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 9.11 테러 10년과 달라진 이슬람 세계
이희수 지음 / 청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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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저자 이희수는 칼의 종교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로 극도로 미화하고 있다. 독자들이 이슬람을 단순한 종교로 보면 큰 잘못이다. 이슬람은 전세계 지배를 원하는 사상으로 공산주의, 나치주의, 파시즘보다 더 악날한 사상으로 한국을 이슬람화 하는데 있어서 이슬람 포교에 앞장서고 있는 저자 이희수는 이슬람의 타끼야(속임수) 교리를 주저 없이 사용하여 이슬람의 정체를 속이고 있다.

한 예로 이책의 101페이지 상단부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것은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이다. 하지만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꾸란에서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꾸란에서는 분명한 단어로 상반되는 원칙을 주장한다. 즉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꾸란 2:256)은 무함마드가 힘이 없었던 메디나 초기의 계시로 나중에 무함마드가 강성해진 다음 내려진 계시인 꾸란 9:5에 의하여 취소되었다(계시의 내용이 모순될 경우 나중 계시가 먼저 계시를 취소 하는 만수크{취소} 교리에 의하여). 이 사실을 독자들은 꾸란닷컴(www.thequran.com)에서 2:256 구절을 검색해보면 꾸란 9:5(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지들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할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예배를 드리며 이슬람세를 낼 때는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리니 실로 알라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니라)에 의하여 취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 이희수는 이슬람 학자로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한국에서 이슬람 포교를 위하여 기만하고 있다. 꾸란은 평균 12구절 마다 살인과 폭력과 증오를 선동하는 총 6,236절로 되어있다.

꾸란과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에 있는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를 선동하는 살인과 폭력과 증오를 선동하는 구절들을 아래에 나열한다.

 

평화의 종교가 가르치는 것.....폭력

 

질문:

 

꾸란이 정말로 폭력을 조장하는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있는가?

 

요약된 해답

 

꾸란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지배를 위하여 불신자들과 전쟁을 하라고 요구하는 적어도 109개의 구절을 가지고 있다. 일부는 아주 구체적이어서 불신자들이 있는 곳에서 머리와 손가락을 자르고 이교도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 투쟁에 합류하지 않은 무슬림들은 ‘위선자’로 부르며 공격에 가담하지 않으면 알라가 그들을 지옥에 보낼 것이라고 경고한다.

폭력에 관한 구약의 모든 구절들과는 달리 꾸란의 폭력에 관한 구절들은 개방적이라서 그 구절들이 그 본문의 역사적인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구절들은 알라의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말씀의 일부분이고 꾸란에 있는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관련이 있고 본질적인 것이다.

오늘날 무슬림들 대부분은 그들의 거룩한 책의 폭력에 관한 많은 구절들을 그들 자신의 도덕적 선입관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을 따라서 폭력적으로 해석하는 개인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옹호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얼버무리고 총체적으로 정밀한 조사에 응하지 않는 빈약한 논리로 그들이 선호하는 요구를 만족시킨다. 문제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나쁜 이념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불신자들이 굴종을 받아들이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던지 아니면 죽임을 당할 때까지 불신자들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요구하는 많은 구절들을 폐기하거나 상쇄해줄 관용과 평화에 관한 구절들은 불행히도 거의 없다. 꾸란에서 발견되는 폭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무함마드의 전쟁에 관한 유언-그리고 그의 동료들의 유언-은 세계 역사를 통하여 피와 눈물의 노정을 만들어왔다.

 

꾸란:

 

꾸란 (2:191-193) - "그들을 발견한 곳에서 그들을 살해하고 그들이 너희들을 추방한 곳으로부터 그들을 추방하라 박해는 살해보다 더 가혹하니라......만약 그들이 싸움을 단념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풀 것이라 박해가 사라지고 종교가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방어적인 전쟁이 아닌데 왜냐하면 무함마드와 그의 무슬림들은 메디나로 이주하였을 뿐이었고 그들의 메카 대적들에 의하여 공격받지 않았다. 사실 그 구절들은 공격적인 전쟁을 충동하며 그에 따라 무슬림들은 메카인들을 메카에서 몰아내게 된다(나중에 그렇게 하였다). 그러므로 일부 무슬림 번역가들에 의한 ”박해“라는 단어 사용은 솔직하지 않다(박해에 해당하는 무슬림들의 실제 단어는 ”idtihad"이고 압제를 의미하는 “z-l-m”의 변형된 것인데 그 구절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실제 아랍어는 불신앙 또는 불신앙과 유혹을 초래하는 무질서를 의미할 수 있는 “fitna"에서 유래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상황은 분명해져서 폭력은 ”종교가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되고“ 불신자들이 그들의 불신앙을 포기할 때까지 정당화된다.

 

꾸란 (2:244) - “알라를 위하여 싸우라 알라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라.”

 

꾸란 (2:216) - “비록 싫어하는 것이지만 너희에게 싸우는 것이 허락되었노라 그러나 너희가 싫어해서 복이 되는 것이 있고 좋아해서 너희에게 악이 되는 것이 있나니 알라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니라.” 이 구절은 폭력이 미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설정할 뿐 아니라 싸우는 것이 단지 자기 방어에만 한정된다는 통념에도 모순되는데 이 구절을 듣는 자들은 명백히 그 당시에 공격당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디스에서 우리는 실제로 이 구절이 무함마드가 약탈물을 얻기 위하여 자기 부하들이 대상들을 공격하도록 자극하고 있을 때 말하여진 것이었다.

 

꾸란 (3:56) - “불신자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현세가 내세에서 가혹한 징벌을 내릴 것이라 그러나 그들은 구원자를 찾지 못할 것이라.”

 

꾸란 (3:151) - “알라는 믿음이 없는 자들의 심중에 공포를 불어 넣으리라 이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들을 알라와 비유하려 했기 때문이라.”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다신교도들에 관하여 말하지만 또한 기독교인들도 포함하는데 그들이 삼위일체설을 믿기 때문이다(무함마드는 ‘알라와 비유’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꾸란 (4:74) - “그로 하여금 알라를 위해 싸우도록 하여 내세를 위해 현세의 생명을 바치도록 하라 알라를 위해서 싸우는 자가 살해를 당하건 승리를 거두건 알라는 그에게 커다란 보상을 주실 것이라.” 이슬람의 순교자들은 초기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순종하여 죽었다. 이 무슬림들은 알라를 위하여 살인과 파괴를 하다가 전쟁에서 살해되었다. 여기에 오늘날의 자살폭탄 테러범들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가 있다.

 

꾸란 (4:76) - “믿는 자들은 알라를 위하여 싸우고...”

 

꾸란 (4:89) - “그들이 그랬듯이 너희도 불신자가 되기를 원하며 너희가 그들과 같이 되기를 바라거늘 너희는 그들이 알라의 길로 들어올 때까지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친구로 삼지 말라 그럼에도 그들이 배반한다면 그들을 포획하고 그들을 발견하는 대로 살해할 것이며 그들로부터 친구나 후원자를 찾지 말라.”

 

꾸란 (4:95) - “아무런 장애도 없이 남아있는 믿는 자와 싸움에 출전하여 재산과 생명을 바치며 싸우는 투사들이 같을 수 없거늘 알라는 남아 있는 자들보다 재산과 생명을 바쳐 싸우는 자들에게는 더 큰 은혜를 베푸시며 또한 이 두 부류에게도 알라의 보상이 약속되었노라 알라는 남아 있는 자들보다 싸우는 자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니라.” 이 구절은 폭력에 가담하지 않는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들을 비방하는데 그들이 알라 앞에서 가치가 적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지하드”가 꾸란에서 성전을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영적인 투쟁일 뿐이라는 근대적인 통념을 뒤집는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아랍어 뿐 아니라 이 구절은 명백히 영적인 것에 관련한 것이 아닌데 육체적인 불구자가 싸움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하디스는 이 구절의 배경이 지하드에 가담할 수 없었던 한 맹인의 항의에 대한 대응이었음을 알려주고 이것은 그 구절의 다른 번역에서 반영되었다).

 

꾸란 (4:104) - “적을 추적할 때 약한 마음을 갖지 말라 너희가 고난을 당할 때 그들도 그와 같은 고난을 당하노라...” 부상당하고 도망치는 적을 추적하는 것이 정말 자기방어의 행위인가?

 

꾸란 (5:33) - “실로 알라와 선지자에 대항하여 지상에 부정을 퍼트리는 자들은 사형이나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그들의 손발이 서로 다르게 절단되거나 또는 추방을 당할 것이라 이렇듯 그들은 현세에서 치욕을 그리고 내세에서는 무거운 벌을 받을 것이라.”

 

꾸란 (8:12) -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자르고 그들 각자의 손가락을 자르라.” 이 구절을 영적인 투쟁으로 해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꾸란 (8:15-16) -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싸움터에서 불신자들을 만날 때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지 말라 그러한 날에 등을 돌리는 자는 그것이 전쟁을 위한 준비나 어떤 무리에 합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이는 분명 알라의 분노를 자아낼 것이며 그의 주거지는 지옥이 되리니 최후가 저주스러우리라.”

 

꾸란 (8:39) - “무질서가 사라지고 종교가 온전히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까지 싸우라.” 일부 번역은 “무질서”를 “박해”로 번역하지만 이 단어의 전통적 해석은 역사적 배경에 의하여 뒷받침되지 않는다(꾸란 2:293의 주석을 보라). 메카인들은 무함마드가 순례기간동안 그들의 도시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였을 뿐이다. 무함마드가 자신이 쫓겨나기 전에 메카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 이후로 다른 무슬림들은 무장하지 않은 조건으로 거기를 여행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메카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방어하는 행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우상들을 부수고 무력으로 이슬람을 수립하려는(그는 나중에 그렇게 하였다) 것이 무함마드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비난받을 부분은 “종교가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까지 싸우라는 부분인데 진정한 폭력의 정당성은 상대방의 불신앙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Sira에 따르면(Ibn Ishaq/Hisham 324) 무함마드는 나아가서 “알라는 경쟁자가 없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꾸란 (8:57) - “그대가 전쟁에서 그들을 만난다면 그들을 따르는 자들을 두렵게 하라 아마도 그들에게 교훈이 되리라.”

 

꾸란 (8:59-60) - “불신자들이 나의 벌을 피하였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실로 그들은 피할 수 없노라. 군대와 무기로 너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에 대항할 준비를 하라 하셨으니 그것으로 알라의 적과 너희들의 적을 두렵게 하라.”

 

꾸란 (8:65) - “선지자여 믿는 자들을 싸우게 하라...”

 

꾸란 (9:5) -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들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할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예배를 드리며 이슬람 세를 낼 때는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 주리니...” 이 구절에 따르면 무슬림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이다. 예배(salat)와 이슬람 세(zakat)는 이슬람교의 5가지 기둥들에 속한다.

 

꾸란 (9:14) - “그들과 싸우라 알라는 너희의 손으로 그들에게 벌주어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고...”

 

꾸란 (9:20) - “믿으며 자신의 집을 떠나 알라의 길에서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바치며 싸우는 자들은 알라 앞에서 가장 큰 보상을 받을 것이니 이들이 승리한 자들이라.” 여기서 “싸우는”으로 말하여진 단어는 지하드(아랍어)이다.

 

꾸란 (9:29) -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선지자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은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낄 것이라.” “성서의 백성”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알라로부터 마지막 “계시들”가운데 하나였고 이 계시는 집요한 군사적 팽창을 추진하여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그 다음 100년 안에 기독교 세계의 3분의 2를 정복하였다. 이슬람은 모든 다른 사람들과 종교를 지배하기를 원한다.

 

꾸란 (9:30) - “유대인들은 에즈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고 있노라 이는 이전에 불신한 자들의 말과 유사하니 알라가 그들을 욕되게 하실 것이라 그들이 진실에서 멀리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라!”

 

꾸란 (9:38-39) - “믿는 자들이여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느뇨 알라를 위해 전쟁에 임하라 하매 너희가 주저하였노라 이는 너희가 내세보다 현세에 만족 하고 있기 때문이라 현세의 삶이 내세에 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노라 너희가 전쟁에 임하지 아니하였다면 너희에게 고통스러운 벌을 주셨을 것이오 너희 대신에 다른 백성을 선택하셨을 것이라...” 이 구절은 싸우기를 거절하는 자들이 지옥으로 가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이다.

 

꾸란 (9:41) - “가볍게든 또는 무겁게 무장하여 나아가라 너희의 재산과 너희의 생명을 바쳐 알라를 위해 싸우라 너희가 알고 있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더욱 좋으리라.” 그다음 구절(9:42)을 보면 - “눈에 보이는 이익이 있고 여행이 쉬웠다면 아마 그들은 그대를 따랐을 것이나 거리가 그들에게 멀었도다...”이 구절은 무함마드가 자기방어를 위해서만 싸웠다는 통념을 반박하는데 이 구절은 전투가 집에서 먼 지역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경우에는 다른 나라인 기독교인의 땅을 의미한다).

 

꾸란 (9:73) - “예언자여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에게 엄하게 대항하라 지옥이 그들의 안식처이며 종말이 저주스러울 것이라.” 이슬람을 거부하는 자들을 인간성을 말살하며 무슬림들에게 그들이 지옥 불에 탈 화목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학살을 정당화하는 것을 쉽게 만들고 있다. 이 구절은 또한 오늘날의 독실한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안 믿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꾸란 (9:88) - “그러나 선지자와 그리고 그분과 함께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바쳐 싸우니 그들은 복을 받을 것이요 번성할 것이라.”

 

꾸란 (9:111) - “알라를 믿는 자 가운데서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재산을 사시고 천국을 주실 것이라 그것은 알라를 위하여 싸우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자를 위해 구약과 신약과 꾸란에 약속된 것이라 알라보다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 누구이뇨 너희가 알라와 거래한 것에 기뻐하라 그것이 영광된 승리라.”

 

꾸란 (9:123) - “믿는 자들이여 너희 가까이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고 그들로 하여금 너희가 엄함을 알게하라...”

 

꾸란 (17:16) - “우리들이 한 고을을 멸망코자 했을 때 안이한 생활을 누리던 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노라 그러나 저들은 그 안에서 거역하였기 때문에 이 고을에 대한 그 명령이 진실임을 입증하여 우리들은 그 고을을 완전히 파괴한다.” 범죄는 도덕적인 죄인데 처벌은 “완전한 파괴”라는 것을 주목하라. (9.11공격을 명령하기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은 먼저 미국인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일 것을 발표하였다).

 

꾸란 (18:65-81) - 이 우화는 명예살인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는데 여기서 가족의 한 구성원이 살해되는데 이유는 그가 배교 또는 도덕적인 추태로 그 가족에게 수치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이 이야기는 유대교 또는 기독교 경전에는 없다)는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모세에 관하여 이야기하는데 그는 겉으로 보기에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한 일들을 하지만 그 후 나중에 설명에 따라서 정당화된다. 그러한 행동 가운데 하나가 특별한 이유 없이 한 소년을 살해하는 것이다(18:74). 그러나 이 현인은 나중에 그 소년이 “불순종과 배은망덕”으로 자기 부모를 “슬프게” 할 것을 염려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는 살해되었고 그래서 알라가 그들에게 “더 좋은” 아들을 줄 수 있었다. (주석: 이것이 샤리아 법에 의하여 명예살인이 명령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Reliance of the Traveller (Umdat al-Saliq)는 부모 또는 조부모가 자식들을 죽일 경우 살인에 대한 처벌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0.1.1-2).)

 

꾸란 (21:44) - “우리들은 이자들이나 그의 선조들을 즐겁게 해주고 오래 살게 해주었다 우리들이 이 땅에 와서 그 끝에서부터 침식하고 있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는가. 대체 그들이 승리자인가?”

 

꾸란 (25:52) - “그러므로 불신자들을 따르지 말고 최대한의 분투함으로 저들과 대적하라” “대적하라”는 지하드인데 분명히 개인적인 상황이 아니다. 이것이 메카 계시라는 것을 아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꾸란 (33:60-61) - “위선자들과 마음이 병든 자들과 그 도시에서 교사하는 자들이 단념하지 않는다면 알라가 그대로 하여금 그들을 지배하도록 하리니 그때 그들은 그 안에서 그대의 이웃이 되지 않을 것이며 체류함이 잠깐 동안에 불과하리라 그들은 가는 곳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며 체포되어 살해 되리라.” 이 구절은 세 그룹에 대하여 살해(다른 번역에서는 “무자비”와 “끔찍한 살인”으로 표현되었다)를 명령하는데 위선자들(“알라를 위해서 싸우기”(3:167)를 거부하고 따라서 무슬림이 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무슬림들)과 “마음이 병든” 자(이것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포함한다; 5:51-52)와 “소란을 피우는 자들” 또는 무함마드 전기 작가에 따르면 이슬람에 대적하는 말만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교사자들”이다. 희생자들은 무슬림들에 의하여 색출되고 이것이 오늘날 테러리스트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구절이 단지 메디나에서만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왜 이 구절이 알라의 영원한 말씀에 포함되어 무슬림들에게 세세토록 전해지는지 알 수 없다.

 

꾸란 (47:3-4) - “알라를 거부하는 자들이 거짓을 따름에 반해 믿는 자들은 알라께서 내려주신 진리를 따르기 때문이라 이렇듯 알라는 비유로서 인간에게 교훈을 내리시니라 너희가 전쟁에서 불신자를 만났을 때는 저들의 목들을 때리라 너희가 완전히 저들을 제압했을 때는 저들을 포로로 취하고,” 알라를 거부하는 자들은 전투에서 제압되어야한다. 이 구절은 계속해서 알라가 그 더러운 일을 자신이 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무슬림들의 신실함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살인하는 자는 시험에 통과한다. “알라께서 원하셨다면 저들에게 징벌을 내렸을 것이라 그러나 다른 자들에 비유하여 시험코자 하심이라 그러나 알라의 길에서 살해된 자 있다면 알라는 그의 행위가 결코 손실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

 

꾸란 (47:35) - “휴전을 촉구하는 약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저들 위에 있노라(Shakir: ”더 좋은 손을 가지고 있노라“) 알라가 너희와 함께 하시어,”

 

꾸란 (48:17) - “장님이나 불구자 그리고 환자가 출전하지 아니함은 죄악이 아니라 알라는 당신과 선지자에게 순종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로 하여금 강이 흐르는 천국에 들게 하시며 외면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고통스러운 벌을 내리시니라.” 현대의 옹호자들은 때로는 지하드가 ‘영적인 투쟁’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장님, 불구자, 환자가 왜 면제되는가?

 

꾸란 (48:29) -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며 그와 함께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에 대항하여 강하고(무자비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 자비하니라...” 이슬람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종교적 상태에 근거하여 적용되는 매우 다른 두 개의 기준이 있다.

 

꾸란 (61:4) - “실로 알라는 당신의 명분을 위하여 싸우는 자들을 사랑하시니라.” 평화의 종교, 정말로! 61:9이 이 구절을 뒤따른다: “선지자를 통하여 복음과 진리의 종교를 보내시고 꾸란을 다른 모든 종교 위에 두신 분이 알라이시라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것을 싫어하더라.”

 

꾸란 (61:10-12) -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고통스러운 징벌로부터 구제될 수 있는 거래를 가르쳐 주리라 그것은 너희가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를 믿으며 알라의 사업을 위해 너희의 재산과 생명을 바쳐 싸우는 것이라 너희가 알고 있다면 그것이 너희를 위한 복이 될 것이라 알라께서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사 강물이 흐르는 천국으로 인도하시어 아름다운 낙원에서 살게 하여 주실 것이라.” 이 구절은 전투에서 주어졌다. 이 구절은 아랍어 지하드를 사용한다.

 

꾸란 (66:9) - “선지자여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되 그들에 대하여 엄격하라 그들의 거주지는 지옥이니 그들의 말로가 불행할 것이라.” “지하드”의 어근이 되는 단어가 여기에 사용되었다. 배경은 분명히 성전이며 폭력의 범위는 자신들이 무슬림들이라고 여기나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포함하여 확대된다.

 

하디스로부터:

 

부카리 (52:177) - 알라의 사도가 “너희들이 유대인들과 싸우고 유대인이 그 뒤에 숨어있는 바위가 ‘오 무슬림! 내 뒤에 유대인이 숨어있으니 그를 죽여’라고 말할 때까지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부카리 (52:256) - 이교도들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는 밤에 이교도 전사들을 공격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지 선지자에게 질문하였다. 선지자는 “그들은(여자들과 아이들) 그들(이교도들)에 속한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명령에서 무함마드는 인지된 적을 죽이는 과정에서 비-전투원을 죽이는 것이 허용된다는 예를 확립하였다. 이것이 많은 이슬람 폭탄 테러범들을 정당화한다.

 

부카리 (52:220) - 알라의 사도가 “나는 테러로 승리하도록 되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부 다우드 (14:2526) - 선지자가(그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말하였다: 믿음의 근본은 세 가지이다: “알라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자를 죽이지 않는 것과 그가 무슨 죄를 지을 지라도 그를 불신자로 선포하지 않는 것과 그의 어떠한 행동에 대하여도 그를 이슬람에서 제명하지 않는 것이며 알라가 나를 선지자로 보낸 날부터 나의 공동체의 마지막 사람이 Dajjal (Antichrist)과 싸우게 될 때까지 지하드는 계속될 것이다.

 

아부 다우드 (14:2527) - 선지자가 말하였다: 알라를 위하여 싸우는 것(지하드)은 경건하든 경건하지 안든 모든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너희들에게 의무이다.

 

무슬림 (1:33) - 알라의 사도가 말하였다: 나는 그들이 알라만이 하나님이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라고 증언할 때까지 모든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명령받았다.

 

부카리 (8:387) - 알라의 사도가 “‘그들이 알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경배되어질 권리가 없다’라고 말할 때까지 사람들과 싸우도록 명령받았고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같이 기도하고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며 우리가 살해하는 것같이 살해한다면 그들의 피와 재산이 우리에게 신성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정당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무슬림 (1:30) - “알라의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알라를 제외하고는 신이 없다고 사람들이 선언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명령받았다.”

 

무슬림 (1:149) “Abu Dharr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알라의 사도여,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알라를 믿고 그를 위하여 지하드를 하라....”

 

무슬림 (20:4645) -“....그가(알라의 사도) 그것을 하고 말하였다: 낙원에서 사람의 지위를 백배나 높은 등급으로 올려주는 행위가 있고 한 등급과 다른 등급과의 차이는 땅에서 하늘의 높이와 같다. 그가(Abu Sa'id)가 말하였다: 그 행위가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알라를 위하여 지하드 하라! 알라를 위하여 지하드 하라!”

 

무슬림 (20:4696) - “알라의 사도(그에게 평화가 있기를)가 말하였다: ‘알라를 위하여 싸우지도 않고 지하드(또는 결심)에 대한 어떠한 열의도 표시하지 않고 죽는 자는 위선자로 죽는 것이다.’”

 

무슬림 (19:4321-4323) - 무함마드가 무고한 어린 아이들이 불신자들에 대한 그의 부하들의 공격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무함마드가 어깨를 으쓱했던 세 개의 하디스가 있다: 그의 반응은 “그들이 그들(적을 의미함) 가운데 있었다.”였다.

 

무슬림 (19:4294) - 알라의 사도(그에게 평화가 임하기를)가 누구든지 군대 또는 파견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할 때 그는 특히 그에게 권고하였다....그가 말하였다: 알라의 이름을 걸고 그리고 알라를 위하여 싸우라. 알라를 믿지 않는 자들과 싸우라. 성전을 하라....다신교도인 너희들의 적들을 만날 때 그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초청하라. 그들이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응대한다면 너희들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어떠한 해악도 행하지 말라. 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초청하라; 그들이 너희들에게 응대한다면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싸우지 말라....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에게 이슬람세(Jizya)를 요구하라. 그들이 지불하기로 한다면 그들에게서 이슬람세를 받고 물러서라. 그들이 이슬람세 지불을 거절한다면 알라의 도움을 구하고 그들과 싸우라.

 

타바리 7:97 Ashraf를 살해한 다음 날 아침에 선지자는 “너희들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살해하라”고 선언하였다. Ashraf는 시인이었는데 이슬람을 비방했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부하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여기서 무함마드는 살해하라는 자신의 명령의 범위를 확대한다. 이어서 무고한 유대인 사업가가 단지 무슬림이 아니란 이유로 자신의 무슬림 동료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타바리 9:69 “불신자를 죽이는 것은 우리에게 작은 문제이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말이다.

 

타바리 17:187 “하나님을 두고 말하는데 우리가 떠났던 종교가 이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종교보다 더 낫고 올바르다. 그들의 종교는 피를 흘리며 거리를 끔찍하게 만들며 재산을 강탈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전에 믿던 종교로 돌아갔다.”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지만 알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폭력과 약탈에 충격을 받은 후 그들의 실수를 알게 된 한 그룹의 기독교인들의 말이다. 평화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결정에 대한 대가는 칼리프 알리에 의하여 남자들은 참수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이븐 이스학/히샴 327: - “알라가 말하였다. ‘선지자는 포로들을 모으기 전에 살해하여야한다. 살해된 적은 땅에서 제거된다. 무함마드, 너는 이 세상의 욕망을 갈망하였다, 세상의 재물들과 포로들의 몸값은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알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그들을 살해하기를 원한다.’”

 

이븐 이스학/히샴 990: - ‘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면서 누군가의 머리를 자르는 것이 요즘 시대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누구든지 생각한다면 무함마드의 명령에 의하여 바로 그 관습이 생겨났다는 것이 여기에 있으며 무함마드가 입증할 것이다.

 

이븐 이스학/히샴 992: - “알라를 위하여 모든 사람과 싸우고 알라를 믿지 않는 자들을 살해하라.” 군사적 공격전에 무함마드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준 가르침이다.

 

추가 설명들: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비-무슬림들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들의 종교가 평화스럽고 관용적인 종교라는 증거로 그들이 내세울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곳(중동과 파키스탄과 같이)에서 종교적 소수집단들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잔인한 박해로 고통 받고 있다. 이슬람이 소수집단인 곳(태국 필리핀, 유럽같이)에서는 무슬림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폭력의 위협이 있다. 두 가지 상황은 종교적인 테러리즘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듯하며 이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있어서 집요하고 특징적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며 꾸란에서 시작된다. 종교적 관용과 보편적 형제애에 관한 현대적인 미덕들에 적합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이슬람의 가장 신성한 책의 구절들은 거의 없다. 나중에 계시된 구절들에 의하여 명백하게 폐기된 초기 “메카” 계시들이 그러한 구절이었다. 이것이 무슬림 옹호자들이 - 꾸란이 완벽한 책이라고 주장하면서도-그들의 “도움”없이 꾸란을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관한 “위험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단지 역사 또는 신학적 구조 개념은 별도로 하고 꾸란의 폭력적인 구절들은 실제 집단학살과 대량학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AD 1000년경부터 시작하여 5세기 동안 Ghazni 왕조 Mahmud의 피비린내 나는 정복으로 수 천 만 명의 힌두교도를 잔인하게 도살한 것을 포함한다. 그와 나중에 Tamerlane(이슬람의 징기스칸)이 단지 자신들의 사원들이 파괴되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에 대하여 무수한 사람들을 도살하였다. 불교는 인도 땅에서 아주 최근에 제거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일부와 오늘날의 터키를 포함하여 무슬림 군대에게 점령된 지역에서 동일한 운명(비록 보다 느리게 되었지만)을 맞았다. 자랑스러운 페르시아 사람들의 고대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는 무슬림들에게 멸시받으며 현대 이란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종교 안에 폭력이 아주 각인되어 이슬람은 다른 종교 또는 이슬람 내부에서 실제로 전쟁하는 것을 절대로 중지하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도시를 포위하고 남자들을 집단학살하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그들의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취하였던 전쟁 지휘관이었다. 몇 가지 경우에서 그는 포위된 거주자들로부터 항복제안을 거절하고 포로까지 도살하였다. 부하들이 싸우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느꼈을 때 그들이 싸운다면 노예들과 전리품을 그들에게 약속하면서 그리고 그들이 싸우지 않으면 지옥으로 그들을 위협하면서 부하들이 전투하도록 실제적으로 선동하였다. 무함마드는 전투에서 포로가 된 상처 입은 여자들을 보통 그들의 남편들과 가족들이 도살된 날에 부하들이 강간하도록 허용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무슬림 군대는 공격적인 작전을 하였고 이슬람의 가장 극적인 군사적인 정복은 무함마드가 죽은 후 수 십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무함마드의 부하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초기의 이슬람의 전쟁 원칙은 도시의 시민들이 저항한다면 그들을 괴멸시키는(남자들은 처형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취하였다) 것이었다. 현대 옹호자들이 무슬림들은 자기방어를 하는 과정에서 공격하였을 뿐이라고 자주 주장하나 이것은 무함마드의 시대로 돌아가서 이슬람 역사가들과 다른 이들의 글에 의하여 분명하게 반박되는 자가당착이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이주한 후 단지 5년 만에 완전히 멸종된 꾸라이자 유대인들의 예를 생각해보자. 꾸라이자 유대인들의 지도자는 무함마드의 치명적인 대상(caravan) 약탈 공격에 대한 보복을 하기위하여 왔던 메카인 군대에게 그들의 도시가 포위되자 중립적인 태도를 선택하였다. 꾸라이자 유대인들은 양측으로 부터 어느 누구도 살해하지 않았고 메카인들이 돌아간 후에 무함마드에게 평화롭게 항복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선지자는 꾸라이자의 모든 남자들을 참수하고 모든 여자들과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고 무함마드 자신이 포로들 가운데 한명을 강간까지 하였다(무슬림 옹호자들은 이것을 “같은 날의 결혼”이라고 부른다).

현대 이슬람의 가장 존경받는 학자들 가운데 한 명인 세이크 Yusuf al-Qaradawi는 공개적으로 공격적인 지하드를 명령한다: “당신들이 추구하는 지하드에서 당신들은 적을 찾고 적을 침공한다. 이러한 형태의 지하드는 이슬람 국가가 이슬람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것이 가는 길에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국가들을] 침공할 때만 여지가 있다.” 그 밖에 그는 “이슬람은 선제공격을 할 권리가 있다....이슬람은 하나님의 종교이고 이슬람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이슬람은 사회제도와 전통의 형태로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파괴할 권리를 가진다....이슬람은 인간 본성을 왜곡시키고 인간 자유를 제한하는 그들의 치명적인 영향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기 위하여 사회제도들과 전통들을 공격한다. 이슬람 지하드가 단지 이슬람의 본 고장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이슬람 방식의 삶의 위대성을 감소시킨다.”라고 말한다.

후계구도를 분명하게 하지 못한 무함마드의 실수는 그가 죽은 후에 계속적인 내전을 초래하였다. 무함마드를 가장 잘 아는 자들은 처음에 멀리 떨어져 있는 부족들이 이슬람을 떠나서 그들이 좋아하는 종교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도록 싸웠다(Ridda 또는 ‘배교 전쟁들’). 이어서 가까이 있는 공동체 안에서 초기에 메카인 개종자들이 나중에 개종한 자들과 싸웠다. 무함마드와 함께 메카로 여행하였던 이주자들과 메디나에서 그들이 정착하도록 도왔던 Ansar 부족 사이에 적대감이 커졌다. 결국은 무함마드 자신의 가족들 안에서 그가 사랑했던 부인과 그가 사랑했던 딸 사이에 폭력적인 전쟁이 있었고-그것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불협화음을 내는 분열로 남아서 오늘날 까지 서로 상대방의 목을 따고 있다.

이슬람에 관하여 말하여 질 수 있는 가장 이상하고 가장 진실이 아닌 것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는 것이다. 서방세계가 심판되고 정죄되는 모든 기준이(노예제도, 제국주의, 불관용, 여성혐오, 성폭력, 전쟁....) 이슬람에 똑같이 적용된다면 판결문은 파괴적일 것이다. 이슬람은 결코 이슬람이 정복한 것들인 종교, 문화, 언어 또는 생활양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결코 사과하지 않으며 도덕적 진보에 맞춘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대화가 막혀 있으며 가장 자기도취적이다. 이슬람은 그 스스로의 완벽함을 확신하지만 잔인할 정도로 자기 검증을 혐오하며 비평을 억압한다.

이것이 꾸란의 폭력에 관한 구절들을 그렇게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꾸란의 구절들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무게감이 실려 있다.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이 그 구절들을 그들의 책에 있는 글자그대로 취하며 지하드 없는 이슬람은 불완전하다고 이해하는 반면에 온건주의자들은 그들을 반박할 것이 거의 없으며 여론의 바깥에 있다. 정말로 그들이 무엇을 가지는가? 평화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무지한 사람들을 속이겠지만 이슬람의 가장 성스러운 책이 열 두 번째 구절마다 비-무슬림에 대한 알라의 증오에 관하여 이야기하거나 비-무슬림들의 죽음, 강제개종, 복속을 요구할 때 비록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의 종교를 해석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라도 테러리즘에 대한 공감이 그 공동체에 깊고 넓게 흐르고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슬람의 가장 존경되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명인 Ibn Khaldun와 같은 학자들이 “이슬람의 사명의 보편성과 모든 사람들을 설득으로 또는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의무 때문에 성전은 종교적인 의무”라고 이해하였어도 많은 다른 무슬림들은 보편적인 비폭력을 전파하는 꾸란의 구절이 거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들의 이슬람에 관한 이해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다. 서방 세계에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가 성경 신약이 평화, 사랑, 관용의 미덕을 전파하는 기독교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형적인데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고 생각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꾸란의 증거와 이슬람의 피로 점철된 역사가 이것과 아주 많이 모순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아마도 놀라고 당황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폭력성을 받아들인다. 1991년 미국의 팔레스타인 부부가 너무 서구화된다는 이유로 딸을 칼로 찔러 죽인 혐의로 유죄가 선고되었다. 가족의 친구가 그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나와서 배심원들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그 아버지는 단지 “종교”에 순종하였음을 주장하며 그 부부는 “딸을 훈육하든지 명예를 잃어버리든지” 하여야 했다고 말하였다. 2011년에 분명하게 알라의 이름으로 시민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뉘우치지 않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사우디 왕에 의하여 메카로 호사스러운 “성지순례”를 하였지만 단 한명의 무슬림의 항의도 없었다.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단지 이슬람이 다르고 위험하다는 둘 다의 현존하는 진실을 피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하나님에 관한 비평적인 생각을 제물로 삼지 않으려하거나  다른 종교를 비방하기 위한 구실들을 이슬람에서는 찾지 않는 서방세계 자유주의자들이 잘하는 것이다.

꾸란을 글자그대로 해석하는 무슬림들이 너무 많이 있고....이슬람의 이름으로 행하여진 폭력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

 

 

꾸란은 증오심을 전파하는 책인가?

 

이슬람의 가장 거룩한 책이 비-무슬림에 관하여 말하는 것

 

 

서론

왜 폭력인가? 왜 무관심인가?

 

2002년9월25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한 무리의 무장한 무슬림들이 기독교 자선단체 사무실에 들어가서 직원 7명을 의자에 묶고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무슬림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 이슬람주의자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을 분리하는데 15분이 걸렸고 그들의 목표물 한명 한명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일을 확실히 하였다.”

이슬람의 철저한 추종자들에 의한 인도주의적인 일을 하는 비-무슬림인 사람들의 죽음은 아주 자주 일어난다. 그 처형은 통상적으로 무슬림들에 의하여 기념되지 않지만 까다롭기로 유명한 공동체에 의하여 이슬람의 이름으로 일어난 살인에 대한 어떤 분노도 거의 표시되지 않는다.

반대로 꾸란 모독 또는 무함마드 만평에 관한 소문들은 극단적인 항의, 폭동, 방화, 초상 태우기 등을 초래하며 비-무슬림에 대한 대량학살은 통상적으로 입이 벌어지게 한다. 9.11이후 6년 동안 만 건 이상의 극단적인 이슬람 테러행위가 계속되었으나 그것들 모두에 대하여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분노하지 않았고 기껐하는 이야기는 Abu Ghraib 교도소 또는 Guantanamo 수용소가 자극했다는 것이다.

이 중대한 도덕성의 부재는 많은 서방세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며 특히 이 현실을 이슬람이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종교라는 정치적으로 타당한 가정으로 조화시키려 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유대-기독교 전통이 보편적인 사랑과 이타적인 것을 전파하니까 이슬람도 같은 원리에 근거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보다 철저한 무슬림들은 가장 평화를 사랑하고 가장 덜 위험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러나 이슬람이 평화와 관용의 종교라는 무슬림 옹호자들의 장밋빛 주장 뒤에는 폭력과 깊이 뿌리박힌 차별을 잘 설명하는 많은 어두운 현실이 있다. 아주 단순하게 꾸란은 우월성과 증오와 적대감을 가르친다.

 

증오에 관한 말들을 정의하는 요소를 생각해보자:

 

⦁이슬람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과 그 밖의 사람들과 사이의 확실한 구분

 

⦁이 구분에 근거한 도덕적 비교

 

⦁다른 집단의 평가절하 또는 인간성 말살과 이슬람 자체의 독특한 우월성

 

⦁정체성 집단의 소속에 근거한 대우의 다른 기준 주장

 

⦁다른 집단 구성원에 대한 폭력 선동

 

슬프게도 그리고 많은 고상한 무슬림들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꾸란은 각 항목에 대하여 증오 스피치로 구성되어 있다.

이슬람의 가장 거룩한 책(꾸란의 61%가 비-무슬림에 관한 것이다)이 무슬림들(가장 우수한 사람들, 3:110)과 불신자들(최악의 피조물들, 98:6) 사이의 선명한 구별의 선을 긋는다. 무슬림들에게는 칭찬이 아낌없이 부어지며 반대로 불신자들에게는 전체적으로 지옥 불에 타는 것으로 정죄된다. 보편적인 사랑을 가르치는 것과 거리가 멀어서 꾸란은 끊임없이 비-무슬림들을 사악한 짐승과 비교하고 그들에 대한 알라의 증오와 그들의 영원한 고문에 대한 알라의 어두운 계획을 보여주면서 비-무슬림들의 열등함을 전파한다. 자연히 무슬림들에 의한 불신자들에 대한 거친 대우도 마찬가지로 장려된다.

그러면 무슬림들에 의하여 알라가 직접 기록한 영원한 말씀이라고 믿어지는 꾸란이 비-무슬림들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꾸란은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을 구별하고 상대적 가치의 계급을 설정한다.

 

꾸란은 이슬람이 보편적인 형제애에 관한 것이 아니며 믿는 자들의 형제애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믿는 자들은 한 형제라”(49:10)

 

이슬람 아래서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다. 예를 들어 꾸란 16:75-76에 따르면 노예들과 장애인들은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람들과 평등하지 않다. 꾸란은 “평등의 법”을 도입하는데 이것은 살인에 대한 보복(2:178)과 같은 어떤 문제들을 고려할 때 다른 수준의 인간가치를 설정한다.

 

무슬림 믿는 자들은 비-무슬림들과 평등하지 않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같을 수 있느뇨?” (39:09)

 

“장님과 보는 자가 같을 수 있으며 암흑과 빛이 같을 수 있느뇨?” (13:16)

 

꾸란은 무슬림들이 은혜 받은 종족이고 반면에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사악한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무슬림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가장 좋은 공동체이 백성이라 계율을 지키고 악을 배제할 것이며 알라를 믿으라 만일 성서의 백성들이 믿음을 가졌더라면 그들에게 축복이 더했으리라 그들 가운데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사악한 자들이더라”(3:110)

 

나중에 보겠지만 알라는 단지 그들의 불신앙에 근거하여 비-무슬림들을 정죄하는 반면에 내세에 무한한 음식과 술과 섹스(56:12-40)를 포함한 최상의 육체적인 괘락으로 믿는 자들에게 보상한다. 사실 꾸란의 대부분이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을 차별하고 비-무슬림들을 비난하는 부분이다.

꾸란의 첫 번째 장이 이것의 예이다. 이것은 철저한 무슬림들이 매일 되풀이하고 이 말씀으로 끝나는 간단한 기도이다:

 

“저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이옵니다”(1:6-7).

 

이 구절들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포함하는지를 무함마드에게 질문하였다. 그의 대답은 “그럼 누구인가?” 였다. (Bukhari 56:662).

알라가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 사이에 확실한 구별을 하였기 때문에 비-무슬림들을 대우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무슬림들이 그들의 삶속으로 구체화해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꾸란은 무슬림들이 서로 간에는 자비하고 이교도들에 대하여는 무자비하라고 말한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선지자이며 그와 함께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에 대항하여 마음이 강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 정이 오가니라...(48:29)

 

알라는 무슬림들이 불신자들에 대하여 승리하도록 해준다:

 

“알라께서는 그 불신자들이 신앙인들을 지배하도록 두지 아니 하시니라”(4:141)[Pickthall – “성공하는 어떤 방법”] (4:141)

 

비-무슬림들이 무슬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길은 이슬람의 지배에 복속되는 것이다: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선지자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은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낄 것이라.(9:29; 인두세는 완전한 이슬람 국가에서 비-무슬림들이 그들의 무슬림 지배자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이다)

 

많은 무슬림들에 대한 통상적인 비난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자주 거만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그들이 사악한 짐승들이라고 말한다.

 

이슬람 연구에 평생을 바친 Ayatollah Khomeini는 비-무슬림들이 “배설물”과 “불결한 음식을 소화하는 낙타의 땀” 사이의 서열위치에 해당한다고 말하였다. 이상할 것 없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이 “동물들”과 짐승들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인간성을 말살한다:

 

“성서의 백성들 중에 진리를 거역한 자들과 불신자들은 불지옥에 있게 되리니 그들은 그 안에서 영주하매 가장 사악한 무리들이라”(98:6).

 

“실로 알라가 보시기에 가장 사악한 동물은 불신하며 믿지 아니하려는 자들이라” (8:55).

 

7:176 구절은 불신자들의 백치 같은 언행과 값어치 없음에 관하여 그들을 “헐떡거리고 있는 개들”에 비유하고 있다. 7:179 구절은 불신자들이 더 악하게 “짐승”과 같다고 말한다.

5:60 구절은 알라가 과거에 유대인들을 원숭이와 돼지로 변신시켰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7:166과 2:65에 의하여 반복된다.

한 하디스(Bukhari 54:524)는 무함마드는 쥐가 유대인을 닮았다고 믿었다고 말한다(또한 Sahih Muslim 7135와 7136에 의하여 확인된다).

46:29-35 구절은 불신하는 사람은 무함마드를 믿는 마귀보다 더 악하다고까지 말한다.

이슬람법에 따르면 비-무슬림들은 무슬림들에 의하여 재산으로 소유될 수 있지만-이슬람이 가장 우월하다는 메시지에 따라서-동료 무슬림들은(그들이 노예상태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았다면) 재산으로 소유될 수 없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가운데 한 명을 살해한 형벌이 본의 아니게 한 무슬림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상의 3분의 1로 제한함으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꾸란은 알라가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한다고 가르친다. 꾸란은 절대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꾸란은 알라가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포한다.

 

“그분은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시니라(30:45)

 

알라는 무함마드에게 복종하는 자들만을 사랑한다(적어도 그 알라의 계시를 제공하는 무함마드에 따르면):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에게 순종하라 하였으니 이를 거역하는 자 있다면 알라는 이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시니라(3:32).

 

죄를 미워하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대신에 알라의 분노는 개인들에게 골고루 미친다:

 

“알라는 배신하며 은혜를 모르는 자는 사랑하지 아니하시노라(22:38).

 

11:118-199 구절은 알라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는 어떤 사람은 선택하여 인도하지 않는다:

 

“알라께로 향하는 길이 있으되 어떤 길은 고르지 못한 길도 있노라 그러나 그분이 원하신다면 너희들 모두를 인도하셨으리라”(16:9).

 

알라가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히 불에 타는 것을 포함하여 가장 무서운 영원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나의 계시를 불신하는 자들을 불지옥으로 들여보내니 그들은 그들의 피부가 불에 익어 다른 피부로 변하는 고통을 맛보더라 실로 알라는 전지전능하심이라”(4:56).

 

“알라는 믿음이 없는 자들의 대적이시라”(2:98)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인데 그는 그들을 아주 많이 미워하여 그들이 죄를 짓도록 인도하기도 하여 실제적으로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서 그들의 운명을 확실하게 만든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알라가 사랑한다는 말이 꾸란 어디에도 없으나 알라가 다른 종교(또는 무신론자)의 사람들의 위하여 준비한 고통을 묘사하는 400개가 넘는 구절들이 있다: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내세에서 패망자 가운데 있게 되리라”(3:85).

 

비-무슬림의 상대적 가치는 그들이 지옥 불에 탈 연료일 뿐이라는 것이다:

 

“믿음을 배반한 그들의 재산과 자손이 그들에게 아무런 효용이 되지 못하고 불의 연료가 될 것이라”(3:10 Shakir: "지옥의 땔감“)

 

그들이 불의 연료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알라의 천사들에 의하여 고통 받을 것이다:

 

“믿는 자들이여 인간과 돌들이 연료가 되어 타고 있는 불지옥으로부터 너희 자신과 너희 가족을 구하라 불길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엄하고 가혹한 천사들이 알라께서 명령한 대로 거역하지 않고 집행할 것이라”(66:6).

 

불신자들이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는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알라는 그것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라를 불신하는 자를 비유하사 저들이 하는 일은 폭풍이 부는 날 폭풍에 휘날리는 재와 같아 저들이 얻은 것을 감수하지 못하고”(14:18).

 

“알라가 저들의 행위로 손실이 가장 큰 자를 너희에게 일러주리요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선행이라 생각하면서 현세의 삶에만 매달리노라 저들은 알라의 말씀과 만남을 부정하는 자들이니 저들의 일들은 무용지물로 끝날 것이라 심판의 날 알라는 저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으리라 지옥이 저들을 위한 보상이라 이것은 저들이 믿음을 거역하고 알라의 말씀과 선지자들을 조롱하였기 때문이라”(18:103-106).

 

무함마드는 선지자라는 자신의 주장을 거부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자기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알라와 선지자들을 불신하며 알라와 선지자들을 이간시키려 하는 자들이 일부는 믿고 일부는 부정하나이다라고 말하며 그 중간의 길을 택하겠다고 하더라 실로 이들이야 말로 불신자들이거늘 알라는 이 불신자들에게 치욕스러운 벌을 준비하여 두셨노라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들을 믿고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선별하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보상이 준비되어 있노라”(4:150-152).

 

기독교에서 내세의 형벌은 죄와 ‘사악함’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상대적으로 지옥에 관한 말이 거의 없지만 강조하는 있는 것은 이기적이거나 잔혹한 행위에 대한 개인적인 고통이다. 이슬람에서 지옥은 무함마드의 자신에 관한 개인적인 주장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일 뿐이다. 성경과 대조적으로 꾸란은 평균적으로 12번째 구절마다 지옥에 관하여 말하며 불신자들에 대한 알라의 분노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불신하는 자들은 불길에 옷이 찢기며 끓는 물이 저들의 머리 위에 부어지니라 그리하여 저들의 내장과 피부도 녹아내릴 것이라 저들을 벌할 철로 된 회초리도 준비되어 있노라 그로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나 저들은 다시 그 안으로 되돌려와 불의 징벌을 맛볼 것이니라”(22:19-22).

 

극도로 증오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을 고문할 수 없다. 알라의 불신자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는 이슬람을 안 믿는 사람들에 대한 무슬림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무슬림들의 개인적인 우월성은 꾸란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려진 대조되는 그림들에 의하여 확인되는데 꾸란에서 무슬림들은 천국에서 가장 큰 육체적인 쾌락으로 보상되며 반대로 불신자들은 동시에 무서운 고통을 받는다(단 하나의 예만 들어서 56장을 보라).

 

알라 자신이 비-무슬림들이 알지 못하게 막는다.

 

알라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피할 기회를 준다면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꾸란은 알라가 고의적으로 불신자들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그들의 길에 장애물을 놓아둔다고 말한다:

 

알라가 원한다면 그는 모든 영혼을 인도할 수 있다:

 

“만일 알라의 뜻이 있었다면 알라는 누구에게나 복음을 주었으리라”(32:13).

 

그러나 대신에 그는 마음에 베일을 씌우고 그들의 귀를 막아버렸다:

 

“알라는 저들의 마음을 봉하니 이해하지 못하고 저들의 귀를 막으니 듣지 못하더라 그러므로 그대가 저들을 복음으로 인도한다 하여도 저들은 결코 바른 길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18:57) 또한 17:46과 45:23을 보라.

 

알라는 불신자들이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멍에와 장애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말씀들이 그들 다수 위에 진리로 나타났으나 그들은 믿지 아니 하더라 알라는 그들의 목에 멍에를 씌우니 그것이 그들의 턱까지 이르매 그들의 고개가 위로 올라 볼 수 없게 되었더라 알라가 그들 앞에 장애물을 놓고 그들 뒤에도 장애물을 두며 그들 위로 덮개를 씌우니 그들은 보지 못하더라 그대가 그들에게 경고를 하던 경고를 하지 아니 하던 그들은 마찬가지로 믿지 않노라“(36:7-10).

 

같은 목적으로 알라는 불신자의 마음을 의심으로 채운다:

 

“어느 누구도 알라의 뜻이 아니고는 믿지 아니하며 그분께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의심(또는 모호함)을 두실 것이다”(10:100).

 

알라는 실제적으로 비-무슬림들이 죄를 짓도록 만든다.

 

불신자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게 막는 것(이것은 그들을 지옥으로 정죄하기에 충분하다)으로 만족하지 않고 꾸란은 증오로 가득 찬 알라가 불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나중에 그들을 처벌할 그 죄를 범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알라가 원하시면 너희 모두를 한 공동체로 만들 수 있노라 그러나 그분이 원하는 자를 방황케하고 그분이 원하는 자를 인도하시니 행하였던 것에 관하여 너희가 심문을 받으리라”(16:93).

 

사탄이 무슬림들을 유혹하지만 불신자들이 실수하도록 만드는 자가 알라 자신이다.

