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하미학 - 중국의 전통 미학 ㅣ 인문과 지혜 3
리쩌허우 지음, 조송식 옮김 / 아카넷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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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역정』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면, 『화하미학』은 미학 사상의

논리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의 논리화는 역사적인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중국 미학의 역사와 더불어 자신의 논리를 구축하고 있다.

화하(華夏)미학은 유가 사상을 주체로 하는 중국의 전통 미학을 가리킨다.

유가는 오랫동안 깊고 넓은 사회적·역사적 기반을 다져 왔으며, 끊임없

이 다양한 학파의 주장을 흡수하고 동화하여 자신을 풍부하게 발전시킴

으로써 중국 문화의 주류와 기본을 이루었다(리. 쩌허우 2016, 4)

이것이 중국 전통 미학 사상을 바라보는 리쩌허우의 기본 입장이다.

유가 미학은 비(非)디오니소스적 ‘예악’ 전통을 역사적 근원으로 삼고,

‘호연지기’와 ‘천인합일’을 기본 특징으로 삼고 있다.

화하미학의 핵심인 유가 미학의 장점은 체계적 피드백 구조로 다양

한 사조와 문화, 체계를 흡수하고 동화함으로써 자신을 개혁하고 발전

시킨 점이다. 그것은 위로 ‘예악’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도가의 소요

유(逍遙遊) 정신을 수용·보완하고, 굴원(屈原)과 위진 현학(玄學)의 깊은

감정과 성찰을 받아들이며, 선종(禪宗)의 형이상학적 추구를 통해 영원

함과 묘오(妙悟), 운미(韻味)와 충담(沖淡)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나

아가 명대 중엽 이후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성령(性靈)을 각성하고 서

양 미학을 받아들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

펴보자.

『화하미학』(1994a)의 목차를 보면, ‘제1장 예악 전통’부터 ‘제6장 근

대를 향하여’까지 종적 구조를 가지면서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단순

한 시간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전구조로 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전구조란 ‘제1장 예악 전통’이 ‘제2장 공문(孔

門) 인학’에 적전되고, 다시 제1장과 제2장의 주요 내용이 ‘제3장 유가

와 도가의 상호 보완’에 적전되는 구조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공문’은

‘유가’와 차이가 있다. ‘공문’이 공자에서 시원하고 맹자와 순자가 발전

시킨 ‘원시 유가’를 가리킨다면, ‘유가’는 한대 이후 선진 제자백가 사

상과 한대 유행한 음양오행 사상이 적전된 사상 체계를 가리키는 것이

다. 이처럼 중국 미학은 선진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지속적으로 적전되

었다는 것이 리쩌허우의 판단이다.

‘예’(禮)와 ‘악’(樂)은 “원시 시대의 토템 가무와 무술 의례가 더한층

정비되고 분화”(리쩌허우 2016, 29)된 것으로, 주공(周公)이 그 중심적인

제정자이고 공자는 확고한 옹호자이며, “유가는 바로 이 역사적 전통

의 계승자이며 유지자이며 해설자다”(리쩌허우, 31). 이렇게 볼 때 공자

는 원시 시대의 토템 가무와 무술 의례를 제도화한 예악 전통을 유가

에 접목한 인물이다. 공자는 예악 전통에 인학(仁學)이라는 자각 의식

을 부여하고, 현실 인생에 집착한 실용이성을 주장함으로써, 동시대의

정치적 교화와 윤리, 인간관계의 조정, 사회질서의 구축에 직접 공헌하

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뒤를 이은 맹자와 순자의 두 흐름은 약간의

차별점이 있었다. “맹자가 선험적 도덕으로써 인간의 감성을 주재하고

통괄하여 ‘인성(사회적 이성)이 선하다’라고 주장했다면, 순자는 현실적

질서와 규범으로 인간의 감성을 개조하여 ‘인성(생물적인 자연 감성)이

악하다’라고 주장했다.”(李澤厚 1994a, 271) 그러나 맹자와 순자의 주장

이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어떻게 개인의 감성이 사회적 이성에 적

전할 것인가 하는 공문(孔門) 인학의 공통 명제로 귀결된다”(李澤厚, 272)

라는 점에서 상통하고 있다.

