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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지성 - 학문 연구를 위한 기독론적 토대와 방법
마크 A. 놀 지음, 박규태 옮김 / IVP / 2015년 8월
평점 :
시원함을 주는 책
(그리스도와 지성, 마크 놀, ivp)
대학 1학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흔하지 않았던 그 때, 첫 여름방학을 맞아 지리산 캠핑을 간 것이다. 좋아하는 기독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었다. 힘든 중에도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내려다 본 일망무제의 구름 사이로 희끗희끗 보이던 중산리 계곡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마크 놀의 "그리스도와 지성“을 읽고 난 느낌도 그랬다. 크리스찬 지성 연구에 최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며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그냥 마음이 시원해지면서 이젠 좀 더 열심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성을 계발하고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그런 다짐도 절로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맛볼 수 있었던 마음의 시원함의 원인은 무엇일까? 주관적으로 몇 가지만 적어본다.
먼저는 ‘신경’의 재발견이다. 사도신경으로부터 시작해서, 니케아, 칼케돈 신경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었다. 예배 전에 외워지는 의례적인 고백이 아니라 학문의 기초로서 아니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해하고, 학문을 하는 패러다임으로서 신경을 보게 된 것은 더운 여름날 등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말씀하신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인 학문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 ‘나셨으나 창조되지 않은’, 성부와 동일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리고 이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사실을 말하는 니케아 신경을 통해 하나님이 피조세계 속에 그리고 그 세계 안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스스로를 충만하게 나타내셨다는 것.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고, 나아가 일반적인 인간사와 구조, 각종 제도에 대한 긍정적 암시를 주셨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합된 한 인격 속에 두 본성-‘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고립되지 않은’-을 가지심을 고백한 칼케돈 신경을 통해 학문의 연구시에 좀 더 폭넓고 유연한 사고, 즉 만물의 이중성, 우연성, 특수성, 자기부인에 대한 이해와 유연한 사고를 할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학문은 학문,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신인이신 예수님의 나심에서부터 학문하는 길과 세상, 우주만물을 알아가는 법을 포함하고 계시다는 것이 놀라웠다.
둘째, 과학의 재발견이다. 근래 SNS 상에서는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우종학, IVP)"로 촉발된 ‘젊은 지구론 vs 오랜 지구론’에 대한 논쟁이 시끌벅적 벌어지고 있다. 간간히 눈팅을 하면서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답답한 느낌이었다. 물증은 있으나 심증이 안 따라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6장을 읽으며 오래 끌고 있던 생각정리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기분이었다.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 문장들이다.
”하나님의 인과법칙에 따르면 피조세계에 일어나는 우연과 목적이 있는 하나님의 섭리는 양립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과법칙과 피조물의 인과법칙은 정도 뿐 아니라 종류가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자연에서 진정 우연의 과정에서 나온 결과라 할지라도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일 수 있다. …겸손하고 책임있게 생각하고 과학지식과 해석을 제대로 갖춘 이들은 많은 과학 분야에서 표준으로 자리잡은 인간 진화라는 큰 그림이 신뢰할만한 성경 해석과 일치하며, 이는 규범적 힘을 가진 신경이 정의 한 역사 속 정통 기독교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p156,7). “
“창조과학을 과학이라는 자연 철학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좋은 길로 장려하여 지적으로 자살 행위를 저지는 이르는 이들이 허다하다(p193)."
충분한 논증을 제시하는 책 전체를 옮겨 올 수도, 선명하게 요약할 능력도 없어 조심스럽다. 하지만 ‘한 인격 속에 두 본질을 가지셨던’ 성육신의 신비를 생각해 볼 때 과학에서 오랜 지구론 뿐 아니라 진화론적 유신론도 충분히 신앙 안에서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잣대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이 시대 우리의 잣대로 성경을 판단하고, 그 판단으로 또 과학과 세상을 판단하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성경의 재발견이다. 저자는 ‘7장 기독론: 성경연구의 기초’에서 피터 엔즈의 ‘성경 영감설’을 길게 인용한다. 핵심은 복음주의자들이 세속 모더니스트와 맞서 성경의 완전무결성을 변호하려고 애쓰다가 도리어 지적 모더니즘이라는 아주 강력한 약을 마시고 말았다는 것과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늘날의 우리의 시각이 아닌 성경 자체의 해석적 관습과 가설을 오늘날의 성경 해석을 구축하는 열쇠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이야기를 '성경대로‘ 이해하려면 당대 이전의 텍스트들-에누마 엘리쉬, 아트라하시스, 길가메시, 함무라비 등- 을 연구하여 얻어 낸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원리-특정한 시대, 구체적인 몸을 입고 오심-를 따라 하나님이 모세오경에 영감을 부어주실 때 사용하셨을 생각을 품고 모세오경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날‘이나 ’노아홍수‘의 개념을 이해할 때도 오늘날 우리의 관심이나 목적이 아닌 창세기 저자의 관심으로 돌아가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추상적인 공식이 아니라 이미 구체적인 맥락에 담아 주셨기” 때문이다. 성경 연구에 게으르지 말고, 성경 본문에 대한 다양한 연구에 마음을 열어놓고 지성을 기울여 공부해야 되는 이유다.
내 마음의 산 정상에 바람이 분다. 이젠 신나게 방향을 잡아 달려가는 길만 남은 것 같다. 기독교와 비기독교, 신앙과 불신앙의 세계가 모두 합쳐진 주님의 세계로 나아가길 원하는 책 벗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우주에는 중립지대가 없다. 1제곱센티의 영역, 1초의 시간도 하나님이 소유권 행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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