 

“...알라께서 이들을 방황하게 하면 그대는 그를 위한 길을 찾지 못하리라”(4:143, 또한 4:88과 74:31을 보라)

 

알라는 고의적으로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방황하도록 보낸다:

 

“....알라는 그를 방황케 하셨으매 그의 귀와 마음을 봉하여 버리고 그의 시각도 봉하여 버렸으니 알라 외에 누가 그를 인도하리요 그럼에도 너희는 숙고하지 않느뇨?”(45:23)

 

알라는 불신자들이 더 (알라가 나중에 그 행동들에 대하여 추궁할)나쁜 행동을 저지르도록 선동하기 위하여 마귀들을 보낸다:

 

“그대는 모르는가? 알라가 불신자들에게 사탄들을 보내어 저들을 화나게 했노라”(19:83)

 

3:54 구절에 따르면 알라는 속임수(사용된 단어 makara의 문자적 의미)를 사용하여 불신자들에 대하여 음모와 계략을 꾸민다. 그 밖에 꾸란은 알라가 불신자들이 나쁜 행동으로 단지 그들 자신의 영원한 형벌을 심화시키고 있을 때 선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속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내세를 믿지 아니한 자들의 행위들이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매 저들은 방황하였으니”(27:4) 또한 39:23, 6:39, 35:8, 13:27, 14:4을 보라.

 

알라는 불신자들이 선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속이기 위하여 사탄이 자신과 함께하도록 불러모은다:

 

“그들의 마음은 더욱 굳어졌으니 사탄이 그들의 행위를 올바른 것처럼 보이게 하였더라”(6:43)

 

물론 농담과 같은 이야기는 비-무슬림에 관한 것인데 그들은 심판의 날에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하였는데 어째서 지옥에 보내졌는지 항의할 것이다:

 

“저들은 순종하듯 우리는 어떤 죄악도 범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니 천사들이 그렇지 아니함이라 실로 알라께서는 너희가 행하였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라 하더라 그러므로 지옥의 문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영생하라”(16:28-29)

 

꾸란은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알라가 비-무슬림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하며 그들이 실수하게 하며 이어서 그들의 불신앙과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영원한 고통으로 그들을 정죄할 정도로 비-무슬림들을 증오한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무슬림들이 세상에서 서로를 대우하는 똑같은 기준으로 알라가 무슬림들로 하여금 불신자들을 대우하도록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꾸란은 진정한 무슬림은 이슬람에 저항하는 자가 가족 가운데 한 명일지라도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대는 알라와 내세를 믿는 자들이 자신의 아버지든 자식이든 또는 형제들이거나 친척들이든 그들이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에게 거역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리라”(58:22)

 

꾸란에는 믿는 자들이 비-무슬림들과 친구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는 구절이 적어도 9군데가 있다:

 

“믿는 자들이여 불신자들을 친구로 택하지 말라 너희는 너희 자신들에게 해가되는 명백한 증거를 알라에게 제공하여 하느뇨?”(4:144)

 

사실 비-무슬림을 친구로 택하는 자는 누구든지 마찬가지로 불신자가 되는 것으로 고발될 수 있다:

 

“믿는 자들이여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친구로 삼지 말라 그들은 서로가 친구들이라 그들에게로 향하는 너희가 있다면 그는 그 무리의 일원이거늘 알라는 이 우매한 백성들을 인도하지 아니 하시니라”(5:51)

 

꾸란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의”무리에 포함된다는 것을 주목하라: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하나님이라 말하는 자들은 진실로 믿지 않는 자들이라”(5:17)

 

무함마드는 불신자들이 무슬림들을 향하여 그것을 말하였다고 말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악하지 않거나 우호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들은 부패와 사악한 의도를 품고있다:

 

“믿는 자들이여 불신자들을 친구로 택하지 말라 그들은 너희를 해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며 그들은 단지 너희가 파괴되기를 바랄 뿐이라 그들의 입들에서 증오가 발산되며 그들의 마음은 더욱 사악하도다”(3:118)

 

“불신자들은 확실한 너희의 적이라”(4:101)

 

“음모하는 그들에게”(86:15)

 

이슬람을 안 믿는 자들은 진실로 알라에 대항하여 악을 돕는 자들이다:

 

“불신자는 알라를 거역하고 사악함을 돕는 자라”(25:55)

 

꾸란은 “너희가 알라만을 믿을 때까지 우리와 너희 사이에 영원히 적의와 증오가 생겨날 것이라”(60:4)라고 말한다.

 

비-무슬림들과 친구가 되는 대신에 꾸란은 적대감을 고취시킨다. 무슬림들은 불신자들과 싸우라고 명령받는다:

 

“믿는 자들이여 너희 가까이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고 그들로 하여금 너희가 엄함을 알게 하라 알라는 항상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니라”(9:123)

 

꾸란은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고통 받을 때 무슬림들이 불신자들을 비웃고 그들의 고통을 조롱하며 영생을 보낼 것이라고 무슬림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천국에 사는 사람들이 지옥에 사는 자들을 부르더라 실로 우리는 알라의 약속이 진리임을 알았노라 너희는 역시 너희 알라의 약속이 진리이더뇨 라고 물으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죄지은 자들에게 알라의 저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 하더라”(7:44) - 무함마드는 Badr 전투에서 자신이 죽인 적들을 개인적으로 조롱하면서 이것을 처음 시작하였다(Ibn Ishaq 454)

 

나중에 그들의 고통에 대하여 기뻐할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없으며 불신앙 덕분에 “알라의 적들”로 호칭되는 사람들과 무슬림들이 친구가 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꾸란은 다른 종교들은 알라에 의하여 저주받았다고 말한다.

 

태국의 불교도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 인도네시아의 기독교인들, 인도의 힌두교도들....왜 이슬람은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와 전쟁을 하고 반면에 이러한 종교들 가운데 어느 종교도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가? 그 이유의 일부분은 꾸란이 다른 종교의 열등함(48:28을 보라)과 알라가 다른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증오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들의 종교를 “비방”하는 것에 대하여 무슬림들이 분노하는 것은 보통이지만 여기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꾸란이 말하는 것이 있다:

 

“유대인들은 에즈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고 있노라 이는 이전에 불신한 자들의 말과 유사하니 알라가 그들을 욕되게 하실 것이라 그들이 진실에서 멀리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라!”(9:30) (또한 Bukhari 8:427을 보라) 무함마드가 죽을 때 한 마지막 하였던 말들 가운데 하나가 “알라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저주하기를”이었다.

 

꾸란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과 다신교도들(힌두교도들)과 무신론자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기독교인들은 알라에게 동료(즉, 삼위일체설)가 있다고 말하면서 알라(10:68-69)에 관하여 거짓말을 만들어낸 신성모독자들(5:17, 5:73) 이다. 알라에 관하여 거짓을 만들어낸 것은 최악의 죄이며(7:37, 29:68)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지옥으로 정죄 받는다(10:70). 비록 한 구절(초기 메디나 계시)이 의로운 기독교인들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이 구절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기를 그만두어야하거나(즉 삼위일체설 부정) 그들의 믿음의 대가로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5:72-73)을 아주 명백하게 만든 나중에 계시된 구절들에 의하여 폐기되었다.

 

유대인들도 무함마드의 마지막 계시들 가운데 하나에서 알라에 의하여 저주받는다(5:13). 꾸란은 유대인들이 사악하고(4:160-162) - 사실상 그들이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18:27) 하여서 알라의 말씀을 변경하려(2:75) 할 정도로 너무 사악하다고 계속하여 무슬림들에게 확신시킨다. 유대인들은 “거짓을 좋아하며 금지된 것을 지키지 않는다”(5:42).

 

꾸란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마음이 병들었다”고 믿는 자들에게 확신시킨다(5:52). 알라는 기독교인들 사이의 적대감을 당연시하기도 한다(5:14). 이슬람에 복속되고 이슬람 세를 지불하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만이 이 세상에서 보호된다(9:29 & Ibn Ishaq 956).

 

힌두교도들은 다신교도들이다. 비록 무함마드가 어떤 힌두교인도 알지 못하였지만(분명히 알라도 알지 못하였다) 꾸란은 수 천만명의 무고한 생명들을 빼앗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힌두교 사람들에 대한 천년동안의 인종청소 운동에 대한 토대를 여전히 제공하고 있다. 이슬람에서 다신교도들은 다른 모든 종교보다 더 악하다. 알라에 대하여 우상들 또는 거짓 신들을 만드는 자들은 알라에 대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 것이고(29:17) 지옥에서 불에 탈것이다. 알라와 함께 다른 신들을 믿는 것도 용서받지 못 할 죄이다(4:48, 40:12).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지 않는데 이것은 잘못된 신을 믿는 것보다 더 나쁘다(무함마드와 그의 후계자들은 무신론자들을 사형에 처하였다-Bukhari 84:57). 무슬림 자기도취가 꾸란에서 장려되고 있을 정도여서 단지 알라의 존재를 질문하는 것도 질문하는 자의 불경건성의 증거가 된다(25:21). 무함마드는 단지 그들이 그를 믿지 않는 다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질문하는 자들에게 말함으로 질문 공세에 응대하였다(36:49-64). 꾸란은 무슬림들이 지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5:101-102).

 

그의 종교를 배반하는 무슬림은 누구나 “사악한 죄인”이다(3:82). 마찬가지로 알라를 부인하거나(40:63)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 자(2:99)는 누구든지 사악하다. 양심의 자유는 이슬람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배교자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사형을 규정하였다((Bukhari 52:260).

 

현시대의 무슬림 옹호자들은 종종 “대화”(당신은 듣고 그들은 이슬람에 관하여 말하는 일방적인 구도를 의미)에 관하여 말하지만 꾸란은 대신에 지하드에 관하여 말한다:

 

“불신자들을 따르지 말고 최대한의 분투하는 노력으로 저들과 싸우라”(Jihad; 25:52)

 

비-무슬림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거나.... 그 문제에 대하여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에 무슨 요점이 있겠는가? 알라가 이미 그들의 마음을 봉하였고 그들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저주하였다: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대가 그들에게 경고하던 또는 경고하지 아니하던 믿으려 하지 아니하매 알라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사 그들의 마음을 봉하고 그들의 귀를 봉하고 그들의 눈을 봉하여 버릴 것이라 무서운 운명이 그들의 것이 될 것이라”(2:6-7)

 

이교도들의 마지막 목적지가 지옥이라면 왜 알라가 그들을 만들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함마드는 일부 사람들(적어도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피조 된 목적은 무슬림의 지위를 가지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지옥에서 고통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Sahih Muslim 6666)

 

꾸란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현 세상에서 폭력적으로 처벌될 것이라고 말한다.

 

알라 자신이 불신자들과 싸우는데(9:30) 왜 무슬림들이 사악한 명분으로 싸우는 것 보다 알라의 명분으로 싸우지 않겠는가(4:76)? 꾸란의 19%가 폭력적인 정복과 비-무슬림의 복속에 관한 것이다:

 

“군대와 무기로 너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에 대항할 준비를 하라 하셨으니 그것으로 알라의 적과 너희들의 적과 그들 외의 다른 위선자들을 두렵게 하라 너희는 그들을 알지 못하나”(8:60)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되 그들에 대하여 엄격하라 그들의 거주지는 지옥이니 그들의 말로가 불행할 것이라”(66:9, 또한 9:73을 보라)

 

무슬림들은 내세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세에서 보상을 기대한다(4:134)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마찬가지로 현세에서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알라께서 방황하게 하신 자는 어느 누구도 인도하지 못하니라 그들은 현세에서도 벌을 받으나 내세에서의 벌은 더욱 고통스러우니라...”(13:33-34)

 

“불신자들에 대한 보상이 그러하니라”와 같은 비-무슬림의 폭력적인 죽음이 불신앙에 대한 알라의 보상이라는 것이 꾸란에 적어도 두 곳이 있다(2:191, 9:26). 3:56 구절은 “불신자들은 현세에서 가혹한 징벌로 처벌받을 것이다”라고 명백하게 말한다(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 징벌을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이행한다).

 

결국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들이 자의로든 강제로든 알라에게 절하게 될 것이다:

 

천지의 모든 것이 좋아서든 싫어서든 알라께 복종하나니”(13:15)

 

이슬람에 저항하는 자들은 비참하게 될 것이다: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에 대적하는 자들은 가장 비참한 자들 가운데 있을 것이다”(58:20-이 구절의 배경은 메디나 유대인 부족의 추방과 무함마드에 의한 그들의 재산, 토지, 어린아이들의 몰수였다).

 

종교가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까지 무슬림들은 비-무슬림들과 싸우게 될 것이다:

 

“무질서(불신앙, 알라가 아닌 다른 것들을 숭배하는 것)가 사라지고 종교가 온전히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까지 싸우라...”(8:39-일부 번역은 단어 "fitna"를 “박해”로 해석하지만-앞에 구절에서 믿기를 꺼려하는 것으로 정의된 것과 같이-이 상황에서는 이슬람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38절을 보라). 이 구절은 무함마드가 고의적으로 도발한 전투 다음에 “계시”되었다. 2:193 구절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말하며 마찬가지로 무슬림들이 물리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지 않을 때 “계시”되었다).

 

마음이 “병든 자들”-이 사람들은 5:52에 따라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포함한다-은 발견하는 곳마다 “위선자들”(불신자들과 교류하거나 지하드에 가담하지 않으려 함으로 진실한 믿는 자가 아닌 것으로 판단되는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체포되어 살해되어야한다(33:60-62)

 

비-무슬림들은 무슬림들에 의하여 침략당하고 압제당하고 징벌 받아야 한다:

 

“알라가 외곽으로부터 그들의 (통치하에 있는) 영토를 좁히어 가면서 멸망시키고 있다는 것을 불신자들은 알지 못하느뇨?”(13:41 - 또한 21:44을 보라)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방향으로부터 점차로 징벌을 내릴 것이니라”(68:44)

 

“그리하여 그들의 땅과 그들의 집과 그들의 재산과 너희가 보지 아니한 대지를 너희에게 상속하여 주었나니 실로 알라는 모든 일에 전지전능 하심이라”(33:27, 또한 Bukhari 53:392를 보라)

 

알라는 무슬림들에게 모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위와 권력을 줄 것이다:

 

“너희 중에 믿음을 갖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알라는 약속 하셨나니 이전에 그들에게 부여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지상을 다스리는 힘을 주실 것이요 그들을 위하여 선택한 종교를 확립하여 주실 것이며...”(24:55)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이 예언을 스스로 이행하여 공격적이고 무자비한 군사적 팽창으로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시체들의 대열을 만들었다)

 

알라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하는 불신자들을 다루는 방법을 무슬림들에게 제공한다:

 

“그대의 알라께서 천사들에게 (말씀으로) 이르시길 내가 너희와 함께하여 신앙인들에게 확신을 주고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때리고 그들 각자의 손가락을 잘라내라 그것은 그들이 알라와 선지자를 거역했기 때문이라 알라와 선지자를 거역하는 자에게는 알라께서 무거운 벌을 내리시리라”(8:12-13)

 

비-무슬림들을 패배시키는 것이 진실한 믿는 자들에게는 쉬운데 무슬림들이 지성과 이해력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선지자여 믿음으로 싸움에 임하는 자들에게 힘을 북돋우라 너희 가운데 이십명이 인내한다면 이백명을 물리칠 것이며 너희가 백명이라면 천명의 불신자들을 물리치리니 그들(불신자들)은 우매한 백성이니라(8:65)

 

폭력에 관한 다른 구절들은 여기에 있다.

꾸란은 이슬람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다고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또한 불신자들에 대하여 공격적인 무슬림들 자신들에게 적용된다. 이슬람을 위하여 살해하거나 살해당하는 자들은 알라를 더 많이 기쁘게 한다:

 

“아무런 장애도 없이 남아있는 믿는 자와 싸움에 출전하여 재산과 생명을 바치며 싸우는 투사들이 같을 수 없거늘...”(4:95)

 

결론

 

무슬림 역사와 불신자들을 향한 현시대의 태도에서 지속되고 있는 인간고통을 무시하는 폭력과 공격적 성향이 꾸란에 담긴 메시지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우월성과 거만함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무슬림들이 지배하는 지역은 비-무슬림들에 대한 압박과 차별에 의하여 특징이 나타나며 반면에 보다 큰 사회 내부의 무슬림 소수그룹들은 다양한 정도의 변덕스러운 요구와 내분과 무장폭동에 의하여 구별된다. 이 뻔뻔스러운 이중 기준에 불편해하는 무슬림들은 거의 없는데 이슬람의 권력의 지위를 의지하여 이 기준으로 이슬람은 피해자를 만들어 내거나 미안해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데-그 이유는 분명하다.

이슬람은 불신자들의 역할이 무슬림들의 지위에 종속되는 우월한 사상이다. 이슬람의 지배에 저항하는 자들은 그들이 살해되거나 완전히 비참해져서 이슬람으로 개종함으로 그들의 열등한 지위를 인정하게 되거나 인두세를 지불하고 그들의 종교가 종속되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무슬림들과 싸우게 된다.

지구상에 자기들의 구성원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이렇게 분명하게 구분하거나 또는 그것의 교리를 따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저주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는데 그것의 가장 거룩한 경전을 그렇게 많이 할당하는 다른 종교는 없다.

이슬람 테러리즘과 보다 광범한 무슬림 공동체의 폭력에 대한 전체적인 무관심에 관한 많은 것이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의 오토만 제국 또는 사담 후세인과 같은 아랍 독재자들 아래서 이상하게도 복종하는 것을 참은 반면에 이웃 유대인 국가는 맹렬하게 반대하였던 것과 같이- 단지 이슬람의 이 이중적인 본질에 대하여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옹호자들이 이슬람은 사랑과 자비를 가르친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만 그들은 이것이 무슬림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을 대우하는데만 적용된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지 않는다. 자체의 동일한 정체성 집단에 대한 충성은 모든 것 이상으로 가치가 매겨지며 이슬람 외부의 사람들에 대한 동정은 기껏해야 선택사항이며 - 그리고 장소에 따라 명백하게 거부되기도 한다.

만약 이것이 오늘날의 “과격주의자들”에 의한 이슬람에 관한 “오해”라면 그 오해는 또한 이슬람의 창시자가 만든 실수이다. 무함마드 당시 비-무슬림들은 단지 새로운 종교 이슬람과 이슬람의 스스로 선포한 선지자에 거역하여 말하는 것에 대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마찬가지로 Qurayza 유대인 부족은 비록 그들이 전투에서 싸우지도 않았지만 무함마드의 명령에 따라 체포되어 즉결처분으로 처형되었다. 비-무슬림들의 생명은 값싸기 때문에 무슬림에 대한 실제적인 육체적 손상은 무함마드의 모범에 따라서 살인을 정당화할 필요도 없었다.

꾸란은 그것에 의하여 우리가 증오의 발언으로 정의하는 모든 기준을 총족시킨다. 그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강한혐오와 무시를 선동할 뿐 아니라 확립의 수단이 폭력에 의거할 지라도 꾸란은 이슬람의 우월성을 명령한다.

무함마드는 그의 말년에 다른 부족들과 종교들을 복속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칼로 위협하여 이슬람으로 “초청”하고 어째든 그들이 공물을 바치도록 강제하는 군사작전을 지휘하였다. 무함마드 사후 단지 50년 안에 세계의 주요 종교 5개 모두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는 공격적인 군사 작전을 그가 처음 시작하였다.

이슬람은 무슬림이 같은 무슬림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사형으로 처벌될지 모르지만(Bukhari 83:17) 무슬림이 비-무슬림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사형을 당하는 무슬림은 없다(Bukhari 83:50, 3:111)는 가르침에 의한 가장 분명한 방법으로 비-무슬림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절하를 구체화한다. 성별과 종교와 지위에 근거하여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할당하는 꾸란의 “평등의 법”은 그러한 차별을 이상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서방세계 자유적 전통에 의하여 의도되는 감각에서의 평등과 정반대이다.

창조적인 번역과 길고 복잡한 설명 또는 노골적인 부인으로 꾸란의 거친 표현들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옹호자들을 항상 발견할 수 있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항상 이슬람의 피해자들과 연결하지 않는 이슬람의 이미지에 대한 이해관계를 속이며-적어도 같은 감각의 긴급성을 가지지 않으며-그러므로 요점을 증명한다.

물론 이슬람의 우월성에 동의하지 않으며 진지하게 세속주의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지지하는 예외적인 무슬림들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독립적인 믿음을 지지하는 그러한 구절들 또는 단편들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꾸란은 전체적으로 항상 끊임없는 도전이 될 것인데 꾸란은 비-무슬림들의 뚜렷하고 열등한 지위를 명백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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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poppy 2014-06-1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너무 길어서 의도가 지나친...

햇밤 2017-02-26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도 그렇다고 말해보세요. 이 책은 이슬람이 우월하고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911테러가 자행된 것이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나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글쓴 분이 쓴 모든 말은 성경에도 그대로 나와있습니다. 지난 수천년간 그리고 현재까지도 기독교 교리로 인해 자행 된 테러 및 마녀사냥, 전쟁은 어떻게 볼 것이며 기독교는 당신한테 무슨 이미지입니까? 그런 논리로 따지자면 이세상의 모든 종교의 이미지는 과격 테러단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네요. 무슨 이미지에 대한 이해관계를 속이는건지...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모습이 어떻게 책 읽는 사람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종이달 2021-08-25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톡톡 이슬람
이희수 지음 / 검둥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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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서 유학하였고 한국이슬람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슬람학자로서 이슬람의 입장을 대변하여 이슬람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도 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이슬람의 실체를 감추고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 지금도 우수한 문화로(중세기에는 우수했을지 모르지만) 옹호하고 있다. 이 책에 나타난 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몇가지 짚어 보겠다.

 

이 책의 서문인 들어가는 말 중간부분에서 "우리는 이슬람 세계와 그들의 삶을 신앙이 아닌 문화로 바라볼 것입니다. 종교적 신앙으로 다른 세상을 보면 자신의 신념만이 진리이고 선인 반면 다른 종교적 가치와 가르침은 악이고 허위라는 이분법적인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나와 다른 세상 사람들이나 문화들이 모두 악마처럼 보이면 큰일이잖아요?"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슬람을 단순한 문화로 볼 것을 주문하며 독자를 기만하고 있다. 독자들이 주의 할 것은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 또는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슬람은 사상 즉 공산주의, 나치주의, 파시즘과 같은 이데올로기이다.

다시 말해서 이슬람은 정치(사상,국가), 경제, 종교, 문화가 하나로 뭉쳐진 것인데 이것을 저자는 이 책 다른 곳에서 슬며시 나타내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기술인195p 끝부분에 "왜냐하면 정치와 경제, 종교가 잘 결합된 이슬람 시스템이 이전의 힌두교나 불교보다 나라를 다스리기에 횔씬 유리했기 때문이다."라고 인도네시아 이슬람을 기술하면서 이슬람이 단순한 종교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이어서 196p에 "'정치 경제 종교'라는 삼총사가 기가 막히게 결합한 것이 동남아시아 이슬람의 성공이라고 볼 수 있지. 그런 배경 때문인지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아 이슬람 문화는 매우 부드럽고 융통성이 많으며 토착 종교하고도 잘 지내는 전통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기술하고 64p의 이집트에 대한 기술에서 "수백년간 함께 이웃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불편함보다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협력의 정신이 훨씬 강합니다.어차피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같은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형제의 종교라는 생각을 합니다."라고 기술하며  207p에서 "이슬람교를 믿고 있음에도 다른 종교와 신앙들도 함께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참 멋져 보였다."라고 기술하며 현재 무슬림이 대다수인 국가에 살고 있는 소수 종교의 비-무슬림들을 이슬람이 박해하는 상황을 기만하고 있다.

그리고 221p 한국여행 부분에서 한국에 무슬림이 늘어나는 다문화 상황을 아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데 한국에 이슬람을 제외한 다문화 상황은 괜찮지만 이슬람 국가에서 들어오는 무슬림들로 다문화가 되는 것은 종국에는 좁은 한국에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고 나중에는 무슬림들이 자치를 요구하고 더 나중에는 좁은 땅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게 될 것이 유럽과 동남아시아의 태국, 필리핀의 상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슬람이 단순한 종교가 아닌 이데올로기라는 것과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무슬림 국가에 살고 있는 소수의 비-무슬림들의 상황에 대한 아래의 자료를 보라.

 

 

 

이슬람에 대한 서방세계의 경계 필요성

 

글쓴이: 거트 윌더스 (2012-07-01 07:29)

 

몇 시간 전에 거트 윌더스는 콜로라도 덴버에서 서방세계 보수주의 정상회담에서 연설하였다. 다음은 그의 연설의 전체 원고이다.

저를 서방세계 보수주의 정상회담에 초청해주신 친구들과 신사숙녀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미국에 오는 것은 항상 즐겁습니다. 저는 이슬람에 관하여 그리고 미국과 유럽에 대한 이슬람의 위협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나의 친구인 국회의원 Michele Bachmann을 만나기 위해 몇 주 전에 여기에 왔습니다.

서구의 관문인 덴버에 왔다는 것도 즐겁습니다. 여기는 개척자 정신이 아직도 살아 있는 미국 보수주의의 심장입니다.

제가 안타까운 시점에 왔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엄청난 산불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수 천 명이 대피하였으며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이 호텔에 머물고 있습니다. 집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손실은 적은 것입니다. 저는 이 재난으로 상심하신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산불로 생명을 잃은 분들의 가족들에게 조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덴버의 시민들이 피해자들에게 전한 도움과 연대감에 감동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위대하고 관용이 많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덴버는 콜로라도 기독교 대학과 “신앙, 가문, 자유”를 모토로 하는 100주년 연구소의 고향으로도 유명합니다. 여러분들의 모토는 여러분들이 우선권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 가문, 자유는 우리 기독교-유대 문명의 기둥들이고 옹호되어야 합니다.

유럽과 특히 나의 조국 네덜란드의 상황에 대하여 여러분들에게 오늘 강연하도록 초청받은 것에 대하여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상황은 여러분이 경계하지 않으면 미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경고도 될 수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의 동료 시민들이여 영원한 경계는 자유의 대가이고 여러분들이 그 축복을 지키기를 원한다면 그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먼저 나 자신의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서방 유럽에서 17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작은 나라 네덜란드의 하원의원 150명 가운데 한명입니다. 저는 자유당의 지도자입니다. 제가 소속한 당은 네덜란드 의회를 대표하는 11개 정당들 가운데서 세 번째로 큰 정당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에서 이 정치인의 삶이 여러분들의 의회의원들의 삶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난 8년 동안 저는 경찰의 24시간 감시 하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사복차림의 경찰들이 저와 함께 갑니다. 저는 방탄으로 아주 잘 보호된 정부의 안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경광등이 번쩍이는 경찰차를 타고 정부의 안가에서 네덜란드 의회로 출근합니다.

저는 지난 8년 동안 혼자서 거리를 걸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가끔 식당이나 영화관에 갈 때는 경찰이 먼저 모든 것을 검사합니다. 나의 아내와 나는 단지 암살에서 안전하기 위하여 군대막사나 감옥과 같은 곳에서 살았습니다.

왜 내가 이 보호가 필요합니까? 저는 대통령 또는 왕이 아니고 의회의원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슬람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죽음에 처해있습니다. 2004년 11월 초에 한 이슬람 광신자가 데오 반 고호가 이슬람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하였을 때부터 경찰의 보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데오 반 고호는 암스테르담 거리에서 벌건 대낮에 살해되었습니다. 몇 시간 후에 경찰은 저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는 암살범이 쓴 편지를 발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 일이 이러한 죽음의 위협을 받을 만한 일인가? 저는 이슬람에 대한 나의 관점을 솔직하게 말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나의 관점은 이슬람은 종교이기 보다는 주로 전 세계를 지배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전체주의 사상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기 싫어합니다. 그것은 이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이 살해하려고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암살 대상이 된 유일한 사람이 아닙니다.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 스칸디나비아 만평가 커트 베스테르가르드와 라스 빌크스가 모두 암살공격의 피해자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로 자유를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그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미 이슬람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중동과 북아프리카와 페르시아와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사람들과 같이 우리는 이슬람의 희생자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그것이 내가 과거에 이야기했던 이유이고 현재 내가 이야기하고 앞으로도 내가 계속해서 이야기할 이유입니다. 저는 유럽도 미국도 이슬람화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제가 무슬림들과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를 원합니다. 많은 온건한 무슬림들이 있습니다. 저는 항상 사람들과 이데올로기 사이를, 무슬림들과 이슬람 사이를 구별합니다. 많은 온건한 무슬림들이 있지만 온건한 이슬람이라는 것 따위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이슬람이 있고 그것은 위험한 이데올로기입니다. 이슬람은 관용하지 않으며 폭력적입니다. 이슬람은 관용되어질 수 없으며 억제되어야 합니다.

유럽에서 이슬람이 사회에서 더 강력해지면 -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온건하더라도- 사회는 보다 덜 자유롭게 되고 비-무슬림들에 대하여 보다 더 관용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2008년 말에 제가 워싱턴의 그의 사무실을 방문하였을 때 만났던 마이애미의 토박이이며 이 위대한 도시의 거주자인 전 의회의원 톰 탄크레도는 마이애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마이애미에 일어난 것들을 봐. 마이애미는 제 3세계 국가가 되었어. 당신이 미합중국 안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모를 거야. 틀림없이 당신이 제 3세계 국가 안에 있다고 말할 거야.”

그와 동일한 상황이 유럽에도 적용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도시들의 어떤 부분들은 더 이상 유럽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카이로(이집트의 수도), 라바트(모로코의 수도), 알제(알제리의 수도), 다마스커스(시리아의 수도), 메카(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성지)와 같습니다.

무슬림 인구가 도시지역에 집중되면서 많은 유럽의 도시들이 매우 많은 이슬람 인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머리 스카프와 부르카와 일부다처 제도와 여성할례와 명예살인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30년 동안 유럽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였습니다. 유럽은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수백만의 사람들이 유럽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의 유대-기독교적이고 인도주의 전통과 완전히 다른 문화에 뿌리를 가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유럽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전통과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번영과 우리의 문화가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미국인들은 아직도 유럽을 관광여행이나 그들의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로부터 들어 아는 지역으로 믿을 것입니다. 이 유럽은 지금 사라지기 직전입니다.

이탈리아의 작가 오리아나 팔라치는 2006년 그녀가 죽기 직전에 “우리의 도시들 각 지역 안에 제 2의 도시가 있는데 국가 안에 국가가 있고 정부 안에 정부가 있다. 코란에 의하여 통치되는 무슬림 도시이다.”라고 글을 썼습니다.

아마도 많은 미국인들은 이민이 미국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이민이 본질적으로 국가에 좋은 것으로 볼 것입니다. 이전에 미국으로의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미국과 같은 유대-기독교 전통을 가진 대륙인 유럽에서 온 반면에 유럽의 현재 이민자들은 우리와 공통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조적으로 우리 사회의 이슬람화는 우리의 서방세계 유대-기독교적 가치들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테러리즘이나 폭력의 위협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비폭력적인 지하드 현상도 있습니다. 유럽에서 증가하고 있는 독단적인 이슬람의 로비는 성공적으로 유럽 정치인들을 압박하여 이슬람을 옹호하는 정책을 적용하고 이슬람 샤리아 법의 요소들을 채택합니다.

이슬람의 요구에 따라 그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특히 젊은 사람들 가운데 그렇습니다. 15살의 독일 무슬림들 가운데 40%가 이슬람이 민주주의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무슬림 대학생들 가운데 40%가 샤리아 법을 지지합니다. 그러한 학생들의 세 명 가운데 한명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의 증가는 또한 우리의 사법제도 내에서 샤리아 법의 증가를 의미합니다. 유럽에서 우리는 샤리아 유언, 샤리아 학교, 샤리아 은행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샤리아 법 요소의 도입은 합법적인 차별대우 시스템을 만듭니다. 샤리아 법은 체계적으로 사람들의 집단을 차별합니다. 약간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영국에는 공식적인 샤리아 법정이 있습니다. 이 법정들 가운데 하나가 재산이 그의 자녀들에게 분배되어야 하는 사람에 관련한 유산분규를 해결하였습니다. 이 법정은 여자는 단지 남자의 절반의 가치를 가진다는 코란의 견해에 따라서 아들들에게 딸들의 두 배를 주었습니다.

나의 조국인 네덜란드에서 -믿기 어렵지만 슬프게도 사실이라는 것을 제가 아는데- 네덜란드 법정에 의하여 샤리아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치입니다. 우리 문명에서 남자와 여자는 법 앞에 평등하게 대우되어야 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실수하지 마십시오. 이슬람은 미국을 향하여 오고 있습니다. 정말로 이슬람은 이미 와있습니다. 여러분의 나라도 역시 스탤스 지하드에 직면하고 있는데 -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샤리아 법을 도입하는 이슬람의 시도입니다. 이슬람은 무슬림을 위한 분리된 캠퍼스 기숙사를 요구합니다. 이슬람은 여성만의 체육수업과 수영장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학교는 크리스마스 기념행사를 금하고 있으며 무슬림 학생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학교 식당 메뉴에서 돼지고기를 제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정들은-미국에서도 우리가 플로리다에서 예를 보았듯이-샤리아 법 적용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작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슬람화를 막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문화, 우리의 민주적인 헌법국가,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문명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잃을 것입니다. 유럽에서 우리는 이미 이슬람을 비판하는 자유인 언론의 자유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필요한 것은 저항정신입니다. 악에 저항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의무입니다. 이 저항은 이슬람의 피해자들인 모든 기독교인들, 모든 유대인들, 모든 비-무슬림들, 모든 무슬림 배교자들, 모든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단결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집트의 콥틱 교도들과 레바논의 마론파 교도들과 이라크의 앗시리아인들과 그밖에 나이지리아의 용감한 기독교인들과 같은 이슬람 세계의 기독교인들의 운명을 본다면 이슬람이 우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매일 이슬람 국가들에서 교회들이 방화되고 기독교인들이 암살됩니다. 소위 온건한 국가들인 터키와 인도네시아에서도 기독교인들은 매일같이 차별과 굴욕에 처해있습니다.

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고통의 원인은 이슬람입니다. 눈물의 강물이 중동에서부터 흐르는데 거기에는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유일하고 안전한 피난처가 있습니다. 진실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기에 안전한 중동에서 유일한 곳은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받아 마땅한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은 탄광 안에 카나리아입니다. 이스라엘이 평화스럽게 존재할 수 없다면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두에게 안전한 피난처입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한 어둠의 지역에서 신호등불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우리도 역시 그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우리의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이 밤에 군대에 있는 그들의 아들들을 염려하기 때문에 서방세계의 어머니들이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입니다. 소위 이슬람의 이스라엘에 대한 “성전”은 우리 모두에 대한 전쟁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을 지지해야 합니다.

2008년 3월에 저는 네덜란드에서 이슬람화의 위험과 코란에 관한 15분 짜리 다큐멘터리인 Fitna를 공개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미국 상원의 동료 의원들에게 Fitna를 보려주기 위하여 상원의원 Jon Kyl에 게 초청받은 반면에 저의 영화의 상영이 유럽의회에 의하여 금지 되었습니다. 영국정부는 제가 영국 상원에서 Fitna를 보여주기 위하여 초청된 그 날에 영국에 입국하는 것을 금지까지 하였습니다.

2008년 말에 네덜란드에 있는 좌익과 자유주의와 이슬람 조직들이 Fitna 때문에 저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들은 집단모욕과 증오와 차별을 선동한다는 혐의로 저를 고소하였습니다. 저는 이슬람에 관한 나의 의견을 말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모든 혐의에 대하여 무죄가 입증되었지만 합법적인 고생이 거의 3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의회에 소속된 자가 재판에 대응하기 위하여 3년을 보냈다는 것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엄청난 시간과 정력과 돈이 소요되었습니다. 내가 무슬림들이 아닌 이슬람을 비판하였고 선거에서 선출되어 공개토론에 참여하는 정치인으로서 저에게 모든 시민들보다 더 큰 언론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법정은 저를 결국 무죄 처분하였습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친구 여러분 서방세계가 어떻게 현재의 상황을 헤져나가야 하는지 우리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리석게도 다문화주의 사상을 채택했기 때문에 그것은 부분적으로 우리의 잘못입니다. 저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말하기 위하여 “다문화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유럽과 오늘의 미국에게 까지도 가장 큰 병입니다. 이것은 모든 문화는 같다는 미친 생각입니다. 물론 문화들은 같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와 인도주의에 근거한 우리 문화는 훨씬 좋으며 이슬람 문화에 비하여 휠씬 우수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서방세계를 날로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정부 지도자들, 법률가들, 판사들, 교회들, 노동조합들, 미디어, 학계, 자선단체들- 그들 모두가 정치적 올바름에 의하여 눈이 가려지고 이슬람을 용인하고 있습니다. 문화적 상대주의의 결과로 자유서방세계가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다문화주의는 재난입니다. 다문화주의는 관용과 같은 우리의 핵심 가치들을 위협하는 사상인 이슬람을 촉진시키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에 다문화주의는 그러한 엄청난 재난입니다.

다문화주의는 동화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경계를 열게 만들었습니다. 다문화주의는 불관용을 관용하게 만들었고 지금은 불관용이 관용을 전멸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이상 관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보존의 이름으로 우리의 가치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국가들에 들어오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친구 여러분 저는 비관론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행동한다면 -유럽에서도- 그 흐름을 아직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취하여야 할 네 가지 수단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위기상황을 말해야 합니다. 서구유럽에서 언론의 자유는 이슬람을 따르는 자들과 그들과 협력하는 자들의 요구로 제한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모욕을 받는다면 그것은 예술의 형태로 여겨지고 이슬람이 모욕을 받는다면 그것은 증오할 범죄입니다.

우리의 언론의 자유 침식이 우리가 이슬람을 수용하기 위하여 지불하여야 하는 대가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이슬람이 문제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문제들을 토론하고 진실을 말하는 권리를 우리에게 주지 않을 우려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우선되고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우리가 진실로서 보는 것을 말하는 권리를 지킵시다. 그것이 유럽에 있는 우리가 미국의 예를 따르고 유럽헌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진실을 이야기할 권리를 가졌다면 우리는 그 권리를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권리는 미국에 있는 여러분도 해당됩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편할지라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을지라도 진실을 말하십시오. 진실은 타협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종식시켜야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하고 누가 우리가 아닌가를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유대-기독교 가치들은 이슬람의 가치들 보다 훨씬 좋고 우수하다고 자랑스럽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이슬람화의 진행을 중지시켜야 합니다. 이슬람이 더 많이 확장 될수록 더 관용이 없어지는 것이며 샤리아 법이 더 많이 확장 될수록 더 자유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이민을 중지시켜야하며 범법자인 이민자들을 추방하여야하며 새로운 모스크의 건설을 금지하여야 합니다. 서방세계는 이미 이슬람이 너무 많습니다.

넷째로 우리 국가들 안에서 다시 자긍심을 가져야합니다. 이민자들이 우리의 가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그 반대는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향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도상의 한 장소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고향은 가치의 공동체, 사상과 이상의 공동체를 향한 우리의 소속감입니다.

친구 여러분 여러분과 나,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인 우리는 공동의 서방 문화에 소속합니다. 우리는 공동 유산의 가치들과 이상들을 공유합니다. 우리 국민들과 우리 고향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의 유산을 우리 자녀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네이숀의 이슬람의 제복 안으로 흡수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우리의 문명을 지켜야 합니다. 로널드 레이건은 “미래는 용기 없는 자에게 속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레이건이 옳습니다. 우리는 용감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체주의에 의하여 가라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가문, 우리의 자유를 보전하는 것은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빚졌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굳건히 서야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슬람에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의 유대-기독교 유산을 가지고 살아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할 것입니다.

진실을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원문출처 http://www.brusselsjournal.com/node/4956

 

 

이슬람 세계의 기독교인들

 

글쓴이: Patrick Sookhdeo


 

우리는 원하는 데로 우리의 종교적 믿음을 따르는 것이 자유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오늘날 이슬람 국가들에서 살고 있는 많은 우리의 형제자매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과 두려움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들은 점차 자신들의 권리가 줄어들고 있음을 느끼고 가난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의 두려움에 빠져있다.

오늘날 세계의 주요 무슬림 국가들에서 소수그룹으로 사는 기독교인들이 4000만 명 정도 된다. 세계의 일부분에서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소수그룹은 상당한 규모를 가지고 있는데 적어도 1500만 명이 인도네시아, 약 900만 명이 이집트, 300만 명이 파키스탄에 있다. 다른 곳의 예를 들면 몰디브는 나라 전체에 수 십 명의 내국인 기독교인들이 남아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국가들에서는 내국인 기독교 신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비밀로 하여야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처형된다. 이러한 나라들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슬림 국가들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이등 시민으로 대우된다. 그들은 교육과 고용에 있어서 그리고 경찰과 법원에서 조차도 빈번한 차별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멸시받고 신임을 받지 못하며 때로는 그들의 충성의 우선을 자신들의 조국에게 보다 서방 “기독교인”에게 주는 것으로 의심을 받는다. 이것의 근거는 이슬람의 전통적 가르침에 있는데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성서의 백성-은 무력에 의하여 복속되어야하며 지츠야(jizya)라는 특별한 세금을 내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꾸란 9장29절은 무슬림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선지자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그들에 대항하여 성전하라 그들은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낄 것이라.

이 항복한 사람들을 딤미스(dhimmis)라고 부른다. 지츠야를 포함하여 딤미스에게 부과되는 다른 많은 조건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의 대부분이 그들의 열등한 지위를 강조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이러한 규정들이 오늘날에는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지만 그 전반적인 마음자세는 무슬림 세계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기독교인들은 고용과 교육에 있어서 그리고 경찰과 법원에서 또 그 밖에 다른 사회적 상황에서 자주 차별대우를 받는다.

일부 국가들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차별이 법으로 규정되어있다. 그 밖의 국가들에서 공정한 법과 헌법에 의한 권리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와 사회는 그들을 불공평하게 대우한다. 예를 들어 이집트에서는 종종 그 두 가지가 합하여진다. 이집트 기독교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교회 건물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기위하여 대통령에게 직접 허가를 받아야 하며 그 과정은 여러 해가 걸리고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기존의 교회 건물을 수선하기 위한 허가조차도 받기 어려운데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건물은 자주 공격을 받는다. 기독교인들은 지방의 상 이집트 무법지역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로 부터 자신들과 가옥들과 경작지에 대한 많은 폭력에 직면하고 있으며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지츠야를 낼 것을 요구한다. 정부는 이러한 무장단체로부터 기독교인들을 보호할 의지가 없는 듯하다.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은 두 가지 특별한 약점이 있다. 첫째로 그들은 소위 신성모독법이라고 부르는 법아래서 거짓고소에 대단히 취약하며 그 법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비록 아무도 아직 처형되지 않았지만 이법에 의하여 악의적으로 고소된 몇 명의 기독교인들이 열성적인 무슬림 개인들에게 살해되었는데 그들은 이것이 알라를 기쁘게 한다고 믿는다. 둘째로 이슬람 재판 제도에서 기독교인의 증언은 무슬림의 증언만큼의 중요성을 가지지 못하며 기독교인을 아주 불리한 위치에 놓게 만든다.

나이지리아에서 기독교인은 무슬림 인구보다 약간 많지만 남부에 집중되어 있고 무슬림은 북부에 집중되어 있다. 중간지역에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인구가 비슷하다. 2000년부터 북부와 중간지역의 주들이 완전한 이슬람법(샤리아)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주에 사는 기독교인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교회건물과 기독교 학교와 여성의 의상과 대중교통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 다양한 제약과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게다가 많은 폭동이 있었는데 이 폭동에서 수 천 명의 기독교인이 살해되고 수 천 명 이상이 집을 잃어 버렸고 많은 교회가 파괴되었다.

보다 더 큰 규모의 반기독교적 폭력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슬림 인구를 가진 인도네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일어났다. 수년전까지 이 나라는 두 공동체 사이에 진정한 평등과 평화로운 기독교인과 무슬림 관계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부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직적인 대학살 운동에 있어서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목표가 되었다. 처음에 그 공격이 대부분 Malukus지역에서 발생하였고 그 다음에 폭력의 주요지역이 Sulawesi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지금은 서부 Papua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마을이 연이어 불에 타 없어지면서 수 천 명의 기독교인이 살해되었고 약 5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칠천 명의 기독교인이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되었다. 이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새로운 믿음에 대한 표시로 강제로 할례를 당하였다. 이 할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보통 소독 또는 마취도 없이 행하여졌다.

수단정부는 이슬람화와 아랍화를 위한 그들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남부 수단의 아프리카 기독교인과 정령신앙교도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였으며 무자비한 전쟁이 1983년에 시작된 이후 남부의 모든 기반시설이 파괴되었다. 몇 개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진정한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수 백 만의 남부주민이 북부로 이웃나라로 피하였다. 북부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여러 가지로 차별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사는 빈민굴은 자주 불도저로 밀어지며 트럭에 가득 실려진 기독교인들은 음식과 물 또는 쉼터도 없이 사막에 강제로 버려진다. 많은 기독교인이 또한 아랍 무슬림들에 의하여 노예로 된다. 수단은 작년 2011년 7월 9일 기독교계인 남수단 공화국이 분리 독립하였는데 아직도 이슬람계인 북수단과 접경지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

세계무역센터와 미국방성에 대한 2001년 9월 11일 테러공격과 그 결과로 미국이 주도한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공격인 “테러와의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무슬림 세계에 사는 기독교인의 상황이 보다 긴장되고 위험하게 되었다. 그들은 무슬림들이 미국에 대하여 느끼는 분노를 발산할 수 있는 손쉬운 지역 목표물이다. 2001년 9월 11일이 지나고 나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수많은 공격이 세계도처에서 일어났다. 예를 들어 9월 20일에 파키스탄에서 13살의 기독교인 노점상이 그로부터 음식을 사고 값을 치루지 않는 무슬림 갱에 의하여 맞아 죽었다. 그들은 그에게 “값을 미국에서 받아라”라고 말하였다. 케냐 Isiolo에 있는 두 교회는 9월 26일 불타버렸고 “알라는 위대하다”와 “우리는 미국을 경멸한다”는 문구가 타고 남은 것에 새겨져 있었다. 10월 8일에 이스라엘에서 이슬람에서 개종한 기독교인이 오사마 빈 라덴을 따르는 자에 의하여 칼에 찔려 죽었는데 그자는 “너는 배신자다!”라고 외쳤다. 10월 23일에 말레이시아에서 국가복음 기독교 협회의 본부에서 8명의 기독교인 직원이 백색가루가 든 봉투를 만진 후에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가루는 도발적인 편지와 같이 우송되었는데 그 가루는 탄저균이었고 직원들의 죽음과 그들 사무실의 파괴와 기독교인 모두에 대한 저주를 약속하고 있었다. 이라크에서 일부 기독교인이 정부 식량 배급에서 제외되고 대신에 식량을 미국에 달라고 하라는 말을 모욕적으로 듣고 있다는 것이 보고되었다. 그들은 두려워서 공공장소에서 더 이상 십자가를 몸에 착용할 수 없다. 10월 28일에 주일 예배에서 15명의 기독교인이 Bahawalpur에 있는 그들의 교회에 난입한 이슬람주의자 총잡이들에게 사살되었다. 그 괴한들은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은 기독교인들의 무덤이다,” “알라는 위대하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외쳤다. 2003년 이라크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00만 명에 달하였던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의 박해로 인하여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로 피하여서 전쟁이 끝난 지금은 그 절반인 약 50만 명이 남아있다. 파키스탄의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공습에서 죽은 모든 무슬림을 위하여 두 명의 파키스탄 기독교인이 살해되어야한다는 화트와(fatwa; 이슬람 종교지도자의 명령)를 발표한 몇 주 후에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이러한 9.11 직후에 일어난 이러한 공격들은 강도에 있어서 증가하고 있고 많은 서방세계 사람들과 선교사들이 내국인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목표물이 되고 있다.

이슬람 국가에 사는 기독교인 소수그룹에 대한 미래의 희망이 있는가? 지난 20년간의 추세는 지속적으로 그들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의 잠식과 압제와 차별과 폭력의 증가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일반적으로 서구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세계에서 대부분 주목받지 못하였다. 무슬림 국가들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지역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그들의 기독교인 형제자매들에 의하여 자신들이 잊혀지고 있다고 느끼며 이것은 그들에게 고통과 절망을 더할 뿐이다.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아마도 9.11 사건으로부터 초래된 이슬람 안에서의 새로운 이해관계로 인하여 14세기 동안 계속된 이슬람 치하에서 고통 받는 교회의 참상을 보다 널리 알리고 또한 이슬람을 혁신으로 인도하여 중세기 이후 변함없이 남아 있는 이슬람의 현재의 법과 가치를 인권과 종교적 자유의 근대적 기준을 향하여 개선하게 만드는 토론의 장을 만들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원문출처: The myth of islamic tolerance; how islamic law treats non-muslims, 252p-256p

 

25p에서 "꾸란에서도 남녀는 평등하게 창조되었다하고 남성과 여성의 독특한 역할을 인정했는데"라고 기술하고 118p에서도 "한 예로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서 양성평등을 가르치는데 여성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낡은 제도를 없앤 것이지."라고 기술하고  203p에서 "이슬람에서 여성의 차별 문제는 반드시 종교적인 영향으로 보기 힘들 것 같구나"라고 기술하고 이어서 "우리나라도 여성들의 취업 비율만 놓고 본다면 선진국 중 하위권이지 않니?"라고 기술하는데 우리나라 여성취업율은 모든 이슬람 국가보다 도 더 높다.  그리고 꾸란은 남녀가 평등하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을 이슬람 학자로서 저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꾸란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열등하며 남편들은 그들을 때릴 권리를 가지며(꾸란 4:34) 여자들이 남편들에게 불순종하면 지옥에 갈 것 이라고 말한다.(꾸란 66:10) 꾸란은 남자들은 여자들에 우선한다고 말한다.(꾸란 2:228) 꾸란은 유산상속에 있어서 여성의 평등권을 부인할 뿐 아니라(꾸란 4:11-12) 여성들을 바보로 여겨서 여성의 증언만으로는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규정한다.(꾸란 2:282) 이것은 강간당한 여성이 남성 목격자가 없으면 그녀의 강간범을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을 의하는데 이것은 물론 농담이 아니다. 강간범은 목격자가 있는데서 강간하지 않는다.