‘유학 4기설’의 유학과 마찬가지로, “유가 미학은 중국 미학의 기

초이자 주류로, 심후한 전통 연원과 심층적인 철학 관념을 가지고 있

고, 그 체계론의 피드백 구조는 또한 각종 사조와 문화 그리고 체계를

흡수하고 동화하여, 자신을 혁신하고 발전시키는 데 뛰어났다”(앞의

책, 281). 『화하미학』 제3장에서 리쩌허우는 유가 미학과 도가・초사(楚

辭)・선종이 어떻게 충돌하는 가운데 융합되었는지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 리쩌허우는 우선 유가와 도가가 “비(非)디오니소스적인 원시적

전통에 근원한다”(리쩌허우 2016, 149)라는 사실을 지적한 후 양자의 관

계가 ‘대립적 보완’임을 밝힌다. “도가와 장자는 ‘인간의 자연화’라는

명제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예악’ 전통과 유가의 인학이 강조하는 ‘자

연의 인간화’와 바로 대립하면서도 보완한다”(리쩌허우, 151)라는 것이

다. 총체적으로 보면, 장자는 유가에 흡수되어 심미적 측면에서 사용되

었다. 장자는 유가의 미학이 인생과 자연과 예술에 대해 진정한 심미

적 태도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

리쩌허우는 유가와 도가의 상호 융화와 보완에는 정치적인 길과 예

술적인 길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고 설파한다. 먼저 정치적인 길은, “곽

상(郭象) 등을 대표로 삼을 수 있고, 유가 학설로 장자를 주석하고 명교

(名敎)가 바로 자연이라 인식하면서, 장자의 학설에서 소외를 반대하

는 해방 정신과 인격 이상을 제거했다”(李澤厚 1994a, 308). 다음 예술적

인 길은, “도연명(陶淵明)의 시와 산수화・화조화(花鳥畵)다. 그것은 확실

히 ‘안빈낙도’의 세속을 따르는 일면이 있지만, 주로 세속 인간관계에

대한 항의와 초월 그리고 해탈이다”(李澤厚, 308). 도가의 부정적 논단과

세속을 초월한 형상은 현실 생활과 문예・미학에서 유가의 긍정적 명

제와 독립적 인격으로 전환한다. 자연은 생활, 사상과 감정, 인격이라

는 세 방면에서 인간의 최고 이상이 되었으며, 그것들은 ‘인간의 자연

화’가 전면적으로 전개된 것으로서, 유가와 도가의 상호 보완이 구체

적으로 실현된 것이다.(앞의 책, 309)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미학 사상에서 굴원의 역할에 대한 평가다.

대표작 「이소」(離騷)를 읽어 보면 굴원이 유가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음

을 알 수 있는데, 리쩌허우는 국가 관념이 희박했던 전국시대 당시 초

나라에 연연하고 수도가 함락되자 바위를 안고 멱라수(汨羅水)에 투신

한 굴원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굴원은 죽음을 선택한 고양된 인간성과 감정적 태도, 즉 추악한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인생의 이상에 대한 동경으로써, 후대 사람을 감염(感

染)시키고 개발하고 교육했다. 굴원은 죽음을 통해, 삶과 죽음・인생과 생

활에 대한 예악 전통과 유가 인학의 철리적 태도를 전에 없던 깊이 있는

감정의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앞의 책, 328)

훗날 유가 전통의 지배 아래 굴원의 자살을 본받은 지식인은 많지

않았지만, 죽음에 대한 깊은 체득과 감정적 반성으로 실제적 죽음 행

위를 대체했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벚꽃처럼 순간적으로 왕성하게 피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화・국화・소나무・대나무처럼 오랫동안 참

아 내는 것을 이상적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리쩌허우 2016, 248). 이 지

