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진보적 정치성향으로 읽어본.

마키아벨리 군주론 - 이탈리어 완역 결정판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신동준역 군주론을 읽었습니다. 군주론은 개인적으로 영역본을 읽어본 적이 있어 한글 번역본을 일부 대조하면서 본 적이 있는데, 기존 번역은 문맥에 맞지 않거나 어색한 부분들이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신동준역 군주론은 매끄럽게 잘 읽히면서도 글의 논지가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도록 잘 번역되어 있어 아주 좋았습니다. 게다가 충실한 각주 등 보완자료와, 번역에 대한 이야기들도 글의 이해를 돕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만, 번역의 주virtu를 군주의 자질이라는 단어로 일괄적으로 번역한 부분은 재고의 여지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다른 한글 번역에서 채택하고 있는 역량이라는 단어가 더욱 액티브하게 virtu의 의미를 다가오게 하지 않나 느꼈습니다. virtu라는 단어는 왕도와 패도를 함께 사용할 줄 아는 양면적인 군주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자질보다는 역량이라는 표현이 더 낫다는 생각도 합니다.

번역본에 대한 커멘트는 마치고 군주론이라는 책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으로 들어갑니다...

최근 최장집 교수가 안희정 충남도지사에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선물했다 해서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여권이 아닌 진보 성향의 지식인이 차세대 야권 리더에게, 얼핏 보기엔 제왕적 리더십을 강조하는 듯한 인상의 책을 준 것이 다소 의외로 비춰질 수도 있겠습니다. 여권의 실정도 실정이지만 야권의 무능 역시 만만치 않은지라 국민들 역시 기댈 곳 없는 막막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가운데 최교수가 안지사에게 군주론을 선물한 것은 야권에서 현실정치라는 것에 대하여 더욱 깊게 이해하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대했기 때문일 거라 짐작해 봅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군주의 통치 방법에 대하여 쓰고 있지만, 이를 통하여 현실정치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고,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그 밑바탕에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그만의 냉철한 시각을 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 가지 층위層位에서 이 책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생각됩니다. 구체적인 군주의 통치방법과 관련한 부분은 사실 Case by case로 달라질 수도 있는 부분이어서 이론異論의 여지가 많다 봅니다. 예컨대 상비군과 용병과 관련한 부분에서 마선생님께선 일관적으로 상비군이 우월하다고 하시는데, 경우에 따라서 잠깐잠깐 군사작전을 할 때는 유지비용이 많이 드는 상비군보다는 당연히 용병이 더 나을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선생님께서 초반에 열거하고 있는 다양한 국가-통치형태들과 각각의 통치방법은 다소 도식적인 면이 있고 현실적으로는 많은 변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더욱 주목하는 부분은 현실정치에 대한 그의 통찰력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그의 냉정한 시각입니다. 우선 현실정치부터. 마키아벨리가 생각하는 현실정치라는 것은 전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책에서는 외부의 적과의 싸움과, 내부의 적과의 투쟁을 엄밀하게 구분하여 설명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판 역시 적을 방치하면 결국 나의 피해로 이어지는 제로섬 게임의 전장이라는 것을 그는 내내 강조합니다. 개인의 윤리에서는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칸트의 생각이 통용될 수 있겠지만, 현실정치와 국제관계에선 이러한 개인 차원의 윤리로 접근하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가능성이 농후하며 이는 역사에서도 계속 확인됩니다. 마선생님께선 이부분을 이렇게 아주 적절하고 냉정하게 지적을 하고 계십니다.

"인간들은 보듬어 안거나 짓밟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작은 피해에는 앙갚음하려 하나 심대한 피해에는 복수할 생각조차 가지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강하게 해 주는데 원인을 제공한 자는 그 자신의 파멸을 자초한다"

"모든 면에서 미덕을 보여주려 하는 자는 패덕한 자들 사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냉정한 현실정치 속에서 기존의 세력을 뒤집고, 개혁에 성공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과업일 것이며, 이 문제를 마선생님께선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개혁가는 구질서 하에서 이익을 누리던 모든 자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며, 새로운 질서에서 이익을 보게 될 자들은 단지 미온적인 지지를 보낼 뿐이다. 이러한 미온적인 지지는 기본적으로 기존 질서와 법제를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적용했던 적들에 대한 두려움과, 확실한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새로운 것을 신뢰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회의 적인 속성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 변화에 반대하는 자들은 맹공을 퍼붓게 되며, 새질서의 추종자들은 오직 반신반의하면서 방어에 급급할 뿐이다."