 

25p 그 아래 부분에서 "세계 최대의 이슬람 인구를 가진 인도네시아에서는 여성인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되었고,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터키 등에서도 국민이 여성을 수상으로 선출했거든."이라고 기술하고 

44p에서 "국민선거를 통해 여성 대통령을 선출하고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터키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도 국민이 직접 선출한 민선 여성총리가 배출되었단다."라고 기술하고 203p 아래 부분에서도 이슬람국가 출신 여성지도자들을 언급하며 이슬람 국가도 여성을 존중한다고 주장하는 데 파키스탄의 부토 수상은 여자는 이슬람 국가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이슬람 과격분자에 의하여 암살되었음을 저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57p에서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의 독재 때문에 이란 국민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폭력에 저항하고 민중을 위해 싸우며 이란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준 사람이지."라고 기술하고 76~77p의 이란에 대한 기술에서도 이슬람의 신정정치를 찬양하고 이란의 회교혁명 지도자 호메이니를 팔레비 국왕의 폭정에서 국민을 구한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 국민들의 삶은 신정정치로 인하여 아주 피폐해졌음을 다음 논문으로 알 수 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기독교 선교에 미친 영향

 

글쓴이 : 이만석 날짜 : 2007-04-08

 

들어가는 말

 

이란이 자랑하는 회교 혁명이 기독교 선교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이란의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선교한 사람이 누구냐를 상의하는 이란 목회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이이러니칼 하게도 최고의 표를 받은 사람은 회교 혁명을 성공시킨 호메이니 옹이었다. 그가 일으킨 회교 혁명으로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란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성도들의 눈물과 헌금과 기도로 지은 엄청난 건물들과 재산 장비등을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간 선교사들의 아픈 마음을 생각해볼 때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소에 부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회교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팔레비 왕정이 그대로 지금까지 존속되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란에 들어가서 활동을 보장받으며 사역을 해왔다고 할지라도 지금 이란에서 이러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국민들의 열린 마음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치된 중론 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이란에서 회교 혁명이 가지는 의의

이란 정부가 자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 것은 20세기 후반(1979)에 팔레비 왕정을 몰아내고 회교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이란 정부는 이 회교 혁명을 온 세계에 퍼뜨리는 것이 자신들의 존재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시야파 이슬람은 항상 소수로 핍박 받으며 살아왔다. 그들이 모하람 달에 외치는 여! 호세인 이라는 외침 속에는 순니파에게 몰살당한 시야파의 세 번째 이맘 호세인의 일가족에 대한 비통한 마음과 그 후로도 계속 소수파로서 다수파인 순니에 항상 억압당해 왔던 원한과 울분을 국가적인 행사로 승화시켜 지켜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때 세계를 지배했던 거대한 국가인 이란이라는 나라를 회교 혁명을 통해서 자신들의 장악 하에 둠으로 이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위치에 올랐고 순니파를 향해서 거의 대등한 위치에서 자신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사실 인구 7천만의 대국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이슬람의 종주국이라고 자랑하고 큰소리 치던 사우디 아라비아와 인구 비례로 볼 때 두 배 이상의 국력을 가지는 것이 되었다. 이제 시야파는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더 이상 소수파는 아니었다. 자신들에게 이렇게 큰 힘이 생긴 것은 회교 혁명 덕분 이었다. 그래서 이 회교 혁명의 끈을 절대로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호메이니 옹의 이란에서의 위상

이 회교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는 호메이니 옹이 구심점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팔레비 왕이 통치하던 시절에는 왕명에 거역하여 국가에서 추방된 연약한 노인에 불과했지만 그가 구심점이 되어 회교 혁명이 성공되고 보니 그는 이제 국가의 역사적 영웅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야파 이슬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란에서의 그의 위치를 이란의 국가(國歌:national anthem)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동의 태양이 수평선에 떠올랐네(이란의 회교혁명을 말함)

이는 믿는 자들(이슬람교도들)의 눈에 비친 광채여라.

바하만(회교 혁명이 일어난 이란력11월)은 우리 믿음의 영광,

오! 이맘이여(호메이니옹을 말함)...

님께서 선포하신 독립과 자유는 우리의 목숨과도 같은 것!

오! 순국열사들이여... 당신들의 외침은 이 시대 모든 이들의 귀에 사무쳤나니...

영원히 든든히 설지어다 이슬람 이란 공화국이여!!(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을 설립한 것은 호메이니 옹의 회교 혁명의 최대의 업적임.)

 

이 가사는 1절밖에 없으며 이는 전체적으로 요약할 때 호메이니옹의 회교 혁명을 찬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호메이니 옹의 무덤

이란에는 테헤란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 있다면 팔레비 왕궁과 호메이니 옹의 무덤이다. 그러나 팔레비 왕의 궁전은 다른 나라의 왕궁들과 비교해 볼 때 그리 대단한 규모는 아니다. 그러나 호메이니 옹의 무덤은 정말 볼만한 것이다. 중동에서 이렇게 호화롭게 멋지게 꾸며진 무덤은 없다.
지금 있는 화려한 수직 카페트와 대리석이 깔린 엄청난 크기의 강당은 임시건물로서 진짜 건물은 지금 절반을 막아서 공사를 하고 있다며 설명을 하는데 묘의 사방에는 4개의 첨탑이 있는데 이는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것으로 온 세상에 호메이니 옹의 이름을 알리고 그의 회교 혁명정신을 수출해야한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 첨탑의 높이는 지상에서 꼭대기까지 정확하게 91m인데 이는 호메이니옹의 사망 당시 나이가 91세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묘실 바로 위쪽으로 중앙에 있는 둥근 돔은 밖의 높이와 실내 높이가 다른데 실내에서 본 높이는 57 m인데 그것은 호메이니옹이 혁명을 일으킨 해가 이란 달력으로 1357년(1979)이기 때문이고 밖의 높이는 68 m 인데 호메이니옹이 죽은 해가 1368년(1989)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묘지는 진도 8의 강진을 견딜 수 있는 내진 설계가 되어 있고 이 묘지 부속건물 중에는 모든 종목의 스포츠 국제 경기를 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종합 체육시설이며 회교 신학교 및 박물관 등을 건립하도록 추진 중이며 테헤란 지하철이 여기서 시작되며 내년에는 묘지 남쪽으로 20 Km 거리의 호메이니 공항으로 입국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묘역이 거기까지 넓어질 것이며 예산과 관리인원은 국민들의 자진참여로 무제한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 국가 대표 스포츠 팀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서 금도금을 한 호메이니 흉상과 함께 방문기념 볼펜을 주는데 그 볼펜에는 “이스라엘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소서”라는 호메이니옹의 말씀이 새겨져 있었다.

 

다) 회교 혁명 정신 수호를 위한 이란의 노력

이란이 존재하는 것은 회교 혁명을 수출하기 위해서라고 고위 공직자들이 공공연히 말하는 것을 흔히 듣게 된다. 만일 회교 혁명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이란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회교 혁명의 의의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종교지도자가 연두 기자회견을 할 때 들어보면 청년들의 혁명 정신에 대한 교육이 국가의 장래에 가장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이란은 70% 정도의 국민이 30대 미만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통계가 있다. 그런데 그 젊은 층이 회교 혁명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회교 혁명 정신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한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적인 회교 종교 행사에 초등학교부터 대학생까지 학생들을 강제 동원하는 것이다. 미국 대사관 탈취 기념일을 학생 관제 시위의 날로 정하고 학생들을 테헤란 시내 변두리에서부터 행진하게 하여 시내 중앙에 있는 옛 미국 대사관 자리로 모이게 한다. 그 자리에서 반미 시위를 하며 미국의 만행을 폭로하며 규탄하게 하면서 회교 혁명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역설한다. 또한 젊은이들의 우상인 유명한 축구 스타등 인기인들을 동원하여 인터뷰를 통해서 정부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발언들을 하게 한다. 국가적으로 젊은이들이 정기 예배에 더 많이 참석할 수 있는 방도를 연구하여 보고하라고 행정 지시를 내린다.

사실 이들의 정기 예배란 테헤란 대학교 교정에서 회교 성직자로서 고위 공직을 맡은 사람들이 강단에 서서 정치 연설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한 주간 동안 전 세계에서 일어난 회교도들의 핍박 받는 모습을 보고하고 이를 미국이 뒤에서 조정하고 있다고 반미감정을 부추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들의 예배는 연설 후 항상 회교 혁명 수출을 위한 기도와 반미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대학에서 입학시험을 통해서 성적 우수한 순위로 학생들을 선발하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문이 회교 혁명에 대한 충성도가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그 지역 담당 성직자에게 평가를 받아 와야 한다. 그 평가가 낮으면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대학 진학을 하기가 힘들게 되어있다.

또한 대학에 진학을 했어도 학생들 중 바씨즈(Basij:자원민병대)라는 단체가 있어서 그들의 감시와 보고로 수시로 언행을 감시당하며 만일 회교 혁명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든지 그와 같은 언행을 하는 학생이나 교수가 있을 경우 즉시 보고하여 제적 내지는 해고를 당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이란은 모든 국가 정책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회교 혁명 수호를 위한 배려가 눈물겨울 정도로 철저하다.

 

2.회교 혁명 정부의 국가 운영


가)회교 혁명의 태동에서 성공까지

호메이니 옹이 이란 국내에서 반 왕정 운동을 주도하자 추방되어 이라크에 있을 때 팔레비 왕의 위협 때문에 사담후세인의 이라크 정권은 호메이니 옹을 돕지 않고 그를 방출했다. 호메이니 옹은 프랑스로 도피하여 혁명의 틀을 잡고 이란 국내로 자신의 음성을 담은 테이프를 이란으로 보내 지하 혁명 요원들의 활동을 통해서 전국에 확산 시키는 방법으로 회교 혁명을 선동했다. 그의 멧세지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었는데 첫째는 팔레비 왕정이 부패했다는 것이며 그런 것들을 증명하는 실제의 사례들과 알라께서 주신 이란 국민의 재산인 Oil을 팔아 개인의 재산만 늘리고 있으며 2500년의 역사와 문화가 찬란한 이란을 송두리째 미국에게 바치려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들이 혁명을 통해서 회교정권을 세우게 되면 세금을 국민들로부터 거두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라께서 주신 Oil 만 가지고도 국가 운영을 하고 남으며, 잉여자금은 국민들에게 공평하게 배분해 줄 것이라고 하는 장밋빛 제안을 하며 왕권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알라께서 인정하시는 정의롭고 공평하며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국민들은 부푼 기대를 가지고 열렬한 환영을 하며 팔레비 왕정을 몰아내기 위하여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그 때 미국은 카터 대통령을 통해서 팔레비 왕정을 지지할 것을 공식 천명하였고 이란 왕정은 미국의 약속을 등에 업고 반란하는 세력들을 무차별 공격하였다. 그러자 자기 백성들을 다루는 왕의 잔인한 모습을 본 이란 국민들의 크게 진노하여 갑자기 호메이니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여 결국은 왕을 지키던 왕정 수비대원들까지도 왕에게 등을 돌리게 되어 왕은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해 이집트 카이로를 향해 비상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것이 회교 혁명의 줄거리 이다.

한 순간에 정권을 잡은 호메이니 옹은 비행기 편으로 프랑스에서 테헤란 공항에 입성하고 이때의 감격스런 환영 인파는 호메이니 옹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겠다는 마음으로 가로수에 올라가 매미처럼 달라붙어 몇 시간 씩 기다리곤 했는데 지금도 혁명 기념일(현지력11월22일) 때는 해마다 그 때 찍은 동영상을 계속 방영하고 있다.
이렇게 입성하여 국민적인 환영을 받으며 정권을 잡은 이란 회교 혁명정부는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하면서 조직 정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혁명정부에 충성을 하는 청년들과 왕정의 잔재세력들은 골목들을 누비면서 총격을 가해대는 사회적 불안이 한동안 계속되자 그 와중에 전직 고위 공직자들이나 돈 많은 부자들과 실력 있는 의사, 학자, 기술자, 및 해외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급히 재산을 정리해서 이란을 떠나 버렸다.


나) 이라크와의 전쟁

회교 혁명정부는 정권을 잡고 보니 국고는 비었고 엎친데 겹친 격으로 이라크와의 전쟁이 시작되어 국가의 경제상태는 날이 갈수록 어렵게 되었다. 이 전쟁은 8년을 끌게 되는데 이란 쪽에서는 이 전쟁을 거룩한 수비전(Defah e Moqadas: Holy Defence)이라고 부른다.

이라크 쪽에서는 서방 세계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계속하면서 UN에 평화 협상을 위한 제안을 해 놓은 상태였으나 이란은 최후의 승리를 얻기 까지,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남을 때 까지 전쟁을 하겠다는 구호를 내걸고 평화협상을 거부하였다. 전쟁이 시작될 당시 이란과 이라크의 전력을 비교하면 이란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군사력이 강했다. 그래서 전쟁이 계속되면 반드시 이란이 이길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란은 호메이니 옹의 지시에 따라 “동양도 서양도 우리의 적이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도울 분은 오직 알라 뿐이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쟁을 강행해 나갔다.

그러나 이란의 국력도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서방세계는 이란에 무기 금수 조치를 내리게 되는데 따라서 이란은 해외에서 무기를 조달하는 길이 막히게 될 뿐 아니라 순수한 방어 자재인 철조망조차 수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라크는 서방 세계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항공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당시에 이란에는 전투기는 있으나 부품을 구할 수가 없어서 단 한 대도 사용가능한 전투기가 없는 극한 상황까지 가게 되어버렸다. 이를 눈치 챈 사담 후세인은 전투기를 테헤란 시내 상공까지 보내어 미사일로 민간인 주거지역을 무차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라크 전투기가 테헤란 상공에 와서 퍼부은 미사일이 155발이나 되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들이 발생하자 호메이니 옹의 옹고집도 꺾이게 되어 눈물을 흘리며 UN에 제출해 놓은 이라크의 협상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하여 8년간의 이라크와의 전쟁은 혁명정부의 재정을 바닥내고 아무 소득도 없이 끝나게 되다. 이란은 이 전쟁을 승리로 규정하는데 이는 이라크 쪽에서 먼저 휴전 협상을 제안하였다는 데 있다.

 

다) 이란 경제의 추락

외국의 도움 없이 8년 전쟁을 치른 나라의 경제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팔레비 왕정이 통치할 1979년 초의 이란의 공식 환율은 미화 1불당 70리얄 대였다. 당시 이란의 주부들은 테헤란 시장에서 물건을 찾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유럽으로 구매 여행을 다녀왔단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서 국력을 소진하다보니 이란의 화폐가치는 계속 떨어지고 물가는 계속 올라가게 되었다. 88년 이란에서 전쟁을 끝내고 이라크의 협상안을 받아들이기 직전에는 미화 1불당 1300 리얄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800리얄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이고 한달이 안 되어 대미 환율은 다시 1300리얄로 치솟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꾸준한 상승이 되어 94년에는 4000리얄까지 오르고 2000년에는 미화 1불당 8000리얄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국민들의 원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게 되었다.

회교라는 종교의 힘을 빌어 알라신의 이름을 업고 회교 혁명을 통해서 정권은 잡았으나 경제나 정치의 경험이 전혀 없는 회교 성직자들이 사회의 모든 분야의 최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각계의 실력있는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도피하게 되어 경제는 곤두박질하게 되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종교인들이었지 정치나 경제의 전문가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책을 찾을 방도가 없었다.

더구나 석유 산업을 비롯한 모든 국가의 기간산업은 국유화 된 상태였기에 민간인들이 경영에 참여하기 위하여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들은 실업자들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이 잡고 있는 국영 기업체에 많은 인력을 채용해 효율적인 인력관리에 실패해 구조적으로 만년 적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노동법은 서구식으로 만들어져서 불필요한 인력이라도 함부로 해고할 수 없도록 강제 규정을 만들어 적자인 줄 알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2006년 현재 대미 환율은 1불당 9000리얄을 넘어서 1만 리얄을 바라보게 되었다. 혁명 전에는 1만 리얄이면 10여명의 손님을 접대할 수 있을 만큼의 구매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귀한 손님을 모시고 가서 함께 먹을 수 있는 수준의 식당에서는 1인당 10만 리얄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니 국민들이 불만과 현 정권에 대한 반발이 얼마나 심하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란 국민들이 회교 혁명을 환영하며 꿈꿨던 장미빛 환상은 무참히 깨어지고 날이 새면 물가가 오르고 가지고 있는 돈이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상황에서 계속 회교 혁명정부의 말을 신뢰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회교 혁명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수시로 새로운 정책을 내어 놓지만 효과를 거둔 사례가 별로 없기에 국민들에게 정부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3. 회교 혁명 정부의 종교 상황


가) 유일신을 신봉하는 소수 종교들이 자유

이란에는 이슬람 외에 법적으로 보장된 자유를 누리는 종교들이 있다. 소위 유일신교를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유일신교는 이슬람을 비롯하여 유대교 기독교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4 종교를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배 형식에 따라 자신들의 언어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란어(Farsi)를 말하는 현지인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자유는 엄격히 규제되고 있다. 이란에는 약 4만 명의 유대교인들이 자신들의 회당에서 자유롭게 종교행사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철천지원수처럼 정치적인 벽을 쌓고 살지만 이란 내에 있는 대대손손이 이란 국적을 가지고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들은 혹은 다니엘 혹은 에스더 때부터 이란에 이주해 살던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한다)에게는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고 활동을 보장해 주고 있다. 또한 배화교는 사실은 선한 신 아후라마즈다(Ahuramazda)와 악한 신 아리만(Ariman)의 두 신을 인정함으로 유일신 종교는 아니지만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전의 이란 전통 종교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그들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다. 기독교 역시 대대손손이 이란에 와서 이란 국적으로 살고 있는 아르메니안과 앗수리안들이 있기에 이들의 예배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다. 그러나 회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심각한 사회적 어려움이 있다.

 

나) 신정 통치의 강화 작업

회교 혁명 정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통치자들이 알라의 뜻에 따라 정의롭게 통치하겠다는 것이며 국민들에게는 자유로운 삶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라의 뜻에 따라서 다스리겠다는 혁명 정부의 신정(神政) 정권이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이 있다면 회교 율법이었으며 이제 신앙은 개인의 양심의 선택이 아니라 경찰력으로 통제하는 통치의 수단이 되었다.
그 일례로 여성들의 머리에 베일을 쓰게 하는 것이었다.

왕정 때 자유롭게 머리모양을 꾸미고 살던 여성들이 갑자기 베일을 쓰라고 하자 대단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 반대 운동의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베일을 써야하는 것은 알라의 뜻이며 무슬림 여성의 기본 의무라는 것을 무시하고 반대를 하니 이는 곧 알라를 대적하고 이슬람의 근간을 흔드는 반역행위라는 명목을 붙여 공개처형을 하는 일이 몇 차례 있고 나서는 감히 이 일에 나서는 사람들이 없게 되었다. 지금도 이슬람 지도자들은 여성의 머리에 베일을 쓰게 하는 것은 정숙한 여성의 상징이며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같은 이슬람 국가라도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외에는 강제로 씌우는 나라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이슬람 국가는 여성의 인권을 보호할 의사가 없다는 말인가? 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통치자의 취향이다. 코란에도 모함마드의 아내들에게 베일을 쓰라고 했지 모든 여성들에게 쓰라고 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이란에서는 외국인이건 현지인이건 12세가 넘은 여성들은 머리에 베일을 쓰지 않고는 외출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흔히 머리에 쓰는 여성들의 복장을 차도로 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Tent"라는 의미이다. 여성들은 항상 집(Tent) 안에만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외출을 할 때도 집 안에 갇힌 채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여성들의 종교적 충성심의 깊이에 따라서 몇 가지로 복장이 나뉘게 된다.

먼저는 차도르(Chador): 온 몸을 감쌀만한 크기의 네모 난 검은 천 혹은 흰 천을 몸에 두르고 끝을 입에 문다. 어떤 이들은 얼굴도 보이지 않도록 안에서만 희미하게 보이는 망사 같은 것으로 뒤집어쓰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가장 열심 있는 무슬림 여성들의 복장이다.

둘째는 헤접(Hejab): 온 몸을 검거나 흰색으로 덮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이는 서양의 원피스 모양으로 소매도 있고 바느질을 해서 약간의 디자인도 가미된 상태이다.

셋째는 마그나에(Magna'e): 이는 상의와 하의는 자유롭게 하되 검은색 곤색 흰색등의 색깔의 천으로 머리에서 어깨까지 덮어 얼굴만 보이는 형태의 복장으로서 위에서부터 덮어쓰는 형식이다. 주로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학교의 정복으로 유행하는 형식이다.

넷째는 루싸리(Rusari): 이는 상하의 복장을 자유로 하고 머리털만 가리는 보자기 같은 것으로 머플러(Muffler)정도로 보면 된다. 현대 개혁파 여성들은 모두가 루싸리 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루싸리들은 단색으로 한 사람들 보다도 총천연색 무늬를 띠고 있는 것을 착용한 사람들은 회교의 종교심이 약하다기 보다는 어쩌면 반이슬람에 대한 감정의 표출로 볼 수도 있다. 대부분 이들은 머리털 전체를 가려야 하는데 앞머리가 1/3 정도 나오게 묶고 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다)국민들의 반발

혁명 정부는 신정 통치의 국가답게 온 국민들에게 회교 율법을 강요하고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답게 통제와 처벌을 강화시켜 가지만 그렇게 할수록 왕정 때 유럽식 자유를 맛보았던 이란 국민들에게 너무 심한 변화라고 생각되어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 반발은 더욱 강해져 갔다. 특히 국민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무슨 권리로 종교의 이름으로 불편한 삶을 강요하느냐는 것이다.

그 예로 회교식 기도에 참석을 하지 않는다. 회교권 어느 나라를 가든지 기도시간(Salat)을 알리는 방송소리가 나면 수퍼마켓도 문을 닫고 달리던 자동차도 멈춰 서서 길가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메카를 향해서 절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회교 혁명 전에는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이란에서 지금은 전혀 기도시간에 맞춰 메카를 향해 엎드리는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또한 맨발의 여성들을 보게 된다. 80-90년대에는 여성들이 양말을 신지 않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양말을 신지 않고 맨발에 신발만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생겼는가 하면 전에는 여인들의 원피스 같은 망토(Manto)가 발목까지 늘어졌는데 최근에는 엉덩이만 살짝 가리고 대신 바지를 입는 여성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심지어는 회교의 다섯 기둥이라고 하는 라마단 기간의 금식도 형식적으로 때우고 대충 사람들이 안 보는 데서는 먹을 것을 다 먹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정부의 공식 통계도 금식하는 라마단 한 달 동안의 식량 소비 통계는 금식하지 않는 달보다도 훨씬 더 많다는 것이 해마다 화제가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젊은이들의 회교에 대한 불감증 내지는 적대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어 여러 가지 행사를 벌이지만 이미 국민적인 대세는 기울어 졌다고 본다.

정부에서는 코란을 잘 암송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을 베푸는 코란 암송대회를 지방자치단체별로 개최하여 우수 선수들을 선발하고 국제 대회를 개최하여 외국 사람들에게까지 풍성한 시상을 한다. 출세를 하려면 코란을 외우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초등학교부터 배우게 된다. 매일 수업 시작 전 30분 동안 아침 조회를 하는데 이 때에 학생들 중 코란을 가장 잘 외우는 아이가 앞에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선창을 하면 선생님들과 전교생들이 합창으로 따라 외우는 일을 하게 된다. 어린 학생들에게 이 일이 주는 명예심은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철이 들면서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듣게 되는 현 정권을 향한 불만이나 회의적인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런 일들이 결코 행복을 줄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인 엄청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젊은이들이 국가의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자포자기하게 됨으로 자신의 삶을 국가 발전을 위해서 쓰기 보다는 방탕하여 마약에 손을 대는 사례가 너무 많이 일어난다. 실제로 이란은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으로부터 유럽으로 운반되는 마약의 중간 매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년들은 아무 죄의식 없이 마약에 쉽게 손을 대게 되고 마약은 하루치가 1불 정도면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한국에서는 마약 사범들을 검거하면 몇 백 그램 정도의 마약을 압수하고 신문에 대서특필하는데 이란에서는 수백 킬로그램에서 몇 톤까지를 압수하여 불에 태우는 사례들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란 정부에서도 이 일을 깨닫고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작전을 벌이지만 가난한 유목민들의 생계수단이요 부의 축적 수단으로서의 마약 밀매는 근절되지 않는다. 오히려 엄청난 조직을 가지고 중무장을 하고 이란의 정규군과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사상자들을 내면서도 계속 유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4.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기독교

 

그렇다면 이렇게 경제가 악화되고 국민감정이 회교 정권에 반감을 보이고 있고 젊은이들이 꿈과 희망을 잃고 방황을 할 때에 이슬람이 참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이슬람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메꿔 줄 수 있는 대안은 기독교라고 무슬림들 스스로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란에서는 기독교도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슬림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이야기의 주제이다. 이것은 정권을 잡은 무슬림 지도자들이 굳게 약속을 해 놓고도 번번히 국민을 속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딴전을 피는데 대한 보복감정으로 우연히 발생된 개념은 아니다.
오히려 주변의 개종자들이 법정에서 사회적인 모든 혜택이 박탈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기독교인임을 부인하지 않는 굳은 신앙을 보고 감동을 하게 된 것이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가) 개종자들이 당하는 어려움


a) 직장생활

실제로 이란에서는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 직장 생활이 어려워진다. 조용히 개종자로서 자신의 일만을 한다 할지라도 직장 단위로 주어지는 종교적 의무가 있다. 직장인으로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할 종교적 행사들이 있다. 그런 곳에 불참을 한다던지 반대 의사를 보인다던지 하는 행위가 반복될 경우에는 사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게 되며 이 것이 결국 조직적인 압력으로 가중되어 가면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스스로 사직을 하든지 아니면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 해고를 당한다는 것은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고되면 생계를 위한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신앙의 고집을 부린다는 것은 무모하거나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b) 부모의 재산 상속

상속의 문제에 있어서 부모의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이슬람을 배신하고 기독교로 개종자한 사람이 상속을 받는 것은 가족의 반발이 있을 경우에는 그 혜택에서 제외된다. 이미 상속을 받은 상황에서라도 가족들이 반환 소송을 제기할 경우 법정에서 본인이 이슬람을 배신했다는 것이 증언될 경우 재산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c) 출생 결혼 사망신고

무슬림들은 태어나면 회교 사원에 가서 출생신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도 회교식 절차에 의해서 해야 하며 또한 사망 신고도 장례식과 함께 회교 사원에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종자가 관공서에 정식 신고를 할 수가 없다. 결혼 신고의 경우 배우자가 기독교 종족인 아르메이안이나 앗수리안일 경우라면 물론 가문의 어른들의 엄청난 반대가 있겠지만 개종과 동시에 가문에서 축출되어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기독교(아르메니안) 결혼 등록소에서 정부로부터 제재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회교로부터 개종한 자를 받아주지 않는다. 아르메니안이나 앗수리안은 대대손손이 이란 국적을 가지고 살지만 그들은 언어가 다르고 그들 종족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인들로 인정되어 호적을 등재하는 곳도 다르다.

혹시 받아주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그가 기독교인임을 누군가가 서류상으로 증명해 주어야 하는데 개종에서 세례까지는 보통 최 단기라도 몇 년이 걸리며 개종한지 10년이 넘어도 세례를 받기 힘든 사례들이 많다. 왜냐하면 개종자에게 세례를 준 것이 발각될 경우에는 어떤 가혹한 피해를 입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근에 아하마디 네젓 대통령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거나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사람에게는 교수형에 처한다고 공포 했다고 교회에서 광고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렵게 세례를 받게 된다 할지라도 세례 증서를 주는 일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개종한 청년은 정상적인 결혼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이란에는 결혼 증명서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공책처럼 되어 있다. 거기에 양가의 호적이 기록되고 양가의 어른들의 서명과 결혼식을 집례한 성직자의 서명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들이 정식 부부가 된 것을 증명하는 증명서가 있고 또한 여성의 편에서 이혼을 제기할 수 있는 조건들이 선택적으로 기록된다. 예를 들면 남편이 마약에 중독이 되어도 계속 혼인상태를 유지하겠습니까? 또는 남편이 중죄를 지어 5년 이상의 중형을 받았을 경우라도 혼인 상태를 유지하겠습니까? 또는 문둥병이나 백혈병등 불치의 병이 걸려서 가족 부양의 능력을 상실했을 경우 ... 등등 질문이 나오고 예 혹은 아니오 라고 표기할 수 있는 빈칸이 있다. 결혼시에 이 빈칸에 표기를 하고 그 조건이 닥칠 경우에는 이혼한다는 조건으로 사는 것이다.

물론 이슬람을 버리고 개종을 했을 경우도 이에 해당될 수 있다. 남자 쪽에서는 언제든지 이혼을 제안할 수 있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미리 표기해 놓은 상황이 닥쳐야만 이혼을 제기할 수 있다. 실제로 남성들은 코란에 의해서 부인에게 “당신과 이혼하겠소” 라는 뜻을 거듭 세 번만 확실하게 표현하면 이혼을 위한 모든 조건이 성립된다. 요즈음 이슬람권에서는 국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핸드폰 문자 멧세지로 혹은 e-mail 로 보낸 것도 유효하다는 유권해석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개종자들이 정식 결혼이 어렵다는 이유로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거를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이는 법적으로 간음죄에 해당하는 정죄를 받게 된다. 이슬람에서 간음죄는 매우 혹독한 정죄를 받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개종자들은 결혼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워지는 것이다.


d) 자녀 교육 문제

만일 이미 회교도로서 결혼을 마친 상태에서 부부가 함께 개종을 한 경우에는 어떠한가?
이런 경우에는 부부가 법적으로 혼인 상태로 인정을 받게 되겠지만 자녀들을 낳은 경우 출생 신고는 어찌할 것인가? 또 자녀가 출생 신고가 된 상태에서 개종을 했다면 그가 취학 연령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학교에서 개종자의 자녀에게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려움이 생긴다. 설령 받아주는 학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학교의 교육과목들이 거의가 회교 종교교육이기 때문에 모함마드의 생애라든지 알리의 사상이라든지 호메이니의 회교 혁명 정신이나 코란 구절들을 외워야하는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자기의 자식들에게는 그런 교육을 받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개종자들의 염원이다.

따라서 개종자들은 보통 결심이 아니면 이란 내에서 살기가 힘들게 되어 아무 준비가 없고 외국어 한마디도 할 줄 몰라도 자녀 교육 때문에 무작정 이란을 떠나 발 닿는 곳으로 정처 없이 방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e) 사망 보상금

최근까지 디에(Die)라는 것 때문에 말이 많았다. 이는 사망보상금을 뜻하는 아랍어이다. 회교법에 개종자들은 개와 같이 취급을 한다는 규정이 있어서 개종자가 죽었을 경우에는 개를 한 마리 죽였을 경우에 보상하는 만큼의 돈을 주면된다는 것이다. 이는 정상적인 사망 보상금의 1/20 내지는 1/30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작년에 이란 국회에서 이 법을 고쳤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아직 그 법에 의해서 개종자의 사망 보상이 정상적으로 집행되었다는 소식은 듣지를 못했다. 이란 국법은 국회에서 통과 되었느냐는 것보다 종교 지도자의 의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종교지도자는 언제라도 아무런 절차 없이 법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있다.


f) 이름을 짓는 일

회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모함마드나 알리 혹은 호세인 등의 회교식 이름을 지으려고 하지 않는다. 코란에 없는 한나 에스더 등 성경적 이름이나 혹은 윌리암 케리나 요한 웨슬레처럼 기독교계에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 혹은 서양의 유명한 배우나 스포츠맨 등의 인사들의 이름으로 자녀 이름을 부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이름을 신고하는 것 자체가 봉쇄되어 있다. 아버지 이름이 회교식 이름인데 아이가 왜 그런 서양식 이름을 가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아주 드물게는 그런 것 신경 쓰지 않고 이름을 등록 받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회교식 이름을 강요받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별칭을 하나씩 가지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개종자들 사이에는 흔히 서로 부르는 이름과 호적상의 이름이 다른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몇 년간 같이 가정교회에서 비밀리에 신앙생활하면서 죽마고우처럼 친하게 지내도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한 경우들을 보게 된다.

나) 기독교에 대한 핍박의 강화

이슬람에서 만족한 해답을 얻지 못했거나 불만이 생긴 사람들은 구도자의 심정으로 기독교인들을 만나기를 원하고 교회를 가고 싶어 하고 자기 말고도 다른 개종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고 신기해한다. 전에는 개종자들에 대한 핍박이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집행되었지만 이제는 너무 많이 일어나는 개종하는 젊은이들의 물결을 막을 수가 없어서 일일이 손을 못 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정부에서는 효과적으로 전도하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과감한 조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티칸 행정부의 외교관 신분으로 나온 28년된 신부를 추방하는가 하면 회교 혁명 때 혁명군들을 치료하는 일로 공을 세워 특별 case로 이란 국적을 취득한 프랑스 신부에게 모든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약 30년 전에 와서 25년 전에 이란 국적을 취득하고 개인전도 보다는 문서 전도를 하는 사람이었다. 좋은 책들이 그의 수고를 통해서 많이 번역 되었다. 그는 약 10여명의 번역 위원들을 고용하여 건물을 사놓고 번역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번역한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유익한 정보들을 얻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활동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가 고용했던 현지 번역 요원들은 갑자기 직장을 잃고 방황해야했고 그가 번역 활동을 위해서 구입했던 4층 빌딩은 텅 비게 되었다. 천주교 신부들은 결혼을 하지 않아 가족이 없기에 혼자 그 큰 건물을 위 아래로 오르내리며 이 책상에 앉았다 저 책상에 앉았다 하면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에 딱한 모습이었다. 그는 국적이 이란인이기에 추방 대상은 아니었지만 활동을 못하게 함으로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원천 봉쇄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바티칸 수녀들이 경영하던 수녀원도 문을 닫았다. 그 곳을 통해서 구제와 봉사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반응을 보이자 제재를 가한 것이었다.
한인 교회 목사를 추방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였다. 한인들만 목회를 한다면 전혀 추방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개종자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니 제재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래 있다보니 현지어로 익숙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많은 인맥을 통해서 은밀한 상담과 전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추방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체류비자의 연장을 거부한 것뿐이다. 자기 집에 와 있는 손님이 더 머물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표현은 주인의 권리라는 것이다. 현지어를 전혀 못하는 한인교회 후임 목회자에게 신속하게 비자를 준 것을 보면 그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법적인 기독교 제재 장치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나 기관에 제재를 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정책적으로 기독교를 말살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조치들을 벌써 오래 전부터 법제화하여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a)교회 건축 허가 문제

교회 건물은 새롭게 건축허가를 발급하지 않는다. 기존의 건물을 수리하는 것은 허락을 하지만 땅을 사서 교회로 신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테헤란에 미국 선교사들이 지은 가장 오래된 교회건물이 있는데 정부에서는 골목을 넓힌다는 명분으로 그 교회 담을 4 m 들여쌓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담의 길이가 거의 100 m 가까이 되는데 교회 측에서는 그 넓은 땅을 빼앗길 수 없다고 거부를 하니 교회 담을 보수할 수 없도록 행정명령을 내렸다. 보수를 하면 당장 정부에서 허물고 길을 넓히겠다는 것이며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국민의 자유를 위해 회교 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이슬람 정권이 통치하는 이란에서는 소유주가 자기 건물의 담을 보수하는 일 조차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왕마귀라고 부르는 미국에서만 매주 2개 씩의 회교사원이 새롭게 탄생되는 것과 비교한다면 정권이 존립하는 한 단 한개의 교회도 건축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을 볼 때 어느 쪽이 참된 자유를 주는지는 확실하게 비교가 된다.


b)개종자 목사 안수 문제와 세례문제

또한 개종자의 목사 안수를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르메니안 이나 앗수리안 기독교인들에게는 목사 안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회교 출신의 개종자 기독교인이 목사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란에서는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아르메니안이나 앗수리안들은 회중들이 안수하여 목사가 되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개종자들에게는 절대로 이런 일을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개종자들 교회는 개종한 목회자가 목회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개종한 사람을 목회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고 보면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줄 사람이 없어진다는 말이고 그렇게 되면 이란의 개종자 교회는 자연히 문을 닫고 세례자가 나오지 않으면 기독교가 고사(枯死)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다. 실제로 지금 이란에 있는 개종자 목사님은 2분이 살아 계신데 모두 연세가 80이 넘으셨고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실 수 있을 만큼 건강하신 분은 한 분도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몇 개 안되는 개종자 교회는 아르메니안 혹은 앗수리안 목사를 모시든지 아니면 담임 목사 없이 설교자를 매주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고 운영 문제는 당회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c)교회 건물 압류

또한 기존의 교회 건물들을 정부에서 압류하는 것이다. 지방에 있는 거의 모든 교회 건물들은 이미 거의 정부에 의해서 압류된 것들이 많고 하마단에 있는 수련원은 10만 평방미터 정도 되는 것을 압류하여 정부에서 사용하고 있고 마샤드에 있는 교회에도 교인들을 핍박하여 가정교회로 흩어지자 문을 닫아걸고 자신들이 세운 관리인이 수년간 관리하다가 신문에 입찰 공고하여 그 넓은 땅의 절반을 분양한 상태다.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교인들을 핍박하여 교회로 모이지를 못하게 하고 한동안 모이는 사람이 없으면 자신들이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접수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PCUSA (Presbyterian Church of United State of America)에서 큰 도시마다 교회 병원 학교 기도원 등의 건물들을 지어 놓고 회교 혁명이 나자 이란 정부의 추방 명령을 받고 재산권을 이란교회에 넘겨주고 급히 철수를 했는데 그들이 지어 놓은 건물들 중에서 많은 학교들을 정부에서 강제로 압류했다.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든지 학교 건물은 회교 혁명정부에서 관리한다는 발표에 의해서 넓은 운동장을 갖춘 교회 소유의 모든 학교들이 정부 관리로 넘어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d) 이란 성서 공회(Bible Society) 폐쇄

혁명 전에는 이란어(Farsi)성경을 찍어내는 성서공회가 있었는데 혁명 이후 책임자를 핍박하여 해외로 도피하자 수년간 문을 봉쇄하고 나중에 교회에 통보도 하지 않고 인쇄기들과 비품들을 철거하고 그동안 찍어 놓았던 성경들을 압수하고 지금은 그들의 허락 하에 누군가의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란에서는 기독교에 관심이 있어도 이란어로 된 성경을 구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성경을 선물처럼 예쁘게 포장하여 보따리로 이고 와서 전달하는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활동했었다. 하지만 새로운 회교 원리주의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는 단속이 심해서 이 일도 중단되고 다시 성경말씀에 대한 기근이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이 일도 부담감을 가지고 도와야 할 것이다. 개종자들은 많은데 그들이 읽을 성경이 없어서 미국에서 하는 기독교 TV 상담 사례를 보면 TV를 보고 개종한 성도들이 성경을 보내달라고 하나 성경이 없어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성도들이 TV로 설교를 듣는 중에 인용되는 성경구절들을 받아 적어서 외우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의 요청은 “설교 중 성경 말씀을 더 많이 인용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란다.


e)기독교단의 법적 효력 상실

이란의 모든 기독교 교단은 아르메니안과 앗수리안 교회를 제외하고는 법적으로 불법 기관이 되었다. 이것은 혁명 정부가 처음에는 이들의 종교 단체 등록을 허락하였다. 이미 왕정 때 등록하여 활동허가를 받은 기관들이기에 허락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혁명이 끝나고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런 문제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고 또 그런 외에도 당장 코 앞에 닥쳐 온 수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어 이 문제에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테헤란에 있는 유일한 외국인 교회인 테헤란 한인교회도 회교 혁명 이전에 이미 등록 허가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혁명 정부는 체제를 정비하고 숨을 돌리게 되자 모든 기독교 기관에 재등록을 요구하였고 새로 발급된 등록증에는 유효기간이 1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계속 유효기간 연장을 하는 가운데 몇 해 전부터는 접수를 받아 놓고 몇 년이 지나도록 신규 등록증을 발급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활동을 제재한 것은 아니지만 이란의 기독교 모든 교단들은 아르메니안과 앗수리안을 제외하고는 법적으로 유효한 활동 허가서가 없는 상태에서 활동하는 것이며 정부는 이들의 활동을 잠정 묵인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언제라도 활동허가서가 없는 불법 집단들의 집회라고 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법적인 모든 준비는 끝내 놓고 있는 것이다.


라)발달된 통신의 영향

지금 세계는 점점 좁아져서 그 문명의 혜택이 이슬람이 뒤덮은 땅 이란에도 찾아왔다. 몇 해 전에 인터넷이 들어왔다. 사실은 97년 정도에 인터넷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때에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인터넷은 그림의 떡이었고 뉴스에서나 보는 신기한 문명의 이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1-2년 사이에 보통 사람들에게도 사용 가능한 것이 되었고 2001년경부터는 누구든지 인터넷 카드를 사서 전화선에 연결만 하면 소통이 가능한 정도가 되었다. 물론 서버의 속도가 느려서 프로그램을 다운 받는다든지 용량이 큰 파일을 연다든지 아니면 동영상을 본다든지 하는 것은 상상을 못하지만 그래도 인터넷으로 신문을 볼 수 있고 e-mail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컴퓨터를 조금만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안방에서 혹은 골방에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란의 젊은이들은 이제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운 변화가 온 것이다. 대대로 코란만이 유일한 삶의 기준이며 이슬람 외에는 종교가 없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슬람에 참 길이 과연 있는 것인가에 감히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은 회교 혁명의 덕분이었다. 회교 혁명은 이란 사람들에게 회교율법으로 통치한다는 것이 국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증명해 준 명백한 사건이었다. 물론 현 정권에서는 회교혁명을 아름다운 말로 미화하여 세뇌시키고 있다. 또한 혁명 당시와 지금의 상황을 비교하여 혁명 정부에서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찬양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혁명 당시(1979년) 전국의 포장도로가 몇 Km였는데 지금은(2006년) 몇 Km가 되었다든가 혁명 당시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마을이 몇 개 였는데 지금은 몇 개 마을 이라든지 등등 전년 대비 몇 % 성장이 아니라 27년 전 대비 몇 % 성장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수치로 비교해보면 어마어마한 발전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 것은 옛말이고 친 동생에게서도 세대차이를 느낀다는 시대에 살면서 27년 전의 통계와의 비교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시골에서 개중에 속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이제 그들의 눈과 귀가 열리고 있고 세상이 어떻게 놀랍게 발전하고 있는가를 날마다 접하고 있기에 그들의 홍보가 얼마나 진실성이 있는 것인지를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회교 성직자들이 알라의 이름으로 밥 먹듯이 약속을 해 놓고 이행을 하지 않는데서 그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다. 그래서 그들은 대안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정부에서는 더욱 젊은 이들의 신앙활동을 정책적으로 촉구하게 되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마. 선교 매체들 및 자료들

기독교 TV가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며 페르시아어 권을 흔들고 있다. 미국에서 24시간 방송을 하는 기독교 TV가 있고 싸이프러스에서 하는 방송도 이번 달 (2006년 9월)부터 24시간 체제로 운영되기로 예정되어 있다. 이 방송의 위력은 너무 파격적인 것이다. 그리고 방송되는 내용들을 CD 혹은 비데오 테이프로 복사를 해서 이웃들에게 돌리고 있다. 또한 이란어로 된 “예수”영화 필름이 CD혹은 비데오 테이프로 복사되어 사용되고 있다. 찬양테이프 혹은 설교 테이프 들이 전달되고 있다. 개종자들의 이런 눈물어린 수고와 봉사는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 구원받은 즐거움과 감격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서 이란의 운명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축복된 나라로 바뀌게 될 것을 기대한다.


바. 기독교의 생명력

이러한 사회적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개종자들은 어느 법정에 서던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부인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경 말씀에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요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엄청난 재산상의 손해를 보면서도 신앙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들, 개종하면 어떤 결과가 자신에게 미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에서 핍박을 받더라도 오직 천국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견디는 사람들... 듣는 이들에게는 남의 일이라고 흥미삼아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많아지면서 기독교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무슬림들이 조롱하는 투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참된 신앙인으로서 개종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막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사)이란 기독교의 현황


a)이란의 교회들

이란의 교회는 교단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부에서는 언어권별로 교회를 나눈다. 앗수리안 아르메니아 이란어 이다.
교단도 존재한다. 하나님의 성회 교단이 있고 복음 교단이 있다. 그리고 성공회가 활동하고 있고 형제교단이라는 교단이 있다. 천주교도 많은 교회를 가지고 있다.


b)이란 교인들의 숫자 변화

회교 혁명 당시에는 정확한 기독교의 통계를 알 길이 없다. 다만 현지 목회자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메대 왕국의 수도였으며 후에 페르시아의 여름 궁전이었던 하마단에만 여러 개의 교회가 있었고 1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하마단에 교회 건물은 있으나 핍박이 심하여 모이는 인원이 없고 교인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가정교회 몇 개 정도가 있을 뿐이다. 기독교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로는 테헤란과 우루미에 그리고 타브리즈와 이스파한 정도가 하마단에 버금가는 규모로 신앙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 통계는 미국의 장로교단 선교부(PCUSA)에 가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었고 수많은 교회들과 고아원 양노원 기도원 등의 시설들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최소한 50만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필자가 이란에 들어갔던 86년도의 기독교 현황은 아르메니안 교회 20만명 정도, 앗수리안 교회 2만명 정도, 개종자들 약 5천명 도합 22만 5천 명 정도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회교 정권 하에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개종자들이나 아르메니아 혹은 앗수리안 교인들이 이란을 떠나고 당시 10여명 밖에 되지 않던 개신교 목회자들 3명이 죽임을 당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2004년도 말 경에는 10만이 채 안되는 숫자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 위성 방송과 가정교회를 통한 전도가 힘을 얻고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닥치는 이 때 2007년 현재 이란 교회의 성도들의 숫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25만 정도는 잡을 수 있으며 계속 급격한 속도로 늘어날 것이다.


할렐루야

 

맺는 말

이란 정부의 회교 혁명 정신 교육 강화 정책과 기독교 박해 정책에도 불구 하고 기울어진 대세의 물살을 역류시키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라도 국민들이 이슬람에서 떠나는 것을 정책적으로 막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고 이슬람권 선교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너무 강력한 닫힌 문이라고 생각하고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은 닫혔고 제도적인 문은 닫혔을지라도 이란 국민들의 마음의 문은 열려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는 이미 열어 놓으신 것이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계3:7후-8전)라고 말씀하신다. 열린 문을 닫힌 줄 알고 기다리고 있으면 죽을 때까지 기다려도 열린 문의 혜택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4:35-36) 주님께서는 곡식을 다 익혀 놓으시고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며 심각한 게으름인가?

어렸을 때 겨울에 연탄불이 꺼지면 얼마나 피우기 어려웠던가를 잘 기억하고 있다. 한 집에 연탄불이 꺼지면 불을 피우기 위한 연기가 이웃집까지 괴롭혔다. 그렇게 해서 차가운 연탄을 올려놓으면 조금 불이 붙는 듯하다가 꺼지는 수가 있는데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연탄불 갈아 넣을 시간이 되면 만사를 제치고 집으로 가야하는가 하면 부득이 오래 집을 비워야 할 경우가 생기면 이웃집에게 부탁을 하고 가는 수도 있다. 그런데 몇 해 전 번개탄이라는 것이 생겼다. 성냥 한 개비만 있으면 연탄불을 확실하게 붙일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감히 이란 청년들의 마음이 영적으로 번개탄처럼 준비되어 있다고 본다. 어찌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 더 이상 무엇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만일 우리가 이 기회를 놓치고 게으름을 부리다가 이란의 정권이 미국이나 유럽과 화해 국면으로 가게 되든지 아니면 사담후세인처럼 강제로 바뀌게 될 경우에 그 때는 다시 이란 사람들의 마음 문이 닫힐 지도 모를 일이다. 젊은이들은 주어진 자유를 건전한 쪽으로 보다는 자유가 주는 타락 쪽으로 치우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선교지를 정하지 않은 예비 선교사들이나 예산을 준비해 놓고 선교지를 물색하는 교회나 선교 기관들은 이제 바로 지금이 이슬람 선교를 위해서 이란에 투자를 해야할 때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 끝-

 

원문출처: http://koreairanianchurch.net/bbs/board.php?bo_table=column_1&wr_id=197&page=7

 

 

61p에서 "이슬람 사회에서 범죄율은 다른 서구 사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단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슬람 사회에서는 이슬람의 특성상 가정폭력과 같은 것들은 범죄로 여져지지도 않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다른 문화권에서 범죄로 간주되는 것들이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범죄로 간주되지 않는다. 다음 자료를 보자.

 

도덕성과 이슬람

 

글쓴이: 알리 시나 (2006/02/09)

 

알리 시나씨 에게

내가 무슬림과 대화를 할 때마다 그들은 이슬람의 좋은 점을 부각시킵니다. 1) 이슬람 국가들에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적다. 이것은 그들이 단지 검사를 안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2) 이슬람 국가들에는 범죄율이 적다. 3) 결혼할 때 이슬람 여자들은 처녀들인데 서구 여자들은 아니다. 이러한 점들에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내가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슬람에 관한 나의 모든 부정적인 점들이 긍정적인 점들 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내게 이메일로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지로부터

 

라지씨 에게

그것은 사실입니다! AIDS는 비무슬림 국가들보다 이슬람 국가들에서 더 적습니다. 그것은 무슬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덜 난잡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칭찬할 만한 한 가지 점입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의 범죄율이 낮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작은 도둑질에 대한 형벌이 크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에서 단지 절도범죄율이 낮을지 몰라도 정부 관료들에 의한 화이트컬러 절도인 큰 도둑질은 민주주의 국가들 보다도 이슬람 국가들에서 훨씬 더 심 합니다. 이란에서 신발 한 켤레를 훔친 것으로 혹독하게 처벌받을 수 있지만 물라(이슬람교국에서 율법학자에 대한 경칭)들은 완전한 면책으로 수 십 억을 도둑질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가계를 비우고 모스크에 가도 손목을 자르는 처벌 때문에 아무도 감히 물건을 훔치려고 하지 않지만 수 십 억 달러의 도둑질은 쉽게 일어나는 사우디아라비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슬람은 권력을 잡은 자들에 대한 비난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국가들에서 폭력범죄도 훨씬 높습니다. 그러나 비무슬림 국가들에서도 예외없이 무슬림들은 다른 어떤 인종 집단 보다 1인당 범죄율이 가장 높습니다. 이슬람 갱들은 모든 국가들에서 경찰의 악몽입니다. 그들이 일반적으로 비무슬림을 목표로 할 때 가장 야비하고 위험하며 그들은 지역 무슬림 공동체에 의하여 보호받습니다.

