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 지하실에 정착한 후 몽은 작곡 보다는 유진에게 추천할 만한 곡을 찾는 듯 보였다.

 

“중저음이 매력적인 여가수는 찾기가 만만치 않아.”

 

사실 수도 그렇게 느꼈다. 저음과 중음이 중심이 된 노래. 비교적 쉽게 따라 부를 만한 쉬운 멜로디. 그러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샘플을 찾아야했다.

“꼭 미국이나 영국 쪽 말고 유럽 쪽으로 넓혀봐.”

 

혜신이 카페모카를 마시며 무심코 한 마디를 던졌다. 유진에 관한 이야기와 자신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동시에 했던 수로선 지금의 조언이 둘 중 어느 쪽에 관한 것인지 쉽게 분간이 가지 않았다.

 

“광고용 음악은 관심 밖이야. 그런 쪽의 아이디어라면 사절이야. 지금 내가 말하는 건 새로운 여자 가수를 위해 참고할 만한 음악들이야.”

 

즉석에서 혜신이 뮤지션들을 추천했다. 언젠가 그녀의 집에서 들었던 곡들이었다. 후버포닉, 포티쉐드, 텔레팝뮤직 같은 일렉트로닉이나 트립합 계열의 여성 보컬들이었다. 혜신은 양 갈래로 나뉘어진 잭에 각각의 이어폰을 꽂았다. 네 가닥이 된 이어폰을 통해 그녀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음악들을 들었다. 둘은 무작정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수많은 CD를 쌓아놓고 들을 필요가 없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런데 말이지. 이 음악을 들으면 프랑스, 파리가 생각나.”

 

잠시 이어폰을 뽑아놓고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수의 귀에 혜신이 이어폰을 꽂아 넣었다. 혜신이 들려준 곡은 샹송이 아니었다. 하지만 곡에선 혜신의 말대로 가보지도 않은 파리의 느낌이 나긴 했다. 몽환적이고도 로맨틱한 느낌의 곡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자 보컬의 음색이 매력적이었다. 허스키하면서도 몽의 말처럼 러블리한 느낌.

 

그 곡은 ‘카디건스(Cardigans)’라는 밴드의 '러브 풀(love fool)'이었다. 사랑에 빠져있는 여자의 나른하면서도 인상적인 목소리. 곡 자체는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익숙한 멜로디는 거의 출시된 지 20년이 넘는 곡으로 팝 팬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곡이었다.

 

수는 이런 곡을 부르는 유진의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의 유진에겐 조금 어색할지라도 유진의 분위기와는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수는 순간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설레었다. 수와 혜신은 커피숍을 나섰다. 최저가의 커피를 2시간 이상 즐기기에 매장은 너무 좁고 답답했다. 시간은 이미 새벽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둘은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 둘은 각자 자신의 것으로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서울의 밤공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최근 시원하게 내린 비 덕이었다. 수는 자신의 스마트폰의 스트리밍 서비스로 카디건스의 음악을 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밴드의 전곡을 당장 들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할 만 일인가. 거기에 이런 음악을 말해주는 친구가 지금 나란히 걷고 있다. 또한 자신과 비슷한 길을 가는 이들이 함께 있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

 

음악과 함께 퍼지는 긍정의 생각꼬리들이 길게 이어지자 수는 자신이 있는 강남에서 까치산까지 걸어갈 수 있을 만큼 다리에 힘이 올랐다. 그들은 내친김에 한강다리를 건넜다. 강바람을 만끽하며 새벽길을 걷는 건 일찍이 상상해 본적 없는 일이었다.

한강 다리를 다 건널 때쯤 수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유진에게 딱 어울릴만한 곡. 바로 이 곡이 아닐까, 싶은 곡이 바로 자신의 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지로가 내준 숙제는 거의 진척이 없었지만 유진에게 어울릴만한 곡을 찾았다는 건 수확이었다. 수는 그날도 하루 내내 카디건스의 음악을 들었다. 홀로 이어폰으로 듣다가 지하실의 스피커를 연결해 들었다. 공간에 울려 퍼지는 풍부한 소리에 둘러싸여 깊은 공감을 얻어 느껴보고 싶었다.

