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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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죽기 전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 수 없다...”는 데이아네이라의 첫 대사로 이 희곡은 시작된다. 마치 자신의 불행을 예견하는 듯이.

어린 시절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었을 때, 어떤 무서운 괴물과도 싸워서 이겨내는 천하무적 헤라클레스의 모습은 너무나 멋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보이는 헤라클레스는 사회적으로는 능력 많고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지만, 가정에서는 바람기 남편에 자식에게 무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래서인지 제목도 트라키스의 ‘남자들’이 아닌 트라키스의 ‘여인들’이 그 주인공이다. 슬픈 ‘여인들’이.

헤라클레스의 식은 사랑을 되찾기 위한 데이아네이라의 방책은 사실은 넷소스의 치밀한 복수였고, 결과적으로 이들 부부에게 고통과 죽음만을 가져다주고 만다. 적의 호의를 너무 쉬이 믿어버린 그녀의 순진하고 치명적인 실수가 과연 이기적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작품 속 여인들의 대사는 결혼한 여자에게 특히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 같다.

그중 기억나는 대사들은 이런 것들이다 .

“처녀가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이라고 불리며 밤이면 밤마다 제 몫의 근심을 갖게 되어 남편 걱정에 자식 걱정에 안절부절 못하지요.”

- 여자에게 결혼이란 이러한 굴레일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모습이 안타깝게 와닿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과연 그 굴레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노동에서도 배움에서도 많이 해방된 요즘의 아내 혹은 엄마의 모습, 하지만 최근 들어 부모교육 전문서적이나 교육방송 등에서는 다시 아이에게 엄마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잠깐이나마 해방을 부르짖던 엄마들 스스로가 엄마의 지극한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있지 않은가.

요사이 바깥일이 늘어 집에 많이 있지 못하는 나에게 며칠 전 둘째아이가 말했다. “엄마는 왜 이렇게 바빠요?” 섭섭해 하는 아이의 표정에 한없이 미안하다가도, 바깥일을 줄이고 아이와 더 많이 있어줘야 할 것 같은 마음과 내 일에 대한 성취욕구 사이에서 수시로 헤매고 다니는 내 모습이 꼭 뫼비우스의 띠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 같다.

“신중한 사람이라면 잘나가고 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넘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지요.”

- 나 역시도 아주 행복하다 여겨지는 그 순간에 오히려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온전히 기쁨에 빠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슬픔과 기쁨이 돌고 도는 것이라는 건 나이가 들수록 인정하게 되는 점이다.

하지만 기쁨 속에서 슬픔을 미리 걱정하기보단, 슬픔 속에서도 어서 일어나 긍정적 마음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참다운 삶의 방식이 아닐까 요즘은 생각하게 된다. 

“내게 사실을 숨기지 마시오...사실을 다 말하시오...그대의 침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니까요. 아는 것이 그렇게 나쁜가요?”

- 데이아네이라가 리카스에게 계속 사실을 숨기지 말라고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을 사실대로 다 얘기해주는 것이 최선이기만 한 것인지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역사적 진실 혹은 선악의 문제 등이 아닌, 일상적 삶, 특히나 남녀 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를 온전히 다 받아들일 바다와 같은 아량이 내게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비슷한 경우 나 역시 데이아네이라처럼 말할 것 같다. 나에게만은 진실을 말해줘!

“하지만 그쪽에서도 나를 그리워하는지 알기도 전에 내가 그리워하고 있더라고 그대가 혹시 너무 일찍 말해버리지나 않을까 나는 두렵소.”

- 천하절색 데이아네이라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보기엔 너무나 자존감 떨어지는 얘기가 아닌가? 남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여자에겐 예부터 내려오던 관습에 의해 자기 존재를 귀히 여기는 마음이 많이 결여되어 있는 게 아닐까. 내 속에도 깊이 박혀있음이 분명한 이 자존감의 결여는 이제 그만 벗어버리고 싶다.

이따금 내 딸에게서 그 모습이 보일 때는 정말 슬퍼진다. 그래, 내가 더 자존감을 올려야 내 딸에게도 그것이 긍정적으로 전달되겠지?

엄마들이여, 더 당당해져라. 당신의 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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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임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인 면에서는 현대를 사는 주부들의 마음과 참 많이 닮은 주인공의 고통이 시대를 거슬러 내게도 답답하고 아프게 여겨졌던 “트라키스의 여인들”!

인간의 의지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의해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작품은, “안티고네”의 두 여인들에게서 보여지는 강하고 단호한 의지와 자기신념에 의한 행동, 그에 따른 예상되는 결말 같은 것이 없다. 오히려 과실에 의해 맞게 되는 비극이다. 그래서 더 답답하고 슬프게 와닿는 작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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