무슬림 신부들이 비무슬림 신부들보다 처녀가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처녀성은 무슬림들에게 중요하지만 비무슬림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이슬람을 떠나면 자신들의 가치들도 버려야만 될 것이라는 실수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슬람을 떠남에 의하여 이슬람의 모든 증오의 가르침들에서 떠날지라도 선한 도덕성을 가지며 그것들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무슬림이든 아니든 우리가 도덕적으로 되기를 원한다면 도덕적으로 될 수 있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비도덕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무함마드 자신이 변태성욕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을 확실하게 믿는 것이 사람을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슬람은 한 번에 두 명, 세 명, 네 명의 여자와 섹스를 가지는 부도덕한 행위에 합법성을 부여하거나 무함마드에 의하여 허가되고 이슬람 시트파 가운데서 널리 퍼진 임시결혼이라고 부르는 매춘을 합법화합니다. 게다가 무슬림 남성이 동정을 가지는 것은 희귀합니다. 그러면 누구와 그들이 성관계를 합니까? 사실은 무슬림들 가운데 섹스는 널리 퍼져 있지만 보통 그것은 처녀성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무슬림 여성들은 처녀성은 지키지만 순결은 지키지 않습니다. 또한 이슬람 사회는 폐쇄되어있어서 종종 젊은 남성은 여자사촌들과 누이들과 같은 가까운 친척들을 강간합니다. 자연히 이러한 사건은 그들이 불쌍한 여자를 명예살인으로 없애버리므로 종결할 수 있는 한 절대로 보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 침해와 같은 이슬람에 내재하는 수많은 다른 큰 결점들이 있습니다. 이슬람에서 가정폭력은 폭력으로 인정도 안 됩니다. 나는 감히 가정폭력이 실제로 모든 가정에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외는 그것들이 단지 예외일 때 존재합니다. 무슬림 남자들은 남성우월주의자이고 일반적으로 폭력적입니다. 서방 국가들이 하듯이 폭력사건을 세어 본다면 이슬람 국가들에서 폭력범죄율은 비이슬람 국가들보다 여러 배나 높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들에서 소수집단은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진보의 토대인 사상과 언론의 자유는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슬림 남성들이 아내의 처녀막이 온전하다고 행복해할지 모르지만 (처녀막은 때로는 결혼 전에 작은 수술로 복구 되서 남편들을 조롱한다) 그들은 인간애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수천가지의 중요한 발명들 가운데 무슬림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온 세상이 이슬람으로 개종한다면 여성들은 처녀여서 돌에 맞아 죽지 않겠지만 세상은 미개함으로 퇴보할 것이며 발전은 정지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아내들의 처녀막을 찢는 특권을 가지는 것에 대한 좋은 대가입니까?

비무슬림들이 순결을 가르치는 기독교와 같은 다른 종교로 개종함으로 덜 난잡하게 되거나 개인적인 성숙으로 덜 난잡하게 되기로 결정하는 것은 가능한 반면에 처녀막을 위하여 우리의 자유를 파는 것이 좋은 거래가 아니라는 사실과는 별도로 인본주의의 품질증명인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무슬림들로부터 박탈되었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인간으로 진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종교는 도덕성을 가르칩니다. 사실 도덕적으로 되기 위해서 종교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지만 도덕성을 믿습니다. 특정한 종교에 소속함에 의하여 도덕적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살 때 도덕적으로 됩니다. 모든 종교들이 도덕성을 가르치기 때문에 도덕적인 존재인 힌두교인, 불교인, 기독교인, 유대교인 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닌 도교인도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도덕적 합리주의자가 되기로 선택하였습니다.

무슬림들에게 전쟁에서 붙잡힌 여자들과 노예여자들과 섹스를 허용하는 이 도덕성은 어떠한 종류의 도덕성입니까? 정말로 이슬람을 면밀하게 조사한다면 이슬람이 매우 부도덕한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바로 보셨는데 이슬람의 산과 같이 나쁜 것들은 몇 가지 좋은 것들을 훨씬 능가합니다. 당신이 이슬람을 떠날지라도 그 몇 가지 좋은 것들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이슬람을 떠나지 않고는 이슬람의 모든 악한 것들을 제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알리 시나씨 에게

나의 질문에 대하여 답장을 주시고 그것을 첫 페이지에 올려놓으신 것을 보니 매우 감사합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보니 그 세 가지 요지가 다 거짓인 듯합니다. 첫 번째 요지는 에이즈 바이러스에 관한 것입니다. 이슬람이 난잡한 성생활을 금하지만 단지 여자들만 해당된다는 것이 이슬람의 진실입니다. 남자들은 선지자 무함마드를 닮기를 원하기 때문에 난잡한 섹스행위를 가지는 것이 허용됩니다. 그들은 스웨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자들을 강간하며 돌아다닐 수 있고 다음에 자기 나라에 돌아와 같은 짓을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바이러스를 퍼뜨릴 수 있습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염이 보다 높은 비율을 가집니다. 나는 건강관리 업종에 종사하며 한때 파키스탄 남자가 미국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창녀와 관계를 가졌으며 그들은 에이즈 바이러스 양성판정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것이 이러한 국가들에서만 조사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비율이 낮은 듯이 보이지만 진단되지 않은 경우들이 많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 번째 요지는 이슬람 국가들의 낮은 범죄율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이슬람 사회에서는 부도덕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당신과 내가 범죄로 여기는 것이 이슬람 사회에서는 그러한 범죄(예를 들면 가정폭력)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감각에서 그들은 보다 낮은 범죄율을 가지질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무엇이 범죄를 구성하고 무엇이 부도덕성을 구성하는 지에 관한 정의가 나머지 세계와 전혀 다른 사회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요지는 결혼할 때에 처녀가 되는 이슬람 여성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이 내게 말한 것은 이러한 공동체에는 많은 강간이 있고 처녀막을 재생하기 위한 많은 수술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이 침묵 속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실제로 모릅니다. 그래서 아마도 결혼할 때 여성의 50%가 처녀로 추측되거나 아니면 25%의 여성들이 결혼할 때 처녀이거나 또는 그 숫자가 서구사회에서의 숫자와 얼마간 근접한 숫자일 것입니다. 당신이 지적한 남자 친척들이 자매들과 사촌여자들 강간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건강관리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하였듯이 저는 무슬림들 특히 파키스탄인들 가운데 많은 근친결혼을 목격하였습니다. 많은 근친결혼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서 당신이 내게 말한 것을 들은 다음 나는 무슬림들이 주장하는 이 세 가지가 모두가 진실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라지로 부터

 

당신이 나보다 더 잘 말씀하셨습니다.

알리 시나로 부터

 

원문출처   http://www.faithfreedom.org/oped/sina60209b.htm

 

터키: 숨겨진 러브 스토리와 이슬람의 야만성

 

2012.4.4 수요일,

글쓴이: Yagmur Dursun

한 터키 무슬림 여성이 자기 언니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말하는데 그녀의 언니는 지역 이맘의 권고에 따라서 뱃속의 아이와 함께 돌에 맞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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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Yagmur(“비”를 의미한다)이다. 나는 터키 시골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반적으로 터키 여성들은 우리 아랍 자매들은 생각도 못할 많은 자유를 누린다. 터키 시골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명예살인은 매일 일어나고 여성들은 집안일에 많은 말을 할 수 없으며 여성 취업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남자들이 힘든 일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힘든 일을 여성이 하는데 여성은 가축이나 노예와 같다. 남편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하라고 하면 당신은 순종해야 한다.

나의 어머니는 교육을 잘 받은 분이여서 집에서 나를 가르쳤고 나도 학교에 갔다. 나의 취미는 책을 읽는 것이었다. 독서를 통하여 나는 다른 언어들과 많은 지식을 얻었다.

고집이 센 나의 언니와는 달리 나는 절제하고 순종적인 여자였다. 언니가 18세 때 한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둘은 서로 사랑하였으나 그 청년은 다른 여자와 결혼해야할 운명이었는데 그의 부모가 그렇게 결정하였다. 데이트는 이슬람에서 완전히 금지되었고 결혼은 계획되지만 젊은이들은 종종 결혼식 날에 처음 보게 된다.

언니는 반항적이었다. 언니는 그 젊은 청년과 “데이트”하였다. 매일 밤 언니는 그를 보러 갔다. 그들은 키스도하였고 사실상 그들의 진도는 너무 많이 가있었다. 언니는 임신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안전한 큰 도시로 도망갈 계획을 하였다. 그들은 마을에서는 종교가 지배하여 자신들이 곤경에 처할 것을 알았다. 당국자들은 시골 터키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때로는 샤리아 법을 실시하고 세속국가 법을 폐지하려 하는 이맘들과 물라들과 장로들이 처벌받았지만 당국자들은 관광객이 많은 대도시에 보다 관심을 가졌고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 젊은 얼굴들을 기억한다. 내가 어린 여자였기에 전체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볼 때 나는 그들이 행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행복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고 나는 미소 짓기를 원하였다. 도망가지 않고 그들은 나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로 결정하였다. 또는 “임신은 결혼 허락을 얻기에 아주 좋은 이유”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슬프게도 나의 언니는 아버지의 그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자기 종교에 대한 집착을 잘 못 계산하였다. 아버지는 노했다. 두 젊은 연인을 결혼시켜서 사랑의 둥지를 만들게 하는 대신에 아버지는 언니를 종교지도자에게 데리고 갔고 그들은 언니가 간음하였다고 심판하였다. 언니는 돌팔매 형이 선고되었다. 그들은 언니의 뱃속에 아기에게도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언니는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고 그 오명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생명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언니의 태어나지 않은 아기도 역시 오점이여서 그 작은 핏덩이도 마찬가지로 죽어야하고 그럼으로 나의 집안이 명예롭게 살 수 있었다.

언니가 처형되기 전날 밤에 그녀는 내 방에 와서 나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언니는 울었고 나를 자기 가슴에 안았다. 그다음 언니는 미소 지었고 곧 자기 아기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다행히도 그녀의 운명을 알지 못했지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나는 굉장히 무서웠다.나는 아직도 언니의 검은 눈을 기억하는데 언니는 땅속에 묻히는 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흰색 천으로 싸였고 손은 몸에 묶였다. 언니는 허리까지 땅에 묻혔다. 광신적인 군중들이 손에 돌을 들고 언니를 둘러싸고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면서 돌을 언니에게 던지기 시작하였다. 언니는 돌들이 연약한 몸을 때리고 머리를 깨뜨릴 때 고통으로 떨었다. 피가 얼굴에서 뺨에서 입에서 코에서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언니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죄우로 구부리는 것 뿐 이었다. 점차로 그 움직임이 느려졌고 마침내 언니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돌팔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언니의 머리가 자기 가슴 위로 늘어졌다. 언니의 피투성이 얼굴은 평화로 왔다. 모든 고통은 사라졌다.

발작하던 군중들도 조용해졌고 알라는 위대하다는 외침도 그쳤다. 언니의 숨을 끊기 위하여 누군가가 손에 커다란 둥근 돌을 가지고 다가와서 언니의 머리를 내리 쳤다. 언니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생명으로 빛나던 언니의 밝고 검은 눈은 감겼다. 그녀의 주변을 가득 채웠던 쾌활한 웃음은 잠잠해졌다. 단지 짧은 시간동안 천국의 사랑과 같은 것으로 박동 치던 그녀의 심장은 멈추었다. 그녀의 태어나지 않은 아기는 한모금의 숨을 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또는 그녀는) 자기의 나이어린 엄마를 따라 고독하고 차가운 무덤으로 갔거나 누가 아는가 아마도 사랑이 있고 고통과 무지가 없는 더 좋은 곳으로 갔는지. 이 두 피어나던 생명들은 베어졌고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언니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언니는 성대한 예식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초대되어서 그녀를 축하하고 결혼식 노래를 부르고 꽃들과 색종이를 그녀에게 던지는 하얀 웨딩드레스 입는 결혼을 꿈꾸었다. 그렇다 예식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결혼식이 아니었다. 그녀는 흰색을 입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웨딩드레스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파티에 왔지만 그들은 그녀를 저주하고 그녀에게 돌을 던지려고 왔다. 아무 음악도 연주되지 않았고 아무런 결혼식 노래도 불러지지 않았고 오직 알라는 위대하다는 외침만이 울려 퍼졌다. 그녀에게 유일한 포옹을 해준 것은 그녀의 하반신이 묻힌 땅이었다. 그녀가 받은 유일한 키스들은 그녀의 살을 찢고 그녀의 뼈를 부수려고 그녀에게 던져진 돌들이었다. 그것들은 죽음의 키스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남자와 결합된 것이 아니고 죽음과 결혼했다.

이것은 언니의 연인의 비극이다. 그의 삶은 그 의미를 잃었다. 그는 채찍질만을 당하였다. 그는 그 연애에 관하여 전부를 쉽게 잊어버리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마치 나의 언니가 나와서 그를 만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 같이 매일 우리 집 앞에 서있었던 것을 보았던 것을 회상한다. 나는 그가 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우리 집 앞에서 울고 있지 않을 때는 그가 공동묘지에서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아기의 무덤 위에서 울고 있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어느 날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고통을 참을 수 없어서 목을 매달았다.

그의 죽음은 은폐되었고 아무도 그것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다. 아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아기와 다시 만났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들을 해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더 이상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 이것은 슬픈 이야기이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것은 결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다. 어느 누구도 이 젊은 연인들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들은 매장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기억도 결코 없었던 것처럼 또한 묻혀버렸고 그들의 진실한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로 씻어져야 할 수치였다.

그러나 가장 슬픈 부분은 이슬람에 따르면 나의 언니는 그 죽음이 마땅하였다. 노인들은 언니가 지옥에서 영원히 불에 타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고 행복해지는 것 때문에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잔인한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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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의 인생을 보자. 내가 18살이 되었을 때 독일에서 온 터키 사업가와 결혼하게 되었다. 내가 독일에 갔을 때 그에게 다른 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쁜 남자는 절대로 아니다. 그는 매우 친절하지만 무슬림이다. 예를 들면 그는 유럽인들이 일부다처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우리가 집에서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이 이상한 방식으로 우리의 명예를 보호한다.

그때 우리는 영국으로 이사했다. 여기서 우리는 터키인들이 더 없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보다 더 고립되었다. 독일에서 우리는 적어도 우리 동포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남편의 첫 부인과 나의 관계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친구였다. 우리 사이에는 약간의 경쟁의식이 있었고 그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혼자이고 어느 누구를 만나거나 집을 떠날 수 없다. 그녀의 인생도 나와 마찬가지로 무의미하고 공허하다. 우리는 서로 미워할 수 없고 우리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친구가 되어야 한다. 남편의 첫 부인과 나는 두 명의 감방동료와 같다. 우리는 우리 둘 밖에 없다.적대감 또는 힘든 감정을 가질 여지가 없다.

나는 5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녀는 4명을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우리 가족 안에서 더 많은 특권을 가진다. 나는 지금까지 딸들만 나았다. 우리 둘 다 교육받았지만 그녀는 자식들에게 더 집착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하찮은 것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아마도 어느 날 나는 자유롭게 될 것이고 책들을 읽을 것이고 계속해서 배우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책을 읽거나 생각하는 것에 관심이 멀다. 나는 혼자이다. 때때로 나는 도망치는 것을 생각해 보지만 나는 5명의 딸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떠날 수도 그들과 같이 도망칠 수도 없다. 사실상 나는 움직일 수 없다.

내가 오래전에 이슬람을 떠났어도 기도하거나 금식하는 것을 그만 둘 수 없다. 남편은 불순종하는 것에 대하여 매질을 한다.....내가 항의를 하려할 때 꾸란에서 인용한 말 때문에 말문이 닫힌다. 이슬람이 우리의 삶을 정의한다. 사람들이 오래전에 쓰여 진 한 권의 책에 따라서 사는 것이 어리석은 것 아닌가? 내 인생에 대하여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을 증오한다. 적어도 나는 어떤 전통들을 반대할 수 있지만 이슬람은 우리 문화에서 가장 나쁜 것을 보존하였고 여성들을 노예로 전락시켰으며 그들을 계속해서 무지하게 만든다.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내 딸들을 볼 때 나는 그들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이슬람과 이 노예상태에서 자유롭게 살기를 기도한다. 알리씨, 당신이 이슬람을 아주 조만간 패배시킬 것을 약속하였으니 부디 그렇게 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때로는 당신이 포기하고 싶은 느낌을 가질 것이라는 것 압니다. 그것이 내게는 좋은 명분에 당신이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당신이 때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나와 같은 여성들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말해 주기를 원할 뿐입니다. 당신이 절망할 때 나와 함께 비슷한 비극적인 경험을 가진 수 백 만의 여성들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은 빛나는 갑옷을 입은 나의 기사입니다. 내가 당신의 열성적인 후원자라는 것만을 당신이 아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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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gmur Dursun은 필명이다. 이 이야기의 일부 상세한 부분이 저자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변경되었다.

(이 글은 2005.3.13에 faithfreedom.org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원문보기 http://www.islam-watch.org/index.php?option=com_content&view=article&id=978:turkey-an-untold-love-story-and-islamic-barbarism&catid=34:testimony

 

66~67p에서 이슬람이 음악과 미술을 장려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이슬람 근본주의에 따르면 음악과 미술은 사단의 도구로 금지되는 것이다. 다음 자료를 보라.

 

 

이슬람의 문화에 대한 전쟁

 

무민 사리히 (2/29/2012)

이슬람이 다른 사람들을 대우할 때 이슬람은 그 자체의 구분체계가 있다. 이슬람은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고 고안된 유일한 종교이다. 정말로 꾸란에서 땅과 종교가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청소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것이 이슬람의 목표이다 이슬람은 단지 이질적인 사상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고 그들의 파멸을 원한다. 이슬람의 이 독특한 모습은 그것의 적절한 이행이 이슬람 자체의 추종자들을 포함하여 모두를 위험하게 만든다.

이슬람의 적절한 이행은 탈레반과 사우디에서 그랬듯이 그들 문화의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해 무슬림들이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금한다. 이 원리의 배경이 되는 이론은 죄에 대한 가장 최선의 보호는 그것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타종교의 실천과 전파는 이슬람 국가들에서 환영받지 못하며 단지 사원들과 다른 경전들의 존재만으로도 적대감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와 같이 이슬람이 지배하는 곳마다 타종교의 실천 또는 다른 경전들의 수입이 법으로 금지되는 이유이다. 이집트와 같이 이슬람이 아직 정식으로 정권을 잡고 있지 않은 나라들에서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교회에 대한 공격들은 평범한 일들이다.

이슬람에서 여자들은 죄악의 주요한 원인으로 간주되므로 그들은 완전히 가려져야 하며 남자들과 섞일 수 없다. 술과 할랄 음식이 아닌 것은 법으로 금지된다. 책들과 모든 인쇄물은 누드나 이슬람에 이질적인 진화론, 사회주의, 또는 언론의 자유와 같은 것들을 게재할 수 없도록 철저히 검열 받는다. 연극, 영화 오페라 하우스는 허용이 안되며 음악, 미술, 사진과 같은 대부분의 예술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무슬림들이 소수일 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는 인권법과 종교의 자유를 이용하면서 자기들 뜻대로 하기위하여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무슬림들의 전략은 종교 때문에 자기들이 특별한 요구를 가진다는 사실로 서방세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이 문제에 대한 지침 없이 그의 추종자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유명한 하디스에서 그의 가르침이 분명하다: ‘너희들이 좁은 길에서 비무슬림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지 말라: 그들이 길을 양보하게 하라.’ 그는 또 비무슬림에게 먼저 인사하지 말라고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무함마드의 지침은 단지 좁은 길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무슬림들의 전략의 요점을 말해준다. 기독교인들이 소수그룹으로 살고 있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과 같은 나라들의 독실한 무슬림들은 그들이 기독교인 이웃들이나 동료들을 만날 때 인사말을 먼저 하지 않으며 상대방이 먼저 인사하기를 기다리고 그 다음에서야 대응한다.

무슬림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기꺼이 적응하게 만들면서 가능한 자신들은 편리를 취하려하며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리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떠난다. 예루살렘, 베들레햄, 나사렛과 같은 도시들은 소수의 무슬림들을 가진 주요 기독교 도시들이었다. 수 십 년 후에 어떤 전쟁도 없이 거기에는 단지 극소수의 기독교인들만이 아직 살고 있다. 유사한 사례가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에 적용되는데 이 나라들은 독립 후 기독교인이 대다수인 국가였지만 지금 그들은 소수그룹이다.

이슬람 문명은 완벽하고 다른 것들은 속빈 강정이다.

무함마드 시대에 아라비아에 다른 예언자들이 있었고 각자에게는 수천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이 예언자들은 어떠한 전쟁이나 문제없이 서로 공존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이슬람을 또 하나의 다른 종교만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그는 이슬람을 모든 다른 종교들의 대체물로 소개하였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에서 강성하게 되었을 때 무함마드는 아랍족들에게 이슬람이 가장 우수하며 받아들일 만한 유일한 종교라고 말하였고 모두가 이슬람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종말을 맞을 것을 요구하였다. 다른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충돌 없이 평화롭게 살았지만 자동적으로 알라와 그의 사도에 대한 적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침략행위로 간주되었다. 마음 깊숙이 무함마드는 그들의 거부를 보복 받아 마땅한 굴욕적인 거절로 해석하였다.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전쟁을 시작하였을 때 유대인, 기독교인 그리고 다른 아랍족들은 그들의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오늘날 무슬림들도 자기들의 종교는 최선이고 다른 사람들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믿으며 성장했다. 그들은 이슬람이 알라에 의하여 생겨났다고 믿기 때문에 이슬람을 그 자체의 ‘완벽한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때문에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다른 문명들이 이루어 놓은 것에 의하여 잠식되어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14세기가 지난 다음에도 무함마드가 과거에 동일한 이유로 그랬던 것과 같이 이슬람은 여전히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다른 문명과 복수심을 가지고 싸운다.

먼저 있던 암흑의 시대

이슬람에 희생된 첫 번째 문화는 아랍족 자신의 이슬람 이전 문화였는데 이 문화는 이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화보다 훨씬 우수하였다.

무슬림들은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는 여자 유아를 산채로 매장하는 것과 같은 무지하고 야만적인 관습으로 점철되어있었다고 믿으며 양육되었다. 그러나 아랍족이 이슬람 도래 전에 계몽과 문화적 다양성의 시대에 살았다는 증거가 넘쳐난다. 인쇄시대 이전에 이슬람 도래 이전 아랍족은 그들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을 그들의 시에 기록하였고 이것은 아랍족이 만들어낸 최고의 것이다. 시에는 여자아이 유아를 산채로 매장하거나 야만적 관습에 관하여 아무런 단서가 없다. 여성들이 보다 신임을 받았고 사회생활에 참여하였다는 증거가 있다. 무함마드의 첫 번째 부인인 카디쟈는 성공한 여성 사업가였고 무함마드에게 청혼한 사람도 여성인 그녀였는데 이것은 이슬람 이후에 생각도 못할 관습이었다.

아랍족은 외부 세계와 무역하고 교류하였고 시와 그들이 선호하는 예술에서 번성하였고 우수하였으며 과거의 아랍의 시는 오늘날의 신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아라비아는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제공한 건강한 다문화적 환경을 즐겼으며; 무함마드도 13년 동안 그의 종교를 전파하도록 허용되었다. 메카인들은 무함마드에게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존중해줄 것과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것만을 요구하였다. 유대인들과 이방 아랍족과 기독교인의 배경은 혼재하였고 조화 속에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메카의 외부인 Okaz에서 모든 문화를 기념하기 위해 연례적인 축제를 마련할 정도로 문명화되어 있었다.

무함마드는 시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시기심은 그의 행동을 얼마간 지배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것에 대한 긍정적인 참고에 대하여 그를 지나치게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의 꾸란에서 무함마드는 되풀이하여 자신이 피조된 인간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하디스에서 여러 번 나온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부모와 식구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모든 무슬림들에게 의무로 만들었고 그것을 진실한 신앙의 조건으로 만들었다. 그의 하디스 가운데 하나에서 무함마드는 반복적으로 그의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들 중에 아내를 가장 잘 다루는 자들이 너희들 중에 가장 우수하며 나는 나의 아내들을 다루는데 최고이다.” 다른 이야기에서 Umm Salma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어버린 매우 매력적인 여자였는데 모든 청혼을 거절하였고 Abu Bakr와 Omar과 같은 지위 높은 인물의 청혼도 거절하였다. 그녀의 이유는 그녀의 죽은 남편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남자와만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그녀가 이러한 남자들 가운데 누구도 죽은 남편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무함마드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하였고 모두에게 증명하여서 Umm Salma도 무함마드가 그녀의 죽은 남편보다 낫다는 것을 믿었다.

무함마드의 시기심은 문화에 까지 확장되어 그의 추종자들이 이슬람 도래 이전 시대의 계몽에 관하여 긍정적인 말을 할 때마다 화를 내곤 하였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그 시대를 무시하도록 명령하였고 그 시대를 무지의 시대로 또는 오늘날 알려진 대로 'jahilyia'로 불렀다.

근대적 jahilyia

메카와 같은 문화적으로 풍성하고 자유로운 사회에서 이슬람의 출현은 우리에게 오늘날 자유롭고 다문화적 유럽에서 이슬람의 출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무함마드의 골수분자들이 유럽에 밀려들어 그들의 증오로 가득 찬 종교를 전파하고 동시에 서구문명을 '근대적인 jahilyia'로 낙인을 찍는다! 그들은 실제로 같은 이유에 대하여 같은 말을 사용한다. 무슬림의 관점에서 서구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일 때까지 무지하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에서 이슬람 이전 문화를 뿌리 뽑는데 성공하였으니 우리는 그의 추종자들이 그렇게 성공하지 못하기를 희망하자.

무함마드의 시기심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유전되었다는 것이 재미있다. 오늘날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이슬람이 이전의 모든 문명들보다 훨씬 우수하다는데 단호하다. 이슬람을 떠나서는 근대적인 무지의 시대로 낙인을 찍은 현대문명을 포함하여 모든 문명들을 다른 형태의 무지의 시대로 간주한다. 민주주의, 인권, 사회주의,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는 무지의 표현이상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들이 부르듯이 '근대적인 jahilyia'이다.

이슬람을 위한 문화 거부

초기 무슬림들은 그들의 옛 문화를 부인하고 그들의 가족과 부족 관계를 부인하도록 요구되었다. 그들은 옛 전통들에 대하여서도 등을 돌리고 꾸란에서 승인된 무함마드와 알라에게 유일한 충성을 바치도록 강요되었다. 내가 Abu Bakr라고 생각하는 무함마드의 대단한 동료들 가운데 한명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가 바드르 전투의 기억에 관하여 자기 아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이 전투는 그 아들이 아직 꾸라이시족과 전투하는 불신자였을 때 일어났다.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나는 아버지를 안 죽이려고 고의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멀리 있었어요” 이에 Abu Bakr가 대답하기를 “내가 너를 보았다면 나는 알라와 그의 사도를 위하여 너를 죽였을거야!” 이 사건은 불신자의 도덕성에 비교하여 무슬림의 도덕성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은 아직도 아랍인같이 보이고 아랍인같이 생각하는 새로운 사람을 그 세계로 데려오는 것을 지향하는 완벽한 문화와 정체성의 변동을 견디어야한다. 갑작스럽게 아랍의 이해관계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그 이해관계 목록의 최상에 두는 개종자 자신의 이해관계가 된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은 아랍식 이름을 선호하여 전에 사용하던 이름을 버린다. 그들은 아랍인같이 옷을 입고 아랍의 옛 전통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오른손으로 먹으며 물 한잔을 세 번에 나누어 마시며 무함마드가 그랬듯이 식사 전후에 동일한 기도 ‘dua'를 한다. 그들의 입맛이 그것에 관하여 어떻든지 대추야자와 꿀을 먹는다. 그들은 이슬람 방식과 맞추기 위하여 그들의 화장실 사용습관을 바꾼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좋아하고 싫어한 것을 모방하여야 하므로 자기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들에게 물어보면 그것은 자신들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문화적 배경에 관계없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무함마드를 모방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14세기 전에 그랬음으로 개들을 싫어하기 시작한다. 무함마드가 고기를 먹었으므로 그들은 채식주의자가 될 수 없다. 무함마드가 나중에 결혼했던 고아였던 자기 양자의 아내 자이납이 벗은 것을 어렴풋이 본 후 입양제도에 대하여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아를 입양할 수 없다. 녹색이 그들의 선호하는 색이 되었고 북소리가 그들의 선호하는 음악이 되었다. 그들은 아랍어를 배우고 아랍어를 유창하게 말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유럽에서도 짧은 아랍식 ‘thaub'를 입고 반면에 그들의 아내들은 니캅으로 덮어 씌우고 물어보면 그것은 자기들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이슬람이 지배한다면....

현재 서방세계 국가들에서 샤리아의 적용에 관한 문제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샤리아를 할랄 음식과 술에 관련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종교적 실천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이슬람은 광범위하고 무슬림 삶의 모든 면을 통제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완성품이다. 무슬림이 새벽 기도를 위해 일어나는 순간부터 그가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몇 분 동안이라도 이슬람의 지배력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나는 15년 이상 전에 당시 Al Muhajeroon 그룹의 지도자인 Omar Bakri에 관한 TV 다큐멘터리를 본 것을 기억하는데 영국에서 이슬람 국가에 관한 그의 비전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9/11훨씬 전이었고 Bakri는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타끼야[taqyia] 또는 이슬람의 속임수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정직성에 놀랐다. Bakri는 있는 그대로 말하였고 독실한 무슬림이 영국을 지배할 방법을 기술하였는데 영국은 이 글에서 기술되고 있는 것 또는 사우디아라비아 또는 탈레반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명과 문화에 아무 잘못된 것이 없을지라도 이슬람 지배 아래서는 모든 것이 실패하게 되어있다! ‘이슬람 문명’은 다른 모든 것을 비난하며 그것들을 청소되어야할 쓰레기로 낙인찍는다. 과학과 의학과 같이 ‘다른 문명’이 엄청난 성공을 이루어 놓은 분야도 이슬람의 경멸감을 진정시키지 못 한다. 이슬람의 ‘성스러운 문명’은 다른 문명들의 업적과 성공에 의하여 잠식될 것 같지 않다. 무슬림들은 어째든 이러한 업적들을 과소평가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이슬람 지배 아래서 서방세계 도시들은 다시 디자인될 것이다. 그 다시 만드는 것은 이슬람에 저촉이 되는 모든 조각들과 조상들을 제거할 것이다. 그것들은 Asnam(우상들)이라고 호칭되고 이슬람을 공격하였던 곳에서 이슬람이 옳았다고 발표하게 될 것이다. 선지자 이브라힘이 그랬듯이 무함마드는 자기 도시의 우상들을 파괴하였다. 오늘날의 우상들은 오늘날 무슬림들이 아마도 대단한 기념으로 그 똑같은 행위를 함으로서 알라를 기쁘게 하는 황금 같은 기회를 제공한다. 1990년대에 탈레반이 종교 또는 문화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고 세계의 주목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부처상을 포격하였다. 이집트에서 많은 살라피 교도들이 역사적인 고대 유적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고 알라가 그들에게 관대하게 보상할 것이니 그것들을 없애는 것이 이집트인들에게 좋을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이슬람 치하의 삶은 이상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상상이나 추측한 것이 아니고 이슬람이 지배하는 모든 곳에서 실상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전형적인 표본이지만 이슬람 집단들은 세계의 여러 곳의 그들의 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서 이슬람을 크게 확장하고 있다.

이슬람은 현재 그것의 황금기를 지내고 있으며 전에 이렇게 여건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나는 역사에서 무슬림들이 오늘날과 같이 이슬람에 그렇게 집착하고 그렇게 환멸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규모 이슬람화의 현재의 수준은 필요한 기술과 통신이 없었기 때문에 수세기 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서방세계는 이 위험에 부인과 무관심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슬람이 그들을 더 공격할수록 그들은 더 양보한다. 서방세계가 그것의 최저점에 이름과 동시에 이슬람이 그것의 최고점에 이르는 것은 매우 이상하고 두려운 우연의 일치이다.

세계에서 이슬람화의 이 파도는 걸프국가들의 대규모 부로 인한 또는 서방세계의 타협책으로 인한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고 그 둘 다의 결과이다.

무슬림들 모두다 알라가 약속한대로 서방세계가 그들에게 점령될 것이라는 데 만족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 승리의 순간이 저절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인터넷은 이 가시화를 반영하는 기사들과 비디오들로 가득 차 있다. 반면에 서방세계 사람들은 이것이 매우 비현실적이거나 불가능한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페르시아와 로마제국이 이슬람에 떨어질 때 생각도 그랬었다.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일 년 만에 아랍세계가 무슬림 형제단에게 떨어졌고 그것이 서방세계의 도움으로 되었다.

서방세계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늦었다. 그들 국가들은 한 두세대가 지나면 대다수가 되어버릴 무슬림들을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다. 피 흘림이 없다면 이 사건의 연속은 중지할 수 없을 것 같으며 모든 것이 단지 법에 따른 약간의 변화에 의하여 뒤집어 질 수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다.

원문출처  http://www.faithfreedom.org/articles/op-ed/islam%e2%80%99s-war-on-culture/

 

79p에서 "그런데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순니파와 시아파가 함께 예배도 보고 결혼도 서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서로 미워하고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라고 기술하고 있서 순니파와 시아파가 서로 사이 좋게 지내고 있는 것같이 기술하며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임을 주장하고 있는데 현재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는 자살폭탄 테러와 차량폭탄 테러는 순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CNN 국제뉴스를 보면 중동에서 이슬람 내부의 갈등으로 인한 자살폭탄 테러, 차량폭탄 테러, 지도자의 독재와 국민들의 반항으로 인한 내전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배경에는 순니파와 시아파간의 갈등이 있다.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가 아닌 10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가 아닌 10가지 분명한 이유

 

1. 과거 10년간 명백하게 이슬람의 이름으로 18,000건의 살인적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아마도 다른 종교는 12건 정도 될 것이다).

 

2.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자신을 모욕하거나 이슬람을 비난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여기는 여성도 포함된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행동을 모범으로 본받고 있다.

 

3. 무함마드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고 사람들이 증언할 때까지 적들과 싸우라고 알라에 의하여 명령받았다고 여러 장소에서 말하였다. 무함마드의 생애 마지막 9년 동안 그 말대로 하기 위해서 적어도 65번 이상의 군사작전을 명령하였다.

무함마드는 약탈물 노획, 성 착취, 술과 섹스 정욕을 만족시켜주는 천국과 같은 가장 비열한 동기를 미끼로 자기 부하들에게 전쟁하도록 선동하였다. 그는 전쟁에서 포로를 참수하였고 어린아이들을 노예로 만들었고 여자들을 강간하였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이 무함마드의 행위를 본받는 것이 꾸란의 가르침이다.

 

4. 무함마드가 죽은 후 그와 같이 살았고 그의 종교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즉시로 서로 전쟁에 들어갔다.

무함마드가 사랑하는 딸 파티마는 이슬람 초기에 메카에서 불신자들 가운데 안전하게 살았으나 무함마드가 죽은 지 단지 6달 후에 동료 무슬림들의 박해로 인한 스트레스로 죽었다. 그녀는 2대 칼리프가 된 사람에 의하여 갈비뼈가 부러진 후 무함마드의 손자를 유산하였다.

이슬람으로 두 번째 개종자였으며 무함마드에게 있어서 아들과 같이 양육되었던 파티마의 남편 알리는 무함마드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이며 그가 완벽한 여자라고 불렀던 아이샤에 의하여 일어난 군대와 내전으로 전쟁을 하였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적어도 10년 안에 일어난 이 단 하나의 전쟁에서 10,000명의 무슬림들이 죽었다.

처음 4명의 무슬림 통치자인 칼리프 가운데 세 명이 살해되었다. 그들 모두 무함마드와 가까운 동료들이었다. 1 대 칼리프는 수 년 후에 5대 칼리프가 될 사람에 의하여 살해된 다음 죽은 당나귀의 가죽에 싸여져서 불에 태워졌다. 3 대 칼리프는 1 대 칼리프의 아들의 연합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4 대 칼리프 알리는 5대 칼리프와 격렬한 논쟁 중에 칼에 찔려 죽었다. 5대 칼리프는 무함마드가 사랑했던 두 명의 손자가운데 한 명을 독살하였다. 다른 손자는 6대 칼리프에 의하여 참수 당하였다.

무함마드의 가족들과 가까운 동료들과 그들의 자손들 사이의 싸움과 권력투쟁은 시간이 가면서 더 심화되었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50년 내에 다신교도 종교 아래서도 그 이전 수 세기 동안 아무 일 없었던 카바 신전도 무슬림들의 내전으로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이슬람 국가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다.

 

5.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에게 타종교와 전쟁을 하고 그들을 이슬람에 복종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죽은 지 수십년 내에 그의 아랍족들은 기독교인, 유대인, 힌두교인, 불교도인과 조로아스터교인들의 땅을 침략하고 정복하였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단지 25년 만에 무슬림 연합군은 사우디아라비아 바깥의 현재 28개국의 경계 안에 땅과 민족을 점령하였다.

 

6. 무슬림들은 1400년 동안 타종교에 대하여 지하드 전쟁을 계속하였고 지하드는 비 무슬림들이 오직 자신들을 방어할 능력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알라의 이름으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과 힌두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주간은 한 주도 없다. 이러한 다른 종교가운데 어느 종교도 서로 전쟁하지 않는다.

 

7. 이슬람은 그들의 종교를 떠나가려는 자는 누구든지 살해할 것을 위협함으로 그 구성원을 유지하는 유일한 종교이다. 이것은 무함마드가 만들어 놓은 예를 따르는 것이다.

 

8. 이슬람은 비 무슬림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은 살인하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지만 비 무슬림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무슬림은 사형에 처해질 수 없다고 말하였다.

 

9. 꾸란은 한 번도 비 무슬림에 대한 알라의 사랑을 말하지 않지만 비 무슬림에 대한 알라의 잔혹함과 증오는 500번 이상 말하고 있다.

 

10.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이 말이 9.11사건 테러에 납치되어 사용된 유나이티드 항공 여객기 93편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들이다!

 

원문보기 http://www.thereligionofpeace.com/Pages/Top-10-Reasons.htm

 

96~97p에 "아랍 국가에서도 일부다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 지금은 약 5퍼센트 정도만이 두 번째 부인을 얻는다고 되어 있어.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일부일처가 이슬람의 근본정신에 가정 부합한다고 할 수 있지."라고 기술하며 일부일처가 이슬람의 근본정신에 가깝다고 주장하는데 안타깝게도 저자의 말과는 달리 이슬람 근본주의 정신은 무함마드를 모방하는 것을 제일의 미덕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교주 무함마드가 부인을 10명 이상을 두고, 첩은 수를 셀수 없을 정도로 둔 것을 미덕으로 여겨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은 아직도 아랍인같이 보이고 아랍인같이 생각하는 새로운 사람을 그 세계로 데려오는 것을 지향하는 완벽한 문화와 정체성의 변동을 견디어야한다. 갑작스럽게 아랍의 이해관계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그 이해관계 목록의 최상에 두는 개종자 자신의 이해관계가 된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은 아랍식 이름을 선호하여 전에 사용하던 이름을 버린다. 그들은 아랍인같이 옷을 입고 아랍의 옛 전통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오른손으로 먹으며 물 한잔을 세 번에 나누어 마시며 무함마드가 그랬듯이 식사 전후에 동일한 기도 ‘dua'를 한다. 그들의 입맛이 그것에 관하여 어떻든지 대추야자와 꿀을 먹는다. 그들은 이슬람 방식과 맞추기 위하여 그들의 화장실 사용습관을 바꾼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좋아하고 싫어한 것을 모방하여야 하므로 자기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들에게 물어보면 그것은 자신들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문화적 배경에 관계없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무함마드를 모방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14세기 전에 그랬음으로 개들을 싫어하기 시작한다. 무함마드가 고기를 먹었으므로 그들은 채식주의자가 될 수 없다. 무함마드가 나중에 결혼했던 고아였던 자기 양자의 아내 자이납이 벗은 것을 어렴풋이 본 후 입양제도에 대하여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아를 입양할 수 없다. 녹색이 그들의 선호하는 색이 되었고 북소리가 그들의 선호하는 음악이 되었다. 그들은 아랍어를 배우고 아랍어를 유창하게 말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유럽에서도 짧은 아랍식 ‘thaub'를 입고 반면에 그들의 아내들은 니캅으로 덮어 씌우고 물어보면 그것은 자기들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109p의 탄자니아 편에서 "어떤 학자들은 오늘날 아프리카가 이렇게 못살고 뒤처지게 된 이유를 유럽사람들이 저지른 노예사냥 때문이라고 해."라고 기술하여 이슬람은 노예제도에서 자유로운듯이 이야기하는데 이슬람은 최근 까지 노예제도를 유지하였고 꾸란이 노예제도를 잘 규정하고 있다. 아래 자료를 보라.

 

꾸란에서 노예제도

 

적어도 두 무슬림 국가 수단과 모리타니아에서 비-무슬림은 또한 노예제도의 위협에 직면한다. 이것은 이슬람에 있어서 특별하게 민감한 문제인데 왜냐하면 노예제도의 옹호자들은 기독교에 비하여 이슬람을 호의적으로 비교하기 위하여 자주 서방 세계의 과거 노예제도를 언급한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에 있어서 끊임없는 비난의 화제인 노예제도는 오늘날 옛 기독교 세계의 영역에서는 시행되지 않으며 단지 무슬림 나라에서 시행된다. 다시 한번 이것에 대한 주된 책임은 꾸란에 있다. 노예제도 특히 전쟁 포로는 무슬림 성서 전체를 통하여 당연시된다. 꾸란은 아무 생각 없이 믿는 자는 당연히 노예 소유자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맹세를 어긴 것에 대한 벌칙으로 너희 가족들이 먹는 음식과 같은 것으로 열 명의 가난한 자에게 음식을 제공하라 또는 열 명의 가난한 자에게 입을 것을 주라 또는 한 명의 노예를 해방시켜 주라”(수라 5:89). 꾸란은 또한 노예와의 결혼에 관한 규정도 포함한다: “너희 가운데 독신과 너희 가운데 정직한 하인과 하녀들을 결혼시켜 주라”(수라 24:32). 노예를 첩으로 취하는 것(자신의 부인이 있음에도)은 역시 분명히 허용된다: “믿는 사람들은 번성하노라 이들은 예배에 임하고 겸손하며 헛된 말을 하지 않는 자들이라 이들은 이슬람 세를 바치며 자신들의 순결을 지키는 자들이라 이들의 아내와 이들의 오른 손이 소유하는 것은 제외로 그들에 대해서는 책망의 대상이 아니라”(수라 23:1-6). 노예제도는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성경에서도 당연시된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그들의 경전을 이해하는 현격히 다른 방식들 그리고 각 경전의 나머지 부분의 다른 내용들이 결정적이다. 성경의 보편적 구원의 선포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 존엄성에 대한 기독교인의 이해로부터 논리적으로 생각한 기독교인들 때문에 미국에서 노예폐지 운동이 시작되었다. 개신교 연합은 그“특별한 제도”를 지원하는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지적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 하나의 해석에 구속되지 않는다. 꾸란에 있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많은 무슬림들은 이슬람 원리위에 있는 노예제도에 반하는 논리를 만들어 내려고 시도했다. 파키스탄의 라호르에 있는 이슬람 연구소의 소장인 Shehzad Saleem은 “이슬람이 노예제도를 승인하고 추종자들이 전쟁포로를 특히 여성들을 노예로 만들며 그들과 또 다른 혼인관계를 이룬다는 개념은 이슬람에 관한 다른 많은 오해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단정하건데 이슬람은 노예제도와 축첩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다. 반대로 이슬람은 이러한 풍습을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이것은 고결한 단언이지만 위에서 인용한 꾸란의 구절과는 완전히 배치되며 Saleem은 그의 글 “이슬람에서 노예제도의 비난”에서 이 꾸란 구절을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그때 당시에 아라비아에 유행했던 사회적 조건 때문에 이슬람은 노예제도를 폐지시키는 점진적인 과정을 채택하였다. 노예제도는 이슬람 이전 아랍사회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무슬림의 노예제도 허용을 유행했던 사회적 조건으로 돌렸다.

기독교인들도 때로는 같은 논리를 만든다: 유행했던 사회적 조건 때문에 사도시대에 교회는 노예제도를 반대하지 않았다. 이것이 두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다시 꾸란에 자리 잡은 지식은 무슬림들을 불리한 입장에 세운다. 위에 언급한 꾸란 구절들은 알라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혐의로 비난 받기 쉬운 Saleem과 같은 개혁주의자를 만든다. 무슬림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꾸란이 완벽한 알라의 말씀이며 모든 시대에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 때문에 꾸란이 보편적인 도덕적 원리를 선언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하는데 Saleem과 공조하는 자들은 그들의 이슬람에 대한 충성심에 대하여 의심을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고립된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는 노예제도는 일부 무슬림들이 여전히 이 문제에 관하여 꾸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게다가 노예제도는 서방세계에서 최근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슬람 역사를 통하여 당연시 되어왔었다. 노예제도를 끝내는 자극은 기독교 세계로부터 이슬람으로 움직였다. 영국정부가 19세기에 노예제도를 선호하는 정권에게 그 풍습을 줄이던지 금지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하자 적어도 한 무슬림 지도자로부터 반응은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다. 모로코의 왕은 “노예의 매매는 아담의 자손들의 시대로부터......... 오늘날 까지 모든 종파와 나라들이 동의해왔던 문제이다.”라고 답장하였다. 그는 자신이 “어느 종파의 어느 법에 의하여 노예제도가 금지되는 것”을 알지 못하며 누군가가 노예제도의 도덕성을 문제시하는 것도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아무도 이 질문을 할 필요가 없으니, 동등한 존재가 지위가 높고 낮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 것이며 대낮의 빛과 같이 더 이상 논증을 요구할 것이 없다.”

이슬람 세계에서 대부분의 노예는 지하드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다. 이것이 조직적인 체계로 발전하였다:

지하드 노예시스템은 칼리프에게 공물을 바치는 자였던 군주에 의하여 복속의 협정을 준수하여 매년 배정된 남자와 여자의 양성의 분담을 포함하였다. Amr가 643년에 트리폴리(리비아)를 정복하였을 때 그는 유대인과 베르베르족 기독교인이 그들의 아내와 자식을 아랍군대에게 그들의 지츠야[jizya; 비-무슬림에 대한 세금]로 줄 것을 강제하였다. 652년부터 1276년에 정복될 때까지 누비아[아프리카 수단 북부지방]는 노예의 매년 분담 분을 카이로로 보내도록 강제되었다. Umayyad와 Abbasid왕조 치하의 Transoxiana, Sijistan, Armenia, Fezzan(마그레브)의 도시와 맺어진 협정은 남성과 여성 노예의 매년 파견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노예의 주요한 공급의 원천은 달 알 하브[dar-al-harb; 비-무슬림지역; 9장 참조]내의 마을에 대한 정기적인 약탈과 이교도의 지역 안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가 거기 거주자들의 도시와 지방들이 비어 버리도록 휩쓸어 버리는 군사적 원정이었다.

 

오늘날도 여전한 노예제도

 

수단과 모리타니아에서 노예제도에 관한 무슬림 기록은 역사의 문제가 아니고 현재의 사건이다. 수단에서 누군가가 노예가 되는 주된 이유는 그 남자 또는 그 여자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이 식민지풍의 허구의 나라에서 북부 지역의 아랍 무슬림들은 나라 전체에 샤리아 법을 적용함으로 남부 지역의 흑인 기독교 세력을 짓밟아 버리는 과정에 있다. 인권과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위한 목적으로 1995년에 창립된 모리타니아와 수단의 반 노예제도 연합(CASMAS)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의 Khartoum정부는 남부의 비-무슬림 흑인들에게 보수적 무슬림 성직자들이 제시하고 해석하는 샤리아 법을 적용하기를 원한다. 흑인 정령 신앙자와 남부 기독교인은 북부와 동부로부터 아랍인들이 노예약탈을 했던 여러 해를 기억하고 무슬림의 종교적 통치와 그것의 뒤에 있는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팽창을 인식하고 저지한다.

전 세계로부터 비평이 수단에 노예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였지만 누군가 기꺼이 그 어려운 사실에 용감하게 맞설 것이라는 데에 의심이 없다. 미국 노예제도 반대 그룹에 따르면 “1996년에 Nation of Islam의 지도자인 성직자 루이스 파라칸(Louis Farrakhan)이 언론사에게 수단에서 노예제도를 찾아내라고 도전한 후에 볼티모어 선 신문사의 두 기자 길버트 루스와이트(Gilbert Lewthwaite)와 그레고리 케인(Gregory Kane)이 그 일을 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남부 수단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한 집단의 젊은 노예들에게 자유를 찾아 주면서 많은 증거를 가지고 돌아왔다. 노예사냥은 특별히 비인간적이다. 미국 노예제도 반대 그룹은 또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노예사냥에서 유괴된 여자와 어린이는 목이 로프로 묶이거나 동물에 묶여져서 북쪽으로 행진하였다. 길을 가면서 많은 여성과 소녀들이 반복적으로 집단 강간을 당하였다. 조용하지 않을 어린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북부에서 노예들은 무장 사병 개인들에 의하여 억류되거나 시장에서 팔렸다. 소년들은 가축을 치는 일꾼으로 일하였고 그들이 치는 가축과 같이 자야만 하였다. 탈출을 시도하였던 일부는 달리는 능력을 제한하기 위하여 아킬레스건이 절단되었다. 주인들은 전형적으로 여성들과 소녀들을 낮에는 청소를 시키고 밤에는 섹스로 주인에게 봉사하게 만들어 가정부 또는 첩으로 이용하였다. 생존자들은 자신들이 “어비드”(“흑인 노예”)라고 불리었으며 매일 매질을 견디어야 하였고 먹지 못할 음식을 먹어야 했다고 보고한다. 주인들은 노예로부터 그들의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마저도 강탈하여서 그들에게 아랍어 이름을 지어주고 무슬림처럼 기도하라고 강요하였다.

