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위악적이라는 감상평(심사위원부터 작가까지 이런 소리 한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해하기가 힘든데)은 죄다 (다른 게 아니라)틀린 것인데 그냥 틀렸을 뿐 아니라 악하기까지 하다. 무척 타자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어떤 보통악하다고들 하는 생각이 걸 (그게 정말 '악한' 건지는 차치하고라도)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기술한 설마 위악이라고 말한 건가. 그걸 위악이라고 느낀 사람이,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스스로 위선적인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걸 기술해놓은 데다 대고 위악이라니. 위악과 뇌내망상이라고 할, 떠올리기만 할 뿐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드문 생각의 기술은 완전히 다르다. 이러면 또 혹자는 물을지 모르겠다.  생각 자체가 위악이 아니었냐고. 천만에. 화자는 실제 그걸 진심으로 생각한 걸테다. 소설을 읽으면 있다. 우리는 사악하다고들 하는, 나아가 사악한 생각을 한다. 그걸 말이나 행동으로 좀체 옮기지 않을 뿐이지. 그렇지만 내면 묘사를 하는 소설에서는 있는 것이다.


내가 예수는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속으로 샤카가 한 것 같은 종류의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자, (혹은 샤카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그와 같은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는 자)샤카더러 위악적이란 말을 던지라.


작가는 샤카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썼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샤카가 한 생각을 위악적이라고 하면 작가는 솔직하게 하고 싶었던 얘기를 털어놓은 책에다 대고 위악적이었다고 말하는 꼴이 된다. 이것은 심히 곤란한 일이다. 그것만 분명히 하겠다.


부디 위악적이란 게 뭔지 개념들을 좀 바로 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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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장강명 지음, 구현성 그림 / 쪽프레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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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시대의 <바이센테니얼 맨>. 생각할 거리들을 던지는 와중에 잔잔한 감동을 안긴다. 페미니즘의 의제에 거의 예외 없이 동의를 보내는 일인으로서 외려 아래의 혹평들을 이해할 수 없다. 삽화나 줄거리나, 일차원적이고 깊이 없는 독법으로 읽어서는 아래와 같은 감상밖에 얻지 못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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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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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광진구 모처에서 일하는 한 부장의 칼럼에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한바탕 뒤집어진 일이 있었다. 자신도 부장이면서 다른 부장들에게 가한 거침없는 일침에 비록 아닌 새해부터 날벼락을 맞은 부장들로부터는 볼멘소리도 나왔지만, 대다수 직장인들은 환호를 보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주일여가 지난 어제(19일)에는 자신의 칼럼이 일으킨 파급력을 확대재생산할 필요가 있다며 나서기에 이른 그. 페이스북으로 끊임없이 팬들과 소통하는 그는 물론 <미스 함무라비>의 저자 문유석 판사다. 전작 <개인주의자 선언>까지만 해도 인천지법에 근무한다던 저자는 모르는 새 서울동부지법으로 옮겨가 새 근무지에 적응하면서도 전혀 낯설 장르인 소설 집필에 어지간히 공을 들인 기색이었다.

   많은 독자들이 판사에게 기대하는 책에는 뭐가 있을까. 아마 저자의 전작들이 그렇듯 에세이거나 전문적인 식견을 담은 책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일반의 예상을 깨고 보란 듯 <미스 함무라비>를 내놓았다. 과연 작중 박차오름 판사만큼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여느 판사에 못잖은 개성있는 행보를 보여온 저자다웠다. 그가 가져다준 놀라움은 이뿐 아니었는데, <판사유감>까지를 포함해 그의 책을 탐독해온데다 페이스북에서 드러내는 온갖 의견들에도 공감을 표하던 터라, 신간 소식을 기다리던 나는 그렇지만 책의 제목에 고개를 갸우뚱해야 했다. 페미니즘에도 일가견이 있는 줄로 아는 그가 선택한 책의 제목이 '미스' 함무라비라니. 다행히 그 제목이 가리키는 대상인 박 판사가 제 별명을 고까워한다는 대목이 나와 한숨을 덜었지만, 과연 오해의 소지를 몽땅 없애겠다고 글이든 책이든 너무 얌전하게 다듬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 대한민국 지식인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만 봐도 알 수 있듯 저자 문유석 판사는 조금, 아니 상당히 특별한 사람이다. <미스 함무라비>를 읽을 때 이런 생각은 더 굳어졌는데, 작중 등장인물인 수석부장만 해도 뭐라고 했던가. '경위야 어떻든 법관 개인이 대중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며' '튀는 법관은 법원에 대한 신뢰를 해칠 우려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법시험이 엉덩이 무게를 테스트하는 걸지 모른다고 할 정도로 법관들의 필생의 업은 기록 더미 가운데 파묻혀 사는 것이건만, 저자는 이 책에서 기어코 그곳을 빠져나와 대중에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곳의 속내를 가능한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애쓴다. 어쩌면 그런 노력의 흔적이야말로 내가 설마 그 문 판사라도 소설까지 잘 써내려구, 하며 반신반의하면서도 이 책을 펴들고, 단숨에 독파해버린 이유가 아닐지 모르겠다.

