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비판적 중국연구'의 지난한 여정과 새로운 지평
21세기 한국의 학문 지형에서 중국연구는 이중의 압력 속에 놓여 있다. 한편으로는 급부상한 중국의 경제적, 지정학적 위상에 따른 실용적 지식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중 갈등과 동북공정, 사드 사태 등을 거치며 심화된 반중(反中) 정서와 혐중(嫌中) 담론이 학문적 객관성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 임춘성의 저서 『중국의 비판적 문화연구와 포스트식민 번역연구』(문화과학사, 2024)는 지난 40여 년간 중국문학 연구에 천착해 온 한 중견 학자가 도달한 학문적 성찰의 결정체로서, 한국의 중국연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비판적 중국연구'를 향한 투쟁으로 규정한다. 해방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의 금제 속에서 사회주의 중국은 '죽의 장막' 뒤에 가려진 금기의 대상이었으며, 리영희 선생 등의 선구적 노력 이후 1992년 수교를 거치며 중국연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저자는 현재의 중국연구가 여전히 두 가지 거대한 장벽, 즉 서구 중심주의(Eurocentrism)가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과 중국 내부의 중화민족주의가 빚어낸 '중국중심주의(Sinocentrism)' 사이에 갇혀 있음을 통렬히 지적한다. 레이 초우(Rey Chow)의 문제의식을 빌려, 저자는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가 적대적인 듯하면서도 실상은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공모 관계를 형성하여 중국의 실체를 왜곡하고 있음을 경계한다.
이 책은 이러한 이중의 왜곡을 극복하기 위해 문학연구라는 전통적인 분과 학문의 울타리를 넘어, '비판적 문화연구', '도시문화 연구', '포스트식민 번역연구', 그리고 최근의 쟁점인 '사이노폰(Sinophone) 연구'를 횡단하는 통섭적 방법론을 채택한다. 본 서평 논문은 이 방대한 저작을 세 가지 주요 축—문화연구의 이론과 실제, 도시 텍스트의 에스노그라피, 포스트식민 번역의 정치학—으로 나누어 심층 분석하고, 이 책이 한국의 중국학계에 던지는 학술적 의의와 그 한계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2. 제1부: 중국의 비판적 문화연구와 '문화에 대한 문화연구'
2.1. 방법론적 전환: '문화의 연구'에서 '문화에 대한 문화연구'로
저자는 먼저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본고장인 영국의 맥락을 재검토하며, 리비스주의(Leavisism)로 대표되는 고급문화 중심의 '문화의 연구(study of culture)'와 버밍엄 학파가 주도한 대중문화 중심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사이의 간극을 포착한다. 한국의 중문학계가 종종 문화연구를 단순한 '문화 텍스트 분석'이나 '문화콘텐츠 연구'로 오인하는 경향을 비판하며, 저자는 '문화에 대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of culture)'라는 새로운 통합적 방법론을 제안한다.
이 개념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위계적 이분법을 해체하고, 모든 문화적 실천을 '정치·경제적 과정'과 '문화적 과정'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장(field)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저자는 이를 통해 텍스트의 미학적 분석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사회과학적 환원론에 빠지지 않는 '제3의 길'을 모색한다. 이는 문학연구가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주의의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텍스트의 함닉(陷溺)에서 벗어나 사회적 공공 의제(agenda)에 참여해야 한다는 저자의 지론과 맞닿아 있다.
2.2. 리퉈와 다이진화: 문화의 상품화와 시각적 정치학
이러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저자는 1990년대 이후 중국 지식계의 지형도를 그려낸다. 특히 리퉈(Li Tuo)가 주편한 '대중문화비평총서'에 대한 분석은 중국에서 비판적 문화연구가 태동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리퉈는 대중문화의 흥기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규정하며, 엘리트 지식인들의 경전화된 태도를 비판했다. 저자는 이 총서에 실린 쑹웨이제의 진융(金庸) 무협소설 연구 등을 통해, 대중문화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당대 중국인의 집단 무의식과 이데올로기가 투쟁하는 장소임을 규명한다.