한 수단 기독교인 노예는 제임스 파렝 엘리어(James Pareng Alier)였는데 그는 12살에 납치되어 노예가 되었다. 엘리어는 “나는 꾸란을 배우고 아흐메드(Ahmed)로 이름을 바꾸도록 강요받았다. 그들은 나에게 기독교는 나쁜 종교라고 말했다. 우리는 군사훈련을 받은 후 전투에 투입될 것이라고 말하였다.”라고 보고한다. 엘리어는 자신의 가족의 소재에 대하여 전혀 모른다.

또 다른 노예는 프란시스 복(Francis Bok)인데 1980년대 후반에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유괴되어 노예로 팔린 기독교인이다. 그는 당시에 7살 이었다. 그는 “그 사건은 비참하였다. 남자는 살해되었고 여자는 강간되었다. 모든 것이 우리들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그 사건은 끔찍하였다.”라고 회상하였다. 그는 시장터로 이동하기 위하여 노새의 옆구리에 묶였고 두 소녀는 반대편에 묶였다. “그 소녀들은 울음을 그칠 줄을 몰랐고 그래서 그 남자들이 그들을 사살하였다. 그 후에 나는 조용히 하는 것을 배웠다.” 미국 노예제도 반대 그룹이 지적하였듯이 10년 후에 그가 드디어 탈출할 때 까지 그는 매일 매질을 당하였고 “어비드”라고 불리었다.

이슬람의 노예유지 기록이 순수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무슬림은 이 부분에서 적어도 이슬람에서 노예제도는 인종차별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서 그들의 종교적인 오명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어느 무슬림 노예소유자도 흑인들이 인간이하이며 그래서 노예로 태어났다는 혐오스러운 교리(한때 서방에서 유행하였던)를 가르치지 않는다.

비록 노예제도는 흑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지만 수 세기동안 무슬림 세계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수입하고 잡아오고 매입하였다. 이슬람에서 이 인종적 요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CASMAS에 따르면 흑인노예제도는 오늘날에도 모리타니아에 존재한다. “옛날에는 노예제도가 모리타니아에서 평범한 것이었다. 노예제도는 인종적 또는 정치적 집단들 간에 무장투쟁의 일부분이었다. 노예제도가 8세기를 통하여 모리타니아에서 이 사람들 가운데 계속되었고 이슬람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점 이후로부터 오직 아프리카 흑인들만이 모리타니아에서 노예가 되었다.” 노예제도는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CASMAS는 “노예제도 반대 지도자인 보바카르 메사오우드(Bobacar Messaoud)[메사오우드 오울드 보울크헤어(Messaoud ould Boulkheir)]는 모리타니아 인구의 거의 절반이 계속해서 노예가 되던지 또는 노예와 같은 관계 속에 살고 있다고 추측한다”고 보고한다.

일부 무슬림은 노예/주인의 관계는 말하자면 미국 남부에 있어서 노예제도보다 전반적으로 보다 자유로웠다는 주장까지 하면서 이슬람에서 노예제도를 동일한 도덕적 붓으로 칠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슬람에서 노예와 주인이 종종 결혼도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같은 집에 살며 노예는 자신의 주인보다 더 부유할 수도 있다. 노예는 광범하고 다양한 조건하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이것이 꾸란 자체 안에 열거되어있다.

BBC 특파원 데이비드 헤크트(David Hecht)는 모리타니아를 여행했고 남자들이 노예들과 결혼하고 그들을 가혹하게 다루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노예/주인의 관계는 일종의 혈족관계이다”라고 설명했다. “비록 노예들은 대부분이 아프리카 흑인이고 주인들 또는 ‘Bidan’은 보다 아랍 베르베르족의 혈통을 가지나 그들은 모두 같은 족속에 속한 구성원들이며 일부 경우에 흑인이 추장이다.” 헤크트는 “모리타니아에서는 대규모 농장도 없고 언덕 위에 대저택도 없다.”고 말한다. 모리타니아에서 노예들에 대한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는 무슬림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이슬람의 세계에서 노예는 항상 그들이 다른 문화에서 누렸던 것보다 더 큰 사회적 유동성을 가진다. 실로 이집트와 시리아를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통치하였던 맘룩(Mamluk: "possessed one," or "slave")왕조에서는 많은 통치자들이 노예로부터 나왔다.

헤크트의 분석이 노예 출신 모리타니아인과 노예제도 반대 운동가 메사오우드 오울드 보울크헤어로부터 맹렬한 저항을 일으킬지도 모르나 그의 분석에는 일부 진실이 있을지 모른다: “자유는 대저택 또는 천막과 관련하여 또는 은행계좌의 돈의 합계액과 관련하여 측정되지 않는다. 자유는 훨씬 단순하고 그 어느 것 보다도 많은 가치를 가진다.” 그 밖의 다른 것을 제시하는 것은 남북전쟁 전에 자신들의 노예가 북부의 일부 자유 흑인들 보다 사정이 낫다고 보는 남부의 노예 주인들의 주장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아마도 남부 노예들의 사정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예폐지론자들의 주장은 삶의 조건에 근거하지 않았고 창조주 앞에서 인간 평등의 개념에 근거한다.

물론 오늘날 노예제도를 시행하는 무슬림 국가는 거의 없다. 그러나 여전히 노예제도가 꾸란과 이슬람법에 의하여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는 한 노예제도의 가능성은 알라의 말씀과 “순수한” 이슬람에 대하여 완전한 복종을 강제하기를 원하는 무슬림 개혁자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그리고 이 “순수한” 이슬람은 무슬림 세계에서 위기가 존재하는 한 영향력이 계속해서 커질 것이다. 모든 것이 이슬람의 세계에서 순조롭지 않을 때 무슬림 투사들이 생각하기를 알라를 모독했다고 여겨지는 온건론자들을 비난할 수 있고 그로인하여 정통강경주의로 돌아가자는 요구를 정당화 할 것이다.

 

원문출처: Islam unveiled; disturbing questions about the world's fastest-growing faith, 63~68p

 

132p 터키여행 부분에서 "할례를 한 아이에게 이웃과 시민들이 축복을 보내고 모르는 사람인데도 선물을 주면서 격려하는 풍습이 진정한 이슬람 사회의 장점인 것 같았다. 그러한 축복을 받은 아이는 틀림없이 자신의 조국 터키를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서 학원으로 가고 야자, 과외, 시험에 시달리는 한국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할례를 한 아이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그 아이가 부럽기도 했다."라고 기술하여 할례를 행하는 터키의 이슬람 문화가 우수하고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처럼 묘사하는 데 한국국민들은 터키국민들 보다 훨씬 더 우수한 문화와 역량을 가지고 있다. 20-50국가 대열에 들어간 것은 한국국민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의 결과였고  한국국민의 교육열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인정하여 종종 그가 연설할 때 한국국민들의 우수한 자녀교육열을 칭찬하며 예로 들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대중예술인 드라마와 K-Pop은 전 세계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으니 저자의 한국아이들에 대한 그러한 묘사는 적절치 않다.

 

139p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하여 "특히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어기고 이웃 아랍 영토까지 차지하고 있단다. 유엔에서 아무리 결의안을 통과시켜 이스라엘에게 군대를 철수시키고 영토 반환을 하라고 촉구해도 이스라엘은 아직도 남의 땅을 차치하고 돌려주지 않고 있지."라고 기술하며 팔레스타인 문제를 자신의 문제인양 관심을 가지는데  1967년 3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을 공격할 준비를하고 있는 아랍국가들을 이스라엘이 먼저 선수를 친것 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의 서해교전 사태나,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사건과 같이 먼저 공격당하는 나라가 아니다. 적들이 공격하기 전에 미리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 이스라엘 군대의 특징이다. 다음 자료는 1967년 3차 중동전에 대하여 중동출신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포함된 무슬림 사회에 대한 글이다.

 

무슬림 사회들의 참상

 

글쓴이 Ibn Kammuna (Tuesday, 03 July 2012 06:20)

 

내가 중동에 살고 있을 때 거기에 살고 있는 친구인 미국인 여성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 아랍인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서방세계 사람들인 당신들이 생각하는 방식과의 주요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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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질문이 모호하고 막연하였지만 그것은 그대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랍문화와 정신세계, 서방세계문화와 정신세계에 관하여 그녀의 마음에 무엇이 가장 인상적인지 알기를 원하였다.

그녀가 배운 여성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녀는 나의 질문에 기나긴 대답을 하였고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아랍문화는 비밀의 문화이다. 서방세계 사람들도 그들의 비밀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것들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한다. 아랍문화는 진실과 개방성이 없는 수치심의 문화이다. 서방세계 문화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문화”가 아닌 “사람들을 돕는 문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직함과 공개된 기록의 문화이다. 아랍문화는 어떠한 생각 없이 개인에게 일들을 “강요하는” 문화이다. 서방세계 문화는 선택의 문화이고 사물들에 대한 비판을 반영하는 문화이다.

그녀는 내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는 많은 다른 것을 말하였다. 그 당시에 나는 서방세계에 가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가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말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들이 나의 기억 속에 박혀있는 요점들이다.

내가 서방세계로 와서 여러 해를 산 다음 그녀가 자신의 대답에서 요점을 말하였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중동에서 나의 뇌는 책과 종교적 명령과 꾸란의 구절과 문화적 격언과 신문과 다른 미디어 수단을 통하여 “유대인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유대인 증오”가르침으로 가득 찬 마음은 유대인에 관한 어떠한 관점을 한 가지 마음으로 몰아가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이 놀라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해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인 유대인들을 올바로 아는 데는 내가 서방세계에서 살고 있는 동안 많은 세월이 걸렸다. 정기적인 자원 활동과 자선행위에 참여하며 공공의 유익을 위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많은 유대인들을 만났는데 아랍문화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특색이다.

서방세계에서 유대인들과 개인적인 만남은 내가 중동에서 자라는 동안 세뇌되고 내가 믿은 어떤 아랍의 문화적 “진실들”에 의문을 품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면 나는 1967년 전쟁은 아랍 국가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도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랍의 문화적 진실로 믿었었다. 나는 이 문제를 믿을만한 출판물들과 중립적 기록물들을 자료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나의 결론은 내안에 소위 Thomas Kuhn이 말하는 “사고의 변화”를 일으켰다. 1967전쟁의 주요 도발자는 아랍 국가들이었다. 이 전쟁 발발의 원흉은 이집트 대통령 자말 압둘 나세르였다. 물론 다른 아랍 지도자들은 그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전 아랍세계는 그들이 자랑스럽게 도발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아주 작은 나라의 손에 괴멸되는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아랍 미디어나 정치를 신용하지 않는다. 나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하여 나 자신의 독립적인 연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글에서 다루어져야할 핵심 문제인 아랍과 이슬람 국가들의 절망적인 실상으로 돌아가자. 이슬람 국가들의 절망적인 참상은 삶의 사실들을 무시하고, 그것들을 피하며, 나타내지 않는 것 때문에 초래되었다. 그리고 무슬림들이 그들의 삶의 완벽한 법전으로 받아들인 이슬람이 이슬람 국가들의 이러한 참상을 만들어내는 데 책임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슬람은 개인들과 국민들의 생각을 마비시킨다. 이슬람은 진실을 찾는 것을 방해한다. 무슬림 사회에 대한 이슬람의 맹목적인 마법은 그들이 진실에 냉담하게 만들고 그들을 무지 속에 있게 만든다. 설명해보겠다.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진실을 찾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요구한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실을 중립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조사하도록 도와주며 필요할 때마다 그것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교정한다. 이 사실은 과학의 발전에 잘 나타나있다. 인간역사의 대부분에서 지구는 평평하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그러나 이어서 과학적 조사는 지구의 형태에 관한 다른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었는데 그것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오래된 진실인 당시의 의견과 다른 것으로 지구가 연속된 둥근 형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수정하였다.

우리는 “시간”의 개념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믿었다. 어떤 현상이 그러한 “진실”에 도전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비판적인 태도로 생각하였고 우리의 시간에 관한 관점을 “상대적인”것으로 바꾸게 이르렀다. 비판적인 사고는 그러므로 진실을 찾는데 필수적이며 그것은 과학적 진보와 발전을 만들어낸다.

이슬람은 인간 사고에 있어서 적어도 어떤 문제들에 있어서 이 비판적인 요소를 파괴한다. 이슬람이 비판적 사고를 허용할지도 모르지만 종교와 무엇이든지 종교와 관련된 문제들에서는 비판적인 사고는 출입금지이다. 서방세계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도덕성을 문제로 삼을 수 있다. 누군가가 교황의 의도를 문제로 삼을 수 있다. 누군가가 어떤 규범에 도전할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아니다. 무슬림 국가에서 당신이 무함마드가 예언자라는 것 또는 꾸란의 진실성에 문제를 제기하면 당신은 죽은 고기가 될 것이다. 전 무슬림 마크 가브리엘은 알-아즈하르 대학교수였다. 그는 이슬람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였고 이슬람의 근본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꾸란 믿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멸시되었고 알-아즈하르 대학교의 자신의 동료들과 자기 가족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았다. 서안지구의 한 대학교 교수가 어떤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여 무함마드의 존재를 문제 삼았다. 그의 학생들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하였을까? 그들은 그를 2층 창문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이단이라는 알리 시나의 주장에 저항한다. 그러나 현장의 사실들은 그의 주장이 날이 갈수록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단에 소속된 자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비열한 범죄자로 밝혀지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주 같은 방식으로 무슬림들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비열한 범죄자, 노상강도, 집단살인자, 노예로 만드는 사람, 어린이에 대한 이상 성욕자, 일부다처주의자, 강간범이라는 분명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무시하며 무함마드에게 신성을 주며 오늘날에는 무함마드를 모방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무슬림들이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서 누군가가 꾸란을 태웠다고 들으면 대 혼란이 일어난다. 이단의 정신세계가 작동하고 무슬림들은 광포해진다. 비록 그 주장하는 꾸란 소각이 세상의 아주 먼 구석에서 일어났어도 무슬림들은 세계의 모든 곳에서 기독교 수녀들과 선교사들을 살해한다. 무슬림들은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유대 성전들과 토라를 태우거나 아흐마디 교단(Ahmadiyya;19세기 말 인도에서 생긴 이슬람 교단) 모스크들을 파괴한다.

이슬람은 그것이 출현한 시대 때문에 큰 성공을 이룬 이단이다. 6세기에 아라비아는 통치하는 정부가 없었고 부족단위의 군대가 그 시기를 통치하였다. 무함마드는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그는 이슬람이라는 “부족”시스템을 찾아냈고 시작하였다. 이 시스템에서는 합류하기는 쉽지만 산채로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날 까지 배교에 대한 처벌은 죽음이다. 그 들어가는 것은 오픈되어 있고 떠나는 것은 막혀 있는 부족 시스템에서 무함마드는 다른 부족으로부터 모든 범법자들과 배신자들을 끌어들이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약탈물에 대한 탐욕과 강간을 위한 여성 포로들로 그들을 유혹하였고 그것이 먹혀들었다. 약탈물과 여성들에 대한 탐욕으로 무함마드는 들어가는 것은 열려있고 떠나는 것은 막혀있는 성공적인 부족 시스템을 수립하였다. “나는 테러로 승리하게 되었다”그리고 “나는 알라가 나를 위하여 약탈물을 허락한 유일한 예언자이다”와 같은 표현들을 그는 거만하게 말하였다.

이슬람의 근본에 대한 이러한 전형적인 예가 얼마나 끔찍하고 비열하든지간에 이것은 이슬람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문서들에서 모두 분명하지만 21세기의 무슬림들은 그것들이 세계가 모든 시대에 걸쳐서 모방하여야할 거룩한 진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슬림 문화가 비판적 사고와 자기반성의 발달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떠난다면 그들은 살해당한다.” 무슬림들은 이 이슬람의 가르침을 생각해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 남성은 다른 종교(유대교와 기독교)의 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된다. 무슬림 여성은 비-무슬림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왜 그렇게 가르쳤는지 질문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은 와인 한 잔을 마시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좋은 것인데).” 무슬림은 와인을 마시는 것 또는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사실상 당신의 피부를 태양에 적당히 노출하는 것은 좋은 것인데 무슬림 여성의 몸은 가리어져야 한다. 그것은 뼈의 발달에 필수적인 영양소인 신체 내에 비타민D 생성을 돕는다.” 무슬림은 그러한 가르침에 도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 목록은 길다. 무슬림들의 두뇌 사용이 신성한 순나로 여겨지는 이슬람의 가르침이나 무함마드의 행동에 도전한다면 무슬림들이 그들의 두뇌를 비판적인 자세로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미네소타의 한 무슬림 의사는 어떤 형태의 여성할례를 아직도 권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 권위 있는 하디스에서 무함마드가 여성의 성 능력을 파괴하는 그러한 악하고 비도덕적인 짓을 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사고를 발달시키기 위하여 사고의 자유와 배우거나 생각에 떠오르는 모든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자유가 학교에서 가르쳐져야한다. 진정한 교육은 개인들에게 어떠한 것도 신성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과 배우고 습득한 사실을 질문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한 능력이 무슬림 사회의 어린이들에게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만약에 무슬림 사회 안에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고가 어떠한 것이라도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하여 허용된다면 이슬람은 인간의 문명을 초월했던 많은 역사적인 종교들 가운데서 어느 때든지 그것의 바른 목적지를 취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슬람은 그것이 실제로 속했던 아라비아 사막모래 속에 매장될 것이다.

원문출처 http://www.islam-watch.org/authors/59-kammuna/1066-the-plight-of-muslim-societies.html

 

152p의 아랍에미리트 여행부분에서 저자는 "원래 이슬람은 과거에도 소수민족과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전통이 있었어. 아랍 시대에는 딤미라는 계층을 인정하여 그들의 종교적 자유와 소수민족으로서의 문화와 전통을 지킬 수 있게 배려해 주었고, 15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 시기에도 밀레트라는 제도를 만들어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들이 마음껏 종교의 자유를 누렸지. 이처럼 수수민족과 다른 종교에 관한 관용과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은 오랜 이슬람 역사의 전통이지."라고 기술하며 이슬람  내부의 소수 그룹 종교을 존중하여 관용을 베풀었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이슬람의 타끼야(포교를 위한 속임수)교리를 사용하고 있다. 다음 자료가 그것을 반증한다.

 

딤미스(dhimmis)와 이슬람

 

글쓴이: Bat Ye'or 

 

아랍족이 7세기에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정복한 후 딤미스(dhimmis)라는 용어는 아랍인이 아닌 원주민과 비무슬림 민족인 유대인들, 기독교인들, 배화교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들의 영토는 아랍 무슬림 지배하에 들어왔다.

dhimmi는 “보호되는”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민족들은 실제에서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이론상으로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의 합의된 계약의 특정된 조건에 의하여 그들의 정복자로부터 약탈과 노예로 되는 것과 추방과 대량학살로부터 보호된다.

이러한 보호의 대가로 dhimmis는 계약내용에 따르게 되고 그 계약의 요점은 잠시 후에 설명하겠다. 이러한 이민족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은 정복한 아랍 소수민족이 자연적으로 강압적인 정책을 채택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혹독해 졌다.

그들의 압제를 정당화하기위해 통치자들은 자선과 형제애를 장려하는 꾸란 구절을 배제하는 어떤 종교적 가치에 근거하여 그들의 정책을 만들었다.

그래서 보편적인 지리정치학적인 사건 즉 다른 민족의 땅 정복과 정복된 사람들의 복속이 종교적인 개념인 지하드 또는 성전으로 연결되었고 이것의 불가피한 결과로서 이교도를 압제하게 되었다.

그로인하여 dhimmis의 조건이 인간 역사에 있어서 거의 전례가 없었던 종교적 불관용의 전형적인 형태이지만 여기서는 오직 그것의 정치적 측면인 토착민의 착취와 복속만이 검토할 것이다.

dhimmi의 문명은 언어와 역사와 문화와 그리고 아랍 정복자들에 의한 합병 전에 그들의 고국 땅에서 발달되었던 특별한 정치적 사법적 기구에 의하여 특징을 나타낸다.

dhimmi 문명 또는 dhimmi 민족이라는 표현은 그 민족의 현재의 분산에 관계없이 그들의 민족적 기원이 특별히 지리적인 지역과 관계있는 민족을 말한다.

dhimmi문명에 속한 사람들은 점령과 압제와 추방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국가적 독립을 잃어버린 결과인 그들의 방랑과 그들의 현재 거주지에도 불구하고 후손에게 그들의 특별한 유산을 계속해서 전하였던 개인들이다.

경제적 착취

세금은 원주민인 dhimmis가 사는 땅에 부과되었다. dhimmis의 토지의 아랍화를 상징하는 이 세금은 아랍 이슬람 공동체의 세습재산에 보태어졌다. 식민지화의 초기에는 세습영지에 주어진 토지는 그 세금이 면제되었다.

남성 dhimmi는 노인, 장애자, 노예에 대한 이론상 예외가 있었지만 인두세(jizya)를 지불해야만 하였고 이 세금은 정복된 자의 복속과 굴종을 상징하였다.

dhimmis는 무슬림들의 두 배의 세금을 내야했다. 게다가 고문과 죽음을 포함한 집단적인 제재조치의 위협아래 무슬림들은 지역 유대인과 기독교인 공동체로부터 자주 몸값을 착취하였다.

정치와 경제적 차별

아래의 것들이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dhimmis에게 금지되었다.

▪ 무기를 소유하거나 소지하는 것

▪ 부당하게 그들을 죽이려고 하는 가해자일지라도 그 무슬림에게 손을 올리는 것.

▪ 아랍족의 적들과 연합하는 것

▪ 이슬람과 무함마드 또는 천사들을 비방하는 것

▪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 그리고 원래의 종교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

▪ 무슬림 여성과 결혼 또는 축첩으로 연결되는 것

▪ 무슬림에 대한 권력을 가지는 지위를 가지는 것

아래의 것들은 dhimmis에게 의무로 부과되었다.

▪ 도시의 특정한 구역에서 무슬림들로부터 분리되어 살아야하며 그곳의 문은 매일 밤 폐쇄되거나 예멘에서와 같이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도시의 경계 외곽에 살아야한다.

▪ 무슬림들의 집보다 높이가 낮은 집을 가져야한다.

▪ 종교는 은밀히 그리고 소리 없이 실천하여야한다.

▪ 시신은 신속히 매장하여야한다.

▪ 십자가, 깃발, 성경과 같은 종교적 상징물을 공개적으로 보이게 하지 말아야한다.

▪ 외관에 의하여 무슬림들과 구별할 수 있어야한다.

▪ 모양(길이, 소매의 형태 등등)에 의하여 뿐만 아니라 각 dhimmis 집단(유대인, 기독교인, 사마리아인 등)에 할당된 특정의 색깔에 의하여 구별되는 옷을 입어야한다.

▪ 무슬림들의 무덤과 다른 유형의 무덤을 가져야한다.

아래의 것들은 dhimmis에게 금지되었다.

▪ 모스크 또는 가까이 감으로 인하여 오염될 수 있는 어떤 신성한 도시에 접근하는 것

▪ 머리 장식, 벨트, 신발 착용 및 장식한 말안장 또는 무슬림들의 것과 비슷한 말안장 사용하는 것

더 나가서 dhimmis의 모든 외관요소는 그들의 비천하고 절망적인 위치를 강조하도록 의도되었다. 그들은 말과 낙타를 타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이러한 동물들은 그들에게 너무 고귀하다고 여겨졌다. 당나귀는 허용되었지만 단지 도시 바깥에서 탈 수 있었으며 무슬림을 만나면 내려야하였다. 어떤 기간에는 공중목욕탕에서 구별할 수 있는 뱃지를 착용하여야 했고 어떤 지역에서는 공중목욕탕에 들어가는 것이 아예 금지되었다.

아래의 것들이 dhimmis에게 의무로 부과되었다.

▪ 거리에서 서둘러 이동하며 항상 불결함을 상징하는 무슬림의 왼쪽으로 지나가야 하며 무슬림은 그들을 벽으로 밀어버리도록 배운다.

▪ 시선을 내리고 겸손하게 걸어야 한다.

▪ 대응하지 말고 모욕을 받아야한다.

▪ 무슬림의 면전에는 겸손하고 존경하는 자세로 서있어야 한다.

▪ 무슬림들에게 제일 좋은 자리를 양보하여야한다.

▪ 대답할 때를 제외하고 무슬림들에게 말할 수 없다.

dhimmi와 무슬림간의 소송은 이슬람 법정으로 보내지며 거기서 dhimmi의 증언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북아프리카와 예멘에서 사형집행인, 무덤을 파는 자, 공중화장실 청소부 그리고 그 비슷한 가장 불쾌한 의무들이 토요일과 주일이라도 유대인에게 강제되었다.

dhimmi의 생명에 대한 경멸이 동일한 범죄에 대한 불평등한 처벌로 표현되었다. 살인에 대한 처벌이 피해자가 dhimmi이면 훨씬 가벼웠다.

피해자가 이슬람에 대한 신성모독을 하였다고 또는 무슬림을 공격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을 때 dhimmi를 살해한 자는 처벌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무슬림들은 dhimmi와 사회적 교류를 하지 말도록 강력하게 권고되지만 그들과의 접촉이 불가피하다면 그들과의 관계가 필요한 최소한도로 제한되며 항상 모욕을 주도록 권장된다.

이상의 간략한 정리는 압제의 모든 체계를 규율하는 규정들의 윤곽만을 단지 제공하며 이것은 각 지역의 특수한 상황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dhimmi들을 괴롭혔던 이러한 의무의 대가로 그들의 땅에서 그들이 사는 것이 용인되었고 이 땅들은 지금 이슬람화 되었다.

이 관용이 끝이 아니다. 이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폐기될 수 있는데 통치자가 일방적으로 dhimmi들을 추방하는 결정을 하거나 dhimmi들이 규정을 위반하므로 폐기될 수 있다.

두 번째의 경우 dhimmi들의 공동체에 대한 개인적 또는 집단적 보복이 허용되며 약탈 또는 대량학살로 끝난다.

이슬람은 이러한 차별로 dhimmis를 박해하여서 그들이 정복한 땅에서 원주민들이 무슬림으로 개종을 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게 만들어 지금의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대부분을 이슬람화 하였다.


원문출처: The myth of islamic tolerance; how islamic law treats non-muslims, 116~119p

 

 

158p에서 "테러는 일부분인데 그것 때문에 아랍 이슬람 문화가 인류 문명에 끼친 화려한 영향과 공헌이 가려져서는 안 되지."라고 기술하고 170p에  "꾸란은 이슬람의 경전이다. 15억 무슬림들의 삶과 정신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지침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라고 기술하고  191p에 "이 세상에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 종교가 어디 있겠니? 이슬람교도 평화와 평등을 가장 중요한 종교적 가르침으로 삼고 있지만, 웬일인지 폭력과 전쟁의 종교로 비춰지고 말았지."라고 기술하고   194p에 "그러나 그런 문제를 폭력적으로 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특히 이슬람은 평화를 강조하는 종교잖아."라고 기술하며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테러는 이슬람의 일부분이 아니라 이슬람의 전부이다. 그 이유는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이 평균 12 구절마다 한번 씩 비-무슬림에 대한 테러를 선동하기 때문이다. 다음 자료를 보라.

 

 

꾸란은 증오심을 전파하는 책인가?

 

이슬람의 가장 거룩한 책이 비-무슬림에 관하여 말하는 것

 

 

서론

 

왜 폭력인가? 왜 무관심인가?

2002년9월25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한 무리의 무장한 무슬림들이 기독교 자선단체 사무실에 들어가서 직원 7명을 의자에 묶고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무슬림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 이슬람주의자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을 분리하는데 15분이 걸렸고 그들의 목표물 한명 한명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일을 확실히 하였다.”

이슬람의 철저한 추종자들에 의한 인도주의적인 일을 하는 비-무슬림인 사람들의 죽음은 아주 자주 일어난다. 그 처형은 통상적으로 무슬림들에 의하여 기념되지 않지만 까다롭기로 유명한 공동체에 의하여 이슬람의 이름으로 일어난 살인에 대한 어떤 분노도 거의 표시되지 않는다.

반대로 꾸란 모독 또는 무함마드 만평에 관한 소문들은 극단적인 항의, 폭동, 방화, 초상 태우기 등을 초래하며 비-무슬림에 대한 대량학살은 통상적으로 입이 벌어지게 한다. 9.11이후 6년 동안 만 건 이상의 극단적인 이슬람 테러행위가 계속되었으나 그것들 모두에 대하여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분노하지 않았고 기껐하는 이야기는 Abu Ghraib 교도소 또는 Guantanamo 수용소가 자극했다는 것이다.

이 중대한 도덕성의 부재는 많은 서방세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며 특히 이 현실을 이슬람이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종교라는 정치적으로 타당한 가정으로 조화시키려 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유대-기독교 전통이 보편적인 사랑과 이타적인 것을 전파하니까 이슬람도 같은 원리에 근거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보다 철저한 무슬림들은 가장 평화를 사랑하고 가장 덜 위험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러나 이슬람이 평화와 관용의 종교라는 무슬림 옹호자들의 장밋빛 주장 뒤에는 폭력과 깊이 뿌리박힌 차별을 잘 설명하는 많은 어두운 현실이 있다. 아주 단순하게 꾸란은 우월성과 증오와 적대감을 가르친다.

증오에 관한 말들을 정의하는 요소를 생각해보자:

⦁이슬람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과 그 밖의 사람들과 사이의 확실한 구분

⦁이 구분에 근거한 도덕적 비교

⦁다른 집단의 평가절하 또는 인간성 말살과 이슬람 자체의 독특한 우월성

⦁정체성 집단의 소속에 근거한 대우의 다른 기준 주장

⦁다른 집단 구성원에 대한 폭력 선동

슬프게도 그리고 많은 고상한 무슬림들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꾸란은 각 항목에 대하여 증오 스피치로 구성되어 있다.

이슬람의 가장 거룩한 책(꾸란의 61%가 비-무슬림에 관한 것이다)이 무슬림들(가장 우수한 사람들, 3:110)과 불신자들(최악의 피조물들, 98:6) 사이의 선명한 구별의 선을 긋는다. 무슬림들에게는 칭찬이 아낌없이 부어지며 반대로 불신자들에게는 전체적으로 지옥 불에 타는 것으로 정죄된다. 보편적인 사랑을 가르치는 것과 거리가 멀어서 꾸란은 끊임없이 비-무슬림들을 사악한 짐승과 비교하고 그들에 대한 알라의 증오와 그들의 영원한 고문에 대한 알라의 어두운 계획을 보여주면서 비-무슬림들의 열등함을 전파한다. 자연히 무슬림들에 의한 불신자들에 대한 거친 대우도 마찬가지로 장려된다.

그러면 무슬림들에 의하여 알라가 직접 기록한 영원한 말씀이라고 믿어지는 꾸란이 비-무슬림들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꾸란은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을 구별하고 상대적 가치의 계급을 설정한다.

꾸란은 이슬람이 보편적인 형제애에 관한 것이 아니며 믿는 자들의 형제애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믿는 자들은 한 형제라”(49:10)

이슬람 아래서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다. 예를 들어 꾸란 16:75-76에 따르면 노예들과 장애인들은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람들과 평등하지 않다. 꾸란은 “평등의 법”을 도입하는데 이것은 살인에 대한 보복(2:178)과 같은 어떤 문제들을 고려할 때 다른 수준의 인간가치를 설정한다.

무슬림 믿는 자들은 비-무슬림들과 평등하지 않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같을 수 있느뇨?” (39:09)

“장님과 보는 자가 같을 수 있으며 암흑과 빛이 같을 수 있느뇨?” (13:16)

꾸란은 무슬림들이 은혜 받은 종족이고 반면에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사악한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무슬림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가장 좋은 공동체이 백성이라 계율을 지키고 악을 배제할 것이며 알라를 믿으라 만일 성서의 백성들이 믿음을 가졌더라면 그들에게 축복이 더했으리라 그들 가운데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사악한 자들이더라”(3:110)

나중에 보겠지만 알라는 단지 그들의 불신앙에 근거하여 비-무슬림들을 정죄하는 반면에 내세에 무한한 음식과 술과 섹스(56:12-40)를 포함한 최상의 육체적인 괘락으로 믿는 자들에게 보상한다. 사실 꾸란의 대부분이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을 차별하고 비-무슬림들을 비난하는 부분이다.

꾸란의 첫 번째 장이 이것의 예이다. 이것은 철저한 무슬림들이 매일 되풀이하고 이 말씀으로 끝나는 간단한 기도이다:

“저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이옵니다”(1:6-7).

이 구절들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포함하는지를 무함마드에게 질문하였다. 그의 대답은 “그럼 누구인가?” 였다. (Bukhari 56:662).

알라가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 사이에 확실한 구별을 하였기 때문에 비-무슬림들을 대우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무슬림들이 그들의 삶속으로 구체화해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꾸란은 무슬림들이 서로 간에는 자비하고 이교도들에 대하여는 무자비하라고 말한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선지자이며 그와 함께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에 대항하여 마음이 강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 정이 오가니라...(48:29)

알라는 무슬림들이 불신자들에 대하여 승리하도록 해준다:

“알라께서는 그 불신자들이 신앙인들을 지배하도록 두지 아니 하시니라”(4:141)[Pickthall – “성공하는 어떤 방법”] (4:141)

비-무슬림들이 무슬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길은 이슬람의 지배에 복속되는 것이다: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선지자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은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낄 것이라.(9:29; 인두세는 완전한 이슬람 국가에서 비-무슬림들이 그들의 무슬림 지배자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이다)

많은 무슬림들에 대한 통상적인 비난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자주 거만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그들이 사악한 짐승들이라고 말한다.

이슬람 연구에 평생을 바친 Ayatollah Khomeini는 비-무슬림들이 “배설물”과 “불결한 음식을 소화하는 낙타의 땀” 사이의 서열위치에 해당한다고 말하였다. 이상할 것 없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이 “동물들”과 짐승들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인간성을 말살한다:

“성서의 백성들 중에 진리를 거역한 자들과 불신자들은 불지옥에 있게 되리니 그들은 그 안에서 영주하매 가장 사악한 무리들이라”(98:6).

“실로 알라가 보시기에 가장 사악한 동물은 불신하며 믿지 아니하려는 자들이라” (8:55).

7:176 구절은 불신자들의 백치 같은 언행과 값어치 없음에 관하여 그들을 “헐떡거리고 있는 개들”에 비유하고 있다. 7:179 구절은 불신자들이 더 악하게 “짐승”과 같다고 말한다.

5:60 구절은 알라가 과거에 유대인들을 원숭이와 돼지로 변신시켰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7:166과 2:65에 의하여 반복된다.

한 하디스(Bukhari 54:524)는 무함마드는 쥐가 유대인을 닮았다고 믿었다고 말한다(또한 Sahih Muslim 7135와 7136에 의하여 확인된다).

46:29-35 구절은 불신하는 사람은 무함마드를 믿는 마귀보다 더 악하다고까지 말한다.

이슬람법에 따르면 비-무슬림들은 무슬림들에 의하여 재산으로 소유될 수 있지만-이슬람이 가장 우월하다는 메시지에 따라서-동료 무슬림들은(그들이 노예상태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았다면) 재산으로 소유될 수 없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가운데 한 명을 살해한 형벌이 본의 아니게 한 무슬림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상의 3분의 1로 제한함으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꾸란은 알라가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한다고 가르친다. 꾸란은 절대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꾸란은 알라가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포한다.

“그분은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시니라(30:45)

알라는 무함마드에게 복종하는 자들만을 사랑한다(적어도 그 알라의 계시를 제공하는 무함마드에 따르면):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에게 순종하라 하였으니 이를 거역하는 자 있다면 알라는 이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시니라(3:32).

죄를 미워하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대신에 알라의 분노는 개인들에게 골고루 미친다:

“알라는 배신하며 은혜를 모르는 자는 사랑하지 아니하시노라(22:38).

11:118-199 구절은 알라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는 어떤 사람은 선택하여 인도하지 않는다:

“알라께로 향하는 길이 있으되 어떤 길은 고르지 못한 길도 있노라 그러나 그분이 원하신다면 너희들 모두를 인도하셨으리라”(16:9).

알라가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히 불에 타는 것을 포함하여 가장 무서운 영원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나의 계시를 불신하는 자들을 불지옥으로 들여보내니 그들은 그들의 피부가 불에 익어 다른 피부로 변하는 고통을 맛보더라 실로 알라는 전지전능하심이라”(4:56).

“알라는 믿음이 없는 자들의 대적이시라”(2:98)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인데 그는 그들을 아주 많이 미워하여 그들이 죄를 짓도록 인도하기도 하여 실제적으로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서 그들의 운명을 확실하게 만든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알라가 사랑한다는 말이 꾸란 어디에도 없으나 알라가 다른 종교(또는 무신론자)의 사람들의 위하여 준비한 고통을 묘사하는 400개가 넘는 구절들이 있다: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내세에서 패망자 가운데 있게 되리라”(3:85).

비-무슬림의 상대적 가치는 그들이 지옥 불에 탈 연료일 뿐이라는 것이다:

“믿음을 배반한 그들의 재산과 자손이 그들에게 아무런 효용이 되지 못하고 불의 연료가 될 것이라”(3:10 Shakir: "지옥의 땔감“)

그들이 불의 연료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알라의 천사들에 의하여 고통 받을 것이다:

“믿는 자들이여 인간과 돌들이 연료가 되어 타고 있는 불지옥으로부터 너희 자신과 너희 가족을 구하라 불길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엄하고 가혹한 천사들이 알라께서 명령한 대로 거역하지 않고 집행할 것이라”(66:6).

불신자들이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는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알라는 그것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라를 불신하는 자를 비유하사 저들이 하는 일은 폭풍이 부는 날 폭풍에 휘날리는 재와 같아 저들이 얻은 것을 감수하지 못하고”(14:18).

“알라가 저들의 행위로 손실이 가장 큰 자를 너희에게 일러주리요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선행이라 생각하면서 현세의 삶에만 매달리노라 저들은 알라의 말씀과 만남을 부정하는 자들이니 저들의 일들은 무용지물로 끝날 것이라 심판의 날 알라는 저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으리라 지옥이 저들을 위한 보상이라 이것은 저들이 믿음을 거역하고 알라의 말씀과 선지자들을 조롱하였기 때문이라”(18:103-106).

무함마드는 선지자라는 자신의 주장을 거부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자기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알라와 선지자들을 불신하며 알라와 선지자들을 이간시키려 하는 자들이 일부는 믿고 일부는 부정하나이다라고 말하며 그 중간의 길을 택하겠다고 하더라 실로 이들이야 말로 불신자들이거늘 알라는 이 불신자들에게 치욕스러운 벌을 준비하여 두셨노라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들을 믿고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선별하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보상이 준비되어 있노라”(4:150-152).

기독교에서 내세의 형벌은 죄와 ‘사악함’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상대적으로 지옥에 관한 말이 거의 없지만 강조하는 있는 것은 이기적이거나 잔혹한 행위에 대한 개인적인 고통이다. 이슬람에서 지옥은 무함마드의 자신에 관한 개인적인 주장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일 뿐이다. 성경과 대조적으로 꾸란은 평균적으로 12번째 구절마다 지옥에 관하여 말하며 불신자들에 대한 알라의 분노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불신하는 자들은 불길에 옷이 찢기며 끓는 물이 저들의 머리 위에 부어지니라 그리하여 저들의 내장과 피부도 녹아내릴 것이라 저들을 벌할 철로 된 회초리도 준비되어 있노라 그로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나 저들은 다시 그 안으로 되돌려와 불의 징벌을 맛볼 것이니라”(22:19-22).

극도로 증오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을 고문할 수 없다. 알라의 불신자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는 이슬람을 안 믿는 사람들에 대한 무슬림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무슬림들의 개인적인 우월성은 꾸란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려진 대조되는 그림들에 의하여 확인되는데 꾸란에서 무슬림들은 천국에서 가장 큰 육체적인 쾌락으로 보상되며 반대로 불신자들은 동시에 무서운 고통을 받는다(단 하나의 예만 들어서 56장을 보라).

알라 자신이 비-무슬림들이 알지 못하게 막는다.

알라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피할 기회를 준다면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꾸란은 알라가 고의적으로 불신자들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그들의 길에 장애물을 놓아둔다고 말한다:

알라가 원한다면 그는 모든 영혼을 인도할 수 있다:

“만일 알라의 뜻이 있었다면 알라는 누구에게나 복음을 주었으리라”(32:13).

그러나 대신에 그는 마음에 베일을 씌우고 그들의 귀를 막아버렸다:

“알라는 저들의 마음을 봉하니 이해하지 못하고 저들의 귀를 막으니 듣지 못하더라 그러므로 그대가 저들을 복음으로 인도한다 하여도 저들은 결코 바른 길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18:57) 또한 17:46과 45:23을 보라.

알라는 불신자들이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멍에와 장애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말씀들이 그들 다수 위에 진리로 나타났으나 그들은 믿지 아니 하더라 알라는 그들의 목에 멍에를 씌우니 그것이 그들의 턱까지 이르매 그들의 고개가 위로 올라 볼 수 없게 되었더라 알라가 그들 앞에 장애물을 놓고 그들 뒤에도 장애물을 두며 그들 위로 덮개를 씌우니 그들은 보지 못하더라 그대가 그들에게 경고를 하던 경고를 하지 아니 하던 그들은 마찬가지로 믿지 않노라“(36:7-10).

같은 목적으로 알라는 불신자의 마음을 의심으로 채운다:

“어느 누구도 알라의 뜻이 아니고는 믿지 아니하며 그분께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의심(또는 모호함)을 두실 것이다”(10:100).

알라는 실제적으로 비-무슬림들이 죄를 짓도록 만든다.

불신자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게 막는 것(이것은 그들을 지옥으로 정죄하기에 충분하다)으로 만족하지 않고 꾸란은 증오로 가득 찬 알라가 불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나중에 그들을 처벌할 그 죄를 범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알라가 원하시면 너희 모두를 한 공동체로 만들 수 있노라 그러나 그분이 원하는 자를 방황케하고 그분이 원하는 자를 인도하시니 행하였던 것에 관하여 너희가 심문을 받으리라”(16:93).

사탄이 무슬림들을 유혹하지만 불신자들이 실수하도록 만드는 자가 알라 자신이다.

“...알라께서 이들을 방황하게 하면 그대는 그를 위한 길을 찾지 못하리라”(4:143, 또한 4:88과 74:31을 보라)

알라는 고의적으로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방황하도록 보낸다:

“....알라는 그를 방황케 하셨으매 그의 귀와 마음을 봉하여 버리고 그의 시각도 봉하여 버렸으니 알라 외에 누가 그를 인도하리요 그럼에도 너희는 숙고하지 않느뇨?”(45:23)

알라는 불신자들이 더 (알라가 나중에 그 행동들에 대하여 추궁할)나쁜 행동을 저지르도록 선동하기 위하여 마귀들을 보낸다:

“그대는 모르는가? 알라가 불신자들에게 사탄들을 보내어 저들을 화나게 했노라”(19:83)

3:54 구절에 따르면 알라는 속임수(사용된 단어 makara의 문자적 의미)를 사용하여 불신자들에 대하여 음모와 계략을 꾸민다. 그 밖에 꾸란은 알라가 불신자들이 나쁜 행동으로 단지 그들 자신의 영원한 형벌을 심화시키고 있을 때 선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속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내세를 믿지 아니한 자들의 행위들이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매 저들은 방황하였으니”(27:4) 또한 39:23, 6:39, 35:8, 13:27, 14:4을 보라.

알라는 불신자들이 선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속이기 위하여 사탄이 자신과 함께하도록 불러모은다:

“그들의 마음은 더욱 굳어졌으니 사탄이 그들의 행위를 올바른 것처럼 보이게 하였더라”(6:43)

물론 농담과 같은 이야기는 비-무슬림에 관한 것인데 그들은 심판의 날에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하였는데 어째서 지옥에 보내졌는지 항의할 것이다:

“저들은 순종하듯 우리는 어떤 죄악도 범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니 천사들이 그렇지 아니함이라 실로 알라께서는 너희가 행하였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라 하더라 그러므로 지옥의 문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영생하라”(16:28-29)

 

꾸란은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알라가 비-무슬림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하며 그들이 실수하게 하며 이어서 그들의 불신앙과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영원한 고통으로 그들을 정죄할 정도로 비-무슬림들을 증오한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무슬림들이 세상에서 서로를 대우하는 똑같은 기준으로 알라가 무슬림들로 하여금 불신자들을 대우하도록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꾸란은 진정한 무슬림은 이슬람에 저항하는 자가 가족 가운데 한 명일지라도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대는 알라와 내세를 믿는 자들이 자신의 아버지든 자식이든 또는 형제들이거나 친척들이든 그들이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에게 거역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리라”(58:22)

꾸란에는 믿는 자들이 비-무슬림들과 친구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는 구절이 적어도 9군데가 있다:

“믿는 자들이여 불신자들을 친구로 택하지 말라 너희는 너희 자신들에게 해가되는 명백한 증거를 알라에게 제공하여 하느뇨?”(4:144)

사실 비-무슬림을 친구로 택하는 자는 누구든지 마찬가지로 불신자가 되는 것으로 고발될 수 있다:

“믿는 자들이여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친구로 삼지 말라 그들은 서로가 친구들이라 그들에게로 향하는 너희가 있다면 그는 그 무리의 일원이거늘 알라는 이 우매한 백성들을 인도하지 아니 하시니라”(5:51)

꾸란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의”무리에 포함된다는 것을 주목하라: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하나님이라 말하는 자들은 진실로 믿지 않는 자들이라”(5:17)

무함마드는 불신자들이 무슬림들을 향하여 그것을 말하였다고 말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악하지 않거나 우호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들은 부패와 사악한 의도를 품고있다:

“믿는 자들이여 불신자들을 친구로 택하지 말라 그들은 너희를 해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며 그들은 단지 너희가 파괴되기를 바랄 뿐이라 그들의 입들에서 증오가 발산되며 그들의 마음은 더욱 사악하도다”(3:118)

“불신자들은 확실한 너희의 적이라”(4:101)

“음모하는 그들에게”(86:15)

이슬람을 안 믿는 자들은 진실로 알라에 대항하여 악을 돕는 자들이다:

“불신자는 알라를 거역하고 사악함을 돕는 자라”(25:55)

꾸란은 “너희가 알라만을 믿을 때까지 우리와 너희 사이에 영원히 적의와 증오가 생겨날 것이라”(60:4)라고 말한다.

비-무슬림들과 친구가 되는 대신에 꾸란은 적대감을 고취시킨다. 무슬림들은 불신자들과 싸우라고 명령받는다:

“믿는 자들이여 너희 가까이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고 그들로 하여금 너희가 엄함을 알게 하라 알라는 항상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니라”(9:123)

꾸란은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고통 받을 때 무슬림들이 불신자들을 비웃고 그들의 고통을 조롱하며 영생을 보낼 것이라고 무슬림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천국에 사는 사람들이 지옥에 사는 자들을 부르더라 실로 우리는 알라의 약속이 진리임을 알았노라 너희는 역시 너희 알라의 약속이 진리이더뇨 라고 물으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죄지은 자들에게 알라의 저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 하더라”(7:44) - 무함마드는 Badr 전투에서 자신이 죽인 적들을 개인적으로 조롱하면서 이것을 처음 시작하였다(Ibn Ishaq 454)

나중에 그들의 고통에 대하여 기뻐할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없으며 불신앙 덕분에 “알라의 적들”로 호칭되는 사람들과 무슬림들이 친구가 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꾸란은 다른 종교들은 알라에 의하여 저주받았다고 말한다.

태국의 불교도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 인도네시아의 기독교인들, 인도의 힌두교도들....왜 이슬람은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와 전쟁을 하고 반면에 이러한 종교들 가운데 어느 종교도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가? 그 이유의 일부분은 꾸란이 다른 종교의 열등함(48:28을 보라)과 알라가 다른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증오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들의 종교를 “비방”하는 것에 대하여 무슬림들이 분노하는 것은 보통이지만 여기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꾸란이 말하는 것이 있다:

“유대인들은 에즈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고 있노라 이는 이전에 불신한 자들의 말과 유사하니 알라가 그들을 욕되게 하실 것이라 그들이 진실에서 멀리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라!”(9:30) (또한 Bukhari 8:427을 보라) 무함마드가 죽을 때 한 마지막 하였던 말들 가운데 하나가 “알라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저주하기를”이었다.

꾸란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과 다신교도들(힌두교도들)과 무신론자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기독교인들은 알라에게 동료(즉, 삼위일체설)가 있다고 말하면서 알라(10:68-69)에 관하여 거짓말을 만들어낸 신성모독자들(5:17, 5:73) 이다. 알라에 관하여 거짓을 만들어낸 것은 최악의 죄이며(7:37, 29:68)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지옥으로 정죄 받는다(10:70). 비록 한 구절(초기 메디나 계시)이 의로운 기독교인들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이 구절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기를 그만두어야하거나(즉 삼위일체설 부정) 그들의 믿음의 대가로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5:72-73)을 아주 명백하게 만든 나중에 계시된 구절들에 의하여 폐기되었다.

유대인들도 무함마드의 마지막 계시들 가운데 하나에서 알라에 의하여 저주받는다(5:13). 꾸란은 유대인들이 사악하고(4:160-162) - 사실상 그들이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18:27) 하여서 알라의 말씀을 변경하려(2:75) 할 정도로 너무 사악하다고 계속하여 무슬림들에게 확신시킨다. 유대인들은 “거짓을 좋아하며 금지된 것을 지키지 않는다”(5:42).

꾸란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마음이 병들었다”고 믿는 자들에게 확신시킨다(5:52). 알라는 기독교인들 사이의 적대감을 당연시하기도 한다(5:14). 이슬람에 복속되고 이슬람 세를 지불하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만이 이 세상에서 보호된다(9:29 & Ibn Ishaq 956).

