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슬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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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하우스가 어떤 결심을 하고 제본을 이렇게 한 것일까. 수고롭고 복잡한 제본 방식으로 아는데. 사철 방식이라도 책이 이렇게 완전히 펼쳐지도록 제본을 하는 것은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드는 것으로 안다. 그것도 두 장씩 바느질을 했다. 독자를 온전히 책으로 안내하겠다는 결심이 아니고서야...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그것도 작가의 첫 그림책이라는데 말이다. 자신감인지 모험인지는 모르겠으나 독자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작가는 그림을 이미 꽤나 그려왔나보다. 손재주쯤이야 대단한 사람들이 널렸으니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미리보기를 봤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 돈 주고 사서 자세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받아보니 이 작가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책을 얼마나 읽는 것일까. 평소 그림책 공부를 할 때 어떤 작가의 책을 좋아하고 자주 보는 것일까. 어디서 그림책 공부를 했을까. 아니, 그림책을 준비하면서 어떤 수업이나 강의를 들은 것일까. 작가는 그림만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문학적 소양도 있고, 그림책의 본질에 대해 생각을 깊이 한 듯하다.
온 세상이 신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좇는 아이,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실체가 없는 자신을 찾아 숨차게 사는 어른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내가 잘 하는 것이 뭔지,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지, 걸신 들린 듯 세상을 소화하려 드는 젊은이 같다. 그런 삶은 브레이크가 걸리기 마련이다.
구름은 비를 뿌리고 아이는 조바심과 허무함과 답답한 심정으로 울음을 울다 자기 앞에 비친 무지개를 본다. 그 장면에서 하늘을 보고 무지개를 발견했다면 참 가식적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땅만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다시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찬찬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마지막 문장은 제목과 호응하며 멋지게 마무리된다.
미하엘 옌데의 <모모>에서, 모모를 쫓던 시간 도둑들은 박사의 거처를 눈 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 목적지에 가려면 뒷걸음질을 쳐야만 하는데 시간 도둑들은 전진만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중요한 사실인가. 때로는 뒷걸음질을 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도 있다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자아를 찾으려던 인물의 여정과 불안, 좌절, 재기의 과정이 아이의 언어를 통해 모든 독자에게 전해진다. 성인의 내면에 있는 아이와 현실의 아이를 위한 아이의 언어를 썼는데도 모든 독자의 마음에 가닿는 좋은 그림책이다. 그림책은 모든 독자를 위한 것이니까, 모두에게 통하는 아이의 언어를 쓰는 것이 기본이다.
그림책에서 자주 간과되는 지점이 있다. 그림책도 문학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림책도 고전이 있다. 그림책의 문학성은 꼭 필요한만큼의 어휘를 심사숙고해서 글을 쓰고, 꼭 필요한 그림을 그려서 언어로 느껴지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글과 그림의 과도한 중복은 독자로 하여금 그림책 읽기의 흥을 깨기도 한다. 심지어 독자의 해석의 기회를 빼앗아 구구절절 설명을 하는 바람에 그만 책장을 덮은 적도 있었다. 이 책은 글과 그림의 역할을 잘 나눴고 그림에서 일으키는 예술적 감흥이 맛나다.
이슬로 작가의 첫 작품에서 맛 본 즐거움이 다음에도 계속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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