 

오후를 지나 밤으로 접어들자 유진이 들어왔다. 여전히 지하실엔 카디건스의 음악이 퍼지고 있었다. 유진이 들어왔을 땐 밴드의 초기 음악들로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말랑말랑한 감성의 곡들이었다. 수는 별말 없이 유진의 반응을 살폈다. 유진은 싱크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때? 이 음악?”

 

“글쎄, 느낌은 좋은데.”

 

유진이 언제 왔는지 저만치 누운 채로 수를 돌려봤다.

 

“이 밴드, 나한테 추천하는 거야?”

 

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소화해낼 것 같아. 이런 분위기.”

 

수가 일어나 곡 하나를 선택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이 곡 하나만은.”

 

쓸쓸한 독백으로 시작하는 곡이었다. 유어 루징 어 프렌드 (you‘re losing a friend)......라며 노래 속의 여자는 읊조리듯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 뒤엔 지그시 누른 건반 음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루징 어 프렌드(losing a friend). 친구를 잃는 것. 제목이 그런데. 잘 들어봐요. 일단 드럼 소리를.”

노래가 이어지다가 드럼이 끼어들어왔다. 일반적인 드러밍이 아니라 마치 일정한 박자로 북을 치듯이 탕, 탕, 탕, 탕 두드리기만 했다.

 

"이 소리, 마치 터벅터벅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 같지. 술에 취해 걷는 사람처럼."

 

수가 누운 채로 유진을 보지도 않고 마치 그림을 그리듯 허공을 보며 말했다. 노래는 점차 격정적으로 치달았다. 노래가 고조될 때 일렉 기타의 음이 들어왔다. 기타 음은 어떤 멜로디 라인을 치는 것이 아니라 한 음만을 집요하게 연주했다.

 

“이 기타 소리, 이건 마치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 같지 않아? 술 마시고 머릿속에 울렸던.”

 

“그러니까 이 노래, 내 이야기를 하는 거네.”

유진 역시 수를 보지 않고 허공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수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확실히 어딘가를 건드린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가 이곡, 잘 부를 거라고 생각해?”

 

“이젠 이런 생각 들지 않아? 내가 좋아서 부르는 곡 보다 누구보다 내가 잘 부르는 곡이 있어야겠다는 생각.”

 

수의 말에 유진은 아예 얼굴을 바닥에 묻고는 한동안 엎드렸다. 어떤 생각이 지금 그녀를 움직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다시 한 번 들려줄래?”

 

유진은 수가 추천해준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잘 모르는 영어가사였기에 가사를 먼저 검색해 보려다 일단 느낌을 받아들이기 위해 무작정 들었다. 정말 듣다 보니 그날의 기억이 생생이 살아났다. 탕, 탕, 탕 기교를 부리지 않고 둔탁하게 규칙적으로 내리치는 드럼은 술에 취해 걷는 모습을 떠올렸고 후반부의 탕, 타닥, 탕, 타닥, 탕,타닥으로 변주된 부분은 공교롭게도 다리까지 다쳐서 절뚝이는 모습을 상기해 주었다. 특히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에서는 한 음만을 집요하게 치는 기타가 등장했다. 수 말대로 그날 술에 취해 머리 속에 울리던 망치 소리처럼 들렸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만든 노래 같았다.

 

절정부에서 울부짖듯이 흐느끼며 고조되는 부분은 감정을 누르며 듣기가 힘이 들었다. 처음 집을 떠나 새로운 거처를 잡고 방안에서 음악만 들으며 지냈던 그날들이 떠올랐다. 죽은 그와 관련된 곡들을 들으며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던 자신이.

곡을 반복하여 듣는 동안 유진은 어느새 가슴 속에서 덩어리졌던 것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단지 그때와 다른 건 그런 거였다. 슬프지만 그냥 슬프고 싶지만은 않은 기분, 괴롭지만 그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대로 뚫고 가보자. 이길 밖엔 없어.”

유진이 중얼 거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