점에서 리쩌허우는 죽고 사는 현상 분석에 그치지 않고, 굴원처럼 죽

음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죽음 앞에서 나온 심후한 ‘현존재’의 감정

그 자체를 높게 평가한다. “굴원과 같은 감정과 절조가 오히려 대대로

중국 지식인의 영혼을 배양했으며, 아울러 항상 생활과 창작의 원동력

이 되었다.”(리쩌허우, 248) 그러므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치욕을

견디면서 『사기』 저술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졌던 사마천의 인생

이나 죽림칠현의 일원이었던 혜강(嵇康)과 완적(阮籍)의 비분과 애상도

“죽음이 임박하여 비로소 최대로 표출될 수 있었던 ‘존재’의 의의를 가

장 잘 드러냈다. 그것들은 죽음에 대한 감정적 사유를 통해 발휘되는

‘존재’의 빛이다”(앞의 책, 249). 이처럼 굴원 정신의 전통은 후대 사대

부 지식인들에게 계승되어 유학 전통의 ‘정감-이성 구조’ 내면에 깊은

생사의 의미를 부여했다. 이렇게 “굴원과 유가・도가는 서로 스며들어

융화하여, 감정을 핵심으로 하는 위진 시대 문예-미학의 기본적 특징

을 형성했다”(앞의 책, 262). 나아가 이 세 갈래 물줄기는 위진 시대에 하

나로 합류(合流)해서 “화하 문예와 미학의 근본적인 심리 특징이자 ‘정

감-이성 기제’를 만들어 냈다”(李澤厚 1994a, 338). 이후 중국 문학사의

대부분 작가는 유가・도가・굴원의 세 요소가 융화하여 이룬 심층적인

정감과 이성의 만남이라는 ‘문화심리구조’를 기반으로 삼아 작품을 창

작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위진 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불교가 유가와 만나는 과정 또한 화하미

학 사상 형성에서 중요하다. “유학을 위주로 하는 중국의 문화 전통이

어떻게 불교에 대응하고 교류했는가의 문제는 수백 년간 이데올로기

의 주요과제가 되었고 다양하고 찬란한 양상을 야기했다. 예술에서 문

학에 이르기까지, 신앙에서 사상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배척하기도 하

고, 흡수하기도 하고, 귀의처로 삼기도 하고, 변조하기도 하고, 장자를

끌어들여 설명하기도 하고, 유교와 서로 겨루기도 했다.”(李澤厚 1994a,

359) 불교 또한 인생 경계(境界)의 추구라는 점에서 유가와 소통했고 유

가는 불교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수용해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다. 선

종(禪宗)이 전자의 예라면, 성리학은 후자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유학

전통은 장자・굴원・현학이라는 단서를 흡수하면서도 새로운 걸음을

내디딘 상황을 계승했다 할 수 있다. 특히 미학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

러하다.”(李澤厚, 359)

리쩌허우는 중국의 전통 의학인 사상(四象)으로 미학 사상을 분류한

바 있다.

유가는 강건함을 미로 여기고 그 속에 부드러움이 있으므로 ‘태양’(太陽)

에 속하고, 도가는 부드러움을 본체로 여기고 그 속에 강함이 있으므로

‘태음’(太陰)에 속하며, 굴원은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으므로 ‘소양’(少

陽)에 속하고, 선(禪)은 겉은 강하지만 속이 부드러우므로 ‘소음’(少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음’은 유가의 웅건하고 강건한 미학 전통과 확

실히 거리가 있다. 선은 본래 인도 불교가 중국 네이션의 문화심리구조에

의해 개조되고 창작된 것이다. (앞의 책, 377)

단, 중국인은 출가해서 중이 되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의식과 문화 영역에도 불교가 그리 많이 반영되지는 않았고, 선은 궁

극적으로 유가와 도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렇게 볼 때, 리쩌허우는

중국의 불교, 즉 선종이 미학 차원에서는 심리로 전환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를 대표하는 시인이 바로 소식(蘇軾)이다. 리쩌허우는 『미의 역

정』에서 소식을 이전 작가들과 대비해 아래와 같이 품평한 바 있다.

