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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떻게 ‘일본’이 되었나 - 새로운 세대의 일본 문화 디코딩
김유영 지음 / 브라운출판사 / 2026년 3월
평점 :
일본의 거리를 걸을 때면 늘 묘한 감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깨끗한 거리, 누구에게나 허리를 굽히며 미소 짓는 사람들, 정해진 매뉴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켜내는 사회. 그 질서 정연함에 감탄하면서도, 이따금 등 뒤로 서늘한 이질감이 스치곤 했다. 저토록 깍듯한 예의 뒤에 숨겨진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화려한 네온사인 이면에 자리한, 기형적일 만큼 팽창한 성인물 산업이나 서브컬처의 범람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책은 내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그 희미한 의문부호들을 가만히 짚어주었다. 책장을 넘기며 나는 타국을 향해 지니고 있던 얄팍한 호기심이나 단편적인 비판의 잣대를 내려놓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숨죽여 살아온 사람들을 향한, 서글프고도 묵직한 연민이 들어섰다.
책은 우리가 흔히 '국민성'이라 부르는 일본인 특유의 맹목적인 친절과 질서가, 실은 얼마나 가혹한 환경 속에서 피어난 생존의 결과물인지 담담하게 서술한다. 예고 없이 땅이 흔들리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쓰나미 앞에서는 개인의 의지 따위는 무력할 뿐이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튀는 행동을 하면 존착에서 배제되는 '무라하치부'를 당해야 했던 에도 시대의 엄격한 신분제와 통제 시스템은 그들의 뼛속 깊이 '순응'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 넣었다. 지진의 공포와 타인의 시선이라는 이중의 굴레 속에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메이와쿠'는 미덕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자기방어였던 셈이다.
그 숨 막히는 동조 압력의 공기를 상상해 본다. 정갈한 기모노의 깃을 여미며 평상심을 유지해야 하는 사회. 그 억압된 일상 속에서 개인의 거세된 욕망은 결국 비틀린 형태로 분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도의 정갈함과 AV 대국이라는 극단적인 모순은, 결국 숨 쉴 틈 없는 사회가 만들어낸 슬픈 배출구가 아니었을까. 책이 일러준 그 이면의 구조를 따라가다 보니, 기괴하게만 보였던 그들의 문화가 벼랑 끝에 선 이들의 아우성처럼 들려왔다.
전범국으로서의 책임 회피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앞에서도 좀처럼 분노하지 않는 그들의 수동성 역시 다른 질감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국가 시스템이나 재앙 앞에서 스스로를 그저 '상황에 휩쓸린 피해자'로 여길 수밖에 없는 그 지독한 무력감. 체념이 곧 지혜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겉으로는 누구보다 친절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뼈아픈 순응의 역사를 짊어지고 걷는 사람들이 있다. 가혹한 자연과 엄격한 신분제가 빚어낸 일본인의 맨얼굴을 쓰다듬다 보면, 분노나 비판보다 오히려 그 타자를 향한 깊은 연민이 피어오른다. 상처 입은 이웃의 진짜 얼굴을 비로소 마주한 기분이다.
우리가 일본 문화에서 발견하는 ‘개방성‘은 보편적 자유가 아니라, 사회구조 안에서 세심하게 구획되고 관리된 자유에 가깝다. - P97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제2차 세계대전. 시공간을 뛰어넘는 이 두 사건의 중심에는, 일본 사회가 비극적 재난을 마주하고 기억하는 독특한 방식, 즉 ‘피해자 의식‘이라는 공통의 코드가 존재한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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