   연작 콩트 형식을 취한 이 소설에서 저자는 한세상, 임바른, 박차오름 세명 판사가 속한 서울중앙지법 44부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통해 대한민국 법원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판사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그려보고 싶다던 저자의 바람은 제법 이루어진 듯하다. 적어도 책을 다 읽었을 때, 내 머릿속에 무표정한 얼굴로 있지도 않은 법봉을 땅땅 두드리는 판사의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게 되었으니까. 대한민국 누구 못지않게 공부를 잘(혹은 열심히) 했지만 그래보아야 법관들도 어쩔 수 없이 갈등하고 고민하는 인간임을 이 소설은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깊숙이 와닿도록 표현하고 있다. 신비의 두터운 베일을 벗겨내는 까다로운 임무를 제법 훌륭히 완수한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건 첫 소설이라기엔 기대 이상인 캐릭터 설정에 힘입은 바가 컸다. "정말 요즘 젊은 판사들은 연수원에서 뭘 배워 오는 거야!" 란 이만저만 꼰대스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한 부장이 다분히 보수적인 윗세대 판사를 대표한다면, 임 판사는 아무리 봐도 저자, 그러니까 문 판사의 아바타 정도로 느껴지고(읽으면 읽을수록 여기에 대한 확신은 더 굳어만 갔는데) 박 판사는 전형적인 신세대 판사로, 같은 사법부, 심지어 같은 44부에서 협력해 일하면서도 서로 다른 입장일 수밖에 없는 셋을 한명에 치중하지 않고 셋 모두의 입장이 되어서 서술해 가며 균형을 잡으려고 한 점이 돋보였다. 이것은 저자에게서 퍽 옛날부터 엿보여온 면모기도 한데, 그가 편파적인 입장이 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기울이는 노력이 독자에게는 얼마나 치열해 보이는지 스스로는 알고 있을지가 의문스러울 정도다. 훗날 저의 행동들로 '미스 함무라비'라고까지 불리게 되는 박 판사는 비단 지하철 치한에게만 정의의 철퇴를 가하지 않는다. 추행을 당하고도 침묵을 지키는 여학생에게도 권리 위에 잠자지 말 것을 요구한다. 비싼 돈을 줘가며 픽업 아티스트들에게 껍데기뿐일 유혹의 기술을 배우려 드는 제 나이 또래 청춘들에게도 그녀의 칼날은 비껴가는 법이 없다.

   저자가 이 책에서 그려낸 또다른 풍경은, 아니 어쩌면 이쪽은 의도했다기보다도 실제 일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사건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절로 배어든 것일지 모르지만, 판결의, 인생의, 나아가서 세상사의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이다. 비록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화끈하게 정의를 실현하는 판사 이야기를 쓰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했지만, 그 누가, 이 책을 끝까지 공들여 정독했다는 전제 하에서 그걸 미안해할 일이라고 여길까. 저자는 대개 이런 상황의 복잡함을 매 이야기에서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로 설정했다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에도 제나름 근거가 있음을 보여줌으로 드러낸다. 한 부장이 때로 꼰대라지만, 악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선한 사람인 그는 그렇지만 살아온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렇듯 사회의 최상층 엘리트라는 판사도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부터 일반 시민들이 자유로웠을 리가. 대표적으로 불판 사건의 당사자들은, 결국 원고 피고 할 것 없이 모두 사회제도적인 모순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악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현실의 희생자가 아니던가. 완전한 악당에 대한 화끈한 정의구현은 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네 풍경이란 거의 모두가 서로에게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것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되 잘못된 것이라면 저마다의 상황이 어떻든 고쳐나가고자 애쓰길 바라는 바람을 저자는 책에 담고 있다. 책임을 물을 것엔 묻되, 책임을 묻는 이들도 결코 티끌만한 죄 하나 없는 존재일 수 없을 때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길 바라는 그런 바람 말이다.

   어디까지나 소설로 쓴 책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부족한 점도 없지 않았다. 공들인 문장이라든가 완급조절 같은 전통적인 소설적 요소가 드묾은 분명 아쉬운 점이다. 보다 소설적이게 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하다시피 한 말들이 보다 등장인물들의 말처럼 느껴졌어야 했으리라. 심지어 저자 스스로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듯한 책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읽는 내내 따라온 점도 아쉽다. 소설이라기엔 당사자들을 가명 처리한 일화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니. 그러잖아도 생각할 거리를 이만저만 던져주는 게 아닌 책에 독자들이 정체성에까지 의문을 품을 부담은 덜어주었다면 좋았으련만. 에필로그에서 비교적 소상한 해명이 제공되지 않았더라면, 한켠의 찜찜함은 꽤나 오래 남아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 종합적으로 합격점, 아니 그 이상을 주고 싶다. 무엇보다도 나는 생각하게 만드는, 그중에도 머리를 쥐어싸고 한숨이 나오도록 숙고하고 또 숙고하게 만드는 책을 좋아하므로. 이 책은 위에 적은 모든 것들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파면 팔수록 더 많을 생각할 거리들을 제공하는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이 그러한 책일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도 말했듯 바로 책의 저자가 그렇게 많은 사유 가운데 사는 이기 때문일 것이고. 그 무게는 내 시름까지 덩달아 내리누르고 깊어지게 했지만, 기꺼이 짊어지고 싶은 짐이라는 생각 또한 동시에 하게 했다. 다음에는 더욱 깊어진 고민들에 더해 벌써 펴낸 책만도 세권에 달하는 어엿한 작가로서 한층 결이 고와진 책을 들고 돌아오는 저자이길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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