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로는 사무실에 사람에 거의 없을 땐 홀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아이데이션을 하기도 했다. 특히 버브의 ‘비터 스윗 심포니(Bitter Sweet Symphony)’를 좋아했다. 한 번 들으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현악의 선율를 바탕으로 경쾌하게 진행되는 곡은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뇌의 회전 속도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지로가 이곡을 사랑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6분에 해당하는 이곡을 딱 10번 들으면 1시간짜리 일이 끝나는 것이었다. 실재로 그랬다. 이곡을 한 번 재생하면 10번이 기본 단위였고 재생이 끝나면 아이디어는 정리되었다. 다행히 20번 혹은 30번 재생하는 일은 없었다.

그 외에도 2시간짜리 일을 할 땐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의 음악들을 자주 이용했는데 반복적인 멜로디에 크게 높낮이가 없으면서도 비트감은 있었다. 너무 쳐지지 않는 음악이라 깊이 생각에 빠질 땐 클래식 음악보다 좋다고 했다. 특히 애청했던 음악은 5분 30초짜리 티어드롭(teardrop), 7분 51초짜리 프로텍션 (protection)등 이었다. 수가 들어봐도 아이데이션 용으로 나쁘진 않았다.

 

회의시간이 되면 수와 이지로는 서로의 아이디어를 펼쳐놓았다. 이지로의 순발력은 수가 보기엔 경이적이었다. 마치 모든 품목과 매체에 맞는 아이디어와 카피가 이미 준비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가 말하는 1시간에서 3시간이란 시간은 어쩌면 그가 갖고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들을 단지 구성하고 배치하는 시간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이지로가 내놓은 아이디어는 적절했고 재미있었다.

수의 아이디어는 독창성은 있었지만 양도 적었고 적절성이나 재미 면에서도 떨어졌다. 이지로는 전혀 수의 아이디어에 사견을 달지 않았다.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법도 없었다. 자신의 아이디어 몇 개와 수의 아이디어 중 살릴만한 것을 즉석에서 살려서 회의를 끝냈다. 회의가 끝나면 즉시 영업과 기획담당 AE를 불러 자신의 안과 카피를 팔았다. 그리곤 그 안들을 디자이너에 넘겼고 시각화에 대한 부분은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안타제조기였다. 매번 들어선 타석에서 그는 5할대 이상의 안타를 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지로가 내놓은 안들은 광고주에 들어가면 절반 이상은 먹혔다. 물론 스위벨의 경우는 좀 달랐지만.

이지로의 안을 받아본 광고주는 괜찮다는 반응이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또 다른 안을 요청했다. 언젠가 스위벨 아이데이션으로 진이 빠진 기획팀과 제작팀들이 한풀이 삼아 회식을 한 적이 있었다.

 

“광고란 건 열정으로 하는 게 아니야 분노로 하는 거지.”

 

제법 술이 오른 이지로는 만난 지 두 달이 지나서야 수에게 사적인 대화를 걸어왔다.

 

“크리에이터란 늘 자신이 만드는 아이디어의 값어치를 지켜야 되는 거야. 우리가 내는 아이디어는 정말 비싸고 소중한 거라고. 그런데 광고주 놈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런 아이디어를 요구해. 마치 파도파도 계속 솟아나는 우물물정도로 취급하지.

우린 말이야. 그런 거에 분노해야 되. 물론 퀄리티있는 아이디어를 만들고 나서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멍청한 크리에이터는 밤낮 광고주가 준 문제로 씨름하지 자기 몸이 다 아작 날 때 까지 말이야. 크리에이터의 머리는 적정한 타임테이블에 따라 쓰여야 되는 거야. 그래서 내가 3시간을 넘기지 말자는 것도 그런 이유지. 그딴 인간들에게 3시간 이상을 머리를 쓰는 건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는 거란 말이다.”

 

수는 이지로가 사이보그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생각이란 게 딱 시간에 맞게 제어가 되긴 하나요?”

“쉽지 않아. 그래서 초기엔 노력이 필요하지.”

“그래서 저에게도 그런 노력을 요구하는 건가요?”

“아니, 절대. 난 그런 타입의 인간은 아니야. 그건 어디까지나 내 방식이야. 일단 넌 내가 주도해가는 스타일에 당분간만, 내 방식을 따르란 말이지. 일단 뭐, 내 조수니까. 난 너의 방식도 있다고 믿어. 그건 네가 앞으로 찾아봐야겠지만.”

 

취중에 이지로의 말은 자연스럽게 반말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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