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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에 면접이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던 날 오후에 들어왔던 영입제안이었다. 회사사람들은 그래도 갈 때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했지만, 수의 감정은 전혀 다행하지 못했다. 그땐, 조난당한 우주선에서 인력이 이끄는 쪽으로 이를 악물고 움직이기보다 모든 것을 놓고 인력 바깥으로 몸을 맡기고 싶었다.

 

시간이 임박하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자켓을 입었지만 넥타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수는 자켓 안쪽에 얇은 니트를 입을까하다 그냥 셔츠를 입었다. 머리를 감아야했지만 도저히 그럴 기분이 나질 않았다. 그나마 음악으로 잡아놓은 두뇌의 균질이 물에 씻겨나갈 것 같았다. 수는 얇은 비니를 썼다. 백팩과 보스턴 백을 들어다 놨다했지만 결국 어떤 가방도 들지 않았다. 그저 스마트폰과 지갑, 거기에 이어폰 하나만 챙겼다.

면접을 가는 동안 ‘하이 앤 드라이’ 한 곡만을 들었다. 하루 종일 수없이 들었던 곡이지만 바깥 풍경과 함께 재생되자 또 다른 느낌이 펼쳐졌다. 도시의 곳곳은 ‘하이’했고 ‘드라이’했기에 한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다.

 

면접을 보기로 한 회사는 시청역 근처의 빌딩에 위치했다. 17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투명한 자동문 너머로 어쩌면 자신이 일하게 될지도 모를 사무실이 보였다. 파티션이 높게 솟아있었고 덕분에 사람들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멀리 가습기의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동문 바로 뒤로 레이스가 잔뜩 달린 짧은 스커트를 입고 출입용 카드를 목에 맨 여직원이 걸어가고 있었다.

인사담당자는 50대로 보였다. 같은 광고회사 소속이겠지만 광고제작 파트와 인사행정 파트는 분리되어 있었기에 담당자는 수에게 존댓말을 썼다. 담당자는 대충의 경력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 관해 물었고 연봉 조건과 회사의 굵직한 방침에 관해 짧게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부터 출근이 가능한 지를 물었다.

수는 그가 던지는 말의 내용보다 건조한 톤에 집중했다. 그 건조함 속에 수는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다. 17층에 올라오는 순간 음악을 껐지만 머릿속엔 잔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수는 그 잔음의 볼륨을 의도적으로 올렸다. 묵묵히 듣는 척 하며 고개를 15도 숙인 채 계속해서 뇌 속에서 울리는 노래를 들었다. 그가 말하는 잡다한 조건들은 한쪽 귀를 통해 들어와 다른 쪽 귀로 흘려보내고 대신 머릿속 잔음들에 집중하는 것으로 건조한 시간을 이겨냈다.

 

회사를 나와 찬바람 속을 걸으니 서서히 머릿속의 음악이 멈췄다. 제정신이 들었는지 잡히지 않았던 거리의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경적소리와 조잡한 배달용 오토바이의 엔진소리와 전화통화를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와 구두소리까지.

현실적으로 뽑힐 가능성은 희박해보였다. 요즘처럼 직장 잡기가 쉽지 않은 때에 그렇게 무성의하게 면접에 임한 사람을 뽑아줄 회사는 없을 것이었다. 설사 뽑힌다고 해도 그런 회사에선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다만 먹고 살아가야할 미래와 고기와 밥을 먹었음에도 또 다시 밀려오는 배고픔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집으로 돌아온 수는 복잡한 마음에 전화기부터 껐다. 전화를 걸 사람도, 받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솔직히 면접 본 회사에서 전화가 올까봐 두려웠다. 만약 내일부터라도 나오라고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수는 전화를 받으며 심정적인 자신과 현실적인 자신이 부딪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심정적으론 그러고 싶진 않아도 현실적으론 네, 내일부터 출근하죠 뭐, 혹은 기껏해야 3일정도 쉰 후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수는 그렇게 타협하는 자신을 보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전화가 안 오면 어떨까? 그것 또한 두려운 일이다. 그건 세상으로부터 영영 멀어져버리는 전조가 될 지도 모른다. 세상과의 끈은 잠시 방심한 사이에 영원히 멀어질 수도 있다. 엄마와 함께 어떻게든 살아온 이 세상 속에서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 역시도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전화가 오는 것도 두려웠고 전화가 오지 않는 것도 두려웠다. 엄마에게 회사에서 퇴사했던 것을 알리면 뭐라고 할까. 엄마의 대사는 예상 가능했다.

‘뭐,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는 거야. 그런데 너, 밥은 먹었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골치 아픈 현실의 드라마에 나서야할 주연배우는 엄마였지만 디테일한 시나리오를 쓰는 쪽은 수였다. 엄마의 생존방식은 미스터리에 가까웠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한때는 엄마 스스로 돈을 벌기도 했고, 어떤 때는 수가 알 수 없는 경로로 돈이 들어오기도 했다.

 

엄마에게 돈은 철저히 수단이었다. 벌기위한 어떤 원칙도 없었다. 그저 기분 좋게 먹고 잘 잘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기껏해야 1년 치의 미래만 걱정했고 그 이후를 걱정하는 엄마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삶이 언젠가 활짝 필거란 기대보다는 자신에겐 최악의 경우는 닥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운 좋게도 모자에게 그런 최악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그런 엄마에게, 뭔가 안정되고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를 증명하고 싶었는데.

밤새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단순한 일이야. 직장을 그만 두었고 다시 직장을 얻으면 끝이 나는 거야. 직장을 구할 기회는 아직 많아. 난 신입도 아니고 이미 경력사원이잖아. 엄마의 방식에 입각해 갖가지 가능성들을 걱정과 염려 사이에 주입해 봤지만 가능성과 염려는 하나의 생각으로 정리되지 않고 불규칙한 나뭇가지 형태로 뻗어나갔다. 그 생각들의 움직임은 더 맹렬하고 집요하게, 지금껏 미뤄둔 생각들까지 모두 끄집어 올려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도대체 이게 삶에 있어 최선인지. 그런 따위의 철학적인 범주로 파고들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논리를 펼쳐보아도 결론이 나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수는 그렇게 허우적대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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