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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레인보우 피쉬 2 (완결) ㅣ [BL] 레인보우 피쉬 2
그루 / 비하인드 / 2016년 12월
평점 :
판매중지
덜컥 구입해놓고 한동안 손이 가질 않아 모셔만 두고 있었습니다. 작가님의 다른 글들도 그렇고, 막상 시작하고 나면 정신없이 몰입해 읽어내려가지만 시작이 항상 어려워요. 이번 렌피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표지의 색감과 키워드.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사전정보의 혼합으로 저도 모르게 질척질척 어두운 뒷골목 밤거리를 상상하고 말았는데요.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주인공 성격을 굉장히 침침한 쪽으로 못 박아뒀습니다... 일단 펼쳐 들고 술술 책장을 넘기면서, 특히 과거 학창시절의 명랑 쾌활한 에피소드를 읽어내려가면서 상상했던 것과 정반대 수준의 인물을 접하곤 많이 당황했어요.
정말 제 예상과는 딴판인 인물이더라고요...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도 맞고, 마냥 밝고 쾌활한 인물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적당히 유연하게 상황을 넘길 줄도 알고 오히려 능숙한 어른이었습니다. 말이 지나치게 없다거나... 땅을 파며 내 인생 왜 이러나 삽질을 한다거나... 아무튼, 예상했던 쪽은 전혀 아니었어요. 쓰면서도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나 싶을 정도네요.
주인공 심태경은 특별한 인물입니다. 좀 더 부연설명을 하면 색색의 피쉬가 보이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에요. 상대의 성격, 살아온 행적, 마음의 변화 등등 여러 요소에 따라 생동감 있게 살아 숨 쉬는 색이 보여요. 태경은 그것을 피쉬라고 부릅니다. 달리 이유는 없고 마치 물고기처럼 움직이기도 하고 살아있는 생명체 같기 때문에요.
그런 태경이 첫눈에 반해버린 색이 있습니다. 눈부신 푸른 피쉬를 가진 이람호. 첫인상이 상당히 강렬할 세 글자이지만 주인공 맞습니다. 자주 보기엔 지나치게 독특한 이름 탓에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스러웠어요. 잔잔한 글 툭 삐져나온 가지처럼 이질적이라 아니 대체 이름이 왜... 싶었습니다. 읽다 보니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갔지만요.
작가님의 글 대부분 그렇듯 레인보우 피쉬의 주인공 역시 가진 것이 많은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주인공들에게 흔히 주렁주렁 매달아주곤 하는 지위나 권력 등등 어떤 것 하나 가지지 못했어요. 그에게는 보증 빚을 남기고 잠적해버린 아버지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린 어머니, 부모님은 한참 전 떠나 계시지 않았고. 대신해 현실의 짐을 험한 말로 자신에게 풀어내는 할머니 한 분 남아계실 뿐이죠.
국가대표가 되어 할머니가 견디는 짐을 덜어야 한다는 책임을 강제 받으며 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감량을 위해 뜁니다. 흔한 참한 효자 설정과도 살짝 어긋나 있어요. 어쨌거나 목표를 이뤄 할머니의 고생에 보답한다는 결론은 같지만, 고분고분한 몸과 달리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어찌 보면 이쪽이 더 현실적이고 당연하죠. 모진 말과 탓을 어린아이가 순순히 견디는 건 이상적이기보다 찝찝한 쪽에 가깝지요.
태경은 그런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합니다. 마음을 깨닫자마자 당돌하게 고백부터 해요.
어린 람호는 다소 삐딱합니다. 평탄하지 않은 현실, 무거운 책임. 가만히 성장하는 것만도 쉽지 않을 나이인데 그가 감당하고 있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요. 험한 말을 뱉고 참지 못하고 주먹도 내지르죠. 아니면 말지 운동하는 자식이 사람 팬다며 동네 사람 찾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태경에 오히려 당황하고 말지만요.