"평범한 인민들은 언제나 겉모습과 결과에만 인상받기 마련이다"

개혁이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준엄하게 깨우쳐 주는 명문입니다. 기득권자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개혁의 수혜를 받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마선생님께서 아주 적절히 지적하신 대목입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자신의 밥줄을 지키려는 기득권 세력의 치열함에 비하면, 개혁세력들의 그것은 한참 멀었다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의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선, 개혁세력들 역시 비판만 하기 보다는 무엇인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할 것임을 마선생님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무력을 가진 예언자들은 모두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들은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민중은 천성적으로 변덕이 심하다.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설득하기는 쉽지만, 이에 대해 그들이 계속 확신하게 하는 건 어렵다"

힘이 없으면 만만하게 보는 인간의 본성을 마선생님께선 이렇게 여지없이 까발리십니다. 개혁 세력이 무력을 보유하지 못하면 맥아리가 없게 된다는 말씀. 현재 상황에서는 무력이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 총칼은 아닐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반대파를 때려 잡는 정치검찰, 여론을 좌우하는 언론이 과거의 무력과 유사한 의미를 가지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대의大義를 가지고 국민의 지지라는 이름의 병사들을 잘 조직화해서 싸우는 것이 민주화 세력이 나아가야 할 길일겁니다. 우리나라의 개혁 세력들 역시 현 집권세력처럼 언론과 검찰을 남용해서는 안되겠지만, 최소한 집권기에 언론과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두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DJ, 노무현 정부때 이러한 견제장치를 만들지 못하고 주류언론과 검찰을 방치해 둔 건 분명 실책이었다 봅니다.

책 중반으로 들어가면,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가져야 할 태도를 설명하면서 그의 인간관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군주는 최소한 신민이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신민이 만만하게 보거나 미워하게 하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입니다.

신민이 만만하게 보는 것을 막는 방법에 대해서는 마선생님께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무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민의 미움을 받지 않는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신민의 재산이나 여자를 뺏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 인간이라는 존재는 도의道義보다는 가진 것 뺏기는 데 더욱 민감하다는 걸 마선생님께선 다음과 같은 냉소적인 재담으로 지적하십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의 상실을 더욱 오래 기억하기 마련이다"

아주 간단한 가이드라인이지만, 돌이켜 보면 이를 지키지 않아 권력을 잃은 사례들이 역사 속에 비일비재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례로, 거의 모든 혁명들은 세금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또한, 이는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어떤 고매한 이상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이득임을 직시하지 못한 현 야당이 최근 선거에서 계속 깨지고 있는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민중에 대하여 내내 냉소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민중은 변덕이 심하며 통치자의 행위에 대한 반응의 일관성도 없다는 것이 마선생님의 생각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모호한 통념 또는 환상을 그는 철저하게 때려부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아도 그의 생각은 설득력이 있다 생각합니다. 개혁 세력이 해야 할 일은 이러한 현실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민중을 세력화-조직화해 나가는 것일 것인데, 마선생님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이 문제에 대해 이 정도의 조언을 남겨주고는 계십니다.

"인민을 기반으로 그의 권력을 구축하는 군주가, 그 자신이 용기를 가지고 다른 이의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고 곤경에 처해서도 절망하지 않으며, 미리미리 대비하고, 그 자신의 자질과 그가 건설하는 제도를 통하여 일반적인 충성을 확보할 수 였다면, 인민은 결코 그 군주를 져버리지 않을 것이다."

군주론은 군주가 뭘 해야 하는지 시시콜콜하게 알려주는 매뉴얼은 아닙니다. 수많은 역사 속의, 그리고 당대 사건들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통하여 군주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선생님께서는 군주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여야 하는지, 군주의 목적은 국민의 행복인지, 자신의 행복인지 등등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진 것 같지 않습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오브라이언은 권력의 본질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We know that no one ever seizes power with the intention of relinguishing it. Power is not a means, it is an end.... The object of power is power.

마선생님께서 이 말을 어찌 생각하셨을 지 정말 궁금합니다. 보통 이런 주제의 책들은, 군주는 국민의 행복을 위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말을 겉치레로라도 하는 법인데 마선생님은 결심이라도 하신 듯 절대로 이 말을 안하시더군요. 마선생님께서 바라신 건 말미에 나오듯 강력한 군주가 나와서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외세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강한 나라를 세우는 것인데 마선생님이 바라는 이상적인 국가상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아직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로마사논고에는 나올런지...

군주론이라는 이름과 달리, 현대의 민주정치 제도 하에서도 여천히 관철되는 현실정치의 논리에 대해 솔직하고 명료하게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듭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정치에 비추어 책을 읽다보니 제 자신의 정치성향이 너무 여과없이 드러나, 저와는 정치성향이 다른 분들께서 읽기가 껄끄러웠을 수도 있게다는 생각이 글을 마치면서 듭니다. 그러나 정치라는 것은 민감하지만 워낙 현실과 밀접한 주제라,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는 것 보다는 터 놓고 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말로 제 입장을 변호해봅니다. 저와 정치성향이 다른 분들 생각도 많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