힌두교도들은 다신교도들이다. 비록 무함마드가 어떤 힌두교인도 알지 못하였지만(분명히 알라도 알지 못하였다) 꾸란은 수 천만명의 무고한 생명들을 빼앗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힌두교 사람들에 대한 천년동안의 인종청소 운동에 대한 토대를 여전히 제공하고 있다. 이슬람에서 다신교도들은 다른 모든 종교보다 더 악하다. 알라에 대하여 우상들 또는 거짓 신들을 만드는 자들은 알라에 대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 것이고(29:17) 지옥에서 불에 탈것이다. 알라와 함께 다른 신들을 믿는 것도 용서받지 못 할 죄이다(4:48, 40:12).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지 않는데 이것은 잘못된 신을 믿는 것보다 더 나쁘다(무함마드와 그의 후계자들은 무신론자들을 사형에 처하였다-Bukhari 84:57). 무슬림 자기도취가 꾸란에서 장려되고 있을 정도여서 단지 알라의 존재를 질문하는 것도 질문하는 자의 불경건성의 증거가 된다(25:21). 무함마드는 단지 그들이 그를 믿지 않는 다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질문하는 자들에게 말함으로 질문 공세에 응대하였다(36:49-64). 꾸란은 무슬림들이 지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5:101-102).

그의 종교를 배반하는 무슬림은 누구나 “사악한 죄인”이다(3:82). 마찬가지로 알라를 부인하거나(40:63)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 자(2:99)는 누구든지 사악하다. 양심의 자유는 이슬람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배교자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사형을 규정하였다((Bukhari 52:260).

현시대의 무슬림 옹호자들은 종종 “대화”(당신은 듣고 그들은 이슬람에 관하여 말하는 일방적인 구도를 의미)에 관하여 말하지만 꾸란은 대신에 지하드에 관하여 말한다:

“불신자들을 따르지 말고 최대한의 분투하는 노력으로 저들과 싸우라”(Jihad; 25:52)

비-무슬림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거나.... 그 문제에 대하여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에 무슨 요점이 있겠는가? 알라가 이미 그들의 마음을 봉하였고 그들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저주하였다: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대가 그들에게 경고하던 또는 경고하지 아니하던 믿으려 하지 아니하매 알라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사 그들의 마음을 봉하고 그들의 귀를 봉하고 그들의 눈을 봉하여 버릴 것이라 무서운 운명이 그들의 것이 될 것이라”(2:6-7)

이교도들의 마지막 목적지가 지옥이라면 왜 알라가 그들을 만들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함마드는 일부 사람들(적어도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피조 된 목적은 무슬림의 지위를 가지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지옥에서 고통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Sahih Muslim 6666)

꾸란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현 세상에서 폭력적으로 처벌될 것이라고 말한다.

알라 자신이 불신자들과 싸우는데(9:30) 왜 무슬림들이 사악한 명분으로 싸우는 것 보다 알라의 명분으로 싸우지 않겠는가(4:76)? 꾸란의 19%가 폭력적인 정복과 비-무슬림의 복속에 관한 것이다:

“군대와 무기로 너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에 대항할 준비를 하라 하셨으니 그것으로 알라의 적과 너희들의 적과 그들 외의 다른 위선자들을 두렵게 하라 너희는 그들을 알지 못하나”(8:60)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되 그들에 대하여 엄격하라 그들의 거주지는 지옥이니 그들의 말로가 불행할 것이라”(66:9, 또한 9:73을 보라)

무슬림들은 내세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세에서 보상을 기대한다(4:134)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마찬가지로 현세에서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알라께서 방황하게 하신 자는 어느 누구도 인도하지 못하니라 그들은 현세에서도 벌을 받으나 내세에서의 벌은 더욱 고통스러우니라...”(13:33-34)

“불신자들에 대한 보상이 그러하니라”와 같은 비-무슬림의 폭력적인 죽음이 불신앙에 대한 알라의 보상이라는 것이 꾸란에 적어도 두 곳이 있다(2:191, 9:26). 3:56 구절은 “불신자들은 현세에서 가혹한 징벌로 처벌받을 것이다”라고 명백하게 말한다(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 징벌을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이행한다).

결국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들이 자의로든 강제로든 알라에게 절하게 될 것이다:

천지의 모든 것이 좋아서든 싫어서든 알라께 복종하나니”(13:15)

이슬람에 저항하는 자들은 비참하게 될 것이다: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에 대적하는 자들은 가장 비참한 자들 가운데 있을 것이다”(58:20-이 구절의 배경은 메디나 유대인 부족의 추방과 무함마드에 의한 그들의 재산, 토지, 어린아이들의 몰수였다).

종교가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까지 무슬림들은 비-무슬림들과 싸우게 될 것이다:

“무질서(불신앙, 알라가 아닌 다른 것들을 숭배하는 것)가 사라지고 종교가 온전히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까지 싸우라...”(8:39-일부 번역은 단어 "fitna"를 “박해”로 해석하지만-앞에 구절에서 믿기를 꺼려하는 것으로 정의된 것과 같이-이 상황에서는 이슬람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38절을 보라). 이 구절은 무함마드가 고의적으로 도발한 전투 다음에 “계시”되었다. 2:193 구절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말하며 마찬가지로 무슬림들이 물리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지 않을 때 “계시”되었다).

마음이 “병든 자들”-이 사람들은 5:52에 따라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포함한다-은 발견하는 곳마다 “위선자들”(불신자들과 교류하거나 지하드에 가담하지 않으려 함으로 진실한 믿는 자가 아닌 것으로 판단되는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체포되어 살해되어야한다(33:60-62)

비-무슬림들은 무슬림들에 의하여 침략당하고 압제당하고 징벌 받아야 한다:

“알라가 외곽으로부터 그들의 (통치하에 있는) 영토를 좁히어 가면서 멸망시키고 있다는 것을 불신자들은 알지 못하느뇨?”(13:41 - 또한 21:44을 보라)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방향으로부터 점차로 징벌을 내릴 것이니라”(68:44)

“그리하여 그들의 땅과 그들의 집과 그들의 재산과 너희가 보지 아니한 대지를 너희에게 상속하여 주었나니 실로 알라는 모든 일에 전지전능 하심이라”(33:27, 또한 Bukhari 53:392를 보라)

알라는 무슬림들에게 모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위와 권력을 줄 것이다:

“너희 중에 믿음을 갖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알라는 약속 하셨나니 이전에 그들에게 부여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지상을 다스리는 힘을 주실 것이요 그들을 위하여 선택한 종교를 확립하여 주실 것이며...”(24:55)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이 예언을 스스로 이행하여 공격적이고 무자비한 군사적 팽창으로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시체들의 대열을 만들었다)

알라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하는 불신자들을 다루는 방법을 무슬림들에게 제공한다:

“그대의 알라께서 천사들에게 (말씀으로) 이르시길 내가 너희와 함께하여 신앙인들에게 확신을 주고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때리고 그들 각자의 손가락을 잘라내라 그것은 그들이 알라와 선지자를 거역했기 때문이라 알라와 선지자를 거역하는 자에게는 알라께서 무거운 벌을 내리시리라”(8:12-13)

비-무슬림들을 패배시키는 것이 진실한 믿는 자들에게는 쉬운데 무슬림들이 지성과 이해력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선지자여 믿음으로 싸움에 임하는 자들에게 힘을 북돋우라 너희 가운데 이십명이 인내한다면 이백명을 물리칠 것이며 너희가 백명이라면 천명의 불신자들을 물리치리니 그들(불신자들)은 우매한 백성이니라(8:65)

폭력에 관한 다른 구절들은 여기에 있다.

꾸란은 이슬람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다고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또한 불신자들에 대하여 공격적인 무슬림들 자신들에게 적용된다. 이슬람을 위하여 살해하거나 살해당하는 자들은 알라를 더 많이 기쁘게 한다:

“아무런 장애도 없이 남아있는 믿는 자와 싸움에 출전하여 재산과 생명을 바치며 싸우는 투사들이 같을 수 없거늘...”(4:95)

결론

무슬림 역사와 불신자들을 향한 현시대의 태도에서 지속되고 있는 인간고통을 무시하는 폭력과 공격적 성향이 꾸란에 담긴 메시지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우월성과 거만함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무슬림들이 지배하는 지역은 비-무슬림들에 대한 압박과 차별에 의하여 특징이 나타나며 반면에 보다 큰 사회 내부의 무슬림 소수그룹들은 다양한 정도의 변덕스러운 요구와 내분과 무장폭동에 의하여 구별된다. 이 뻔뻔스러운 이중 기준에 불편해하는 무슬림들은 거의 없는데 이슬람의 권력의 지위를 의지하여 이 기준으로 이슬람은 피해자를 만들어 내거나 미안해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데-그 이유는 분명하다.

이슬람은 불신자들의 역할이 무슬림들의 지위에 종속되는 우월한 사상이다. 이슬람의 지배에 저항하는 자들은 그들이 살해되거나 완전히 비참해져서 이슬람으로 개종함으로 그들의 열등한 지위를 인정하게 되거나 인두세를 지불하고 그들의 종교가 종속되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무슬림들과 싸우게 된다.

지구상에 자기들의 구성원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이렇게 분명하게 구분하거나 또는 그것의 교리를 따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저주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는데 그것의 가장 거룩한 경전을 그렇게 많이 할당하는 다른 종교는 없다.

이슬람 테러리즘과 보다 광범한 무슬림 공동체의 폭력에 대한 전체적인 무관심에 관한 많은 것이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의 오토만 제국 또는 사담 후세인과 같은 아랍 독재자들 아래서 이상하게도 복종하는 것을 참은 반면에 이웃 유대인 국가는 맹렬하게 반대하였던 것과 같이- 단지 이슬람의 이 이중적인 본질에 대하여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옹호자들이 이슬람은 사랑과 자비를 가르친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만 그들은 이것이 무슬림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을 대우하는데만 적용된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지 않는다. 자체의 동일한 정체성 집단에 대한 충성은 모든 것 이상으로 가치가 매겨지며 이슬람 외부의 사람들에 대한 동정은 기껏해야 선택사항이며 - 그리고 장소에 따라 명백하게 거부되기도 한다.

만약 이것이 오늘날의 “과격주의자들”에 의한 이슬람에 관한 “오해”라면 그 오해는 또한 이슬람의 창시자가 만든 실수이다. 무함마드 당시 비-무슬림들은 단지 새로운 종교 이슬람과 이슬람의 스스로 선포한 선지자에 거역하여 말하는 것에 대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마찬가지로 Qurayza 유대인 부족은 비록 그들이 전투에서 싸우지도 않았지만 무함마드의 명령에 따라 체포되어 즉결처분으로 처형되었다. 비-무슬림들의 생명은 값싸기 때문에 무슬림에 대한 실제적인 육체적 손상은 무함마드의 모범에 따라서 살인을 정당화할 필요도 없었다.

꾸란은 그것에 의하여 우리가 증오의 발언으로 정의하는 모든 기준을 총족시킨다. 그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강한혐오와 무시를 선동할 뿐 아니라 확립의 수단이 폭력에 의거할 지라도 꾸란은 이슬람의 우월성을 명령한다.

무함마드는 그의 말년에 다른 부족들과 종교들을 복속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칼로 위협하여 이슬람으로 “초청”하고 어째든 그들이 공물을 바치도록 강제하는 군사작전을 지휘하였다. 무함마드 사후 단지 50년 안에 세계의 주요 종교 5개 모두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는 공격적인 군사 작전을 그가 처음 시작하였다.

이슬람은 무슬림이 같은 무슬림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사형으로 처벌될지 모르지만(Bukhari 83:17) 무슬림이 비-무슬림을 살해한 것에 대하여 사형을 당하는 무슬림은 없다(Bukhari 83:50, 3:111)는 가르침에 의한 가장 분명한 방법으로 비-무슬림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절하를 구체화한다. 성별과 종교와 지위에 근거하여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할당하는 꾸란의 “평등의 법”은 그러한 차별을 이상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서방세계 자유적 전통에 의하여 의도되는 감각에서의 평등과 정반대이다.

창조적인 번역과 길고 복잡한 설명 또는 노골적인 부인으로 꾸란의 거친 표현들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옹호자들을 항상 발견할 수 있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항상 이슬람의 피해자들과 연결하지 않는 이슬람의 이미지에 대한 이해관계를 속이며-적어도 같은 감각의 긴급성을 가지지 않으며-그러므로 요점을 증명한다.

물론 이슬람의 우월성에 동의하지 않으며 진지하게 세속주의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지지하는 예외적인 무슬림들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독립적인 믿음을 지지하는 그러한 구절들 또는 단편들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꾸란은 전체적으로 항상 끊임없는 도전이 될 것인데 꾸란은 비-무슬림들의 뚜렷하고 열등한 지위를 명백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http://www.thereligionofpeace.com/Pages/Quran-Hate.htm

 

이슬람의 최근 테러 기록을 보려면 http://www.thereligionofpeace.com/index.html#Attacks를 클릭하면 최근테러 기록을 볼 수 있읍니다.

 

 

163p에서 저자는 "사촌의 결혼의 허용과 일부다처제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엄격한 줄로만 알았던 이슬람의 율볍이 사실은 융통성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하여 이슬람 율법이 융통성이 많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슬람 율법(샤리아 법)은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맞지 않으며 융통성이 없는 중세기 사고방식의 법이다. 다음 자료를 보라.

 

이슬람 샤리아 법에 관하여

 

전에 무슬림이었던 Nonie Darwish는 “잔혹하고 일상적인 처벌: 소름끼치는 이슬람 법의 세계적 적용”(Cruel and Usual Punishment: The Terrifying Global Implications of Islamic Law)의 저자인데 그 책의 내용 가운데 “덤미들을 위한 샤리아”(Sharia for Dummies)는 샤리아 법들 가운데 몇 가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덤미”는 이슬람 국가에 복속되어 굴종적인 삶을 사는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킨다.

 

1. 이슬람교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비-무슬림들에 대항하여 전쟁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지하드는 모든 무슬림과 국가의 무슬림 수반(칼리프)의 의무이다. 지하드를 거부하는 무슬림 칼리프는 샤리아 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통치에 적합하지 않다.

 

2. 칼리프는 폭력 사용을 의미하는 권력의 강탈을 통하여 정부를 장악할 수 있다.

 

3. 칼리프는 살인, 간음, 강도, 절도, 음주 그리고 일부 강간의 경우와 같은 중대한 범죄로 처벌되는 것에서 면제된다.

 

4. 자카드(자선기부금)의 일부는 지하드에 사용되어야 한다.

 

5. 칼리프가 공정하지 않더라도 그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의무이다.

 

6. 칼리프는 무슬림이며 노예가 아닌 남성이어야 한다.

 

7. 무슬림 대중은 칼리프가 이슬람을 거부하는 경우에만 그를 제거하여야 한다.

 

8. 이슬람을 떠나는 무슬림은 즉시로 살해되어야 한다.

 

9. 무슬림은 배교자와 간음한자와 노상강도를 살해하였을 경우 살인죄가 용서된다. 자경단원이 거리의 정의를 지키는 것과 명예살인은 용인된다.

 

10. 무슬림이 비-무슬림을 살해하였을 경우 사형에 처해질 수 없다.

 

11. 샤리아 법은 노예제도와 성노예 제도를 결코 폐지하지 않으며 그것을 잘 규정한다. 주인은 자기 노예를 살해한 것에 대하여 처벌될 수 없다.

 

12. 샤리아 법은 간음과 같은 범죄에 대해서도 투석형, 참수형, 수족절단형, 채찍질형과 다른 종류의 잔혹하고 특별한 형벌을 명한다.

 

13. 비-무슬림은 무슬림과 평등하지 않으며 그들이 안전하기를 원한다면 샤리아 법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무슬림 여성과 결혼하는 것과 술이나 돼지고기를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것과 그들의 성경을 낭독하거나 그들의 종교적 축제일과 장례식을 공개적으로 기념하는 것이 금지된다. 그들은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거나 교회를 모스크보다 높이 건축하는 것이 금지된다. 그들은 허가 없이 모스크에 들어올 수 없다. 비-무슬림이 무슬림 여성과 간통을 하였거나 무슬림이 이슬람을 떠나게 만들 경우 더 이상 보호될 수 없다.

 

14. 무슬림에 대항하여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자에게 비-무슬림이 무기를 판매하는 것은 범죄이다. 비-무슬림은 무슬림을 저주할 수 없고 알라와 무함마드와 또는 이슬람과 또는 무슬림들의 약점을 노출하는 경멸적인 말을 할 수 없다.

 

15. 비-무슬림은 무슬림으로부터 상속받을 수 없다.

 

16. 은행들은 샤리아 법에 따라야 하며 이자는 허용되지 않는다.

 

17. 거리의 청소부 또는 목욕탕 종업원과 같은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법정 증언은 받아들여 질 수 없다. 직업적으로 장례식에서 곡하는 자와 같은 천한 직업을 가진 여성은 이혼의 경우에 자기 자녀의 양육권을 가질 수 없다.

 

18. 비-무슬림은 비-무슬림 소수에 대하여도 지배할 수 없다.

 

19. 동성연애는 사형에 처해진다.

 

20. 샤리아 법 아래서는 여성의 결혼에 대한 나이 제한이 없다. 결혼계약은 출생 후 언제든지 체결될 수 있으며 8세 또는 9세에 결혼이 성립된다.

 

21. 아내측의 반항은 그녀를 부양하는 남편의 의무를 무효로 하며 남편에게 아내를 구타할 권리를 주며 아내를 집에 감금할 수 있다.

 

22. 이혼할 권리는 오직 남편에게 있고 “나는 당신과 이혼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비록 남편이 이혼을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유효하다.

 

23. 남편과 아내사이에 공동재산은 없으며 남편의 재산은 남편의 사후에 자동적으로 아내의 것이 되지 않는다.

 

24. 여성은 남성이 상속받는 것의 반을 상속받는다.

 

25. 남성은 부인을 4명까지 둘 권리가 있으며 아내는 남편이 아내를 많이 두더라도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26. 지참금은 여성의 성기 사용에 대한 대가로 지불된다.

 

27. 남성은 노예여성과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여성과 섹스가 허용되며 그 노예여성이 이미 결혼하였다면 그녀의 결혼은 무효로 된다.

 

28. 여성의 법정증언은 남성의 법정증언 가치의 절반이다.

 

29. 여성이 재혼하면 양육권을 잃는다.

 

30. 강간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성은 4명의 남자증인이 있어야 한다.

 

31. 강간한 자는 그 강간 피해자와 결혼하지 않고 지참금을 지불할 수 있다.

 

32. 무슬림 여성은 “Awrah" 즉 성기로 간주되는 그녀 몸의 모든 부분을 거려야 한다. 샤리아 법의 일부 학파들은 얼굴 노출은 허용하고 일부는 허용하지 않는다.

 

33. 무슬림 남성은 간음 중에 붙잡힌 자기 아내를 살해할 경우 용서된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닌데 그 남성이 같이 간음한 여성과 결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문출처: Ali Sina, Understanding Muhammad, 298~299p

 

 

 

179p에 꾸란이 "이슬람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받은 하느님의 계시를 그대로 옮겨 적어 놓은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무함마드에게 계시는 준 존재는 천사 가브리엘이 아니다. 다음 자료를 보라.

 

 

 

무함마드는 어떤 영의 계시를 받았을까?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어떤 영의 계시를 받았느냐고 무슬림들에게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가브리엘(Gabriel) 천사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역사적으로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는 주후 595년 그의 나이 25세 때 여러 차례 결혼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던 40세의 부유한 과부 카디자(Khadija)와 결혼을 했다. 결혼 생활을 한 지 15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종교적인 열심히 있어 히라(Hira)동굴에 가서 명상을 하다가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런 경험을 하게 된다.

이슬람에서 꾸란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는 제 2의 경전인 부카리의 하디스(Hadith)에 의하면 무함마드에게 어느 날 한 천사가 나타나 자신의 목을 조르고 찍어 누르며 괴롭히다가 읽으라고 명하여 “자신은 글을 모른다”고 했더니 다시 찍어 누르면서 너무 고통스러워 신음하는데 버둥거리고 있는데 또 읽으라고 해서 “글을 모른다”고 했더니 또 괴롭히고 이런 경험을 3번 하고 나서 천사가 “응혈(엉긴 피: clot)로 인간을 창조하신 네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하면서 꾸란 96장 1-3절까지를 계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함마드는 그 사건이 너무 두려워서 집으로 달려가서 아내 카디자에게 “나를 덮어 주오. 내게 악한 일이 생길 것 같소. 너무 두렵소.”라고 하자 그녀는 그를 덮어주고 안심을 시키고는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를 물었단다. 그가 동굴 속의 경험을 말하면서 꼭 무슨 악한 일이 생길 것 같다고 두려워할 때 그의 아내 카디자(Khadija)는 “당신은 착한 사람이니까 알라(Allah)께서 절대로 당신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기독교인이었던 자신의 사촌 와라까(Waraqa Ibn Naufal)에게 무함마드와 함께 찾아가서 상담을 청했다. 그 때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와라까는 “조카가 본 것은 무싸(Musa:모세를 말함)에게 계시를 전했던 그 비밀을 간직한 분이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계시를 내렸던 그 천사가 누군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이것이 무슨 현상인지 그것이 누구인지를 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꾸란에 보면 그가 메카에서 받았다고 하는 12년 동안의 계시에는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계시를 전하는 그 천사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나중에 기독교와 유대교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계시를 내릴 때는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의 천사를 통해서 내린다는 사실을 듣고 메디나에서 계시를 받을 때 두 번 지브이일(Gibriil)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꾸란 2장 98절, 66장 4절)


그러나 성경의 가브리엘 천사는 매우 인격적인 천사로 언제나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하나님의 계시를 전한다. 그러나 무함마드에게 나타난 천사는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또한 성령의 계시는 사람을 죽일 듯이 고문하고 괴롭히면서 임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다. 그러나 무함마드에게 임한 영은 그의 목을 조르면서 너무 고통스럽게 했기에 그는 자살을 하고 싶을 정도로 두려워서 절벽에서 뛰어 내리려고 했지만 천사가 말려서 포기했다는 것이다.(P.J.스튜어트, 『펼쳐보는 이슬람』, 김백리 역(서울:풀빛, 2004) p67) 그러므로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렸던 천사는 성경에 나오는 가브리엘과는 전혀 다른 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슬람의 하디스 중에는 무함마드가 악마의 계시를 받았다는 글들이 있다. 이는 그 유명한 악마의 시(Satanic verses)의 구절이다. 9세기 말에서 10세기에 걸쳐 활약했던 이란의 타바리스탄(지금의 아몰:Amol) 출신의 유명한 이슬람 신학자 타바리(Tabari)는 그가 수집한 하디스(Hadith) 6권 107쪽에서 무함마드가 악마의 계시를 받았다고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핍박을 받지 않고 평안하게 살도록 해주기 위해서 우상 숭배자들과 타협을 했다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그 당시 알라(Allah)의 딸들이라고 불리는 세 여신들(Al-Lat, Uzza, Manat)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이들은 높이 나는 학과 같아서 알라께서는 그들의 중재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했다.(P.J.스튜어트, 『펼쳐보는 이슬람』, 김백리 역(서울:풀빛, 2004) p83) 이 계시가 내리자 메카의 우상 숭배자들은 만족해하면서 무슬림이 되었으며 무함마드와 함께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핍박을 피해 아비씨니아(에디오피아)에 피난 갔던 무슬림들은 이제는 더 이상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뻐하면서 살림을 정리해서 메카로 돌아오고 있는데 무함마드가 그 계시를 취소하는 계시를 다시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 새로운 계시의 내용은 “이 세 여신(라트 웃짜, 마나트)은 알라의 딸들이 아니며 알라께서는 이들에게 아무런 권위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타바리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이전 계시를 취소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나타나서 “너는 왜 내가 네게 주지 않은 계시를 전했느냐? 그것은 네 혀에 악마가 넣어준 계시니라. 그러나 자비로운 알라께서 너를 용서하시느니라.”하면서 아래와 같은 새로운 계시를 내렸다고 한다.


라트와 웃자와 세 번째 마나트에 대한 말씀이라. 너희들에게는 아들들이 있으며 그분에게는 딸이 있다는 것이냐? 그것은 부당한 분배니라. 그것들은 너희와 너희 조상들이 그렇게 불러왔을 뿐이니라.(꾸란 53장 19-23절)


이 계시로 인하여 한동안 화해 무드로 부드러워졌던 무함마드를 따르는 무슬림들과 메카 주민들과의 관계는 악화 되었고 핍박은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 핍박을 견디지 못해서 무함마드는 622년 드디어 메카를 버리고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슬람의 학자들에 의해서 무함마드가 악마의 계시를 받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악마의 계시가 정상적인 계시로 오해되었던 기간이 얼마나 길었을까? 이슬람의 역사적 자료를 아무리 뒤져 보아도 그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소문이 거의 1000 Km 정도 떨어진 이디오피아 수도까지 전달되어서 그들이 가산을 정리하고 돌아오다가 메카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 그 계시를 취소하고 새로운 계시가 내렸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갔다면 그 기간은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악마의 영에 의해서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과연 그가 악마의 영의 계시를 받은 것이 이 사건과 관련된 한 번뿐이었을까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계시를 전달한 영이 어떤 영이었는지를 몰랐다는 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영이 성령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이다.(고린도 전서 12장 3절: 꾸란5장17절)


그리고 이슬람의 영은 무함마드에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다고 계시를 했다는 것이다.(꾸란4장157절) 이 부분이야말로 그 영이 성령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열어주신 문은 십자가뿐이기 때문이다.(갈라디아3장1절) 십자가를 부인하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한다.(꾸란4장158절) 예수께서는 죽지 않고 그대로 승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슬람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도 인정하고(꾸란19장20절) 또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꾸란3장49절) 문둥병을 치료하였으며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꾸란5장110절)까지 인정하면서 왜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하는 것인가?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 구원의 길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사단의 전략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기적을 행하신 것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버리면 다른 것을 다 인정한다고 해도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며(요한복음1장29절)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종교가 되고 만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많은 요소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또한 이슬람의 영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며(꾸란5장73절)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한다. 알라(Allah)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것이다.(꾸란18장4절)

 

아무리 이슬람 쪽에서 알라(Allah)와 하나님은 같은 신이라고 주장을 해도 이런 핵심적인 부분들이 다르다면 같은 영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속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슬람 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이슬람은 기독교와 모두 같은데 “예수님을 신으로 받드는 것만 부인한다”고 한다. 즉 99%가 같고 1%만 다르다는 것이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기독교와 많은 점이 똑같다고 주장을 하더라도 가장 핵심적인 1%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와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성령과는 전혀 다른 영일 것이다.


유명한 이슬람 학자 타바리(Tabari)뿐만 아니라 무함마드의 전기를 쓴 초기 이슬람 신학자들 이븐 이삭(Ibn Ishaq) 및 와키디(Wakidi) 그리고 이븐 싸앋(Ibn Sa'd)도 무함마드가 한 때 악마의 계시를 받았다고 그들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Kitab al Tabaqat al Kabir", Volume 1, parts 1 and 2, pages 236 - 239, translated by S. Moinul Haq, published by the Pakistan Historical Society)

 

꾸란과 하디스 및 여러 가지 증거로 볼 때 그 때 한 번뿐이 아니라 항상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원문출처: http://koreairanianchurch.net/bbs/board.php?bo_table=column_1&wr_id=2322&pag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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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이슬람 바로 알기
이희수 지음 / 청솔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이슬람 국가 터키에서 유학한 이슬람 전문가이며 동시에 한국이슬람학회 회장으로서 이슬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슬람은 포교를 위하여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그들의 경전 꾸란이 명령하는 칼의 종교이며,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차별하고, 남녀를 차별하는 불평등의 종교로서 21세기에는 맞지않는 중세기 사고방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종교로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말미암아 OIC(이슬람회의기구) 소속 57개 이슬람 국가들은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후진국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책에 나타나 있는 이슬람의 실상을 미화하고 왜곡한 부분을 몇가지 짚어 보겠다.  

 

12p에 "남성과 여성의 권리는 같지만 각각의 역할이 다르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다.

 

꾸란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열등하며 남편들은 그들을 때릴 권리를 가지며(꾸란 4:34) 여자들이 남편들에게 불순종하면 지옥에 갈 것 이라고 말한다.(꾸란 66:10) 꾸란은 남자들은 여자들에 우선한다고 말한다.(꾸란 2:228) 꾸란은 유산상속에 있어서 여성의 평등권을 부인할 뿐 아니라(꾸란 4:11-12) 여성들을 바보로 여겨서 여성의 증언만으로는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규정한다.(꾸란 2:282) 이것은 강간당한 여성이 남성 목격자가 없으면 그녀의 강간범을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을 의하는데 이것은 물론 농담이 아니다. 강간범은 목격자가 있는데서 강간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구절은 알라가 무슬림들에게 전쟁에서 잡힌 여자들을 그들이 잡히기 전에 결혼하였어도 강간을 허용하는 부분이다.(꾸란 4:24)(꾸란 4:3)

 

34p에 "그러나 꼭 필요한 경우는 엄격한 조건을 달아 일부다처제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반대로 꾸란은 일부다처제 전체적으로 허용하며 부분적으로 불허하고 있다.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정하게 배려하여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 두 번 또는 세 번 또는 네 번도 좋으니라”(수라 4:3). 이 구절은 이슬람에서 이혼과 축첩이 실제적으로 남자에게 무한한 수의 여성들을 허락하지만 전통적으로 한 남성은 네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이 허락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무슬림들은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그 뒤의 구절을 재빨리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공평을 베풀어 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성과 결혼하라.” 공평하게 그 나머지 계속되는 구절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는 너희 오른손이 소유하고 있는 여성과 결혼하라”(수라 4:3). 또 다른 구절은 남자들에게 경고한다. “너희가 최선을 다한다 해도 아내들을 공평하게 할 수 없으리라”(수라 4:129). 일부일처를 옹호하는 무슬림들은 이러한 구절들을 같이 말한다: 꾸란은 한 남자가 모든 자기 아내들을 공평히 대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공평하게 대우할 수 없다면 한 아내와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은 꾸란이 실제적으로 일부다처를 금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부다처제를 금한다면 아예 전면적으로 금해져야 한다.

 

72p에서 "특히 이슬람은 민족과 피부색, 언어에 따른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을 매우 강조하기 때문에"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은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을 구별하고 상대적 가치의 계급을 설정한다.

꾸란은 이슬람이 보편적인 형제애에 관한 것이 아니며 믿는 자들의 형제애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믿는 자들은 한 형제라”(49:10)

이슬람 아래서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다. 예를 들어 꾸란 16:75-76에 따르면 노예들과 장애인들은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람들과 평등하지 않다. 꾸란은 “평등의 법”을 도입하는데 이것은 살인에 대한 보복(2:178)과 같은 어떤 문제들을 고려할 때 다른 수준의 인간가치를 설정한다.

무슬림 믿는 자들은 비-무슬림들과 평등하지 않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같을 수 있느뇨?” (39:09)

“장님과 보는 자가 같을 수 있으며 암흑과 빛이 같을 수 있느뇨?” (13:16)

꾸란은 무슬림들이 은혜 받은 종족이고 반면에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사악한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무슬림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가장 좋은 공동체이 백성이라 계율을 지키고 악을 배제할 것이며 알라를 믿으라 만일 성서의 백성들이 믿음을 가졌더라면 그들에게 축복이 더했으리라 그들 가운데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사악한 자들이더라”(3:110)

알라는 단지 그들의 불신앙에 근거하여 비-무슬림들을 정죄하는 반면에 내세에 무한한 음식과 술과 섹스(56:12-40)를 포함한 최상의 육체적인 괘락으로 믿는 자들에게 보상한다. 사실 꾸란의 대부분이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을 차별하고 비-무슬림들을 비난하는 부분이다.

꾸란의 첫 번째 장이 이것의 예이다. 이것은 철저한 무슬림들이 매일 되풀이하고 이 말씀으로 끝나는 간단한 기도이다:

“저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이옵니다”(1:6-7).

이 구절들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포함하는지를 무함마드에게 질문하였다. 그의 대답은 “그럼 누구인가?” 였다. (Bukhari 56:662).

알라가 무슬림들과 비-무슬림들 사이에 확실한 구별을 하였기 때문에 비-무슬림들을 대우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무슬림들이 그들의 삶속으로 구체화해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꾸란은 무슬림들이 서로 간에는 자비하고 이교도들에 대하여는 무자비하라고 말한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선지자이며 그와 함께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에 대항하여 마음이 강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 정이 오가니라...(48:29)

알라는 무슬림들이 불신자들에 대하여 승리하도록 해준다:

“알라께서는 그 불신자들이 신앙인들을 지배하도록 두지 아니 하시니라”(4:141)

비-무슬림들이 무슬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길은 이슬람의 지배에 복속되는 것이다: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선지자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은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낄 것이라.(9:29; 인두세는 완전한 이슬람 국가에서 비-무슬림들이 그들의 무슬림 지배자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이다)

많은 무슬림들에 대한 통상적인 비난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자주 거만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그들이 사악한 짐승들이라고 말한다.

이슬람 연구에 평생을 바친 Ayatollah Khomeini는 비-무슬림들이 “배설물”과 “불결한 음식을 소화하는 낙타의 땀” 사이의 서열위치에 해당한다고 말하였다. 이상할 것 없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이 “동물들”과 짐승들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인간성을 말살한다:

“성서의 백성들 중에 진리를 거역한 자들과 불신자들은 불지옥에 있게 되리니 그들은 그 안에서 영주하매 가장 사악한 무리들이라”(98:6).

“실로 알라가 보시기에 가장 사악한 동물은 불신하며 믿지 아니하려는 자들이라” (8:55).

7:176 구절은 불신자들의 백치 같은 언행과 값어치 없음에 관하여 그들을 “헐떡거리고 있는 개들”에 비유하고 있다. 7:179 구절은 불신자들이 더 악하게 “짐승”과 같다고 말한다.

5:60 구절은 알라가 과거에 유대인들을 원숭이와 돼지로 변신시켰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7:166과 2:65에 의하여 반복된다.

한 하디스(Bukhari 54:524)는 무함마드는 쥐가 유대인을 닮았다고 믿었다고 말한다(또한 Sahih Muslim 7135와 7136에 의하여 확인된다).

46:29-35 구절은 불신하는 사람은 무함마드를 믿는 마귀보다 더 악하다고까지 말한다.

이슬람법에 따르면 비-무슬림들은 무슬림들에 의하여 재산으로 소유될 수 있지만-이슬람이 가장 우월하다는 메시지에 따라서-동료 무슬림들은(그들이 노예상태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았다면) 재산으로 소유될 수 없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가운데 한 명을 살해한 형벌이 본의 아니게 한 무슬림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상의 3분의 1로 제한함으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꾸란은 알라가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한다고 가르친다. 꾸란은 절대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꾸란은 알라가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포한다.

“그분은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시니라(30:45)

알라는 무함마드에게 복종하는 자들만을 사랑한다(적어도 그 알라의 계시를 제공하는 무함마드에 따르면):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에게 순종하라 하였으니 이를 거역하는 자 있다면 알라는 이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시니라(3:32).

죄를 미워하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대신에 알라의 분노는 개인들에게 골고루 미친다:

“알라는 배신하며 은혜를 모르는 자는 사랑하지 아니하시노라(22:38).

11:118-199 구절은 알라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는 어떤 사람은 선택하여 인도하지 않는다:

“알라께로 향하는 길이 있으되 어떤 길은 고르지 못한 길도 있노라 그러나 그분이 원하신다면 너희들 모두를 인도하셨으리라”(16:9).

알라가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히 불에 타는 것을 포함하여 가장 무서운 영원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나의 계시를 불신하는 자들을 불지옥으로 들여보내니 그들은 그들의 피부가 불에 익어 다른 피부로 변하는 고통을 맛보더라 실로 알라는 전지전능하심이라”(4:56).

“알라는 믿음이 없는 자들의 대적이시라”(2:98)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인데 그는 그들을 아주 많이 미워하여 그들이 죄를 짓도록 인도하기도 하여 실제적으로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서 그들의 운명을 확실하게 만든다.

 

꾸란은 비-무슬림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알라가 사랑한다는 말이 꾸란 어디에도 없으나 알라가 다른 종교(또는 무신론자)의 사람들의 위하여 준비한 고통을 묘사하는 400개가 넘는 구절들이 있다: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내세에서 패망자 가운데 있게 되리라”(3:85).

비-무슬림의 상대적 가치는 그들이 지옥 불에 탈 연료일 뿐이라는 것이다:

“믿음을 배반한 그들의 재산과 자손이 그들에게 아무런 효용이 되지 못하고 불의 연료가 될 것이라”(3:10 Shakir: "지옥의 땔감“)

그들이 불의 연료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알라의 천사들에 의하여 고통 받을 것이다:

“믿는 자들이여 인간과 돌들이 연료가 되어 타고 있는 불지옥으로부터 너희 자신과 너희 가족을 구하라 불길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엄하고 가혹한 천사들이 알라께서 명령한 대로 거역하지 않고 집행할 것이라”(66:6).

불신자들이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는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알라는 그것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라를 불신하는 자를 비유하사 저들이 하는 일은 폭풍이 부는 날 폭풍에 휘날리는 재와 같아 저들이 얻은 것을 감수하지 못하고”(14:18).

“알라가 저들의 행위로 손실이 가장 큰 자를 너희에게 일러주리요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선행이라 생각하면서 현세의 삶에만 매달리노라 저들은 알라의 말씀과 만남을 부정하는 자들이니 저들의 일들은 무용지물로 끝날 것이라 심판의 날 알라는 저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으리라 지옥이 저들을 위한 보상이라 이것은 저들이 믿음을 거역하고 알라의 말씀과 선지자들을 조롱하였기 때문이라”(18:103-106).

무함마드는 선지자라는 자신의 주장을 거부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자기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알라와 선지자들을 불신하며 알라와 선지자들을 이간시키려 하는 자들이 일부는 믿고 일부는 부정하나이다라고 말하며 그 중간의 길을 택하겠다고 하더라 실로 이들이야 말로 불신자들이거늘 알라는 이 불신자들에게 치욕스러운 벌을 준비하여 두셨노라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들을 믿고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선별하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보상이 준비되어 있노라”(4:150-152).

기독교에서 내세의 형벌은 죄와 ‘사악함’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상대적으로 지옥에 관한 말이 거의 없지만 강조하는 있는 것은 이기적이거나 잔혹한 행위에 대한 개인적인 고통이다. 이슬람에서 지옥은 무함마드의 자신에 관한 개인적인 주장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일 뿐이다. 성경과 대조적으로 꾸란은 평균적으로 12번째 구절마다 지옥에 관하여 말하며 불신자들에 대한 알라의 분노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불신하는 자들은 불길에 옷이 찢기며 끓는 물이 저들의 머리 위에 부어지니라 그리하여 저들의 내장과 피부도 녹아내릴 것이라 저들을 벌할 철로 된 회초리도 준비되어 있노라 그로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나 저들은 다시 그 안으로 되돌려와 불의 징벌을 맛볼 것이니라”(22:19-22).

극도로 증오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을 고문할 수 없다. 알라의 불신자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는 이슬람을 안 믿는 사람들에 대한 무슬림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무슬림들의 개인적인 우월성은 꾸란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려진 대조되는 그림들에 의하여 확인되는데 꾸란에서 무슬림들은 천국에서 가장 큰 육체적인 쾌락으로 보상되며 반대로 불신자들은 동시에 무서운 고통을 받는다(단 하나의 예만 들어서 56장을 보라).

 

90p에 "꾸란에서는 '힘에 의한 이슬람 전파'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꾸란에서는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 꾸란에 있는 단 하나의 평화적인 구절은 무함마드가 세력이 약했던 초기 메카 계시이며 이 구절은 무함마드가 나중에 메디나에서 세력이 강해졌을 때 받은 폭력적인 메디나 계시에 의하여 취소되었음을 저자도 이슬람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같은 페이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세금만 내면 자유와 평등이 주어지는 이슬람으로 자신의 종교를 바꾸었지요"라고 기술하고 있고 91~92p에는 "중국을 비롯하여 스페인 등의 유럽까지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칼 때문이 아니라 여러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했던 넉넉한 마음 때문이었읍니다. 기본적으로 종교와 폭력은 함께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사랑과 평화를 원하거든요. 종교로서의 이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종교보다도 평화와 사랑을 강조하고 있읍니다."라고 기술하고 있고 다시 92p에 "그러나 이슬람 교리에서는 평화를 강조합니다. '이슬람'이라는 단어 자체가 바로 평화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과 경전이 있어도 그것을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모습만을 보고 이슬람을 이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꾸란은 저자가 주장하듯이 좋은 가르침의 경전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사람들 사이에 폭력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03p에서는 "그러나 이런 무역은 부족간의 전쟁으로 자주 길이 막혀 버리기 때문에 약탈과 침략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살아남기 위한 약탈은 범죄라기 보다는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고 기술하여 생존을 위하여 약탈과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까지 하고 있다. 176p에서 "애초에 이슬람이 화해와 용서 그리고 평화의 메시지였던 것처럼 여러 가지 생각과 이상이 함께하는 세상이야말로 이슬람 정신의 진정한 출발점입니다."라고 기술하여 이슬람이 처음부터 평화의 메시지인 것처럼 독자들을 오도하고 있는데 다음의 꾸란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슬람은 출현 당시부터 평화의 메시지가 아니었고 지금도 평화의 메시지가 아니다.

 

꾸란 (2:191-193) - "그들을 발견한 곳에서 그들을 살해하고 그들이 너희들을 추방한 곳으로부터 그들을 추방하라 박해는 살해보다 더 가혹하니라......만약 그들이 싸움을 단념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풀 것이라 박해가 사라지고 종교가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

 

꾸란 (2:244) - “알라를 위하여 싸우라 알라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라.”

 

꾸란 (2:216) - “비록 싫어하는 것이지만 너희에게 싸우는 것이 허락되었노라 그러나 너희가 싫어해서 복이 되는 것이 있고 좋아해서 너희에게 악이 되는 것이 있나니 알라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니라.” 이 구절은 폭력이 미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설정할 뿐 아니라 싸우는 것이 단지 자기 방어에만 한정된다는 통념에도 모순되는데 이 구절을 듣는 자들은 명백히 그 당시에 공격당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디스에서 우리는 실제로 이 구절이 무함마드가 약탈물을 얻기 위하여 자기 부하들이 대상들을 공격하도록 자극하고 있을 때 말하여진 것이었다.

 

꾸란 (3:56) - “불신자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현세가 내세에서 가혹한 징벌을 내릴 것이라 그러나 그들은 구원자를 찾지 못할 것이라.”

 

꾸란 (3:151) - “알라는 믿음이 없는 자들의 심중에 공포를 불어 넣으리라 이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들을 알라와 비유하려 했기 때문이라.”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다신교도들에 관하여 말하지만 또한 기독교인들도 포함하는데 그들이 삼위일체설을 믿기 때문이다(무함마드는 ‘알라와 비유’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꾸란 (4:74) - “그로 하여금 알라를 위해 싸우도록 하여 내세를 위해 현세의 생명을 바치도록 하라 알라를 위해서 싸우는 자가 살해를 당하건 승리를 거두건 알라는 그에게 커다란 보상을 주실 것이라.” 이슬람의 순교자들은 초기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순종하여 죽었다. 이 무슬림들은 알라를 위하여 살인과 파괴를 하다가 전쟁에서 살해되었다. 여기에 오늘날의 자살폭탄 테러범들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가 있다.

 

꾸란 (4:76) - “믿는 자들은 알라를 위하여 싸우고...”

 

꾸란 (4:89) - “그들이 그랬듯이 너희도 불신자가 되기를 원하며 너희가 그들과 같이 되기를 바라거늘 너희는 그들이 알라의 길로 들어올 때까지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친구로 삼지 말라 그럼에도 그들이 배반한다면 그들을 포획하고 그들을 발견하는 대로 살해할 것이며 그들로부터 친구나 후원자를 찾지 말라.”

 

꾸란 (4:95) - “아무런 장애도 없이 남아있는 믿는 자와 싸움에 출전하여 재산과 생명을 바치며 싸우는 투사들이 같을 수 없거늘 알라는 남아 있는 자들보다 재산과 생명을 바쳐 싸우는 자들에게는 더 큰 은혜를 베푸시며 또한 이 두 부류에게도 알라의 보상이 약속되었노라 알라는 남아 있는 자들보다 싸우는 자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니라.” 이 구절은 폭력에 가담하지 않는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들을 비방하는데 그들이 알라 앞에서 가치가 적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지하드”가 꾸란에서 성전을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영적인 투쟁일 뿐이라는 근대적인 통념을 뒤집는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아랍어 뿐 아니라 이 구절은 명백히 영적인 것에 관련한 것이 아닌데 육체적인 불구자가 싸움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하디스는 이 구절의 배경이 지하드에 가담할 수 없었던 한 맹인의 항의에 대한 대응이었음을 알려주고 이것은 그 구절의 다른 번역에서 반영되었다).

 

꾸란 (4:104) - “적을 추적할 때 약한 마음을 갖지 말라 너희가 고난을 당할 때 그들도 그와 같은 고난을 당하노라...” 부상당하고 도망치는 적을 추적하는 것이 정말 자기방어의 행위인가?

 

꾸란 (5:33) - “실로 알라와 선지자에 대항하여 지상에 부정을 퍼트리는 자들은 사형이나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그들의 손발이 서로 다르게 절단되거나 또는 추방을 당할 것이라 이렇듯 그들은 현세에서 치욕을 그리고 내세에서는 무거운 벌을 받을 것이라.”

 

꾸란 (8:12) -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자르고 그들 각자의 손가락을 자르라.” 이 구절을 영적인 투쟁으로 해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꾸란 (8:15-16) -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싸움터에서 불신자들을 만날 때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지 말라 그러한 날에 등을 돌리는 자는 그것이 전쟁을 위한 준비나 어떤 무리에 합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이는 분명 알라의 분노를 자아낼 것이며 그의 주거지는 지옥이 되리니 최후가 저주스러우리라.”

 

꾸란 (8:39) - “무질서가 사라지고 종교가 온전히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까지 싸우라.” 일부 번역은 “무질서”를 “박해”로 번역하지만 이 단어의 전통적 해석은 역사적 배경에 의하여 뒷받침되지 않는다(꾸란 2:293의 주석을 보라). 메카인들은 무함마드가 순례기간동안 그들의 도시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였을 뿐이다. 무함마드가 자신이 쫓겨나기 전에 메카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 이후로 다른 무슬림들은 무장하지 않은 조건으로 거기를 여행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메카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방어하는 행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우상들을 부수고 무력으로 이슬람을 수립하려는(그는 나중에 그렇게 하였다) 것이 무함마드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비난받을 부분은 “종교가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까지 싸우라는 부분인데 진정한 폭력의 정당성은 상대방의 불신앙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Sira에 따르면(Ibn Ishaq/Hisham 324) 무함마드는 나아가서 “알라는 경쟁자가 없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꾸란 (8:57) - “그대가 전쟁에서 그들을 만난다면 그들을 따르는 자들을 두렵게 하라 아마도 그들에게 교훈이 되리라.”

 

꾸란 (8:59-60) - “불신자들이 나의 벌을 피하였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실로 그들은 피할 수 없노라. 군대와 무기로 너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에 대항할 준비를 하라 하셨으니 그것으로 알라의 적과 너희들의 적을 두렵게 하라.”

 

꾸란 (8:65) - “선지자여 믿는 자들을 싸우게 하라...”

 

꾸란 (9:5) -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들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할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예배를 드리며 이슬람 세를 낼 때는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 주리니...” 이 구절에 따르면 무슬림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이다. 예배(salat)와 이슬람 세(zakat)는 이슬람교의 5가지 기둥들에 속한다.

 

꾸란 (9:14) - “그들과 싸우라 알라는 너희의 손으로 그들에게 벌주어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고...”

 

꾸란 (9:20) - “믿으며 자신의 집을 떠나 알라의 길에서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바치며 싸우는 자들은 알라 앞에서 가장 큰 보상을 받을 것이니 이들이 승리한 자들이라.” 여기서 “싸우는”으로 말하여진 단어는 지하드(아랍어)이다.

 

꾸란 (9:29) -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선지자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은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낄 것이라.” “성서의 백성”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알라로부터 마지막 “계시들”가운데 하나였고 이 계시는 집요한 군사적 팽창을 추진하여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그 다음 100년 안에 기독교 세계의 3분의 2를 정복하였다. 이슬람은 모든 다른 사람들과 종교를 지배하기를 원한다.

 

꾸란 (9:30) - “유대인들은 에즈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고 있노라 이는 이전에 불신한 자들의 말과 유사하니 알라가 그들을 욕되게 하실 것이라 그들이 진실에서 멀리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라!”

 

꾸란 (9:38-39) - “믿는 자들이여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느뇨 알라를 위해 전쟁에 임하라 하매 너희가 주저하였노라 이는 너희가 내세보다 현세에 만족 하고 있기 때문이라 현세의 삶이 내세에 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노라 너희가 전쟁에 임하지 아니하였다면 너희에게 고통스러운 벌을 주셨을 것이오 너희 대신에 다른 백성을 선택하셨을 것이라...” 이 구절은 싸우기를 거절하는 자들이 지옥으로 가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이다.

 

꾸란 (9:41) - “가볍게든 또는 무겁게 무장하여 나아가라 너희의 재산과 너희의 생명을 바쳐 알라를 위해 싸우라 너희가 알고 있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더욱 좋으리라.” 그다음 구절(9:42)을 보면 - “눈에 보이는 이익이 있고 여행이 쉬웠다면 아마 그들은 그대를 따랐을 것이나 거리가 그들에게 멀었도다...”이 구절은 무함마드가 자기방어를 위해서만 싸웠다는 통념을 반박하는데 이 구절은 전투가 집에서 먼 지역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경우에는 다른 나라인 기독교인의 땅을 의미한다).

 

꾸란 (9:73) - “예언자여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에게 엄하게 대항하라 지옥이 그들의 안식처이며 종말이 저주스러울 것이라.” 이슬람을 거부하는 자들을 인간성을 말살하며 무슬림들에게 그들이 지옥 불에 탈 화목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학살을 정당화하는 것을 쉽게 만들고 있다. 이 구절은 또한 오늘날의 독실한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안 믿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꾸란 (9:88) - “그러나 선지자와 그리고 그분과 함께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바쳐 싸우니 그들은 복을 받을 것이요 번성할 것이라.”

 

꾸란 (9:111) - “알라를 믿는 자 가운데서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재산을 사시고 천국을 주실 것이라 그것은 알라를 위하여 싸우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자를 위해 구약과 신약과 꾸란에 약속된 것이라 알라보다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 누구이뇨 너희가 알라와 거래한 것에 기뻐하라 그것이 영광된 승리라.”

