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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평점 :
나는 고문하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방식의 고문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가장 싫어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반에서 누군가가 물건을 잃어버렸거나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선생님은 아이들을 모두 눈을 감게 하고는 침묵을 한동안 강요하다가 조금씩 우리에게 실토를 하라고 강요했다.
마치 선생님 자신은 범인?을 알고 있으니 알아서 자수하여 광명을 찾아라, 식이었다.
그 시간은 어쩌면 짧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괜시리 죄책감?을 갖고는 손바닥에 땀까지 날 정도였다. 게다가 가장 악랄?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그 한명 때문에 다른 많은 아이들이(그당시에 학생 수는 50-60명 정도였다)집에도 가지 못하고 벌서는 심정으로 가슴을 콩닥거리며 시련?을 견디고 있다는 점을 아이들에게 각인시켰던 것이다.
사실 선생님은 범인?이 누군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범인?이 손을 들어 자신임을 알려준다고 하자, 그러면 선생님은 어떻게 다른 아이들 모르게 그 아이를 불러 이야기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눈을 감게 한것은 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사실 하나도 보호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가?!
참으로 우습게도 물건을 잃어버린 아이는 자신의 실수로 집에 놓고 왔거나 다른 곳에 흘렸거나 그런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면 그 일로 인해 반아이들은 받지도 않아도 될 고문을 받고 스스로 자신이 결백함을 입증해야만 했던 씁쓸한 시간을 보내야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러한 일들을 혹 누군가가 행하고 있다면 말리고 싶다. 때리지만 않았을 뿐이지 이건 엄연한 고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는 가공의 일본에서 벌어지는 '정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부가 '평화경찰'을 만들어 일본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회에 위험이 될 사람을 미리 색출하여 공개처형-인권의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피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호기심과 광기에 휩싸여 공개처형(그것도 단두대)에 흥분하기까지 한다. 그 장면에서 나는 집단광기 혹은 믿음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인간성'은 정말로 '악'이 먼저일까, 이런 생각까지도 들 정도였다.-을 한다. 소위 '안전지구'에 선정된 지역에 한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평화경찰이 색출하는 위험이 될 사람은 어떻게 뽑히는가?
누군가가 평화경찰에 신고를 하거나(심지어는 자신이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 그저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도 있었다) 술자리나 식사자리에서 정부를 비판하거나 평화경찰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평화경찰에 의해 위험인물이 되어 잡혀갔다.
그러면 자신이 위험인물이 아님을 주장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실제로 평화경찰은 그들이 위험인물이라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평화경찰은 그들이 위험인물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들의 존재이유-위험인물을 제거하는 정의로운 평화경찰-를 뒷받침해주는 '위험인물'이 필요할 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평화경찰은 잡혀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위험인물이 아님을 주장하면 할수록 고문을 강행한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너무 슬펐다. 이사카 코타로는 이것이 가상의 일이라고, 소설이라고 썼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얼마전까지도 이런 세계에서 살았다. 아니,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도덕책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학창시절에 아주 짧은 글이 있었다. 배경은 조선시대였는데 한 양반이 한 노비에게 자신의 돈을 훔쳤다며 그 노비를 몰아세웠다. 그 당시에는 노비는 인간취급도 받지 않았기에 양반은 노비를 고문했다. 칼을 채우고, 곤장을 치며 등등. 결국 노비는 자신이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자백했다. 그러자 양반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고문은 하지도 않은 일을 자백하게 만든다고. 참, 서글펐다. 죄없는 노비의 희생은 그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자신의 이론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문하는 양반을 보며 현실에서는 수많은 동물들이 그렇게 희생당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동물뿐이겠는가, 이 지구 모든 것이 권력과 돈의 실험대상인 것을.)
평화경찰에 잡혀온 사람에게 평화경찰인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다하라 씨가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리 불만이 많든, 지금의 이 사회를 살아가야만 해. 룰을 지키며 올바르게 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나라를 떠나면 돼. 다만 어느 나라에 가든 이 사회의 연장선상에 있지. 일본보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도 있어. 약도 없고 에어컨도 없지. 말라리아 때문에 고민하는 나라도 있어. 이 나라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아예 화성에 가서 살 생각이야?"
라고. 하지만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다. 떠나지 못하니까 고칠 수 밖에 없다고. 우리가 그 겨울 광장에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이유때문이라고 말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평화경찰에 반기를 든 이가 나타났다. 일명 정의의 편. 골프공같은 검은 구슬과 오토바이, 검은 작업복 그리고 목검으로 사람들을 구하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한명의 히어로는 어려움에 처한 많은 이들을 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선택된 자들만이 히어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그 구분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이 책은 누군가의 입을 빌어 '위선'이라는 말을 꺼낸다.
마치 한겨울 불우이웃을 돕는다면서 라면박스 몇개 들고 가서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것과 같다며 그를 비난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 아이들을 이용하더라도 라면박스를 기부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책에서 이런 상황이 있었다.
굶었는지 삐쩍 마른 길고양이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냥 지나치는데 한 사람이 그 고양이에게 참치캔을 내밀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말했다.
"매일 주지도 못할거 아예 안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괜히 고양이한테 기대만 하게 만들잖아."
그러자 고양이에게 참치캔을 내민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오늘 이 고양이는 배가 불러서 행복하지 않을까. 내가 고양이라면 기대를 하더라도 오늘 하루 배부른게 좋을 것 같아."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를 위선자라고 부를 것인가.
내가 만약 그 고양이였다면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을 것이다.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이 중요한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서 친절이나 도움을 베푼다면 그게 그 누군가가 마지 못해서 했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휩쓸려 했거나 혹은 자신의 버리지못하는 성격때문에 했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고맙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그 누군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 속에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여기에서
살 것이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주 느리다고 할지라도 세상은 변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