이어지는 다이진화(Dai Jinhua)에 대한 분석은 더욱 심도 깊다. 다이진화의 "탈주하다 그물에 걸림(逃脫中的落網)"이라는 명제는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문화적 곤경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문혁의 전체주의적 '그물'에서 탈출했으나, 곧바로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더 큰 '그물'에 포획된 중국 지식인의 운명에 대한 비유다. 저자는 다이진화의 영화 비평과 젠더 연구를 경유하여, 5세대 감독들의 영화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 부응하여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자기 오리엔탈리즘'의 기제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또한, 사회주의 시기 여성 해방이 계급 해방의 이름 아래 여성성을 소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지적하며, 포스트사회주의 시대에 부활한 가부장제와 자본의 결탁을 비판한다.
2.3. 왕샤오밍과 뤼신위: 신이데올로기 비판과 하층의 재현
상하이 학파의 거두 왕샤오밍(Wang Xiaoming)에 대한 장에서는 문학사 연구에서 문화연구로의 전환 과정이 다루어진다. 저자는 왕샤오밍이 주창한 '신이데올로기'론, 즉 권위주의적 국가 권력과 시장 자본이 결탁하여 대중을 소비주의로 마취시키는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소개한다. 특히 왕샤오밍이 20세기 초 근대 사상(옌푸, 량치차오 등)을 재발굴하여 현재의 자원(resource)으로 삼으려는 시도에 주목하되, 그가 강조하는 '중토성(中土性, local nature)'이 자칫 또 다른 형태의 중국중심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경계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한다.
뤼신위(Lv Xinyu)의 다큐멘터리 연구 분석은 시각 문화 연구의 정치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1990년대 '신다큐멘터리 운동'에서 최근의 '하층(底層) 독립 다큐멘터리'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저자는 카메라가 단순한 기록 장치가 아니라 대상과 신체적으로 공명하며 '행동'하는 윤리적 매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개혁개방의 그늘에 가려진 농민공, 철거민 등 소외된 주체들의 '존엄의 정치'를 복원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2.4. 텍스트 분석의 확장: <낭야방>과 적폐 청산의 알레고리
1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TV 드라마 <낭야방(瑯玡榜)>에 대한 분석은 '문화에 대한 문화연구'가 어떻게 구체적 텍스트 분석으로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백미다. 저자는 이 대중적 히트작을 단순한 무협 사극이나 권모술수 드라마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 '적폐 청산'이라는 한국과 중국의 동시대적 정치적 열망을 투영한 알레고리로 독해한다. 주인공 매장소가 12년 전의 억울한 사건을 바로잡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하고 실천하는 과정은, 정의가 실종된 시대에 대중이 갈망하는 정치적 리더십과 사회 정의의 회복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문학이 독점하던 사회 비판과 담론 생산의 기능이 21세기에는 TV 드라마와 같은 대중매체로 이전되었음을 실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3. 제2부: 텍스트로 읽는 도시문화와 에스노그라피
3.1. 상하이: 노스탤지어와 근대의 이중성
2부는 공간으로 시선을 돌려 상하이, 홍콩, 타이완이라는 세 도시의 문화 정체성을 탐구한다. 여기서 저자가 채택한 방법론은 '문학인류학'과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이다. 소설과 영화를 허구적 텍스트가 아닌, 도시의 생태와 인간 군상을 기록한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로서의 에스노그라피로 간주하는 것이다.
상하이 연구의 핵심 키워드는 '노스탤지어'이다. 저자는 1990년대 이후 중국을 휩쓴 '상하이 노스탤지어(Lao Shanghai Huaijiu)' 열풍을 단순한 복고 취향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으로 단절되었던 자본주의적 근대와의 재접속 욕망, 그리고 억압된 기억의 귀환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노스탤지어는 실재했던 과거라기보다는, 소비주의 욕망에 의해 재구성된 '상상된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저자는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시대별 '상하이 에스노그라피'를 구축한다.
1. 한방칭의 『해상화열전(海上花列傳)』: 19세기 말 조계지 상하이의 기녀와 상인들의 세계를 다룬 이 작품은 근대 초기 상하이의 혼종적 정체성과 물신주의적 욕망을 보여주는 텍스트로 분석된다.
