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설정 탓인지 시작 장면부터 머릿속에 일본 만화가 그려지는 기분이었어요. 색다른 감상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외국인 설정은 제법 봤지만, 일본인이 주인공인 글은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더라고요. 일본 이름을 언제나 만화를 통해서만 만나 봤으니, 자동으로 그림체가 떠오른 게 이상할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용 자체도 만화에 걸맞은 유쾌하고 가벼운 이야기다 보니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어요. 사실 제목의 야쿠자 소재부터 큰 노력 없이 상상이 가능하게 만들죠. 아이가 등장하는 작품을 꺼리는 편임에도 이 글을 무리 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건, 이야기가 그림처럼 생생하게 펼쳐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가 등장하는 글은 괜히 어색해서 꺼리지만, 만화는 귀엽다며 잘 보거든요. 귀여운 켄타의 얼굴이 긴 묘사 없이도 쉽게 그려져서 즐거웠어요.
어쨌든, 작품은 시작부터 가볍고 통통 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자신을 마마라고 부르는 어린아이, 야쿠자의 등장, 애인의 배신으로 한순간 빚더미에 앉은 주인공, 말도 안 되는 계약. 주렁주렁 나오는 것들마다 다소 뻔한. 하지만 언제봐도 즐거운 설정들이었어요. 빚을 감해주겠다며 계약을 제시한 주인공에게 반강제로 휩쓸려 아이의 마마로 지내게 되는 민준. 잔뜩 겁을 먹고도 할 말은 해버리는 성격답게 급작스러운 상황에도 금방 적응을 합니다.
어쩌면 주인공 다이키가 험악한 배경과 비교해 느슨한 분위기를 풍겨서 적응이 빨랐는지도 모르겠어요. 첫 만남에서부터 다짜고짜 검사를 한다며 진도를 확 빼버리는데, 그 와중에도 솔직한 민준은 겁먹은 체할 정신도 놓쳐버리고 홀딱 빠지거든요. 부하들을 내보내는 나름의 예의도 갖춰주고(한두 단계 늦긴 했지만요) 취향이 아님에도 끝까지 책임져주고 정신 빼놓고 아무 말이나 뱉는 민준에게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토록 친절한 고용주라니, 적응이 빠를 수밖에요. 계약도 나름대로 파격적인 조건에 고용 환경이 나쁘지도 않아요. 소리를 지르며 제한을 많이 둔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가 안 되면 다른 하나는 허락해주는 나름대로 마음씨 좋은 고용주입니다.
아이가 등장하는 글의 가장 큰 장점이 아이가 두 주인공의 관계 진전에 큰 역할을 해준다는 점인데요. 이 작품 역시 그랬습니다. 토마를 계기로 두 사람의 사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좁혀집니다. 무슨 일이든 마마와 파파를 부르는 토마 덕분에 두 사람은 싫어도 마주 앉고 사소한 일상 틈틈이 영상 통화를 하거나 심지어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해요. 자연스러운 그 과정을 통해 둘은 어느새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갑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지내던 민준과 자신답지 않은 동요가 당황스러운 다이키. 뒤숭숭한 속마음과 달리 겉보기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관계를 유지하던 두 사람에게 변화가 찾아온 건 다이키가 여자를 데려오면서부터. 토마와 자신이 있는 집에 여자를 데려와 잠자리를 갖는 다이키에게 민준은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외면해오던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게 되죠.
마음을 깨달았지만, 배신감이 훨씬 더 컸기에 이런 마음 따위 접어버리겠다 되레 큰소리치죠. 하지만. 실연을 겪은 사람이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 민준은 알코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맙니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실연 후 술독에 빠져 보는 사람 얼굴마저 붉어지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흑역사를 적립하게 돼요.
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엉망진창인 꼴을 보인 상대는 한창 민준에게 온 신경이 흔들흔들하는 중인 다이키. 깔깔깔 절로 웃음이 쏟아질 꼴을 보고도 비웃기는커녕 넌 내가 좋은 거냐 본격적인 연애물을 찍기 시작합니다.
이 답답한 사람들 드디어 감정 진도를 나가려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풀리지 않아요. 야쿠자 설정이라면 안 나오면 섭섭한 민준의 여장. 이츠키는 물론 그 다이키마저 순간 멈칫할 만큼 그럴싸한 기모노 차림을 하고, 유리아라는 가명으로 토마의 마마로서 인사를 가게 됩니다.
시험하듯 던져진 질문에 진심 반 상황 모면 반, 어쩌면 진심만 가득 담긴 답변을 내놓고 한숨 돌렸다 싶은 찰나, 둘 사이의 급진전을 위한 이물질이 등장해주시고, 둘의 사이는 다소 과격하지만 확실하게, 급속도로 진행됩니다.
일단 한 번 이 길이구나 결심하고부터는 망설일 게 없죠. 다이키는 물론 민준도 자신의 마음과 몸에 솔직합니다.
하지만 알콩달콩 연애에만 빠져 지내기엔 다이키의 직업이 심상찮다 보니, 끊임없이 불안과 위기가 이어집니다. 작품 전반적인 분위기가 명랑 쾌활해서 큰 걱정 없이 넘길 수 있는 굴곡이었지만,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에요. 귀여운 토마와 와중에도 태평하게 마이웨이하는 민준 덕분에 저도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네요. 처음에는 딱딱하고 성질 밖에 낼 줄 모르는 것 같았던 다이키도 점차 느슨해져서 민준과 주고받는 대화만 봐도 웃음이 나올 정도였어요.
글 전체적인 분위기가 가볍고 유쾌하다 보니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덕분에 부담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