 

꾸란 (9:123) - “믿는 자들이여 너희 가까이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고 그들로 하여금 너희가 엄함을 알게하라...”

 

꾸란 (17:16) - “우리들이 한 고을을 멸망코자 했을 때 안이한 생활을 누리던 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노라 그러나 저들은 그 안에서 거역하였기 때문에 이 고을에 대한 그 명령이 진실임을 입증하여 우리들은 그 고을을 완전히 파괴한다.” 범죄는 도덕적인 죄인데 처벌은 “완전한 파괴”라는 것을 주목하라. (9.11공격을 명령하기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은 먼저 미국인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일 것을 발표하였다).

 

꾸란 (18:65-81) - 이 우화는 명예살인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는데 여기서 가족의 한 구성원이 살해되는데 이유는 그가 배교 또는 도덕적인 추태로 그 가족에게 수치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이 이야기는 유대교 또는 기독교 경전에는 없다)는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모세에 관하여 이야기하는데 그는 겉으로 보기에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한 일들을 하지만 그 후 나중에 설명에 따라서 정당화된다. 그러한 행동 가운데 하나가 특별한 이유 없이 한 소년을 살해하는 것이다(18:74). 그러나 이 현인은 나중에 그 소년이 “불순종과 배은망덕”으로 자기 부모를 “슬프게” 할 것을 염려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는 살해되었고 그래서 알라가 그들에게 “더 좋은” 아들을 줄 수 있었다. (주석: 이것이 샤리아 법에 의하여 명예살인이 명령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Reliance of the Traveller (Umdat al-Saliq)는 부모 또는 조부모가 자식들을 죽일 경우 살인에 대한 처벌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0.1.1-2).)

 

꾸란 (25:52) - “그러므로 불신자들을 따르지 말고 최대한의 분투함으로 저들과 대적하라” “대적하라”는 지하드인데 분명히 개인적인 상황이 아니다. 이것이 메카 계시라는 것을 아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꾸란 (33:60-61) - “위선자들과 마음이 병든 자들과 그 도시에서 교사하는 자들이 단념하지 않는다면 알라가 그대로 하여금 그들을 지배하도록 하리니 그때 그들은 그 안에서 그대의 이웃이 되지 않을 것이며 체류함이 잠깐 동안에 불과하리라 그들은 가는 곳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며 체포되어 살해 되리라.” 이 구절은 세 그룹에 대하여 살해(다른 번역에서는 “무자비”와 “끔찍한 살인”으로 표현되었다)를 명령하는데 위선자들(“알라를 위해서 싸우기”(3:167)를 거부하고 따라서 무슬림이 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무슬림들)과 “마음이 병든” 자(이것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포함한다; 5:51-52)와 “소란을 피우는 자들” 또는 무함마드 전기 작가에 따르면 이슬람에 대적하는 말만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교사자들”이다. 희생자들은 무슬림들에 의하여 색출되고 이것이 오늘날 테러리스트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구절이 단지 메디나에서만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왜 이 구절이 알라의 영원한 말씀에 포함되어 무슬림들에게 세세토록 전해지는지 알 수 없다.

 

꾸란 (47:3-4) - “알라를 거부하는 자들이 거짓을 따름에 반해 믿는 자들은 알라께서 내려주신 진리를 따르기 때문이라 이렇듯 알라는 비유로서 인간에게 교훈을 내리시니라 너희가 전쟁에서 불신자를 만났을 때는 저들의 목들을 때리라 너희가 완전히 저들을 제압했을 때는 저들을 포로로 취하고,” 알라를 거부하는 자들은 전투에서 제압되어야한다. 이 구절은 계속해서 알라가 그 더러운 일을 자신이 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무슬림들의 신실함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살인하는 자는 시험에 통과한다. “알라께서 원하셨다면 저들에게 징벌을 내렸을 것이라 그러나 다른 자들에 비유하여 시험코자 하심이라 그러나 알라의 길에서 살해된 자 있다면 알라는 그의 행위가 결코 손실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

 

꾸란 (47:35) - “휴전을 촉구하는 약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저들 위에 있노라(Shakir: ”더 좋은 손을 가지고 있노라“) 알라가 너희와 함께 하시어,”

꾸란 (48:17) - “장님이나 불구자 그리고 환자가 출전하지 아니함은 죄악이 아니라 알라는 당신과 선지자에게 순종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로 하여금 강이 흐르는 천국에 들게 하시며 외면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고통스러운 벌을 내리시니라.” 현대의 옹호자들은 때로는 지하드가 ‘영적인 투쟁’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장님, 불구자, 환자가 왜 면제되는가?

 

꾸란 (48:29) -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며 그와 함께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에 대항하여 강하고(무자비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 자비하니라...” 이슬람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종교적 상태에 근거하여 적용되는 매우 다른 두 개의 기준이 있다.

 

꾸란 (61:4) - “실로 알라는 당신의 명분을 위하여 싸우는 자들을 사랑하시니라.” 평화의 종교, 정말로! 61:9이 이 구절을 뒤따른다: “선지자를 통하여 복음과 진리의 종교를 보내시고 꾸란을 다른 모든 종교 위에 두신 분이 알라이시라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것을 싫어하더라.”

 

꾸란 (61:10-12) -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고통스러운 징벌로부터 구제될 수 있는 거래를 가르쳐 주리라 그것은 너희가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를 믿으며 알라의 사업을 위해 너희의 재산과 생명을 바쳐 싸우는 것이라 너희가 알고 있다면 그것이 너희를 위한 복이 될 것이라 알라께서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사 강물이 흐르는 천국으로 인도하시어 아름다운 낙원에서 살게 하여 주실 것이라.” 이 구절은 전투에서 주어졌다. 이 구절은 아랍어 지하드를 사용한다.

 

꾸란 (66:9) - “선지자여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되 그들에 대하여 엄격하라 그들의 거주지는 지옥이니 그들의 말로가 불행할 것이라.” “지하드”의 어근이 되는 단어가 여기에 사용되었다. 배경은 분명히 성전이며 폭력의 범위는 자신들이 무슬림들이라고 여기나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포함하여 확대된다.

 

무함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로부터:

 

 

부카리 (52:177) - 알라의 사도가 “너희들이 유대인들과 싸우고 유대인이 그 뒤에 숨어있는 바위가 ‘오 무슬림! 내 뒤에 유대인이 숨어있으니 그를 죽여’라고 말할 때까지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부카리 (52:256) - 이교도들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는 밤에 이교도 전사들을 공격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지 선지자에게 질문하였다. 선지자는 “그들은(여자들과 아이들) 그들(이교도들)에 속한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명령에서 무함마드는 인지된 적을 죽이는 과정에서 비-전투원을 죽이는 것이 허용된다는 예를 확립하였다. 이것이 많은 이슬람 폭탄 테러범들을 정당화한다.

 

부카리 (52:220) - 알라의 사도가 “나는 테러로 승리하도록 되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부 다우드 (14:2526) - 선지자가(그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말하였다: 믿음의 근본은 세 가지이다: “알라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자를 죽이지 않는 것과 그가 무슨 죄를 지을 지라도 그를 불신자로 선포하지 않는 것과 그의 어떠한 행동에 대하여도 그를 이슬람에서 제명하지 않는 것이며 알라가 나를 선지자로 보낸 날부터 나의 공동체의 마지막 사람이 Dajjal (Antichrist)과 싸우게 될 때까지 지하드는 계속될 것이다.

 

아부 다우드 (14:2527) - 선지자가 말하였다: 알라를 위하여 싸우는 것(지하드)은 경건하든 경건하지 안든 모든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너희들에게 의무이다.

 

무슬림 (1:33) - 알라의 사도가 말하였다: 나는 그들이 알라만이 하나님이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라고 증언할 때까지 모든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명령받았다.

 

부카리 (8:387) - 알라의 사도가 “‘그들이 알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경배되어질 권리가 없다’라고 말할 때까지 사람들과 싸우도록 명령받았고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같이 기도하고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며 우리가 살해하는 것같이 살해한다면 그들의 피와 재산이 우리에게 신성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정당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무슬림 (1:30) - “알라의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알라를 제외하고는 신이 없다고 사람들이 선언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명령받았다.”

 

무슬림 (1:149) “Abu Dharr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알라의 사도여,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알라를 믿고 그를 위하여 지하드를 하라....”

 

무슬림 (19:4321-4323) - 무함마드가 무고한 어린 아이들이 불신자들에 대한 그의 부하들의 공격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무함마드가 어깨를 으쓱했던 세 개의 하디스가 있다: 그의 반응은 “그들이 그들(적을 의미함) 가운데 있었다.”였다.

 

무슬림 (19:4294) - 알라의 사도(그에게 평화가 임하기를)가 누구든지 군대 또는 파견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할 때 그는 특히 그에게 권고하였다....그가 말하였다: 알라의 이름을 걸고 그리고 알라를 위하여 싸우라. 알라를 믿지 않는 자들과 싸우라. 성전을 하라....다신교도인 너희들의 적들을 만날 때 그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초청하라. 그들이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응대한다면 너희들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어떠한 해악도 행하지 말라. 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초청하라; 그들이 너희들에게 응대한다면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싸우지 말라....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에게 이슬람세(Jizya)를 요구하라. 그들이 지불하기로 한다면 그들에게서 이슬람세를 받고 물러서라. 그들이 이슬람세 지불을 거절한다면 알라의 도움을 구하고 그들과 싸우라.

 

타바리 7:97 Ashraf를 살해한 다음 날 아침에 선지자는 “너희들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살해하라”고 선언하였다. Ashraf는 시인이었는데 이슬람을 비방했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부하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여기서 무함마드는 살해하라는 자신의 명령의 범위를 확대한다. 이어서 무고한 유대인 사업가가 단지 무슬림이 아니란 이유로 자신의 무슬림 동료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타바리 9:69 “불신자를 죽이는 것은 우리에게 작은 문제이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말이다.

 

타바리 17:187 “하나님을 두고 말하는데 우리가 떠났던 종교가 이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종교보다 더 낫고 올바르다. 그들의 종교는 피를 흘리며 거리를 끔찍하게 만들며 재산을 강탈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전에 믿던 종교로 돌아갔다.”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지만 알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폭력과 약탈에 충격을 받은 후 그들의 실수를 알게 된 한 그룹의 기독교인들의 말이다. 평화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결정에 대한 대가는 칼리프 알리에 의하여 남자들은 참수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이븐 이스학/히샴 327: - “알라가 말하였다. ‘선지자는 포로들을 모으기 전에 살해하여야한다. 살해된 적은 땅에서 제거된다. 무함마드, 너는 이 세상의 욕망을 갈망하였다, 세상의 재물들과 포로들의 몸값은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알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그들을 살해하기를 원한다.’”

 

이븐 이스학/히샴 990: - ‘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면서 누군가의 머리를 자르는 것이 요즘 시대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누구든지 생각한다면 무함마드의 명령에 의하여 바로 그 관습이 생겨났다는 것이 여기에 있으며 무함마드가 입증할 것이다.

이븐 이스학/히샴 992: - “알라를 위하여 모든 사람과 싸우고 알라를 믿지 않는 자들을 살해하라.” 군사적 공격전에 무함마드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준 가르침이다.

 

추가 설명들: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비-무슬림들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들의 종교가 평화스럽고 관용적인 종교라는 증거로 그들이 내세울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곳(중동과 파키스탄과 같이)에서 종교적 소수집단들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잔인한 박해로 고통 받고 있다. 이슬람이 소수집단인 곳(태국 필리핀, 유럽같이)에서는 무슬림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폭력의 위협이 있다. 두 가지 상황은 종교적인 테러리즘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듯하며 이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있어서 집요하고 특징적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며 꾸란에서 시작된다. 종교적 관용과 보편적 형제애에 관한 현대적인 미덕들에 적합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이슬람의 가장 신성한 책의 구절들은 거의 없다. 나중에 계시된 구절들에 의하여 명백하게 폐기된 초기 “메카” 계시들이 그러한 구절이었다. 이것이 무슬림 옹호자들이 - 꾸란이 완벽한 책이라고 주장하면서도-그들의 “도움”없이 꾸란을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관한 “위험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단지 역사 또는 신학적 구조 개념은 별도로 하고 꾸란의 폭력적인 구절들은 실제 집단학살과 대량학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AD 1000년경부터 시작하여 5세기 동안 Ghazni 왕조 Mahmud의 피비린내 나는 정복으로 수 천 만 명의 힌두교도를 잔인하게 도살한 것을 포함한다. 그와 나중에 Tamerlane(이슬람의 징기스칸)이 단지 자신들의 사원들이 파괴되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에 대하여 무수한 사람들을 도살하였다. 불교는 인도 땅에서 아주 최근에 제거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일부와 오늘날의 터키를 포함하여 무슬림 군대에게 점령된 지역에서 동일한 운명(비록 보다 느리게 되었지만)을 맞았다. 자랑스러운 페르시아 사람들의 고대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는 무슬림들에게 멸시받으며 현대 이란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종교 안에 폭력이 아주 각인되어 이슬람은 다른 종교 또는 이슬람 내부에서 실제로 전쟁하는 것을 절대로 중지하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도시를 포위하고 남자들을 집단학살하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그들의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취하였던 전쟁 지휘관이었다. 몇 가지 경우에서 그는 포위된 거주자들로부터 항복제안을 거절하고 포로까지 도살하였다. 부하들이 싸우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느꼈을 때 그들이 싸운다면 노예들과 전리품을 그들에게 약속하면서 그리고 그들이 싸우지 않으면 지옥으로 그들을 위협하면서 부하들이 전투하도록 실제적으로 선동하였다. 무함마드는 전투에서 포로가 된 상처 입은 여자들을 보통 그들의 남편들과 가족들이 도살된 날에 부하들이 강간하도록 허용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무슬림 군대는 공격적인 작전을 하였고 이슬람의 가장 극적인 군사적인 정복은 무함마드가 죽은 후 수 십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무함마드의 부하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초기의 이슬람의 전쟁 원칙은 도시의 시민들이 저항한다면 그들을 괴멸시키는(남자들은 처형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취하였다) 것이었다. 현대 옹호자들이 무슬림들은 자기방어를 하는 과정에서 공격하였을 뿐이라고 자주 주장하나 이것은 무함마드의 시대로 돌아가서 이슬람 역사가들과 다른 이들의 글에 의하여 분명하게 반박되는 자가당착이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이주한 후 단지 5년 만에 완전히 멸종된 꾸라이자 유대인들의 예를 생각해보자. 꾸라이자 유대인들의 지도자는 무함마드의 치명적인 대상(caravan) 약탈 공격에 대한 보복을 하기위하여 왔던 메카인 군대에게 그들의 도시가 포위되자 중립적인 태도를 선택하였다. 꾸라이자 유대인들은 양측으로 부터 어느 누구도 살해하지 않았고 메카인들이 돌아간 후에 무함마드에게 평화롭게 항복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선지자는 꾸라이자의 모든 남자들을 참수하고 모든 여자들과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고 무함마드 자신이 포로들 가운데 한명을 강간까지 하였다(무슬림 옹호자들은 이것을 “같은 날의 결혼”이라고 부른다).

현대 이슬람의 가장 존경받는 학자들 가운데 한 명인 세이크 Yusuf al-Qaradawi는 공개적으로 공격적인 지하드를 명령한다: “당신들이 추구하는 지하드에서 당신들은 적을 찾고 적을 침공한다. 이러한 형태의 지하드는 이슬람 국가가 이슬람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것이 가는 길에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국가들을] 침공할 때만 여지가 있다.” 그 밖에 그는 “이슬람은 선제공격을 할 권리가 있다....이슬람은 하나님의 종교이고 이슬람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이슬람은 사회제도와 전통의 형태로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파괴할 권리를 가진다....이슬람은 인간 본성을 왜곡시키고 인간 자유를 제한하는 그들의 치명적인 영향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기 위하여 사회제도들과 전통들을 공격한다. 이슬람 지하드가 단지 이슬람의 본 고장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이슬람 방식의 삶의 위대성을 감소시킨다.”라고 말한다.

후계구도를 분명하게 하지 못한 무함마드의 실수는 그가 죽은 후에 계속적인 내전을 초래하였다. 무함마드를 가장 잘 아는 자들은 처음에 멀리 떨어져 있는 부족들이 이슬람을 떠나서 그들이 좋아하는 종교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도록 싸웠다(Ridda 또는 ‘배교 전쟁들’). 이어서 가까이 있는 공동체 안에서 초기에 메카인 개종자들이 나중에 개종한 자들과 싸웠다. 무함마드와 함께 메카로 여행하였던 이주자들과 메디나에서 그들이 정착하도록 도왔던 Ansar 부족 사이에 적대감이 커졌다. 결국은 무함마드 자신의 가족들 안에서 그가 사랑했던 부인과 그가 사랑했던 딸 사이에 폭력적인 전쟁이 있었고-그것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불협화음을 내는 분열로 남아서 오늘날 까지 서로 상대방의 목을 따고 있다.

이슬람에 관하여 말하여 질 수 있는 가장 이상하고 가장 진실이 아닌 것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는 것이다. 서방세계가 심판되고 정죄되는 모든 기준이(노예제도, 제국주의, 불관용, 여성혐오, 성폭력, 전쟁....) 이슬람에 똑같이 적용된다면 판결문은 파괴적일 것이다. 이슬람은 결코 이슬람이 정복한 것들인 종교, 문화, 언어 또는 생활양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결코 사과하지 않으며 도덕적 진보에 맞춘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대화가 막혀 있으며 가장 자기도취적이다. 이슬람은 그 스스로의 완벽함을 확신하지만 잔인할 정도로 자기 검증을 혐오하며 비평을 억압한다.

이것이 꾸란의 폭력에 관한 구절들을 그렇게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꾸란의 구절들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무게감이 실려 있다.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이 그 구절들을 그들의 책에 있는 글자그대로 취하며 지하드 없는 이슬람은 불완전하다고 이해하는 반면에 온건주의자들은 그들을 반박할 것이 거의 없으며 여론의 바깥에 있다. 정말로 그들이 무엇을 가지는가? 평화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무지한 사람들을 속이겠지만 이슬람의 가장 성스러운 책이 열 두 번째 구절마다 비-무슬림에 대한 알라의 증오에 관하여 이야기하거나 비-무슬림들의 죽음, 강제개종, 복속을 요구할 때 비록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의 종교를 해석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라도 테러리즘에 대한 공감이 그 공동체에 깊고 넓게 흐르고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슬람의 가장 존경되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명인 Ibn Khaldun와 같은 학자들이 “이슬람의 사명의 보편성과 모든 사람들을 설득으로 또는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의무 때문에 성전은 종교적인 의무”라고 이해하였어도 많은 다른 무슬림들은 보편적인 비폭력을 전파하는 꾸란의 구절이 거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들의 이슬람에 관한 이해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다. 서방 세계에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가 성경 신약이 평화, 사랑, 관용의 미덕을 전파하는 기독교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형적인데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고 생각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꾸란의 증거와 이슬람의 피로 점철된 역사가 이것과 아주 많이 모순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아마도 놀라고 당황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폭력성을 받아들인다. 1991년 미국의 팔레스타인 부부가 너무 서구화된다는 이유로 딸을 칼로 찔러 죽인 혐의로 유죄가 선고되었다. 가족의 친구가 그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나와서 배심원들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그 아버지는 단지 “종교”에 순종하였음을 주장하며 그 부부는 “딸을 훈육하든지 명예를 잃어버리든지” 하여야 했다고 말하였다. 2011년에 분명하게 알라의 이름으로 시민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뉘우치지 않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사우디 왕에 의하여 메카로 호사스러운 “성지순례”를 하였지만 단 한명의 무슬림의 항의도 없었다.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단지 이슬람이 다르고 위험하다는 둘 다의 현존하는 진실을 피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하나님에 관한 비평적인 생각을 제물로 삼지 않으려하거나  다른 종교를 비방하기 위한 구실들을 이슬람에서는 찾지 않는 서방세계 자유주의자들이 잘하는 것이다.

꾸란을 글자그대로 해석하는 무슬림들이 너무 많이 있고....이슬람의 이름으로 행하여진 폭력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

132p에 "아랍 민족과 유대 민족은 같은 성서의 백성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고 잠시후에 "그 후 이삭은 유대 민족의 조상으로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고 이스마엘은 아랍족의 조상으로 그 가문에서 무함마드가 탄생했다"는 근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랍 민족 모두가 성서의 백성이며 이스마엘이 무함마드의 조상이라는 주장은 다음의 자료로 반박된다.

 

 

아랍족이 이스마엘의 후손인가?

 

글쓴이 Dr. Robert A. Morey

 

서언

중동은 위의 질문이 역사적인 사실에 따라서 정직하게 답변될 때까지 결코 평화가 없을 것이다. 신화와 전설은 어린아이를 위해서는 이야기로서 좋지만 실제 세계에서 우리는 사실과 기록을 가져야한다.

제 1장

아랍인들의 이스라엘 땅에 대한 주장은 전적으로 세 가지 거짓에 의거한다.

거짓 주장들:

1. 모든 아랍족들이 이스마엘을 통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2.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에 포함된다.

3.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스라엘 땅을 포함하기 때문에 아랍족들이 그것을 주장할 합법성을 가진다.

열 가지 역사적인 사실들

1. 토라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 그는 현재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서쪽으로 갔다.(창 12장) 그는 그 땅에서 천막에서 살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그 당시에 살고 있었던 땅에 대하여 언약을 했던 곳은 이스라엘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이스마엘과 다른 많은 아들과 딸을 낳은 곳도 이스라엘이었다. 이삭은 하나님에 의하여 언약의 상속자로 선택을 받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에 대한 제물로 드리려고 모리야산으로 데리고 갔다.

2. 토라는 거의 모든 점에 있어서 꾸란과 모순된다. 꾸란 2:125-126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은 이스라엘에서 천막에서 살지 않았고 아라비아 메카에서 살았다. 그들이 함께 카바신전을 재건축하고 벽에 검은 돌을 박았다. 메카로 연례적인 순례의 전통과 마귀에게 돌을 던지는 행사등을 시작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하나님에게 제물로 드리기 위해 미나산으로 갔다.

3.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의 이름은 느바욧,게달,앗브엘,밉삼,미스마,두마,맛사,하닷,데마,여둘,나비스,게드마이다. 그들은 북아라비아 지역의 사람들과 통혼하여서 이스마엘인이라고 알려진 몇몇 유목부족이 되었다.

4. 이스마엘과 그의 가족이 “모든 형제들이 동방에서 살 것”이라고 토라에 예언되어있다.(창 16:12) 그리고 “그들이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현제의 맞은 편에 거하였더라”(창 25:18) 이 경계지역은 앗시리아 왕국을 향한 북 아라비아의 이집트의 동쪽 사막지역이다.

5. 이스마엘인들은 앗수르인들의 기록에서 독특한 부족으로 언급된다. 그들은 나중에 미디안인과 다른 지역부족들과 통혼하여 흡수된다. 창세기 37:25-28; 39:1에서 이스마엘인들이 미디안인으로 불리우며 사사기 8:22-24에서 미디안인들이 이스마엘인으로 불리운다. 그 동일성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6. 아라비아는 아브라함과 또는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오래전에 구스와 셈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창 10:7) 그들의 도시와 사원들은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잘 기록되어있다.

7. 무함마드가 주장하는 대로 모든 아랍족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면 그 모든 원래 아랍족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랍족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스마엘은 누구와 결혼하였는가? 아라비아에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다면 누가 메카를 건설하였는가? 이스마엘이 거기에 살았기 때문에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메카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은 스스로 말한다. 이스마엘이 이주하기 전에, 이주하는 동안, 이주한 후에 존재하였던 아랍족은 북아라비아 광야를 방랑하기 시작하였다.

8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수르 광야에서 하윌라의 고대도시까지 북아라비아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미디안인과 같은 지역 부족들에게 흡수되었다(창 37:25-28; 39:1; 삿 8:24). 이스마엘이 남쪽 메카에 가서 아랍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역사적 고고학적 기록은 없다. 일부 현대 아랍 학자들은 무함마드 전에 이스마엘이 아닌 까탄이 아랍민족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9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삭과 그의 후손들에게만 주어졌다.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어떤 부분도 하나님으로부터 배제되었다.(창 18:18-21)

10. 그러므로 이스마엘의 자손들과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땅에 대하여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데 그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유대인만이 이스라엘 땅에 대한 주장을 가진다.

제 2장

이슬람의 주장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이스라엘 땅을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할 권리를 준다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이 주장은 두 가지 거짓 억지에 근거한다:

1.모든 아랍족은 이스마엘의 후손이다.

2.무함마드가 예루살렘에 갔다.

세 가지 역사적 사실들

1. 첫 번째 가정은 이미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아랍민족은 모두가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고 따라서 그들은 족장들과 선지자들과 성서와 이스라엘 땅의 상속자들이 아니다.

2.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에 갔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꾸란과 하디스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한밤중에 하늘을 여행하여 칠 층 천을 방문하고 예수와 같은 위인들을 만나고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꿈을 꾸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꿈이기 때문에 그는 실제로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자리에 있는 모스크는 무함마드가 그 장소에 서있었다는 거짓말 위에 지어진 날조이다.

3. 꾸란 어디에도 이스마엘이 아랍족의 조상이라는 말은 없다. 그것이 꾸란에 없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한 이슬람 신앙일 수 없다.

결론

아랍민족은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다. 비록 그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가정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없는데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어떠한 부분이라도 가지는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삭이 유일한 아브라함의 언약의 상속자이다. 그러므로 아랍민족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없다. 무슬림들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땅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없다. 무함마드는 꿈에서 말고는 예루살렘에 간적이 없다. 이스라엘 땅에 대한 영적이며 성경적인 권리를 가지는 유일한 자들은 이삭의 후손인 유대인들이다.

참고문헌

“아라비아 문학은 그 고유의 선사시대적 버전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완전히 전설적이다”(Encyclopedia Britannica, Vol. 2:176)

“순수한 아랍인들은 현재 아랍인들이 그들의 본래 조상이라고 여기는 욕산 또는 까탄의 후손들이다.....혼합된 아랍인들인 'Arabu ‘'l-Musta’'riba는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이 자랑한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이 일관되게 그들의 가계의 계보로 여기는 선호성과 그들이 그것에 접목한 많은 허구적인 전설을 설명할 것이다.....이스마엘의 역사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서 아랍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것에 상당히 많은 지어낸 이야기를 섞어 넣었다. (A Dictionary of Islam, pgs. 18-19)

“무함마드는 아브라함의 가계에 관하여 알지 못하였다.”(Encyclopedia of Islam) I: 184. See also pages 544-546.

남쪽과 북쪽 두 방향에서 아랍인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져있고 창세기 16장12절에서 ”그(이스마엘)가 모든 형제와 대항하여 살리라“는 마치 그것이 대체로 아랍인들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더 많이 번성할 것이라는 민족적 독립의 예고인 것으로 종종 읽혀진다. 그러나 이 추정은 원래의 히브리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하는데 그것은 문자적으로 ”그가 모든 그의 형제들을 마주하고 살 것이다“의미하며 (위에 설명된 관용어법에 따르면 ”마주하고“는 동쪽을 의미한다) 그의 후손들의 거주지는 아브라함의 다른 후손들의 거주지의 ”동쪽“이 될 것이다....

이 예언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 일반적으로 사라 또는 케두라를 모계로하는 아브라함의 다른 후손들의 동쪽에 자리 잡았던 사실에서 그것이 성취되었음이 발견된다. 그러나 남방 아랍족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이 되었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근거가 없으며 아랍족이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씨라는 아랍인들의 허구에 의하여 고안된 전통에서 유래된 듯하며 그 허구는 족장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의 전체 역사를 왜곡하고 위조하였고 그러한 사태를 팔레스타인부터 메카까지 미치게 하였다. (McClintock and Strong, Cyclopedia of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Literature, (Vol. I:339)

꾸란에서는 “창세기 21:17-21의 배경이 메카로 나와 있다.” (The Concise Encyclopedia of Islam, p. 193). 꾸란은 남방 아랍인들이 이스마엘이 아닌 까탄의 후손이라고 기록한다(p. 48).

원문보기 http://www.journeytojesus.com/AreTheArabsDescendantsOfIshmael.pdf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인가?

 

글쓴이 Dr. Rafat Amari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증거로서 무슬림들은 A.D. 770-775년 경에 Ibn Ishak이 쓴 족보를 주장한다.

그가 쓴 것은 진실이 아니다. Ibn Ishak에 따르면 이스마엘 족속들, 특히 무함마드의 조상이라고 여겨지는 느바욧 (Nebaioth) 부족은 시나이 반도와 비옥한 초생달 지대에 살았던 유목민 부족이었다. 이 부족들은 B.C. 7세기 이후 사라졌다.

무함마드의 가문은 예멘의 시바인 집안(Sabaean Yemeni family)이었고 반면에 비옥한 초생달 지대의 광야에 살았던 이스마엘족은 무함마드의 가문이 예멘을 떠나기 여러 세기 이전에 사라졌다.

역사가들은 무함마드의 가문이 시바-예멘에 살았던 가문이었고 말한다. A.D. 5세기에 무함마드의 8대 조상인 Qusayy Bin Kilab이 꾸라이시족으로 구성된 많은 예멘 가문들의 연합체를 결집하였고 그 연합체 안의 부족에서 무함마드가 나왔다. 이 가문들은 단지 A.D. 5세기에 메카를 점령했다. 메카의 시는 A.D. 4세기에 Khuzaa'h 부족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무함마드의 가문은 어떤 이스마엘 부족과도 연결이 안되는데 왜냐하면 무함마드의 가문은 A.D. 5세기 까지 예멘을 떠나지 않았고 그것은 이스마엘족이 사라지고 1,100년 정도가 지난 시기이다. 무함마드의 부족은 역사를 통하여 어느 시점에서도 이스마엘족이 살았던 같은 지역에 살수 없었다.

Ibn-Ishak에 의하여 조작된 족보는 무함마드의 말과도 모순되어서 무함마드는 그의 17대 조상이전의 선조들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Ibn-Ishak은 그의 시대의 무슬림 학자들에 의하여 거짓 족보를 만들고 위조한 것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i]

Ibn Ishak 훨씬 전에 무함마드 시대에 살았던 무슬림들도 또한 무함마드를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시도로 족보를 조작하였다. 무함마드 자신은 이 모든 거짓 족보들을 거부하고 그의 조상들의 족보에 관하여 한계를 두었다. 거짓 족보에 대한 무함마드 자신의 거부에 대하여 Amru bin al-A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무함마드는 al-Nather bin Kinaneh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의 조상들에 관하여 스스로 족보를 세었고 그 다음 “다른 주장을 하거나 조상들을 더 이상 더하는 자는 누구든지 거짓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2][ii]

이것에 의하여 무함마드는 자신도 그리고 어느 누구도 al-Nather bin Kinaneh 이상의 자신의 조상에 대하여 모른다고 고백하였다. Nather bin Kinaneh는 무함마드가 진정한 것으로 인정하는 족보에서 17대 조상이다. 하디스라고 불리우는 무함마드의 말 또는 관습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은 무함마드가 Maad 이상으로 계보를 찾는 것을 거부하는데 Maad는 누군가가 주장하기를 al-Nather bin Kinaneh의 4대 조상이었다고 한다.[3][iii]

우리가 무함마드의 조상들을 볼 때 무함마드의 17 조상들의 각 세대에 대하여 30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함마드가 그의 부족들의 족보에 대하여 약 510년 전까지 알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무함마드가 올린 다른 4 조상을 더하기를 원한다면 630년 전까지 갈 수 있다. 진실은 어느 누구도 그 시점 이전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Ibn Ishak과 그의 추종자들이 B.C. 2050년 경에 살았던 이스마엘까지 옛날의 족보를 확실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무함마드의 21대 조상과 이스마엘 사이에 대략 2000년의 기간을 준다. Ibn Ishak은 어떻게 이스마엘족이 이 기간 동안 메카에 살았다는 주장을 할 수 있었고 무함마드 자신이 17대 또는 21대 조상 이전의 그의 친족들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모른다고 말했을 때 그들의 역사에 관한 구체적인 부분을 설명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분명히 증명하였듯이 메카는 이 기간 동안 존재하지도 않았다. Ibn Ishak의 족보는 무함마드가 자신의 17대 조상인 al-Nather bin Kinaneh보다 이전의 조상에 대하여 모른다는 무함마드 자신의 주장과 모순이 된다.

무함마드 당시에 나타났던 모든 족보들은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거짓으로 간주되었다.

무함마드의 추종자들로부터 만들어진 무함마드에 관한 하디스의 많은 버전들 모두는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 된다는 것에 반대하였다고 보고한다. 무함마드와 가장 가까운 동시대 사람들과 추종자들은 무함마드 당시에 나타난 족보들이 거짓으로 간주하였다. 그러한 족보에 대하여 무함마드의 반대를 보고하였던 사람들 가운데는 무함마드의 아내인 Aisheh와 무함마드에 관한 하디스의 가장 중요한 보고자들 가운데 한명인 무함마드의 사촌 Ibn Abbas가 있다.[4][iv] Ibn Ishak은 무함마드의 조상들과 이스마엘을 연결시키는 족보를 만듬으로 이 모든 사람들이 말했던 것과 모순이 되고 있다.

Ibn Ishak은 창세기에 기록된 족보들을 변경하였는데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아랍식 이름을 집어넣어 아말렉에 관한 역사에 모순을 만들었다.

조작은 이것을 초월한다. Ibn Ishak과 그 이후의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족보는 창세기에 있는 족보에 아랍식 이름들을 집어넣었다. 예를 들면 Ibn Ishak은 “Arab,”이라는 단어에서 유대된 “Ya’rab,”이라는 아랍식 이름을 “ Khahtan.”의 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집어넣었다. Ibn Ishak은 창세기에서 노아의 아들 셈, 셈의 셋째아들 아르박삿, 아르박삿의 손자는 에벨, 에벨의 아들로 언급된 욕단을 까탄(Khahtan)으로 바꾸었다.[5][v] 우리는 “Arab”이라는 용어가 B.C. 10세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아마도 B.C. 5500년경의 노아 직후의 역사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Ibn Ishak은 더 나간다. 그는 셈의 넷째아들 인 룻(Lud)이라는 이름을 루쓰(Luth)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루쓰(Luth)를 아말렉족의 조상인 아말렉(Amalek)으로 만들었다. 그는 또한 아말렉과 그의 부족이 메카에 살았다고 주장했고 고대 이집트인들이 또한 아말렉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다음 그는 아말렉을 아랍족에 연결시키기 위해서 아말렉의 원래 이름을 “Arib,”으로 바꾸었다.[6][vi] 이러한 거짓 족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Ibn Ishak은 메카가 노아와 그의 손자 룻의 시대에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전에 검토하였던 메카가 A.D. 4세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에 직접적으로 모순된다.

아말렉은 이삭의 아들인 에서의 후손이다. 창세기 36:12은 딤나가 에서의 첫째아들인 엘리바스의 첩이었고 그녀는 엘리바스에게 아말렉을 낳았다고 말한다. 아말렉은 아말렉족의 조상이 되었고 이들은 원래 남부 요르단에 살았던 에돔족속 이었지만 모세의 시대에 입증된 바와 같이 시나이의 동쪽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아말렉족은 B.C. 10세기 이후 사라졌다. 어떠한 그리스 역사가의 글속에 또는 어떠한 비문들에서도 아말렉에 관한 언급이 없는데 이것은 그 부족이 아라비아의 중앙과 서쪽 또는 북쪽에 살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주르흠에 관한 주장 반박

Ibn Ishak은 주르흠(Jurhum) 부족이 메카에서 아브라함 시대부터 살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주르흠이 에벨의 아들 욕단의 손자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나아가서 주르흠의 원래 이름이 “Hathrem” 이었다고 주장하였다.[7][vii] “Hathrem”이라는 이름의 중요성은 그것이 Ibn Ishak 당시인 8세기에 사용되었던 아랍식 이름의 전형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예멘과 북아라비아의 비문에 있는 이름들은 Ibn Ishak의 족보에 있는 이름들의 스타일과 전혀 다른데 Ibn Ishak의 족보는 자신의 세대의 이름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어느 비문도 어느 그리스 또는 로마 역사가도 그리고 아라비아를 방문하였던 어느 지리학자도 주르흠이라 불리우는 부족을 언급한 적이 없다. 또한 예언자라고 주장하였던 무함마드의 외삼촌인 Ummyya bin Abi al-Salet의 시에서 주르흠에 관한 최초의 언급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Ummyya의 것으로 여겨지는 시는 “아드와 주르흠의 주님(the Lord of Ad and Jurhum)”을 이야기한다.[8][viii] 무엇보다도 그 시는 이슬람 도래 이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우리는 주르흠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이슬람 이전 자힐리야(Jahiliyah;무지의 시대) 시대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 이후에 자힐리야의 많은 시들이 추가되었다는 생각은 유명한 이집트인 학자인 Tah Hussein과 같은 위대한 학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 두 번째로 논쟁에 있어서 우리가 그러한 구절이 진실임을 수용하기 원한다하여도 아브라함 시대부터 아라비아에 주르흠이라는 불리우는 민족이 존재하였다는 역사를 그것을 기초로 만들 수 없는데 왜냐하면 Ummyya는 무함마드와 동시대 인물이고 그는 자신의 시대보다 2700년 전에 존재하였던 한 민족에 관한 기록의 출처가 될 수 없다. 당시에 는 오늘날과 같이 파일을 보관하는 방법도 없었고 인쇄술도 없었으므로 전통은 단지 그것이 저작자들로부터 4세기 이내에 기록된 경우만 정확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주르흠이 아라비아에 존재하였다면 그것은 기독교 시대 이후 어떤 시기에 나타났던 작은 부족일 수 있다. 존재하였어도 어느 고전 저자도 이 부족을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그 부족은 중요하지 않다. Ummyyia의 시는 신화로 가득하여서 솔로몬 왕을 방문하였던 사바의 여왕이 자신의 고모라고 주장하는데 그는 예언자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였다. 게다가 Ummyyia는 마귀의 영과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마귀의 영은 그를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아라비아의 신비한 종교에 속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시가 그에 의하여 저작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그의 시대에서 2700년 전까지 소급되는 역사를 정립하기 위하여 그러한 성격의 시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꾸란에는 무수한 역사적 오류들이 존재하고 족보들은 꾸란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이슬람 도래 이후에 만들어졌다. 일부 예들은 사무드와 니므롯에 대한 족보이다.

이슬람 족보에는 사무드 부족에 관한 다른 일련의 역사적 오류들이 있다. 사무드는 비문들을 통하여 앗수르 왕 사르곤 2세의 시대에 증명되듯이 8세기에 나타났던 아라비아 부족이다. 나중 A.D. 5세기 경에 사무드는 정치적 힘을 잃었다. 사무드와 아드(사무드 다음에 나타났던 또 다른 아라비아 부족)가 노아 직후에 나타났던 부족들로 기록하고 있는 꾸란에서 언급된 진술들은 이슬람의 족보들을 소급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사무드 부족의 선조를 만들었고 그를 “사무드”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노아의 아들인 셈의 손자라고 주장하였다.[9][ix] 이 모든 것이 단지 꾸란의 이야기에 맞추려고 만들어졌다.

꾸란은 사무드 부족이 노아 이후 세 번째 세대라고 주장하고, (꾸란은 아라비아 부족 아드를 노아 세대 이후 두 번째 세대로 사무드를 세 번째 세대로 만들었다, 수라 7:69; 23:31,32;14:8,9를 보라) 그것은 알라에게 바람에 의하여 징벌을 받는 것으로 정죄되었다.(바람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심판을 가져오는 신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또한 엄청난 역사적 오류라는 것을 안다. 사무드가 B.C. 8세기까지 나타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앗수르인들의 비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공식적인 역사는 사무드가 B.C. 7세기 동안 계속해서 존재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아라비아에 관한 글을 쓴 다양한 그리스와 로마의 지리학자들에 의한 글도 북부 아라비아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였던 정치적으로 조직된 부족으로 사무드가 A.D. 5세기까지 존재하였다고 말했다. 꾸란이 주장하듯이 어떠한 바람도 그 부족들 멸망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를 믿게 만들기에 충분하지만 이슬람 족보에는 여전히 또 다른 엄청난 역사적 오류들이 있다. 이것은 니므롯과 관계가 있다. 창세기 10:8-11에 따르면 니므롯은 메소포타미아 고대도시들의 최초로 건설한자였다. 그는 구스의 아들이었고 구스는 함의 아들이었고 함은 노아의 아들이었다. 우리는 니므롯이 B.C. 5000과 4500년 사이에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슬람 족보는 니므롯이 구스의 아들이었다고 올바르게 말하지만 그가 아브라함의 시대에 살았다고 잘못 말하고 있다.[10][x] 니므롯에 관한 이 거짓 주장은 꾸란의 오류에 조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꾸란은 니므롯이 아브라함 시대에 살았다고 한다. 꾸란은 니므롯이 아브라함을 핍박해서 그를 불속에 던졌지만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꾸란 21:51-70과 37:95에서 볼 수 있다. 그 꾸란의 이야기는 미드라쉬 랍바(Midrash Rabbah)라는 유대인 책 17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우리는 무슬림들에게 역사를 공부하고 사실들을 꾸란과 이슬람 전통에서 말하여진 것들과 비교하라고 권장한다. 무함마드와 꾸란과 이슬람의 주장들은 명확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비록 그러한 역사적 오류들이 무함마드 시대에 추종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어도 우리는 지금 그것들이 오류에 빠져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너무나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역사의 공부가 그것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는 증명하는데 어느 누가 이러한 엄청난 오류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기록된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보다 2,000년 이전에 살았던 한 특별한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후손이 되었다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무함마드의 경우 그러한 문서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무함마드의 조상들이 이스마엘의 후손들이었다는 증거가 없다.

나는 A.D. 8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무함마드를 이스마엘과 연결시키려고 애쓴 이슬람 족보들을 분석하는 것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이미 무함마드의 하디스를 인용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보다 17대 전에 살았던 Nather bin Kinaneh보다 더 소급하여 자신의 조상들을 기술한 어떠한 족보도 금지하였다. 무함마드에 관한 다른 하디스는 무함마드가 Maad 이전으로 족보가 계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일부 사람들은 Maad가 Nather bin Kinaneh의 4대 조상이었다고 말하였다. A.D. 8세기 이후 나타난 많은 족보들은 무함마드의 족보가 무함마드 이전 17대까지로 제한되고 분명히 21대 이상은 아니라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함마드의 족보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왜 이것이 중요한가? 첫 번째로 무함마드 자신이 17대 이전의 조상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고백하였다. 두 번째로 17대 이전에 우리는 그러한 족보들에서 차이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21대 조상 Maad bin Adnan 이전 족보들은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스스로 모순되기 시작하는데 그러한 족보들의 저자들이 그들의 족보들을 만들 자료들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것이 무함마드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17대 조상 이전으로 소급하는 것을 금지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무함마드의 족보를 서로가 다르게 꾸며내었다.

그들의 작업에서 또 다른 흥미 있는 것은 전기 작가들 모두가 8~9세기의 아랍식 이름들을 사용하였지만 그들은 그 이름들을 이스마엘이 살았던 세대에도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Tabari에 의하여 언급된 족보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서 족보의 저자는 이스마엘의 장자 느바욧(Nebaioth)이 al-Awam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고 al-Awam은 al-Saboh를 낳았다. 아랍식 이름을 주목하라. 족보에서 al-Awam과 al-Saboh라는 이름의 사용은 각자가 그 이름들을 모방하도록 만들었다.[11][xi] 기독교시대 이전 북 아라비아의 비문에서도 이러한 식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이러한 이름들이 A.D. 8세기와 9세기 이후 Umayyad와 Abassid 왕조시대의 이름들과 같은 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Abassid 왕조시대는 A.D. 750에 시작되었다).

그 위에 다른 무슬림 저자들이 최근에 더 많은 것을 만든 Ibn Ishak에 의하여 조작된 족보로 돌아가면 그의 족보가 아랍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말했듯이 Ibn Ishak은 이스마엘의 장자 느바욧의 아들을 Yashjub으로 그의 아들을 Yarob으로 기록하였다. Yarob 그 자체가 Arab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Ibn Ishak은 이스마엘을 아랍인으로 나타나게 만들기 위하여 이렇게 하였다. 우리는 “Arab”이라는 단어가 B.C. 10세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Yarob과 Yashjub같은 식의 이름들은 Ibn Ishak이 살았던 A.D. 8세기의 전형적인 것이다. 이 모든 족보들에 있어서 통상적인 성격은 그것들이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고 그들 모두 무함마드와 이스마엘 사이에 제한된 수의 조상들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마엘과 무함마드 사이에 2,670년이 있고 이 장구한 시간은 단지 40세대로 커버될 수 없다는 것이다.

Ibn Ishak은 40명의 조상들을 기록한다. 그가 무함마드의 족보를 조작하였을 때 그는 40명의 조상들이 이스마엘과 무함마드 사이의 장구한 기간을 커버하는데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스마엘은 2050년경에 살았고 무함마드는 A.D. 620년에 메디나로 이주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마엘과 무함마드 사이에는 약 2,670년이 있다. 이 장구한 기간이 어떻게 단지 40명의 조상들로 커버될 수 있을까?

대조적으로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기록한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예수 사이의 기간이 단지 1,950년 일지라도 42명의 조상들을 찾을 수 있다. 무함마드의 족보는 720년을 더하여 계산하여야 한다.

또 다른 고려할 점은 유대인의 세대는 아랍인의 세대보다 길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서 다윗왕까지 이삭의 후손들을 생각해보라. 이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40세 또는 50세가 되었을 때 그들의 장자를 낳았다. 우리는 B.C. 586년 바벨론의 유수와 예수의 탄생 사이에 14세대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그 기간의 유대인 세대가 약 41년 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랍인 세대로 올 때 우리는 각 세대에 41년을 적용할 수 없다. 학자들은 아랍인 세대는 약 20년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왜냐하면 아랍인들은 기후와 그들의 문화적인 환경 때문에 약17-20세에 결혼하였다.

아라비아의 고고학은 아라비아인 세대가 상대적으로 짧았음을 입증하였다.

고고학은 아라비아에서 한 세대의 기간들이 보다 짧았음을 입증한다. 우리가 아라비아에서 즉 북부 아라비아와 예멘에서 일련의 왕들을 연구한다면 이스라엘과 같은 다른 지역의 세대들과 비교하였을 때 아라비아 세대들이 짧았음을 입증하게 된다. 예를 들면 사바(Saba)와 예멘의 힘야르(Himyar)에서 일련의 통치자들은 B.C. 9세기에 Karibil A로 시작하여 그 일련의 통치자 가운데 102번째이며 마지막 통치자인 Himyar의 왕 Maadikarib III까지 간다. Maadikarib III는 A.D. 575-577 사이에 통치하였다. [12][xii] 우리는 약 1,400년의 기간에 102세대의 왕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통치자들 가운데 약간은 같은 세대 안의 다른 왕들의 형제였다는 것을 기억하면 우리는 75에서 80세대 사이로 간주할 수 있고 아라비아인의 평균 세대는 약 17-20년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아라비아 세대가 짧았다는 것을 고려하여 무함마드 족보에서 각 세대는 20년 이라고 가정하자. 무함마드가 2,670년 전에 아브라함과 이스마엘로부터 분리되었다면 그들 사이에 133세대가 약간 넘어야 한다. 계산을 하여 2,670년을 20년으로 나누면 결과는 133세대와 반 세대로 무함마드의 조상들에 대한 족보를 조작한 Ibn Ishak과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였듯이 35 또는 40세대가 아니다. 우리는 무함마드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그들이 얼마나 준비가 덜 되었고 현명하지 못하였는지 알 수 있다.

수세기를 걸쳐 성경에 기록된 책에 의하여 문서화된 예수의 족보를 제외하고 역사에서 다른 어느 가문도 2,000년 이상동안 그들의 조상들을 설명한 적이 없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살펴보자. 우리가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이 알려졌고 한 세대를 20년이 아닌 25년으로 만든다고 가정하면 21대 조상은 무함마드로부터 525년 소급될 것이다. 이것은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이 A.D. 50-70년 사이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와 이스마엘 사이에 약 2,000년의 기간을 만든다.

예수의 족보를 제외하고 역사의 어느 가문도 2,000년의 기간 이상 그들의 조상들을 입증하지 못하였다. 유다의 왕족의 후손인 요셉의 가문도, 같은 부족의 후손인 성모 마리아의 가문도 그들의 조상들을 아브라함까지 설명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각 세대에 성경의 책들에 기록된 것이 있었고 그 사실들은 거듭해서 입증되었다. 그 책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이어서 메시아의 족보에 관한 거의 모든 구성원들을 확증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만들었던 약속에 대한 증거를 준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은 모세에 의해서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기록되었듯이 메시야의 족보에서 이삭과 그의 아들 야곱 그리고 그의 아들 유다와 같은 다른 사람들에게 수행되었다.

그 족보는 성경의 많은 다른 책에 계속해서 기록되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이 메시아 계보의 계속성을 다윗왕의 조상들 가운데 한명인 보아스를 통하여 룻기에서 확증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세주로서 거룩한 아기의 탄생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그리고 이어서 B.C. 586년경에 바벨론의 포로기에 유다를 통치하였던 마지막 왕에 이를 때까지 많은 다른 왕들에게 확증되었다. 하나님 약속의 확증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계속되었다. 사실상 하나님은 다윗왕의 계보에서 또 다른 통치자인 스룹바벨에게 자신의 약속을 갱신하였는데 스룹바벨은 B.C. 538년경에 유다의 통치자가 되었다.

스룹바벨이 총독이 된 이후 많은 선지자들이 인간의 육신을 입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예언하였다. 계속된 예언들이 말라기 선지자에 이르기 까지 계속되었고 말라기는 B.C. 436년경에 구약의 마지막 책을 썼다. 말라기의 세 번째 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말라기와 모든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구약의 하나님은 그분께서 오심의 표시로 그분을 위하여 길을 준비할 사자를 보낼 것을 말씀하시면서 오실 것을 약속한 그 분이었다. 이 사자는 세례 요한이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던 같은 세대에서 그를 부르셨고 그는 요한복음 1:26,27에서 예수에 관하여 증언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나중에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그가 메시아냐고 물었을 때 마태복음 3:2에서 그는 자신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사야 40:3의 예언을 성취하여 주님이 오시기 전에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온 자였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지목하였다.