그리고 이어지는 과거에선 읽는 저조차 깜짝 놀란 태경의 성격이 빛을 발합니다. 직진 직진 직진. 일정 선을 긋고 기대는 일찌감치 접어버리지만, 그 덕인지 주저함도 망설임 따위도 없는 고등학생 태경. 람호는 점점 태경에게 익숙해져 가고, 뜻하지 않는 위로도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잠시의 위로만으로 견디기 쉽지 않아요. 마지막 기회라 여긴 국가대표 선발이 결국 좌절되고, 잔뜩 삐딱해진 람호는 태경의 트라우마를 건드려버리고, 상처를 받아버린 둘은 결국 엇갈리고 맙니다.
7년의 시간. 어른이 된 태경은 어찌 보면 여전하지만, 한편으론 과거의 상처를 여전히 끌어안고 그럭저럭 무난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죠. 당돌했던 과거와 달리 상처받지 않기 위해 방어적으로 굴며 다소 이기적인 선택도 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그에게 7년 전 짝사랑의 상대 이람호가 다시 나타납니다. 당황스러운 말과 함께요.
이제 와 어쩌겠다고. 기가 막힌 태경의 속마음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로, 람호의 등장은 뜬금없고, 늦어도 한참 늦었어요.
하지만 7년, 정확히 말하면 10년 가까운 긴 시간이 지나도록 첫사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답답이가 바로 태경이었기 때문에. 늦어도 한참 늦은 재회가 둘 사이에선 남다른 의미가 되어버립니다.
오랜만의 재회에도 단번에 상대를 알아보고 당황해 말 한마디 제대로 못 꺼내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버릴 정도로. 태경은 그를 잊지 못했어요.
하지만 뜬금없이 나타나 마음을 표현하는 그에게 선뜻 고개를 끄덕일 용기는 없었습니다. 하나둘 쌓인 과거의 상처가 그를 망설이게 했고, 람호에 대한 마음의 무게가 덩달아 태경을 무겁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람호는 과거에도 그랬듯 강한 인내와 끈기로, 그리고 태경이 도리어 불안해질 만큼 천천히, 한 발자국 발자국 신중하게 다가섭니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난 두 사람이 마음의 장애물을 넘고 넘어 결국 연애를 시작하기까지. 레인보우 피쉬는 그 간질간질하고 안달 나는 과정을 담은 글이에요. 사실 부연설명 없이 간질간질만을 붙이기엔 태평함이 부족한 글입니다. 어둑어둑한 레인보우 피쉬의 조명처럼 레인보우 피쉬 글 자체도 불 한두 개 꺼진 것과 같은 침침함이 있어요.
태경의 불안과 망설임, 람호의 솔직한 마음.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춥고 따뜻한 일상. 군데군데 녹아든 설렘까지. 자연스럽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진중한 람호와 겁이 많아진 태경의 느린 과정을 담은 만큼 넘치도록 긴 글이었지만, 막상 끝이 다가오니 언제나 그랬듯 많이 아쉬워졌어요.
착실하게 연애를 시작하고 평범한 데이트도 하고 처음 겪는 연인만의 이벤트도 겪고, 제법 많은 에피소드를 담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드네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에도 호기심이 솟을 만큼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적당한 비중을 한껏 활용한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이 많았어요. 오랜 짝사랑을 마침내 깔끔하게 털어내고 썸남을 만난 김세나씨. 스무 살 트루러브를 찾아 착실하게 흑역사 적립을 하고 계신 허세 기영이. 연애는 100일이 넘지 않는다는 유쾌한 아프리카청춘씨.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있지만, 고작 대일밴드 하나에 벽을 허물어버리는 어린 정우. 정말 좋은 어른, 아버지 편의점 사장님과 착하고 순한 경철이.
어째 적다 보니 끝이 없을 것 같네요. 알고 보니 최악은 아니었던, 나름의 사정과 책임감을 가진 람호의 아버지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안 해본 일이 없었다는 람호의 삶, 비어있던 가족의 자리가 채워진 건 조심스럽지만.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요. 제가 쉽게 가볍게 말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지난날 어린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가족이라는 존재가 지금은 의미를 달리했으면.
첫 시작이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장을 덮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네요. 살아 숨 쉬는 색색의 피쉬처럼 다채로운 인물들이 머릿속을 신나게 유영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떨쳐낸 태경이처럼 저도 얼른 감상에서 빠져나와야겠죠. 언젠가 소소하게나마 후일담으로 만나게 될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