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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어김없이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20세기식 장터는 태어나본 적 없는 시대였지만 마치 경험했던 것 같은 익숙함이 있었다. 20세기식 기차를 탄 사람들이 20세기식의 기차역에서 내렸고 많은 이들은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한 달에 하루쯤 시장에서 나는 야채나 곡물 등으로 아침을 지어 먹곤 했다. 그것이 내 조상들을 좀 더 느낄 수 있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어쩌면 곧 그들이 있는 피안의 세계에 나도 곧 합류하게 될지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해가 떠오를 무렵 나는 싱싱한 아스파라거스와 양상치를 듬뿍 구했다. 요즘은 잘 먹지 않는, 옛날 방식으로 만든 하몽도 구했다. 나는 종이봉투를 한 아름 안고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운이 좋은 날엔 생각지도 않은 뭔가를 더 구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때 사람들 사이로 두리번거리던 두 눈과 마주쳤다. 이제 스무 살이나 됨직한 젊은 여인의 눈이었다. 누군가를 찾던 눈이었다. 눈빛이 서로 맞닿는 순간, 나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녀의 두 눈은 나에게서 멈출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누구도 새벽녘 시장에서 사랑을 발견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평생에 단 한 번 찾아온 운명적인 사랑을. 60여 년을 산 끝에 찾아온 순간이었다.

나는 종이봉투를 꽉 움켜쥐고 침착하게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점점 걸음을 옮길수록 지나치는 사람들이 흘러가는 구름처럼 걷히고 그녀의 제 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거침없이 그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 역시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채 꼼짝하지 않고 서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갈 기세로 다가갔다.

 

그녀의 인상은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던 느낌이었다. 새로운 만남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있었지만 그런 정염에 따르던 두렵고 낯선 느낌은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웠고 거침이 없었다.

아직 때묻지 않은 정결함과 고귀함이 살아있는, 마치 18~19세기에나 있을 법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얀색 원피스와 검은 구두를 신었고 검은 색의 생머리가 단정했다. 마침내 그녀와의 거리가 한 뼘 이내로 좁혀졌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초록빛 눈을 가진 그녀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나의 가우디 풍의 저택으로 향했다.

높고 검은 철제 대문 앞에 차를 세운 후 손수 저택의 문을 열었다. 차를 대문 앞에 세운 후 그녀와 함께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여자와 함께 정원을 걸어본 것이 몇 십년 만의 일인가.

이곳을 방문한 여자들은 하나같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두리번 거렸다. 이런 고전적인 공간을 실제 생활의 공간으로 생각한 이는 없었다. 나는 여기서 먹고 자고 실제로 산다고 말했고 그들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

보통 50대를 넘기면 20세기 혹은 21세기 풍의 저택을 별장의 형태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특이하게도 어릴 때부터 그런 시대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다. 부모님의 유산으로 지어진 이 저택엔 다리를 움직여 걸어 다녀야 하는 계단과 자동으로 처리되지 않는 수동식 난방장치와 중앙보건기구 시스템과 연결된 생체센서가 부착되지 않은 화장실, 부엌과 침대 등이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갖고도 이런 불편을 감내해야하는 것이 사람들엔 변태로 보였던 걸까? 그런 질문도 20여 년 전부터는 해보지도 않았다. 그냥 홀로 지내면 되었으니까.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천천히 내부를 돌아보았다. 1층엔 오래전부터 전해온 선조들의 그림과 사진들이 가득했다. 각종 기념품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가족 박물관과 다를 바 없다. 그녀는 별도의 설명 없이도 익숙하게 그것들을 구경했다. 마치 타인의 공간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았던 공간을 확인하는 듯 느껴졌다. 그녀는 사뿐히 걸으며 철제 난관과 오랜 나무 장식을 손으로 쓸었고 누군지도 모르는 초상화에 시선이 뺏긴 눈엔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나는 어떤 방해도 하고 싶지 않아 그녀 뒤로 물러났다. 마치 수 십 년 간 홀로 집을 지켜온 시종이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궁을 찾은 왕비를 영접하는 순간과도 같았다.

조금은 떨어진 채로,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느끼는 이것은 평생에 한번, 사랑에 빠지고픈 열망 때문에 만들어진 감정은 아닐까? 수 십년 동안의 외로움이 지긋지긋했기에 이번만큼은 사랑이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녀를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이 끝나고 드러나 넓은 공간에는 노란색 텐트 하나가 지어져 있다. 나는 그녀와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 안은 보여주기 민망한 것들이 가득했다. 어린 시절 갖고 놀았던 장난감과 그림과 동화책들 간단히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침대와 빵과 음료수 그리고 과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텐트 벽에 붙어있던 그림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래요. 우린 늘 이런 공간에서 살기를 원했지요.

 

사실 60이 넘은 지금도 가끔 이 텐트 안에서 들어와서 몇 일을 살기도 했다. 부모를 여의고 이 저택을 짓고 살았을 때부터 이 텐트는 단 한 번도 걷혀진 적이 없었다. 젊은 시절 나는 몇몇 여자를 데리고 이 텐트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그녀가 진정으로 나의 텐트 안에서 느끼는 안온함을 느끼고 있음을. 그녀를 제외한 여자들은 오로지 텐트 밖으로 나갈 생각뿐이었다. 몇몇은 나에게 정신의학자와의 상담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녀는 나와 침대에 걸터앉아 그림과 장난감을 구경했고 과자를 먹었다. 그녀가 너무도 쉽게 공간에 익숙해지자 오히려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보여주고 싶은 것들에 잘 적응하는 그녀를 보자 더 이상 숨겨할 무엇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느새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곤 3층 한 가운데 있는 조각상 앞에 서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대리석상은 한때 아기를 잃었던 엄마가 다시 아기를 만나게 되는 순간을 빚어놓은 것이었다. 아이를 품은 엄마의 감사와 환희에 찬 표정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다는 평을 들었던 작품이었다.

 

그런 전설을 들었어요.

저건 원래 대리석 상이 아니었다지요.

100년의 시간이 흐르고 엄마가 아이를 안고 그대로 굳어서 저렇게 되었다죠.

 

그녀는 숨을 죽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믿음에 대한 눈물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 우리는 정오가 넘어서야 식탁에 앉아 식사를 했다. 어쩐 일인지 그녀와 나의 이름과 사는 곳 등은 묻지도 않았다.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언제 이집을 떠날지에 관해서도 묻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그녀에게 쉴 방을 안내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때가 그날 하루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곧 감정은 급격한 경사를 타고 내려앉았다. 돌아서 방을 나가려는 나의 등에 대고 한 그녀는 말했다.

 

저는 로봇입니다.

 

그 한 마디에 나는 다시 뒤돌아 설 수 없었다. 잠시 얼굴을 감싸쥐고 한 숨을 쉬었던 나는

그녀를 침대에 남겨 두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에 기댄 나는 주저없이 한 인물을 떠올렸다.

 

폰 슈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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