여기(소식의 문장 — 인용자)에는 굴원과 완적의 근심과 울분이 없고, 이백

과 두보의 호방함과 성실함도 없으며, 백거이의 명랑함과 다르고 유종원

의 고고함과도 다르며, 한유의 안하무인의 오만한 기세와는 더더욱 다르

다. 소식이 미학에서 추구한 것은, 질박하고 꾸미지 않으며 평담(平淡)하

고 자연스러운 정취와 운미(韻味)였고, 사회를 멀리하고 세상을 꺼리는

인생 이상이자 생활 태도였다. 그는 가식과 조작, 장식과 조탁(彫琢)에 반

대했으며, 이상의 모든 것을 철저한 깨달음의 철리적 수준으로 끌어올렸

다.(앞의 책, 157)

여기에서 리쩌허우는 소식의 작품을 ‘송명 이학이 선종을 흡수한 해

석학적 산물’(앞의 책, 385)로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송명 “이학

자가 순수철학 영역에서 선종과 불학을 경유하여 다시 유학으로 돌아

왔을 때 자신을 최대한 풍부하게 하고 심미로 종교를 대신하는 형이상

학적 본체 경계를 구축”(李澤厚 1994a, 386)한 것과 대체로 비슷하다. 여

기에 리쩌허우는 산수화의 예를 추가한다. 그에 따르면, “송명 이학의

고조기가 대체로 중국에서 산수화가 가장 성했던 시기라는 것이다”(李

澤厚, 386). 철학적 사변과 예술적 취미의 이러한 동보성(同步性)은 경제

발전과 예술발전의 불균등성과 연관해서 고찰해 볼 만한 토픽임이 틀

림없다.

리쩌허우는 『화하미학』의 마지막 장인 ‘제6장 근대를 향하여’의 서

두에서 번영과 쇠락의 순환을 언급한 후, 전통 유학과 문예・미학의 상

황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새로운 뜻을 지니는 사상 경향과 예술 창작은 오히려 언제나 유학의 정통

을 등지거나 심지어 이를 위반하는 방향을 지향했다. 그러나 ‘다투어 벗

어나려는’ 어떤 의향이나 전망을 표현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지

향’일 뿐, 그 자체로 유학의 울타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성숙

하지도 철저하지도 못했다. 특히 이론면에서는 더욱 그러했다.(앞의 책,

388)

명 중엽, 유학의 정통에서 ‘다투어 벗어나려는’ 의향 또는 전망은 바

로 갑작스레 출현한 ‘인간의 욕망’[人欲]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인간

의 욕망은 우선 남녀 간의 성욕으로, 오랜 기간 예술의 주제였다. 그러

나 중국의 예악 전통과 유교적 교양의 영향 아래 “성애(性愛) 자체는 문

예와 심미에서 독자적 지위를 제대로 얻지 못했으며, 특히 개체의 감

성 존재와 서로 깊이 연관된 독립적 지위도 얻지 못했다”(앞의 책, 389).

명 중엽 이래 전에 없던 상공업의 번영과 도시의 소비 발달에 힘입어

사회 풍상(風尙)이 바뀌었고, 성애(性愛)소설이 유행했으며 전통 예속(禮

俗)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삼언’(三言)7과 ‘이박’(二

拍)8이다.

사회 조류의 커다란 변화와 관련해 리쩌허우는 철학, 심미적 취미와

기교 형식의 세 가지를 제기했다. 첫째, 철학에서 말할 때 이러한 새로

운 경향은 왕양명(王陽明) 심학(心學)의 해체 과정에 반영되었다. 이것은

감성적인 것이 인정되고 긍정되며 강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리쩌허

우 2016, 374) 둘째, 동일한 시기에, 서위(徐渭), 탕현조(湯顯祖), 원굉도(袁

宏道)와 같이 이지(李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인물이 시문과 회화

분야에서 개성과 자아를 핵심 또는 특징으로 하는 창작론과 예술론을

각각 발표했다.(리쩌허우, 379) 셋째, 그 시대에 몇몇 작가와 예술가들이

형식이나 기교를 규범화하고 고찰했던 것은 오히려 매우 자각적이라

할 수 있다. 문예-심미의 자체적 규율이나 법칙에 대한 일찍이 없었던

중시와 진지한 추구는 근대로 나아가는 표현이었다.(앞의 책, 395; 李澤厚

1994a, 400)

