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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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사건을 보면서 박창진 사무장이 처음 문제를 제기했을때 그 누구도 동료들이 진실을 얘기해 주질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그분이 조직내에서 버티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이번에 다시 사건이 ...났을때 1,000명의 박창진이 나왔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제가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 모든걸 잊고 그냥 주저 앉는다면 앞으로 검찰이 달라지는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거라 생각하구요. 검사라는 사람도 본인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지 못해서 그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면 이 이후에 어떤 피해자가 앞으로 나올 수 있겠는지.

검찰은 돌아 올 생각 하지 말아라 라고 저에게 메세지를 주고 있지만... 제가 어느 정도 힘을 내서 진실을 말하고 버티고 있으면 내부에 겁을 먹고 공포에 질려 있는 검사들도 진실을 얘기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서 용기를 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 서지현 검사의 말 중에서 발췌


어렸을 적에 이웃에 남편에게 맞고 사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하지만 주위 어른들은 그 아주머니를 감싸주거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 잘못도 없이 맞는 아주머니를 불쌍하게 여기기는 커녕 남편의 말(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줬다, 밥을 늦게 줬다, 아이들을 버릇없게 키운다, 바가지를 긁었다 등등)을 전적으로 믿는 눈치였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지나가면 수근거리며 외톨이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을 누군가가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당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짧은 치마를 입어서 그래, 화장을 진하게 해서 그래, 말투가 싸구려?여서 그래, 그냥 생김새가 그래 등등.

남편이 바람을 피고 가정을 파탄을 내도, 오히려 아내는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상대 여성을 탓하거나 자신을 탓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을 욕했다. 아내의 행동?이 바람피울 만하다고 남편을 편들었고, 유부남인지 몰랐던 상대방 여성을 뻔뻔스런 밝히는 여자로 만들었다.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는 숨어야 하며 죄책감을 가져야 하며, 부끄러워해야 하며, 평생 그 사실을 마음 속에 꽁꽁 숨겨야 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을까?


공포영화 '여고괴담1'을 보면 전교 1등인 아이의 목이나 어깨 등을 남자선생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은밀한 손길로 만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영화가 나온 뒤 많은 사람들이 정말 공포는 귀신이 아니라 그 남선생이었다고 이야기했었다. (귀신이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력을 행하진 않을테니)

그 영화 속에서도 학생들은 선생의 추악함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선생의 추악함을 알고 있을 동료 선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고괴담이 나온지도 벌써 20년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 때와 달라졌을까?


어렸을 적에 이웃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남자아이는 여름이 되면 런닝만 입고서 마을을 돌아다녔다. 고추를 덜렁덜렁 흔들면서 뛰어다녀도 어른들은 아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아이의 고추를 품평하며 웃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한 여름에도 팬티를 입고 치마를 입고 있었다. 왜일까? 왜 그 둘은 다르게 입어야만 했을까?

