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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아무도 몰래
사카이 고마코 지음, 김숙 옮김 / 북뱅크 / 2017년 10월
평점 :
그림책 서점 '책과 아이들'에서 발견한 그림책이다.
표지에 있는 아이는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이불을 두르고 있어서 '혹시 상상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일까?'하고 열었더니 타이틀 화면에 의외의 물건을 두었다.
흔들 목마.
거기서 첫 장으로 갈 수 없었다. 뭐지?
흔들 목마... 스릴 있으면서도 손잡이를 놓치지 않는 한 안전한 놀이기구.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러고 보면 이 놀이기구만큼 안심하고 스릴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드물구나.
드디어 첫 문장을 만난다.
- 어느 날 한나가 말이야, / 저절로 잠이 깨 일어나 보니 / 아직 깜깜한 한밤중이더래.
이 한 문장은 세 컷의 그림과 세 페이지에 걸쳐있다.
유화인지 아크릴화인지 붓이 지난 흔적은 그대로 살려두고 색연필을 이용하여 세밀한 느낌을 더했다. 주로 파스텔이나 수채물감으로 그린 그림에서 느끼던 따뜻한 느낌을 이렇게 받을 수 있다니 묘하게 행복했다. 주류로 쓰인 묵직한 질감과 색감은 밤을 묘사하기에 적절하면서 살짝씩 비치는 살구색(예전에는 살색이라고 했었다)은 색연필이 주는 여린 감성과 잘 어울렸다. 면지에서 사용된 그 살구색이 화면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 각 화면마다 프레임이 쓰였는데 완전한 사각형 프레임이 아니라 모서리가 둥글려진 사각형을 사용한 것, 검정 바탕 위에 색을 덧칠해서 어둠을 표현한 것이며 외곽선을 깔끔하게 처리하기보다 붓이 자연스레 지나간 흔적을 남기도록 둔 것 등, 초반에 감탄을 하게 만들었다.
그림과 글의 역할이 반반, 그것을 이토록 절묘하게 보여주니 내 눈에 이 그림책의 매 페이지는 별천지였다.
글의 "~더래"라는 말투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마치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는 느낌을 주고 책을 읽어준다는 느낌이 덜하도록 편안하다.
딱, 필요한 만큼의 글과 친절한 그림. 화면을 꽉 채우지 않고, 상세하게 채우지 않아도 분위기가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 잠이 깬 한나는 깜짝 놀라 언니를 깨웠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언니가 일어나지 않더래.
언니를 깨우는 한나의 모습에서 화면은 한나의 발뒤꿈치께에서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 치로를 비춘다. 이것은 카메라가 이동하며 비추는 화면 같다. '언니는 그냥 둬, 내가 일어나야겠군.'하듯 치로는 한나와 계단을 내려가고 화장실에서 볼 일을 함께 본다.
부모님도 주무시니 깨우지 못하고,
-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치로한테 주고 / 한나는 체리를 꺼내 먹었는데/ 야단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래.
그리고 글이 없이 두 페이지에 걸쳐진 한 컷의 그림.
커다란 거실 창밖에 노란 보름달이 환하게 보이고 여전히 어둑한 실내에서 달을 쳐다보며 뒷모습이 보이는 한나. 왼쪽에는 고양이 치로, 오른쪽에는 흔들 목마가 보인다.
어둠 속에서 밝고 따스한 빛을 주는 존재인 달, 밤을 함께 보내고 지켜주는 동반자 치로, 그리고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나의 해석일 뿐이다) 목마, 이렇게 셋은 한나를 가운데 두고 가장 안정감 있는 삼각형 구도를 이룬다. 한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두려움은 분명 아니다. 이제 다음 그림부터 쭉 풀어나가는 장면들이 설명해 주는 듯하다.
평소 해결되지 못했던 욕구는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해소가 되고, 비둘기 날아온 새벽이 되자 가장 편안한 심리상태에서 찾아오는 '잠'을 통해 아이는 언니의 발치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화해를 마친다. 앞으로 아이는 어둠을 두려워하는 누군가에게 괜찮아,라고 말 할 수 있겠지.
와.... 30여 페이지에 담긴 몇 줄의 글과 26 컷의 그림을 가지고 동생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데 거의 한 시간을 떠들었다. 그리고 남들이 들으면 과하다 싶게 많은 감탄사를 써댔다.
내가 어릴 때 우연히 밤중에 잠이 깼던 적이 있었다. 가족이 한 방에서 오글오글 지냈었다. 아빠의 한 팔이 엄마의 등에 놓여있었는데, 그때 들었던 생각은,
'엄마랑 아빠는 사이가 좋으시구나'
였다. 그 사실이 참 든든했다. 혼자서 이불을 둘둘 감고 자던 언니는 얄미웠고 이불을 뺏겨서 구석에 웅크리고 자는 동생의 모습에 언니의 엉덩이를 툭 차서 이불을 조금 빼내 덮어준 기억이, 문득 났다. 이 책 때문에 어릴 적 기억이 난 것일까.
그날 밤의 우리 가족의 취침 장면은 '포근한'으로 설명된다.
아이들이 무조건 밤을 두려워하진 않는 거였다. 심리적인 지지를 받기만 한다면, 무섭다고 하던 어둠도 아이에게 새로운 경험과 지혜의 장이 될 수 있다. 어른들이 고민할 것은 그 '심리적 지지'를 어떤 방식으로 제공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등의 말도 좋겠지만 때로는 침묵(용인)하거나 혼자서 시도해 볼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은 어떨까.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훨씬 강인하다고 믿는다.
모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책을 만나 행복하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치로한테 주고 한나는 체리를 꺼내 먹었는데 야단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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