2. 마오둔의 『한밤중(子夜)』: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민족 자본가와 매판 자본가, 노동자 계급의 갈등을 그린 이 소설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총체적 모순을 기록한 '사회 연대기'로 읽힌다.
3. 왕안이의 『푸핑(富萍)』: 1960년대 상하이로 이주한 농촌 여성의 시선을 통해, 화려한 와이탄의 이면에 숨겨진 눙탕(골목)의 일상과 서민들의 생명력을 포착한 에스노그라피로 평가받는다.
영화 텍스트 분석에서는 장이머우의 <상하이 트라이어드>나 리안의 <색, 계>가 보여주는 '상상된 상하이'와 펑샤오롄의 '상하이 3부작'이 보여주는 '리얼한 상하이'를 대비시킨다. 특히 <색, 계>에 대한 분석은 레이 초우의 시각을 빌려, 서구의 시선에 부합하기 위해 스스로를 에로틱하고 원시적인 타자로 전시하는 '자기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짚어낸다.
3.2. 홍콩과 타이완: 사이노폰과 정체성의 정치
홍콩과 타이완을 다루는 장에서는 '중국적임(Chinese-ness)'의 경계가 심문당한다. 홍콩은 영국과 중국이라는 두 제국 사이에서(between colonizers) '이중의 타자'로 존재해 온 공간이다. 저자는 왕가위의 <동사서독>을 기억과 망각의 알레고리로, 프룻 챈의 <메이드 인 홍콩>을 하층민의 절망적 에스노그라피로 독해하며, 1997년 반환 전후 홍콩인들의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을 추적한다. 또한, 최근작 <10년>을 통해 '항인치항(港人治港)'의 약속이 무너진 후 홍콩의 급진화된 로컬리즘과 반중 정서를 분석한다.
타이완 연구에서는 1987년 계엄 해제 이후 폭발한 정체성 논쟁을 다룬다. 본성인과 외성인, 원주민 사이의 에스닉 갈등과 '탈중국화'의 흐름 속에서, 타이완 문학이 어떻게 '중국문학'의 하위 범주가 아닌 독자적인 '사이노폰 문학'으로 재구성되고 있는지를 살핀다. 이는 3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사이노폰 담론의 예고편이기도 하다.
4. 제3부: 포스트식민 번역연구와 사이노폰 논쟁
4.1. 번역, 언어의 등가성을 넘어서
3부는 이 책의 이론적 도약이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저자는 번역을 단순한 언어 간의 의미 등가성 확보 작업이 아닌,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정치적 행위이자 '문화 번역'의 과정으로 재정의한다. 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에 대한 독해를 통해, 번역이 원작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원작의 '사후의 삶(afterlife)'을 부여하고 도착어의 지평을 확장하는 창조적 행위임을 역설한다. 또한 더글러스 로빈슨의 포스트식민 번역 이론을 수용하여, 제국과 식민지, 중심과 주변 사이의 번역이 어떻게 불평등한 권력 위계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규명한다.
4.2. 레이 초우와 시각적 번역
레이 초우의 『원시적 열정』에 대한 심층 분석은 이 책의 백미 중 하나다. 저자는 초우의 논의를 빌려 '시각성(visuality)' 자체가 일종의 문화 번역임을 주장한다. 중국의 5세대 감독들이 서구 영화제에 출품하기 위해 중국의 민속과 의례를 과장되게 재현하는 행위는, 서구의 시선(gaze)에 맞추어 자신의 문화를 '원시적인 것'으로 번역해내는 '자기 에스노그라피(auto-ethnography)'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장이머우의 영화에서 여성의 신체가 전시되는 방식은 이러한 시각적 번역과 자기 오리엔탈리즘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4.3. 사이노폰 논쟁: 스수메이 대 왕더웨이
책의 후반부는 현재 전 세계 중국학계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사이노폰(Sinophone, 華語語系)' 논쟁을 정면으로 다룬다. 저자는 스수메이(Shih Shu-mei)와 왕더웨이(David Der-wei Wang)의 입장을 대조하며 한국 학계의 수용 방향을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