리쩌허우는 제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양의 이론 프레임으로 중

국 문학 이론을 형이상학론, 결정론, 표현론, 기교론, 심리론, 실용론으

로 분류한 류뤄위(劉若愚)9와, 서예 이론을 사실파, 순조형파, 감정지상

파, 윤리파, 자연파, 선의파로 나눈 슝빙밍(熊秉明)10을 비판하면서, 자신

의 초보적 구상을 아래의 표로 제시하고 있다.

도표 3• 중국 전통 미학 사상의 범주와 연변(演變)

리쩌허우는 위의 표가 인상식의 현상 묘사이자 직관적 태도일 뿐,

근대적 언어분석의 과학성이 결여되어 모범으로 삼기 부족하고 다만

출발점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겸양하지만, 우리는 이 표

를 통해 전통 미학 사상의 몇 가지 범주의 역사 흐름과 상호 구분을 이

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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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역정 ㅣ 현대의 고전 6
리쩌허우 지음, 이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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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역정』은 중국 미학사인 동시에 중국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

할 만하다. 3000년이 넘는 중국 미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흐름을 유가

전통으로 설정하고, 그것의 시대별·장르별 흐름의 특색을 잡아내고

있다. 벤야민은 1930년대 파리를 관찰하기 위해 ‘산책자’(the Flâneur)

의 시점을 선택했지만, 3000년이 넘는 중국이라는 시공간을 관찰하기

에 산책자의 어슬렁거림은 안이해 보인다. 리쩌허우는 부득불 거시적

조망의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부분적으로 산책자의 여유를 보이

기도 하지만, 주요하게는 조감자(aeroviewer)의 시선을 취하고 있다. 조

감자의 시선은 우선 예술사회학의 관점에서 3000년이 넘는 대하(大河)

물줄기의 본체에 초점을 맞춘다. 리쩌허우는 선진(先秦) 시대에 형성된

‘이성주의 정신’을 중국 미학사의 특징으로 꼽는다. 이어서 시대별 특

색에 눈길을 주는데, 이는 왕조 변천사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하

지만 리쩌허우는 단순하게 왕조의 변천을 따라 시기를 구분하지는 않

는다. 진(秦)의 제도를 계승했다는 한(漢)을 초(楚)와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고, 똑같은 당(唐)임에도 불구하고 성당(盛唐)과 중당(中唐)을 미학적

으로 다른 시기로 분류하며, 나아가 한족의 송(宋)과 몽골족의 원(元)을,

그리고 한족의 명(明)과 만주족의 청(淸)을 하나로 묶는 등의 시기 구분

은 리쩌허우의 독창적 안목을 드러내고 있다.

리쩌허우는 중국 미학사를 10시기 — 상고(上古), 청동, 선진, 초한,

위진, 불교 예술, 성당, 중당, 송원, 명청 — 로 나누고, 그 가운데 비교

적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네 시기를 꼽는다. 첫째는 백가쟁명(百家爭

鳴)·백화제방(百花齊放)의 선진 시대다. 둘째는 위진(魏晉) 시대로, 철리

적(哲理的) 사변의 색채를 많이 띠었고 이론 창조와 사상 해방이 두드러

졌다. 셋째는 중당에서 북송까지로, 문화와 사상의 모든 영역에서 다양

하고도 전면적인 개척과 성숙이 이루어지면서 사대부(士大夫)라는 세

속 지주가 후기 봉건사회의 기초를 공고히 다졌다. 넷째는 명대 중엽

으로, 시민 문학과 낭만주의 사조가 자본주의라는 근대 의식의 출현을

상징한다.(리쩌허우 2014, 343)