예수의 메시야 족보에 관한 기록과 역사적 증언들의 완벽한 연속성이 있다.

메시야 족보는 말라기와 예수의 시대 사이에 연속되어 잘 나타나 있다. 사실상 유다의 통치자들은 B.C. 2세기 동안 마카비 왕조시대에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계속하였다. 이것은 마리아와 요셉에 이르기 까지 구전으로 감추어졌던 기간은 120-140년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문들이 140년 먼저 살았던 그들의 증조할아버지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짧은 기간이었다.

신약에서 뿐만 아니라 유대-로마 역사가인 요셉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의 저작물과 같은 역사적인 문학작품에서도 그에 관한 증언이 있는 세례 요한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예수의 메시야 족보에 관한 기록들과 역사적 증언들의 완벽한 연속성을 볼 수 있다.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는 이슬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무함마드와 이스마엘 사이의 기록의 부재

반면에 가장 문제가 되는 조상이 무함마드로부터 21대 선조이고 그는 A.D. 1세기에 예멘에 살았던 무함마드의 가문으로 올 때 어떻게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을 그보다 2,000년 전에 시나이에 살았던 이스마엘과 연결할 수 있는가? 무함마드 이전에 기록된 어떠한 아랍의 문서들도 그러한 주장에 대한 암시조차도 없다.

이슬람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메카의 시를 건설하였다고 주장하지만 메카는 A.D. 4세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21대 조상과 이스마엘의 시대 사이의 2,000년동안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이 이스마엘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기록문서는 없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의 시대와 무함마드 자신의 시대 사이에 기록된 신빙성 있는 문서도 없다.

만약 이것이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라는 증거에 충분하지 않다면 우리는 많은 다른 부족들에 속하였던 아라비아의 수백의 통치자들에 관하여 말하여주는 수천의 비문들과 연대기들과 고고학적 기록들에 관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비문 또는 기록도 무함마드의 조상들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무함마드의 집안이 예멘의 다른 어떤 가문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가문이라는 것, 그리고 비록 이슬람 전통이 무함마드의 가문이 메카에서 통치하였다고 주장할지라도 무함마드의 가문은 서부 아라비아의 어떠한 도시에서도 통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지 확증할 수 있다.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이 이스마엘의 후손이 되는 것의 불가능성

무함마드는 평범한 예멘의 가문출신인데 그의 21대 조상이 어떻게 아브라함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에 관한 정보를 가질 수 있을까? 비록 인쇄술이 15세기에 발명되고 그때 이후로 이전 세기들 보다 파일보관과 기록이 더 잘 조직화되고 쉬워졌지만 우리 세대의 어느 가문들도 1,000년 전에 살았던 그들의 조상들의 이름을 모른다. 그렇다면 A.D. 1세기경에 살았던 무함마드의 21대 조상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 보다 2,000년 전에 살았던 한 조상에 관하여 무언가를 알 수 있었을까?

B.C. 9세기와 7세기 사이의 앗수르인들의 기록에서 우리는 이스마엘 부족이 시나이와 비옥한 초생달 지대에서 유목민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 가운데 어느 것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떠한 비문도 그들이 누군가를 그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계보가 이스마엘과 닿았다는 것을 그들이 몰랐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그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였을 것이고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이 쓴 모든 고대의 책에서 이삭을 그들의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의 일부로 기록한 것과 같이 그들 이후 각 세대에서 이스마엘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부름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그의 유일한 역사적 후손들은 그의 아들들로 유래된 12부족들이 있었다. 이어지는 세대들에서 비록 이스마엘과 이러한 부족들 사이의 기간이 단지 약 1,200년(B.C. 9세기와 7세기 사이)이었을지라도 그의 아들들의 후손은 그의 이름을 포함하여 그에 관하여 잊어버렸다. 이것이 이스마엘의 진정한 후손들에 대한 경우인데 어떻게 이스마엘이 살았던 곳과 거리가 먼 예멘에 살았던 사람이 자신보다 2,000년 전에 살았던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스마엘족 자신들이 그들의 조상이 이스마엘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면 누가 무함마드의 21대 조상에게 그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말해주었는가?

무함마드의 17대 또는 21대 조상이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는 증거가 없다. 무함마드 이전에 그러한 주장을 하는 기록된 문서가 없다. 그러한 문서가 존재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이 조상은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는 각 세대에 기록된 문서 없이는 자신 보다 2,000년 전에 살았던 한 사람으로부터 후손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는 이슬람의 주장은 내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살았던 줄리어스 시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진리에서 더 멀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의 21대 조상이 줄리어스 시저의 후손이라고 주장할 지라도 나의 주장을 확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한 주장은 우리 세대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오늘날 어느 누구도 로마 자체에서도 줄리어스 시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고 1,000년 전에 살았던 어느 이탈리아인도 감히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어떠한 기록된 증거가 없는 1,000년도 그 주장을 조롱거리로 만든다는 것이 이해된다.

예언자임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성경 인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은 무함마드 당시에 아라비아에서 통상적인 관습이었다.

누군가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그러한 주장은 정직과 논리를 위반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특히 무함마드 당시에 아라비아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어서 고의적으로 자신들이 성경 인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종 역사적으로 알려진 인물들 또는 성경에 언급된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무함마드의 외사촌인 Umayya bin abi al-Salt는 예언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솔로몬을 방문하였던 시바의 여왕이 자신의 고모라고 말하였다.[13][xiii] 그는 자신이 그녀의 남자형제의 후손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이것을 말하였다. 또한 Tubb'a(A.D. 410-435년에 통치하였고 메카를 점령한 예멘의 지도자)도 예언자라고 주장하였고 시바의 여왕이 자신의 아주머니라고 주장하였다.[14][xiv]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Umayya bin Abi al-Salt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사람들 위에 예언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순진하고 무지하여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을 하였다.

비록 아라비아의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 보다 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담대함을 가졌지만 무함마드는 역사적인 어떤 기록도 없이 자신보다 2,700년 전에 살았던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의 마음은 논리와 역사에 반하는 주장에 대한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계속해서 믿는 우리의 무슬림 친구들에로 간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추종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 천국에 올라갔고 아브라함을 만났고 자신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카피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무함마드가 어떻게 이스마엘이 자신의 선조라고 주장하는지 보았다. 그는 자신과 이스마엘 사이의 기간이 2,700년이고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록된 것이 어느 시기에도 없음에도 이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비역사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보다 더 관련된 것이 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육신적으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카피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아브라함에 연결시켰는데 왜냐하면 그가 많은 성경의 인물들을 만났고 그 가운데 아브라함도 있었다는 천국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그 당시 영지주의와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많은 종교들과 종파들에 의하여 수용된 사상을 모방하여 천국이 7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 문서는 인간이 하늘 7층의 각층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한다. 무함마드가 똑같이 주장하였다. 무함마드는 아브라함을 하늘의 7층에[15][xv] 두었는데 거기서 아브라함은 더 많은 일을 하는 성도들을 다스렸고 낮은 층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종교의식을 수행하였다.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설득시키기 위하여 무함마드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카피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이 무함마드에게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었을 때 그는 아브라함이 무함마드 자신의 카피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당신의 친구처럼 그와 비슷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고 당신의 친구가 그와 같은 어느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16][xvi] (“친구”는 무함마드 자신을 의미한다.)

무함마드에 관한 하디스의 권위 있는 책 Al-Bukhari는 무함마드가 “나는 아브라함과 가장 닮은 아들이다”라고 말했다고 인용한다.[17][xvii] 무함마드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설득하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카피라고 주장하였다. 이삭은 비록 그가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는 아브라함의 이복자매였지만 감히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았다. 야곱도 또는 아브라함의 시대에 가까이 살았던 아브라함의 어떤 후손들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카피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아브라함보다 2,700년 이후에 살았던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종교연구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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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i] Halabieh, I, page 93 ; comments on Ibn Hisham, page m

[2][ii] Halabieh I, page 36

[3][iii] Masudi, Muruj al-Thahab, Beirut-Lebanon, 1991, II, pages 280-282

[4][iv] Halabieh, I, page 35, 36

[5][v] Tarikh al-Tabari, I , page 127

[6][vi] Tarikh al-Tabari, I, page 127

[7][vii] Tarikh al-Tabari, I, page 127

[8][viii] Diwan Ummiah bin Abi al-Salt, ( Beirut-1938), page 58

[9][ix] Tarikh al-Tabari, I, page 128

[10][x] Tarikh al-Tabari, I, page 128

[11][xi] Tarikh al-Tabari, I, page 516

[12][xii] K.A. Kitchen, Documentation For Ancient Arabia, Part I, pages 90-222

[13][xiii] Diwan Ummiah, page 26

[14][xiv] Tarikh al-Tabari, I, page 429

[15][xv] Sahih al-Bukhari, I, page 92

[16][xvi] Ibn Hisham, 2, page 32; Halabieh, 2, page 91

[17][xvii] Sahih al-Bukhari, 4, page 125

원문출처 http://religionresearchinstitute.org/

 

 

148p에서 1988년 노벨문학상을 받는 이집트 작가 '나기부 마푸즈' 한 명을 이슬람권에서 나온 대단한 인물로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중세기 방식의 퇴보적 영향으로 이슬람권 출신 노벨 수상자는 이슬람 인구에 대비하여 아주 극소수이다. 다음 자료를 보자.

 

이슬람과 무슬림들의 후진성

 

이슬람은 모두에게 저주이지만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주요 피해자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제목의 2005년 기사에서 파키스탄인 저자 Farrukh Saleem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저술하였다:

57개 무슬림 국가들의 연간 GDP 총계가 2조 달러 이하이다. 미국은 혼자서 10.4조 달러의 재화를 생산하며 중국은 5.7조 달러, 일본은 3.5조 달러 그리고 독일은 2.1조 달러를 생산한다. 인도의 GDP도 3조 달러 이상으로 평가된다.(구매력 평가 기준).

원유 자원이 풍부한 국가인 사우디 아라비아, U.A.E, 쿠웨이트와 카타르는 모두 합하여 4천3백억 달러 가치의 재화(대부분 원유)를 생산하지만 네덜란드 혼자서 더 많은 연간 GDP를 가지고 있으며 불교국가 태국도 4천2백9십억 달러 가치의 재화를 생산한다.

무슬림들은 세계인구의 22%이지만 전 세계 GDP의 5% 이하를 생산한다. 더 염려되는 것은 무슬림 국가들 GDP의 전 세계 GDP에 대한 비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아랍 국가들은 특히 악화되고 있다. UN의 아랍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아랍 여성의 절반이 글을 읽을 줄을 모르며 5명 가운데 1명의 아랍인들이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며 아랍 인구 가운데 단지 1%만이 개인 컴퓨터를 가지고 있으며 그 1%의 절반만이 인터넷을 사용하며 아랍 노동력의 15%가 실업 상태이고 이 숫자는 2010년까지 2배가 될 것이다. 아랍 세계에서 지난 20년 동안 개인당 소득의 평균증가율은 매년 0.5%였으며 아프리카의 사하라 남쪽을 제외하고 어느 곳보다도 안 좋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은 에티오피아, 시에라리온, 아프가니스탄, 캄보디아, 소말리아, 나이지리아, 파키스탄과 모잠비크이다. 적어도 가난한 나라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6개 국가가 무슬림이 대다수인 국가들이다.

결론: 세계의 무슬림들은 가난한 나라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나라들에서 살고 있다.

무슬림들이 대다수인 57개 국가들은 각 나라 당 평균 10개의 종합대학교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합하여 14억 인구에 600개 이하의 종합대학교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인도는 8,407개 종합대학교를 가지고 있고 미국은 5,758개의 종합대학교를 가지고 있다. 14억의 무슬림들 가운데서 Abdus Salam과 Ahmed Zewail가 물리학과 화학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두 명의 무슬림들이다(Salam은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그의 과학적 업적을 수행하였으며 Zewail은 켈리포니아 공대에서 수학하였다). Salam 박사는 자신의 조국에서도 무슬림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과거 105년 동안 14억 무슬림들은 8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한 반면에 단지 1400만 유대인들은 167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였다. 14억 무슬림들 가운데 30만 명이 못되는 사람들이 과학자로 분류되며 이것은 무슬림 백만 명당 230명의 과학자가 있는 비율이다. 미국은 110만 명의 과학자들(백만 명당 4,099명)이 있고 일본은 70만 명의의 과학자들(백만 명당 5,095명)이 있다.

사실: 14억 무슬림들 가운데서 8억 명은 문맹이다(10명의 무슬림들 가운데 6명이 읽을 줄을 모른다). 기독교 세계에서 성인들의 문자 해독율은 78%이다.

예를 들어 무슬림들은 세계인구의 22%를 구성하면서 노벨상 수상자들의 1%를 배출한 것을 생각해보라. 유대인들은 세계인구의 0.23%를 구성하는데 노벨상 수상자들의 22%를 배출하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무슬림들은 가난하고 문맹이며 약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올바른 진단에 이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데 그 대책은 그 진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진단은 단순하다. 이슬람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슬람이다. 한 나라가 더 이슬람화 될수록 그 나라는 더 후진국이 된다. 파키스탄의 핵물리학자인 Pervez Hoodbhoy 교수는 이스라엘이 57개 무슬림 국가들을 다 합한 것 보다 거의 2배 더 많은 과학자들을 가지고 있다고 저술하였다. 전 세계인구의 거의 1/5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은 전 세계 과학자들의 1% 이하를 배출하였다.[1]

뉴욕타임즈에 실린 기사에서 보스턴의 Brigham and Women's Hospital의 무슬림 의사인 Tariq Ahmad는 독창적인 생각을 가졌다.[2] “나는 절대로 이슬람 또는 무슬림들에 관한 주제의 전문가는 아니다”라는 전제하에 그는 “급진적인 이슬람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서 그 해답은 가장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 생각한다. 과격주의 외침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이슬람 내부의 세속적 힘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다른 말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이슬람을 덜 알고 이슬람을 덜 실행하는 사람들의 손에 있다는 말이다. Ahmad 박사가 의술을 가장 잘 시술하는 사람은 의과대학 과정에서 탈락한 사람이라 것을 또한 믿는가?

Ahmad가 혼자가 아니다. 그의 생각이 지배적인 생각이다. 1400년 동안 “이슬람을 적게 실천한 무슬림들”은 증오에 가득 찬 이슬람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일단 그들이 꾸란의 권위를 받아들이면 그들은 모든 권력을 진정한 무슬림들-극단주의자들-에게 주어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증오에 가득 찬 이슬람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이슬람을 더 잘 아는 사람들은 폭력이 이슬람을 구성한다는 것을 안다. 코메이니는 이슬람을 잘 알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하였다. “이슬람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슬람이 전쟁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이다. 이슬람은 말한다: 불신자들이 당신들을 살해하였듯이 모든 불신자들을 살해하라!.....이슬람은 말한다: 그들을 살해하라, 그들을 칼로 죽이라. 사람들은 칼이 아니고서는 순종하지 않는다.”[3]

코메이니의 관점은 이슬람 경전에 근거하고 모든 무슬림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한다. “덜 무슬림”인 사람들이 좋은 무슬림이 되기로 결심할 때 그들은 지하드 테러리스트가 된다.

숫자는 상관없다. 스스로 “신성한 권위”를 가지는 자는 누구든지 그 마지막 말을 가진다. 이슬람에서 근본주의자들은 항상 이길 것이다. 미지근한 무슬림들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들은 그 문제의 몸통이다. 자신들을 무슬림이라고 여기면서 그들은 꾸란과 그 꾸란을 실천하는 테러리스트들에게 합법성을 준다.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홀로코스트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관여하지 않은 대다수의 침묵 때문에 수백만이 학살되었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범죄자들에게 합법성을 주었다.

이슬람이 좋은 것이라면 왜 그것이 최소한으로 실천되는가? 이슬람이 나쁜 것이라면 왜 그것이 어째든 실천되는가? 아주 작은 양일지라도 들어온 독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는데 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1] Islam and Science, Religious Orthodoxy and the Battle for Rationality. 1991.

[2] http://www.nytimes.com/2009/12/5/opinion/05iht-edahmed.html?_r=2

[3] Khomeini: Islam Is Not a Religion of Pacifists (1942)


원본출처: Ali Sina, Understanding Muhammad, 273-275p, Faithfreedom Publishing.

 

 

158p에서 저자는 "그(무함마드)가 종교적 명상에 잠기곤 했는데, 마침내 610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유일신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무함마드에게 계시는 준 존재는 천사 가브리엘이 아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다음과 같다.

 

 

무함마드는 어떤 영의 계시를 받았을까?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어떤 영의 계시를 받았느냐고 무슬림들에게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가브리엘(Gabriel) 천사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역사적으로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는 주후 595년 그의 나이 25세 때 여러 차례 결혼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던 40세의 부유한 과부 카디자(Khadija)와 결혼을 했다. 결혼 생활을 한 지 15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종교적인 열심히 있어 히라(Hira)동굴에 가서 명상을 하다가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런 경험을 하게 된다.

이슬람에서 꾸란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는 제 2의 경전인 부카리의 하디스(Hadith)에 의하면 무함마드에게 어느 날 한 천사가 나타나 자신의 목을 조르고 찍어 누르며 괴롭히다가 읽으라고 명하여 “자신은 글을 모른다”고 했더니 다시 찍어 누르면서 너무 고통스러워 신음하는데 버둥거리고 있는데 또 읽으라고 해서 “글을 모른다”고 했더니 또 괴롭히고 이런 경험을 3번 하고 나서 천사가 “응혈(엉긴 피: clot)로 인간을 창조하신 네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하면서 꾸란 96장 1-3절까지를 계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함마드는 그 사건이 너무 두려워서 집으로 달려가서 아내 카디자에게 “나를 덮어 주오. 내게 악한 일이 생길 것 같소. 너무 두렵소.”라고 하자 그녀는 그를 덮어주고 안심을 시키고는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를 물었단다. 그가 동굴 속의 경험을 말하면서 꼭 무슨 악한 일이 생길 것 같다고 두려워할 때 그의 아내 카디자(Khadija)는 “당신은 착한 사람이니까 알라(Allah)께서 절대로 당신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기독교인이었던 자신의 사촌 와라까(Waraqa Ibn Naufal)에게 무함마드와 함께 찾아가서 상담을 청했다. 그 때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와라까는 “조카가 본 것은 무싸(Musa:모세를 말함)에게 계시를 전했던 그 비밀을 간직한 분이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계시를 내렸던 그 천사가 누군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이것이 무슨 현상인지 그것이 누구인지를 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꾸란에 보면 그가 메카에서 받았다고 하는 12년 동안의 계시에는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계시를 전하는 그 천사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나중에 기독교와 유대교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계시를 내릴 때는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의 천사를 통해서 내린다는 사실을 듣고 메디나에서 계시를 받을 때 두 번 지브이일(Gibriil)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꾸란 2장 98절, 66장 4절)

그러나 성경의 가브리엘 천사는 매우 인격적인 천사로 언제나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하나님의 계시를 전한다. 그러나 무함마드에게 나타난 천사는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또한 성령의 계시는 사람을 죽일 듯이 고문하고 괴롭히면서 임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다. 그러나 무함마드에게 임한 영은 그의 목을 조르면서 너무 고통스럽게 했기에 그는 자살을 하고 싶을 정도로 두려워서 절벽에서 뛰어 내리려고 했지만 천사가 말려서 포기했다는 것이다.(P.J.스튜어트, 『펼쳐보는 이슬람』, 김백리 역(서울:풀빛, 2004) p67) 그러므로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렸던 천사는 성경에 나오는 가브리엘과는 전혀 다른 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슬람의 하디스 중에는 무함마드가 악마의 계시를 받았다는 글들이 있다. 이는 그 유명한 악마의 시(Satanic verses)의 구절이다. 9세기 말에서 10세기에 걸쳐 활약했던 이란의 타바리스탄(지금의 아몰:Amol) 출신의 유명한 이슬람 신학자 타바리(Tabari)는 그가 수집한 하디스(Hadith) 6권 107쪽에서 무함마드가 악마의 계시를 받았다고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핍박을 받지 않고 평안하게 살도록 해주기 위해서 우상 숭배자들과 타협을 했다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그 당시 알라(Allah)의 딸들이라고 불리는 세 여신들(Al-Lat, Uzza, Manat)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이들은 높이 나는 학과 같아서 알라께서는 그들의 중재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했다.(P.J.스튜어트, 『펼쳐보는 이슬람』, 김백리 역(서울:풀빛, 2004) p83) 이 계시가 내리자 메카의 우상 숭배자들은 만족해하면서 무슬림이 되었으며 무함마드와 함께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핍박을 피해 아비씨니아(에디오피아)에 피난 갔던 무슬림들은 이제는 더 이상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뻐하면서 살림을 정리해서 메카로 돌아오고 있는데 무함마드가 그 계시를 취소하는 계시를 다시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 새로운 계시의 내용은 “이 세 여신(라트 웃짜, 마나트)은 알라의 딸들이 아니며 알라께서는 이들에게 아무런 권위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타바리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이전 계시를 취소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나타나서 “너는 왜 내가 네게 주지 않은 계시를 전했느냐? 그것은 네 혀에 악마가 넣어준 계시니라. 그러나 자비로운 알라께서 너를 용서하시느니라.”하면서 아래와 같은 새로운 계시를 내렸다고 한다.

라트와 웃자와 세 번째 마나트에 대한 말씀이라. 너희들에게는 아들들이 있으며 그분에게는 딸이 있다는 것이냐? 그것은 부당한 분배니라. 그것들은 너희와 너희 조상들이 그렇게 불러왔을 뿐이니라.(꾸란 53장 19-23절)

이 계시로 인하여 한동안 화해 무드로 부드러워졌던 무함마드를 따르는 무슬림들과 메카 주민들과의 관계는 악화 되었고 핍박은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 핍박을 견디지 못해서 무함마드는 622년 드디어 메카를 버리고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슬람의 학자들에 의해서 무함마드가 악마의 계시를 받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악마의 계시가 정상적인 계시로 오해되었던 기간이 얼마나 길었을까? 이슬람의 역사적 자료를 아무리 뒤져 보아도 그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소문이 거의 1000 Km 정도 떨어진 이디오피아 수도까지 전달되어서 그들이 가산을 정리하고 돌아오다가 메카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 그 계시를 취소하고 새로운 계시가 내렸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갔다면 그 기간은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악마의 영에 의해서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과연 그가 악마의 영의 계시를 받은 것이 이 사건과 관련된 한 번뿐이었을까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계시를 전달한 영이 어떤 영이었는지를 몰랐다는 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영이 성령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이다.(고린도 전서 12장 3절: 꾸란5장17절)

그리고 이슬람의 영은 무함마드에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다고 계시를 했다는 것이다.(꾸란4장157절) 이 부분이야말로 그 영이 성령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열어주신 문은 십자가뿐이기 때문이다.(갈라디아3장1절) 십자가를 부인하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한다.(꾸란4장158절) 예수께서는 죽지 않고 그대로 승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슬람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도 인정하고(꾸란19장20절) 또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꾸란3장49절) 문둥병을 치료하였으며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꾸란5장110절)까지 인정하면서 왜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하는 것인가?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 구원의 길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사단의 전략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기적을 행하신 것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버리면 다른 것을 다 인정한다고 해도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며(요한복음1장29절)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종교가 되고 만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많은 요소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또한 이슬람의 영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며(꾸란5장73절)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한다. 알라(Allah)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것이다.(꾸란18장4절)

아무리 이슬람 쪽에서 알라(Allah)와 하나님은 같은 신이라고 주장을 해도 이런 핵심적인 부분들이 다르다면 같은 영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속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슬람 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이슬람은 기독교와 모두 같은데 “예수님을 신으로 받드는 것만 부인한다”고 한다. 즉 99%가 같고 1%만 다르다는 것이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기독교와 많은 점이 똑같다고 주장을 하더라도 가장 핵심적인 1%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와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성령과는 전혀 다른 영일 것이다.

유명한 이슬람 학자 타바리(Tabari)뿐만 아니라 무함마드의 전기를 쓴 초기 이슬람 신학자들 이븐 이삭(Ibn Ishaq) 및 와키디(Wakidi) 그리고 이븐 싸앋(Ibn Sa'd)도 무함마드가 한 때 악마의 계시를 받았다고 그들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Kitab al Tabaqat al Kabir", Volume 1, parts 1 and 2, pages 236 - 239, translated by S. Moinul Haq, published by the Pakistan Historical Society)

꾸란과 하디스 및 여러 가지 증거로 볼 때 그 때 한 번뿐이 아니라 항상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료출처: http://koreairanianchurch.net/bbs/board.php?bo_table=column_1&wr_id=2322&page=4

 

 

 

172p에서 저자는 "이슬람이 표방하고 있는 정치제도는 상당히 민주적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상과 아주 다른 말이다. 다음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슬람은 어떻게 독재와 폭정으로 이르는가

 

글쓴이 Rafi Aziz

 

독재정권이 나타나는 이유와 방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이슬람이 폭정을 촉진하고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슬람은 그것의 월력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대로 지금도 15세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문화적으로 지성적으로 나머지 세계보다 훨씬 뒤 처져있다. 이것이 이슬람의 영향이 존재하는 곳마다 이슬람이 폭정에 이르는 이유인데 전통이 보다 전근대적일수록 독재가 더 친숙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한 증명은 수억의 무슬림들이 칼리프 통치를 원하는데 칼리프는 자기에게 저항하는 자들을 정죄할 능력을 가진 독재자이고 그것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다.

이슬람은 항상 속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슬람은 서방세계 지성적인 전통에 의하여 거의 독점적으로 개발된 개념인 해방과 자유와 진보에 관한 기만적인 설명으로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 아래 샤리아 법을 그리고 운이 따른다면 칼리프 통치를 적용하려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이슬람이 보다 확장될수록 불안정한 상황이 더 많다. 이슬람이 이렇게 만드는데 이슬람은 심화된 정죄하는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끊임없이 당신을 정죄하면서 당신이 “충분히 이슬람적인”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서 경찰에게 돌아선다. 당신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당신의 적들이 언제 부당한 “도덕적인 죄” 혐의를 사용할지 모르며 그 형벌은 참혹하다. 이것이 10억 피해자들의 삶을 망가뜨린 이슬람의 폭정이다.

마호멧교는 벌건 대낮에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여자를 돌로 쳐 죽이고 마치 그들이 사악하고 악한 짓을 전혀 하지 않은 것처럼 집으로 가는 사회들을. 당신이 단지 생각한 것 때문에 당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고 당신의 마음이 당신의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공공의 소유물인 병든 사회를 만들어 내었다. 당신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조종되고 지배되며 끊임없이 정죄된다. 이슬람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검열이 급격히 증가한다. 사실 이란과 같은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웹사이트들에 접속을 막았으며 “국내용” 인터넷을 만드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슬람에 좋은 것이 있는가? 가이드가 독재와 폭정으로 인도하는데 삶에 대한 총체적인 가이드가 무슨 좋은 점이 있는가? 공산주의와 나치도 삶에 대한 가이드였다. 삶에 대한 가이드가 되는 것은 성취가 아니다. 우리가 21세기에 이슬람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우리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중지할 때이다. 이슬람이 그것의 못생긴 머리를 보이는 곳마다 환경이 진부하고 불행하고 비참하다. 지난 10년은 이슬람이 독재와 폭정으로 인도하는 자승자박이라는 것을 의심의 그늘을 벗어버리고 증명하였다.

 

원문출처 http://www.faithfreedom.org/articles/political-islam/how-islam-leads-to-dictatorship-and-tyra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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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사회들의 참상

 

글쓴이 Ibn Kammuna (Tuesday, 03 July 2012 06:20)

내가 중동에 살고 있을 때 거기에 살고 있는 친구인 미국인 여성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 아랍인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서방세계 사람들인 당신들이 생각하는 방식과의 주요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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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질문이 모호하고 막연하였지만 그것은 그대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랍문화와 정신세계, 서방세계문화와 정신세계에 관하여 그녀의 마음에 무엇이 가장 인상적인지 알기를 원하였다.

그녀가 배운 여성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녀는 나의 질문에 기나긴 대답을 하였고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아랍문화는 비밀의 문화이다. 서방세계 사람들도 그들의 비밀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것들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한다. 아랍문화는 진실과 개방성이 없는 수치심의 문화이다. 서방세계 문화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문화”가 아닌 “사람들을 돕는 문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직함과 공개된 기록의 문화이다. 아랍문화는 어떠한 생각 없이 개인에게 일들을 “강요하는” 문화이다. 서방세계 문화는 선택의 문화이고 사물들에 대한 비판을 반영하는 문화이다.

그녀는 내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는 많은 다른 것을 말하였다. 그 당시에 나는 서방세계에 가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가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말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들이 나의 기억 속에 박혀있는 요점들이다.

내가 서방세계로 와서 여러 해를 산 다음 그녀가 자신의 대답에서 요점을 말하였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중동에서 나의 뇌는 책과 종교적 명령과 꾸란의 구절과 문화적 격언과 신문과 다른 미디어 수단을 통하여 “유대인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유대인 증오”가르침으로 가득 찬 마음은 유대인에 관한 어떠한 관점을 한 가지 마음으로 몰아가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이 놀라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해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인 유대인들을 올바로 아는 데는 내가 서방세계에서 살고 있는 동안 많은 세월이 걸렸다. 정기적인 자원 활동과 자선행위에 참여하며 공공의 유익을 위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많은 유대인들을 만났는데 아랍문화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특색이다.

서방세계에서 유대인들과 개인적인 만남은 내가 중동에서 자라는 동안 세뇌되고 내가 믿은 어떤 아랍의 문화적 “진실들”에 의문을 품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면 나는 1967년 전쟁은 아랍 국가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도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랍의 문화적 진실로 믿었었다. 나는 이 문제를 믿을만한 출판물들과 중립적 기록물들을 자료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나의 결론은 내안에 소위 Thomas Kuhn이 말하는 “사고의 변화”를 일으켰다. 1967전쟁의 주요 도발자는 아랍 국가들이었다. 이 전쟁 발발의 원흉은 이집트 대통령 자말 압둘 나세르였다. 물론 다른 아랍 지도자들은 그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전 아랍세계는 그들이 자랑스럽게 도발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아주 작은 나라의 손에 괴멸되는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아랍 미디어나 정치를 신용하지 않는다. 나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하여 나 자신의 독립적인 연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글에서 다루어져야할 핵심 문제인 아랍과 이슬람 국가들의 절망적인 실상으로 돌아가자. 이슬람 국가들의 절망적인 참상은 삶의 사실들을 무시하고, 그것들을 피하며, 나타내지 않는 것 때문에 초래되었다. 그리고 무슬림들이 그들의 삶의 완벽한 법전으로 받아들인 이슬람이 이슬람 국가들의 이러한 참상을 만들어내는 데 책임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슬람은 개인들과 국민들의 생각을 마비시킨다. 이슬람은 진실을 찾는 것을 방해한다. 무슬림 사회에 대한 이슬람의 맹목적인 마법은 그들이 진실에 냉담하게 만들고 그들을 무지 속에 있게 만든다. 설명해보겠다.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진실을 찾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요구한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실을 중립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조사하도록 도와주며 필요할 때마다 그것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교정한다. 이 사실은 과학의 발전에 잘 나타나있다. 인간역사의 대부분에서 지구는 평평하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그러나 이어서 과학적 조사는 지구의 형태에 관한 다른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었는데 그것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오래된 진실인 당시의 의견과 다른 것으로 지구가 연속된 둥근 형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수정하였다.

우리는 “시간”의 개념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믿었다. 어떤 현상이 그러한 “진실”에 도전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비판적인 태도로 생각하였고 우리의 시간에 관한 관점을 “상대적인”것으로 바꾸게 이르렀다. 비판적인 사고는 그러므로 진실을 찾는데 필수적이며 그것은 과학적 진보와 발전을 만들어낸다.

이슬람은 인간 사고에 있어서 적어도 어떤 문제들에 있어서 이 비판적인 요소를 파괴한다. 이슬람이 비판적 사고를 허용할지도 모르지만 종교와 무엇이든지 종교와 관련된 문제들에서는 비판적인 사고는 출입금지이다. 서방세계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도덕성을 문제로 삼을 수 있다. 누군가가 교황의 의도를 문제로 삼을 수 있다. 누군가가 어떤 규범에 도전할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아니다. 무슬림 국가에서 당신이 무함마드가 예언자라는 것 또는 꾸란의 진실성에 문제를 제기하면 당신은 죽은 고기가 될 것이다. 전 무슬림 마크 가브리엘은 알-아즈하르 대학교수였다. 그는 이슬람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였고 이슬람의 근본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꾸란 믿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멸시되었고 알-아즈하르 대학교의 자신의 동료들과 자기 가족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았다. 서안지구의 한 대학교 교수가 어떤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여 무함마드의 존재를 문제 삼았다. 그의 학생들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하였을까? 그들은 그를 2층 창문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이단이라는 알리 시나의 주장에 저항한다. 그러나 현장의 사실들은 그의 주장이 날이 갈수록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단에 소속된 자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비열한 범죄자로 밝혀지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주 같은 방식으로 무슬림들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비열한 범죄자, 노상강도, 집단살인자, 노예로 만드는 사람, 어린이에 대한 이상 성욕자, 일부다처주의자, 강간범이라는 분명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무시하며 무함마드에게 신성을 주며 오늘날에는 무함마드를 모방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무슬림들이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서 누군가가 꾸란을 태웠다고 들으면 대 혼란이 일어난다. 이단의 정신세계가 작동하고 무슬림들은 광포해진다. 비록 그 주장하는 꾸란 소각이 세상의 아주 먼 구석에서 일어났어도 무슬림들은 세계의 모든 곳에서 기독교 수녀들과 선교사들을 살해한다. 무슬림들은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유대 성전들과 토라를 태우거나 아흐마디 교단(Ahmadiyya;19세기 말 인도에서 생긴 이슬람 교단) 모스크들을 파괴한다.

이슬람은 그것이 출현한 시대 때문에 큰 성공을 이룬 이단이다. 6세기에 아라비아는 통치하는 정부가 없었고 부족단위의 군대가 그 시기를 통치하였다. 무함마드는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그는 이슬람이라는 “부족”시스템을 찾아냈고 시작하였다. 이 시스템에서는 합류하기는 쉽지만 산채로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날 까지 배교에 대한 처벌은 죽음이다. 그 들어가는 것은 오픈되어 있고 떠나는 것은 막혀 있는 부족 시스템에서 무함마드는 다른 부족으로부터 모든 범법자들과 배신자들을 끌어들이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약탈물에 대한 탐욕과 강간을 위한 여성 포로들로 그들을 유혹하였고 그것이 먹혀들었다. 약탈물과 여성들에 대한 탐욕으로 무함마드는 들어가는 것은 열려있고 떠나는 것은 막혀있는 성공적인 부족 시스템을 수립하였다. “나는 테러로 승리하게 되었다”그리고 “나는 알라가 나를 위하여 약탈물을 허락한 유일한 예언자이다”와 같은 표현들을 그는 거만하게 말하였다.

이슬람의 근본에 대한 이러한 전형적인 예가 얼마나 끔찍하고 비열하든지간에 이것은 이슬람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문서들에서 모두 분명하지만 21세기의 무슬림들은 그것들이 세계가 모든 시대에 걸쳐서 모방하여야할 거룩한 진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슬림 문화가 비판적 사고와 자기반성의 발달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떠난다면 그들은 살해당한다.” 무슬림들은 이 이슬람의 가르침을 생각해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 남성은 다른 종교(유대교와 기독교)의 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된다. 무슬림 여성은 비-무슬림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왜 그렇게 가르쳤는지 질문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은 와인 한 잔을 마시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좋은 것인데).” 무슬림은 와인을 마시는 것 또는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사실상 당신의 피부를 태양에 적당히 노출하는 것은 좋은 것인데 무슬림 여성의 몸은 가리어져야 한다. 그것은 뼈의 발달에 필수적인 영양소인 신체 내에 비타민D 생성을 돕는다.” 무슬림은 그러한 가르침에 도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 목록은 길다. 무슬림들의 두뇌 사용이 신성한 순나로 여겨지는 이슬람의 가르침이나 무함마드의 행동에 도전한다면 무슬림들이 그들의 두뇌를 비판적인 자세로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미네소타의 한 무슬림 의사는 어떤 형태의 여성할례를 아직도 권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 권위 있는 하디스에서 무함마드가 여성의 성 능력을 파괴하는 그러한 악하고 비도덕적인 짓을 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사고를 발달시키기 위하여 사고의 자유와 배우거나 생각에 떠오르는 모든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자유가 학교에서 가르쳐져야한다. 진정한 교육은 개인들에게 어떠한 것도 신성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과 배우고 습득한 사실을 질문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한 능력이 무슬림 사회의 어린이들에게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만약에 무슬림 사회 안에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고가 어떠한 것이라도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하여 허용된다면 이슬람은 인간의 문명을 초월했던 많은 역사적인 종교들 가운데서 어느 때든지 그것의 바른 목적지를 취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슬람은 그것이 실제로 속했던 아라비아 사막모래 속에 매장될 것이다.

 

원문출처 http://www.islam-watch.org/authors/59-kammuna/1066-the-plight-of-muslim-societie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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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ffa 2014-05-11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람 틀림없이 기독교다. 글구 이슬람 무력으로 포교하지않았음. the complete idiot's world of history - timothy 저자 편 읽어보세요. 그리스도국가 역사학자들의 대체적인 정론인데... 이사람들은 중계무역으로 즉 부로 주변국에 강한 인상을 주지 무력이 필요없었어요. 글구 18세기 즉 근세로 넘어오기전에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여자 인권은 없었죠. 구약성경에서는 여자는 하나님의 아이를 낳아야 하기에 동성애자나 아이를 낳지않는것은 좋지않게 봤지요. 또 여자는 집안일이나 해야하기에 멘델스존 누나가 자기 이름으로 악보를 출판하지도 못했구요. 정말 이런 사람들 때문이라도 이책이 필요한것같다. 이슬람을 좋아할 필요도 없지만 세계의 판도가 어떠한가를 아는것은 필요하다. 좋아할필요는 없지만 왜곡은 맙시다.^^
 
만화 이슬람의 모든 것 - 초등학생이 꼭 알아야 할
임영제 글, 마정원 그림, 이희수 원작 / 주니어김영사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폭력의 종교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로 미화된 잘못된 정보를 주고 있다. 서방세계와 중동의 국제관계 갈등 부분에서는 일부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으나 이슬람의 포교 전략 중의 하나인 타끼야(속임수) 교리에 의하여 이슬람이 진정으로 말하는 것인 이슬람 포교를 위한 비-무슬림들에 대한 폭력의 정당성을 숨기고 평화의 종교로 위장하고 있는 흔적이 책 곳곳(30p, 54p, 55p, 62p, 74p, 75p,80p) 에서 발견되고 있고 신라인 처용이 아랍인이라는 견해(14p), 알라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는 견해(31p)는 받아들일 수 없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래 꾸란 구절의 알라와 같이 폭력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라는 무함마드의 부족인 꾸라이시족의 아라비아의 토착신으로서 달신이었음에도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뿌리가 같다고 주장하고있지만(60p) 그 반증는 모스크 꼭대기의 초생달과 이슬람국가들의 대부분의 국기에 있는 달이며(인터넷으로 "moon god"검색하면 자세히 나옴), 꾸란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열등하며 남편들은 그들을 때릴 권리를 가지며(꾸란 4:34) 여자들이 남편들에게 불순종하면 지옥에 갈 것 이라고 말한다.(꾸란 66:10) 꾸란은 남자들은 여자들에 우선한다고 말한다.(꾸란 2:228) 꾸란은 유산상속에 있어서 여성의 평등권을 부인할 뿐 아니라(꾸란 4:11-12) 여성들을 바보로 여겨서 여성의 증언만으로는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규정한다.(꾸란 2:282) 이것은 강간당한 여성이 남성 목격자가 없으면 그녀의 강간범을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물론 농담이 아니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이 이렇게 기술하고 있음에도 이슬람에서 남녀가 모두 동등하다고 기술하고 있다(41p). 일부다체제도는 무함마드가 자신의 부인들을 과부들로10명이 넘도록 둔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고아와 미망인을 돕기위한 역사적인 이유로 생긴 복지제도라고 합리화하고 있다(111p). 이슬람 은행이 이자를 받지 않는 대신 예금주의 돈으로 투자를 해서 그 수익을 일정비율 예금주에게 지불한다고(114p) 하는데 일반은행이 고객의 예치금을 투자해서 이자로 돌려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이슬람의 지하드를 아래 제시한 이슬람 경전인 꾸란의 명령과는 다르게 많은 부분을 미화하고 있다(167p,169p,171p,173p). 아랍의 독재자들을 미화하고 있다(198~201p).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보면

 

꾸란 (2:191-193) - "그들을 발견한 곳에서 그들을 살해하고 그들이 너희들을 추방한 곳으로부터 그들을 추방하라 박해는 살해보다 더 가혹하니라......만약 그들이 싸움을 단념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풀 것이라 박해가 사라지고 종교가 알라만을 위한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

 

꾸란 (4:74) - “그로 하여금 알라를 위해 싸우도록 하여 내세를 위해 현세의 생명을 바치도록 하라 알라를 위해서 싸우는 자가 살해를 당하건 승리를 거두건 알라는 그에게 커다란 보상을 주실 것이라.”

 

꾸란 (4:89) - “그들이 그랬듯이 너희도 불신자가 되기를 원하며 너희가 그들과 같이 되기를 바라거늘 너희는 그들이 알라의 길로 들어올 때까지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친구로 삼지 말라 그럼에도 그들이 배반한다면 그들을 포획하고 그들을 발견하는 대로 살해할 것이며 그들로부터 친구나 후원자를 찾지 말라.”

 

꾸란 (4:95) - “아무런 장애도 없이 남아있는 믿는 자와 싸움에 출전하여 재산과 생명을 바치며 싸우는 투사들이 같을 수 없거늘 알라는 남아 있는 자들보다 재산과 생명을 바쳐 싸우는 자들에게는 더 큰 은혜를 베푸시며 또한 이 두 부류에게도 알라의 보상이 약속되었노라 알라는 남아 있는 자들보다 싸우는 자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니라.”

 

꾸란 (5:33) - “실로 알라와 선지자에 대항하여 지상에 부정을 퍼트리는 자들은 사형이나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그들의 손발이 서로 다르게 절단되거나 또는 추방을 당할 것이라 이렇듯 그들은 현세에서 치욕을 그리고 내세에서는 무거운 벌을 받을 것이라.”

 

꾸란 (8:12) -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자르고 그들 각자의 손가락을 자르라.” 이 구절을 영적인 투쟁으로 해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꾸란 (9:5) -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들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할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예배를 드리며 이슬람 세를 낼 때는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 주리니...” 이 구절에 따르면 무슬림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이다.

 

꾸란 (9:29) -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선지자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은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낄 것이라.” “성서의 백성”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알라로부터 마지막 “계시들”가운데 하나였고 이 계시는 집요한 군사적 팽창을 추진하여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그 다음 100년 안에 기독교 세계의 3분의 2를 정복하였다. 이슬람은 모든 다른 사람들과 종교를 지배하기를 원한다.

 

꾸란 (9:38-39) - “믿는 자들이여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느뇨 알라를 위해 전쟁에 임하라 하매 너희가 주저하였노라 이는 너희가 내세보다 현세에 만족 하고 있기 때문이라 현세의 삶이 내세에 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노라 너희가 전쟁에 임하지 아니하였다면 너희에게 고통스러운 벌을 주셨을 것이오 너희 대신에 다른 백성을 선택하셨을 것이라...” 이 구절은 싸우기를 거절하는 자들이 지옥으로 가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이다.

 

꾸란 (9:73) - “예언자여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라 그들에게 엄하게 대항하라 지옥이 그들의 안식처이며 종말이 저주스러울 것이라.” 이슬람을 거부하는 자들을 인간성을 말살하며 무슬림들에게 그들이 지옥 불에 탈 화목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학살을 정당화하는 것을 쉽게 만들고 있다. 이 구절은 또한 오늘날의 독실한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안 믿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꾸란 (9:111) - “알라를 믿는 자 가운데서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재산을 사시고 천국을 주실 것이라 그것은 알라를 위하여 싸우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자를 위해 구약과 신약과 꾸란에 약속된 것이라 알라보다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 누구이뇨 너희가 알라와 거래한 것에 기뻐하라 그것이 영광된 승리라.”

 

꾸란 (48:17) - “장님이나 불구자 그리고 환자가 출전하지 아니함은 죄악이 아니라 알라는 당신과 선지자에게 순종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로 하여금 강이 흐르는 천국에 들게 하시며 외면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고통스러운 벌을 내리시니라.” 현대의 옹호자들은 때로는 지하드가 ‘영적인 투쟁’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장님, 불구자, 환자가 왜 면제되는가?

 

꾸란 (48:29) -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며 그와 함께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에 대항하여 강하고(무자비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 자비하니라...” 이슬람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종교적 상태에 근거하여 적용되는 매우 다른 두 개의 기준이 있다.

 

꾸란 (66:9) - “선지자여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되 그들에 대하여 엄격하라 그들의 거주지는 지옥이니 그들의 말로가 불행할 것이라.” “지하드”의 어근이 되는 단어가 여기에 사용되었다. 배경은 분명히 성전이며 폭력의 범위는 자신들이 무슬림들이라고 여기나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포함하여 확대된다.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를 보면

 

부카리 (52:177) - 알라의 사도가 “너희들이 유대인들과 싸우고 유대인이 그 뒤에 숨어있는 바위가 ‘오 무슬림! 내 뒤에 유대인이 숨어있으니 그를 죽여’라고 말할 때까지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부카리 (52:256) - 이교도들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는 밤에 이교도 전사들을 공격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지 선지자에게 질문하였다. 선지자는 “그들은(여자들과 아이들) 그들(이교도들)에 속한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명령에서 무함마드는 인지된 적을 죽이는 과정에서 비-전투원을 죽이는 것이 허용된다는 예를 확립하였다. 이것이 많은 이슬람 폭탄 테러범들을 정당화한다.

 

부카리 (52:220) - 알라의 사도가 “나는 테러로 승리하도록 되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부 다우드 (14:2526) - 선지자가(그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말하였다: 믿음의 근본은 세 가지이다: “알라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자를 죽이지 않는 것과 그가 무슨 죄를 지을 지라도 그를 불신자로 선포하지 않는 것과 그의 어떠한 행동에 대하여도 그를 이슬람에서 제명하지 않는 것이며 알라가 나를 선지자로 보낸 날부터 나의 공동체의 마지막 사람이 Dajjal (Antichrist)과 싸우게 될 때까지 지하드는 계속될 것이다.

 

아부 다우드 (14:2527) - 선지자가 말하였다: 알라를 위하여 싸우는 것(지하드)은 경건하든 경건하지 안든 모든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너희들에게 의무이다.

 

무슬림 (1:33) - 알라의 사도가 말하였다: 나는 그들이 알라만이 하나님이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라고 증언할 때까지 모든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명령받았다.

 

부카리 (8:387) - 알라의 사도가 “‘그들이 알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경배되어질 권리가 없다’라고 말할 때까지 사람들과 싸우도록 명령받았고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같이 기도하고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며 우리가 살해하는 것같이 살해한다면 그들의 피와 재산이 우리에게 신성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정당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무슬림 (1:30) - “알라의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알라를 제외하고는 신이 없다고 사람들이 선언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명령받았다.”

 

무슬림 (20:4696) - “알라의 사도(그에게 평화가 있기를)가 말하였다: ‘알라를 위하여 싸우지도 않고 지하드(또는 결심)에 대한 어떠한 열의도 표시하지 않고 죽는 자는 위선자로 죽는 것이다.’”

 

무슬림 (19:4321-4323) - 무함마드가 무고한 어린 아이들이 불신자들에 대한 그의 부하들의 공격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무함마드가 어깨를 으쓱했던 세 개의 하디스가 있다: 그의 반응은 “그들이 그들(적을 의미함) 가운데 있었다.”였다.

 

무슬림 (19:4294) - 알라의 사도(그에게 평화가 임하기를)가 누구든지 군대 또는 파견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할 때 그는 특히 그에게 권고하였다....그가 말하였다: 알라의 이름을 걸고 그리고 알라를 위하여 싸우라. 알라를 믿지 않는 자들과 싸우라. 성전을 하라....다신교도인 너희들의 적들을 만날 때 그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초청하라. 그들이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응대한다면 너희들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어떠한 해악도 행하지 말라. 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초청하라; 그들이 너희들에게 응대한다면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싸우지 말라....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에게 이슬람세(Jizya)를 요구하라. 그들이 지불하기로 한다면 그들에게서 이슬람세를 받고 물러서라. 그들이 이슬람세 지불을 거절한다면 알라의 도움을 구하고 그들과 싸우라.

 

타바리 9:69 “불신자를 죽이는 것은 우리에게 작은 문제이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말이다.

 

타바리 17:187 “하나님을 두고 말하는데 우리가 떠났던 종교가 이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종교보다 더 낫고 올바르다. 그들의 종교는 피를 흘리며 거리를 끔찍하게 만들며 재산을 강탈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전에 믿던 종교로 돌아갔다.”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지만 알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폭력과 약탈에 충격을 받은 후 그들의 실수를 알게 된 한 그룹의 기독교인들의 말이다. 평화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결정에 대한 대가는 칼리프 알리에 의하여 남자들은 참수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이븐 이스학/히샴 327: - “알라가 말하였다. ‘선지자는 포로들을 모으기 전에 살해하여야한다. 살해된 적은 땅에서 제거된다. 무함마드, 너는 이 세상의 욕망을 갈망하였다, 세상의 재물들과 포로들의 몸값은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알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그들을 살해하기를 원한다.’”

 

이븐 이스학/히샴 990: - ‘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면서 누군가의 머리를 자르는 것이 요즘 시대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누구든지 생각한다면 무함마드의 명령에 의하여 바로 그 관습이 생겨났다는 것이 여기에 있으며 무함마드가 입증할 것이다.

 

이븐 이스학/히샴 992: - “알라를 위하여 모든 사람과 싸우고 알라를 믿지 않는 자들을 살해하라.” 군사적 공격전에 무함마드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준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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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볼 2013-09-1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