여자아이들은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몸을 항상 깨끗한 유리병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다루어야한다고 배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가정시간(80년대에는 여자아이들은 가정가사를 남자아이들은 기술을 배웠다. 지금은 같이 배운다고 들었다.)에 아직 가슴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브레지어를 착용해야했다. 안하면 점수가 깎이거나 손바닥을 맞았다.(어떻게 브레지어를 착용했는지 검사하는가하면 선생이 여자아이들의 등 뒤를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걸리는 것이 있나 없나로 검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정가사시간에 이루어지는 성교육(그때에 남자아이들은 기술시간이었는데 그애들은 성교육을 받지 않았다. 우습지 않은가?)을 받았는데 내용은 생리에 관한 이야기와 임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임신도 요즘처럼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않았다. 여선생이어서 그런건지 어떤건지 모르지만 그 여선생도 결국 같은 여성이라도 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그 시대에는 여성에게 금기시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그 어느 곳에서도(고등학교때에도) 배운 적이 없다. 궁금하면 직접 알아내거나 책을 보거나 뭐 그랬다. 그러다보니 성교육의 내용이라는 것이 여자 팔자 뒤웅박이라고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여자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뭐 그럴수도 있다. 자신의 반려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인생은 이리 저리 바뀌기도 하니까. 하지만 내용이 가관이었다. 고등학생인 여자아이가 우연찮게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섹스를 했는데 덜컥 임신이 되었다. 하지만 남자는 나몰라라 도망치고(우습게도 자신의 아이인 것을 어떻게 믿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여자가 동정녀 마리아도 아닌데 말이다.) 여자아이는 최대한 임신사실을 감추다가(복대를 하고) 출산할때쯤 임신사실을 들킨다. 학교는 퇴학당하고 부모에게도 외면당하며 결국 태어난 아이는 입양보내고 피폐한 삶을 산다는 이야기였다. 이게 과연 성교육비디오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비디오를 틀어주며 성교육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렇게 감추어야했다. 자신의 몸도, 욕망도. 성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감추어야했다. 성은 남성들의 것이었다. 남성들은 겉으로 드러냈다. 여자아이들의 외모를 점수로 평가하며 자신과 사귀었다가 헤어진 여친과의 성생활도 친구들과 공유했다. 반면 헤어진 여친은 아이들 사이에서 '걸레'라며 손가락질을 당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거지? 무엇부터 잘못된 거지? 무엇을 잘못한 거지?


[그 후 20여 년 동안 리궈화는 자신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여학생들이 세상에 널렸다는 걸 알았다.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에게는 최고의 방패였다. 여학생을 강간해도 세상은 그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죄책감은 아주 오래된 순수 혈통의 양치기 개였다. 어린 학생들은 온전히 걷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일어나 뛸 것을 강요당하는 어린 양이었다. 그럼 그는 무엇일까? 그는 그 어린 양들이 가장 좋아하고, 또 그 어린 양들을 제일 좋아하는 절벽이었다.]

                                                                  -p 123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일말의 상상력도 없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남자와 젊고 예쁜 불륜녀, 눈물을 흘리는 조강지처의 조합은 자세히 들여다볼 것도 없이 황금시간대 막장드라마 속 스토리로 치부되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고통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걸 부정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작디작은 평화가 너무 이기적으로 보인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앞다투어 자신을 '루저'라고 칭하는 시대에 진정한 루저인 여자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아무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고통과 행복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사람들은 작은 행복을 누리며 입으로는 작은 고통을 외치고 있다. 누군가이 적나라한 고통이 눈앞에 다가오면 그들의 안락함은 비루해지고 고통은 가볍게 보인다.

줄줄이 달린 댓글이 서슬 퍼런 칼이 되어 그녀를 난도질했다. 죄는 선생님의 것이지만 그녀의 몸도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p 282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저자 린이한의 자전소설이라 한다.

읽는 내내 가슴 속에 불덩이를 삼킨 듯한 체기를 느꼈다.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다.

린이한이자 팡쓰치, 그녀가 가야만 했던 길이 너무나 외로워서, 그 길에 아무도 없어서 그래서 그녀가 기어코 아픔을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녀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에 그녀는 그것을 붙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안해도 그렇게 찬란하게 빛났던 팡쓰치의 13살 어느날 그녀의 아픈 몸짓을 누구 하나라도 알아챘더라면, 누구 하나라도 그녀의 말에 귀기울여졌더라면...

혹은 팡쓰치가 자신의 아픔 속에 머물러있지 않고 모든 것을 토해냈더라면, 아주 작게라도 말이다. (우리의 성교육은 '말하는'것부터 배워야만 한다. 이상하면 이상하다고, 싫으면 싫다고... 그리고 그것을 거짓이 아니라 그 말 그대로 '참'이라고.)


우리가 내가 미투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연대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


이 세상 수많은 팡쓰치에게 우리는 말해야 한다.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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