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
허 자오톈 외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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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출생한 지식인을 대표하는 중국의 비판적 사상가인 허자오톈의 논문 모음집. 1980년대 이후 중국 인문사회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준 리쩌허우의 주요 명제인 '계몽과 구망/구국의 이중변주'에 대한 비판적 고찰인 [제2장 계몽과 혁명의 이중변주]가 눈에 띤다. 

다만 리쩌허우를 1980년대 유행한 '신계몽주의'로 분류한 점과 중국 근현대 사상사를 54신문화운동부터 보고 있는 점은 문제적이다. 

리쩌허우는 『중국근대사상사론』 「후기」에서 사조(思潮)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근대 중국의 역사발전을 추동한 세 가지 선진 사조와 그 주요한 대표인물을 중점적으로 논술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수용되기 이전, 중국에 세 가지 선진적 사회사조가 출현했다고 진단했다. “이 세 가지 시대사조는 태평천국 농민혁명 사상과 개량파 자유주의의 변법유신 사상, 그리고 혁명파 민주주의의 ‘삼민주의’ 사상이다. 이 세 가지 사조는 중국 근대 구민주주의 사상발전의 주류였다. 그것들은 근대중국에서 연속적으로 출현하고 상호교체된, 깊은 의의를 가진 역사현상이었다.”(751) 이 세 가지 진보적 사회사조는 각각 유토피아 사회주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태평천국의 1,000년 왕국, 자유주의 개량파 캉유웨이의 대동공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순을 보고 모순의 회피를 요구한 쑨중산과 혁명파의 ‘민생주의’가 있었다.”(577)

리쩌허우는 이들 세 가지 선진사조의 이중성과 사조 간 계승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먼저 1850년대 태평천국의 혁명사상은 “중국에서 최초로 출현한 근대적 선진사조”인 동시에 “중국 고대 농민혁명 사상의 총결(總結)이었다.”(751) 그것은 “군사․정치․경제적으로 농민계급을 대표하여 지주통치의 이익에 반대”하는 “농민의 혁명정권”을 수립했지만 “동시에 전형적인 봉건성격을 띠고 있었다.”(71) 그리고 1870-90년대의 자유주의 개량파의 변법유신 사상은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고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요구하며,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군주전제 제도를 개변시켜 서양의 부르주아 입헌군주제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근대에서 가장 먼저 명확하게 제출”(752)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주토지소유제와 보다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었고 “봉건 통치체계, 관료제도와 불가분의 혈연적 의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176) 그리고 이들 선진 사조의 성과가 신민주주의 혁명에 수렴되었다고 평가한다. 허자오톈이 설정한 사상사의 범위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신민주주의 혁명을 고찰하고 있다.

허자오톈이 54 계몽주의 운동과 구별한 공산주의 운동의 실체가 1949년 이후 어떻게 변질되었는지에 대해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허자오톈의 합리적인 문제제기: 왜 리쩌허우가 긍정하는 계몽관과 멀지 않은 지식인들이 중국현대사에서 그만큼 큰 정치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반대로 그 계몽관에서 점차 멀어진 공산혁명 지식인들이 중국 현대사의 기본 면모를 바꿔내는 정치적 힘을 발휘했던 것일까?(허자오톈, 173) 등. 

그리하여 중국공산당은 도대체 어떤 의식, 방법, 실천을 통해 효과적으로 중국사회를 동원하는 데 성공했는가, 그리고 그들을 중국 공산혁명의 유기적 부분으로 조직하는 데 성공했는가라는 질문처럼 중국 공산혁명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기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문제들조차 진지하게 제기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질문으로 던져지지 않은 결과 리쩌허우는 그가 지지하는 형태의 계몽, 즉 근대적 관념과 근대적 이해, 근대적 지식을 지닌 계몽자의 우월한 지위를 절대화하고 계몽의 대상인 사회의 불합리를 절대화하고자 하는 계몽 자체가 반드시 회의되고 반성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허자오톈,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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