 함께 네 건의 미스터리한 사건을 통과하는 조코. 그리고 조코의 곁에는 내내 미키지마 선배가 있습니다. 급기야 마지막 에피소드인 ‘눈에 취하는 로직’에 이르러서는 취연을 벗어난 사적인 공간에서 미키지마 선배와 마주치게 되죠. 


이쯤 되면 모두들 궁금해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미스터리인지 연애담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이 소설의 결말을 말이죠.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 이제 직접 읽어보실 차례입니다. 


힌트는 이 정도.


청춘은 긴 터널이 분명했다. 

우리들은 그저 마구 그 안을 달리는 유령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터널 안에서 뿅 하고 밝혀진 등불을 만난다면, 그걸 놓쳐서는 안 된다.  

꽃 불빛인지, 달 불빛인지,

눈 불빛인지 알 수 없지만, 

그걸 의지해, 

더듬거리면서 어둠 속을 나아가는 것이다. (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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