이렇게 10시기로 나눈 리쩌허우는 다시 시대를 주도한 장르에 주목

한다. 이는 각각 그 시대 예술 정신의 응결 지점이었다.(리쩌허우, 307)

이를테면 한대의 공예와 부(賦), 육조(六朝)의 조소(彫塑)와 변문(騈文),

당대(唐代)의 시가와 서예, 송원의 회화와 사곡(詞曲), 명청의 희곡과 소

설 등이 바로 그것이다. 리쩌허우는 한발 더 나아가 그 시대의 예술 정

신을 응집시켜 각 장의 표제로 삼고 있다. 상고 시대의 토템과 원시 가

무, 청동 시대의 도철(饕餮)과 종정문(鐘鼎文), 선진 시대의 시가와 건축,

초한의 이소(離騷), 위진의 풍도(風度), 불교 예술, 성당의 시가·산문·서

예, 중당의 운외지치(韻外之致), 송원 산수의 의경(意境), 명청의 시민 문

예 등등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거시적으로 조감할 때 예술사회

학의 방법을 동원했다면, 시대를 주도한 장르를 분석할 때 리쩌허우는

심미심리학의 방법을 가지고 온다. 전자가 예술과 경제・정치 발전의

불균형, 그리고 예술 각 부류 간의 불균형 등에 초점을 맞추어 문예의

존재 및 발전에 내재적인 논리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고전 작

품 속에 응결된 중국인의 심미적 취향과 예술 스타일이 왜 오늘날 중

국인의 느낌과 애호에 여전히 부합하고 친밀감을 주는가에 초점을 맞

춤으로써 예술작품의 영원성의 비밀을 풀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미의 역정』의 백미는 성당(盛唐)에 대한 분석이다. 리쩌허우는 이 시

기를 ‘낡은 것을 타파’[破舊]하고 ‘새로운 것을 수립’[立新]한 전환점으

로 파악했다. 이백(李白)과 장욱(張旭) 등에 초점을 맞추면, ‘성당’은 옛

사회 규범과 미학 기준에 대한 파괴와 돌파가 일어난 시기로서, 그 예

술적 특징은 내용이 형식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넘쳐나 형식의 어떠한

속박과 제한도 받지 않는다. 그것은 미처 형식이 확정되지 않은 모방

할 수 없는 천재성의 발로다. 한편 두보(杜甫)와 안진경(顏眞卿) 등에 초

점을 맞추면, ‘성당’은 새로운 예술 규범과 미학 기준을 확정·수립한

시기로, 그 특징은 형식을 중시하며 형식과 내용의 엄격한 결합과 통

일을 요구함으로써 학습하고 모방할 수 있는 격식과 본보기를 세운 것

이다. 전자가 낡은 형식을 돌파했다면 후자는 새로운 형식을 수립한

것이다.(李澤厚 1994a, 135) 그러기에 리쩌허우에게 성당은 이백과 장욱

의 성당과 두보와 안진경의 성당 두 종류다. 그것은 두 종류의 서로 다

른 ‘의미 있는 형식’으로, 서로 다른 사회적·시대적 내용이 각각에 간

직되어 있고 적전되어 있다. 이로써 각자의 풍격상의 특징, 심미적 가

치,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리쩌허우 2014,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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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충돌 -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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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미국 기업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미중 관계를, 1990-2010년의 미중 공생 단계, 2010년 이후 미중 경쟁 단계로 구분한 관점이 참신하다. 훙호펑 교수의 분석 앞에 민주주의 체제와 권위주의 체제 사이 극복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차이가 불가피하게 대립을 만든다는 인식은 진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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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문화정체성과 문화정치 ㅣ 문화과학 이론신서 74
임춘성 지음 / 문화과학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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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도서 선정!
http://member.kpa21.or.kr/kpa_bbs/출판문화산업진흥원-2018년-세종도서-학술부문-선정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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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
허 자오톈 외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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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출생한 지식인을 대표하는 중국의 비판적 사상가인 허자오톈의 논문 모음집. 1980년대 이후 중국 인문사회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준 리쩌허우의 주요 명제인 '계몽과 구망/구국의 이중변주'에 대한 비판적 고찰인 [제2장 계몽과 혁명의 이중변주]가 눈에 띤다. 

다만 리쩌허우를 1980년대 유행한 '신계몽주의'로 분류한 점과 중국 근현대 사상사를 54신문화운동부터 보고 있는 점은 문제적이다. 

리쩌허우는 『중국근대사상사론』 「후기」에서 사조(思潮)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근대 중국의 역사발전을 추동한 세 가지 선진 사조와 그 주요한 대표인물을 중점적으로 논술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수용되기 이전, 중국에 세 가지 선진적 사회사조가 출현했다고 진단했다. “이 세 가지 시대사조는 태평천국 농민혁명 사상과 개량파 자유주의의 변법유신 사상, 그리고 혁명파 민주주의의 ‘삼민주의’ 사상이다. 이 세 가지 사조는 중국 근대 구민주주의 사상발전의 주류였다. 그것들은 근대중국에서 연속적으로 출현하고 상호교체된, 깊은 의의를 가진 역사현상이었다.”(751) 이 세 가지 진보적 사회사조는 각각 유토피아 사회주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태평천국의 1,000년 왕국, 자유주의 개량파 캉유웨이의 대동공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순을 보고 모순의 회피를 요구한 쑨중산과 혁명파의 ‘민생주의’가 있었다.”(577)

리쩌허우는 이들 세 가지 선진사조의 이중성과 사조 간 계승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먼저 1850년대 태평천국의 혁명사상은 “중국에서 최초로 출현한 근대적 선진사조”인 동시에 “중국 고대 농민혁명 사상의 총결(總結)이었다.”(751) 그것은 “군사․정치․경제적으로 농민계급을 대표하여 지주통치의 이익에 반대”하는 “농민의 혁명정권”을 수립했지만 “동시에 전형적인 봉건성격을 띠고 있었다.”(71) 그리고 1870-90년대의 자유주의 개량파의 변법유신 사상은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고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요구하며,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군주전제 제도를 개변시켜 서양의 부르주아 입헌군주제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근대에서 가장 먼저 명확하게 제출”(752)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주토지소유제와 보다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었고 “봉건 통치체계, 관료제도와 불가분의 혈연적 의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176) 그리고 이들 선진 사조의 성과가 신민주주의 혁명에 수렴되었다고 평가한다. 허자오톈이 설정한 사상사의 범위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신민주주의 혁명을 고찰하고 있다.

허자오톈이 54 계몽주의 운동과 구별한 공산주의 운동의 실체가 1949년 이후 어떻게 변질되었는지에 대해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허자오톈의 합리적인 문제제기: 왜 리쩌허우가 긍정하는 계몽관과 멀지 않은 지식인들이 중국현대사에서 그만큼 큰 정치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반대로 그 계몽관에서 점차 멀어진 공산혁명 지식인들이 중국 현대사의 기본 면모를 바꿔내는 정치적 힘을 발휘했던 것일까?(허자오톈, 173) 등. 

그리하여 중국공산당은 도대체 어떤 의식, 방법, 실천을 통해 효과적으로 중국사회를 동원하는 데 성공했는가, 그리고 그들을 중국 공산혁명의 유기적 부분으로 조직하는 데 성공했는가라는 질문처럼 중국 공산혁명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기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문제들조차 진지하게 제기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질문으로 던져지지 않은 결과 리쩌허우는 그가 지지하는 형태의 계몽, 즉 근대적 관념과 근대적 이해, 근대적 지식을 지닌 계몽자의 우월한 지위를 절대화하고 계몽의 대상인 사회의 불합리를 절대화하고자 하는 계몽 자체가 반드시 회의되고 반성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허자오톈,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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