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눈을 떴을 땐 감옥 안이었다.

뒷골이 약간 당긴 것 말고는 오랜 잠을 자고 일어난 느낌과 같았다.

그는 일어서서 뒷골을 쓰다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서서히 기억을 살리기 시작했다.

 

맞다.

나도 감옥 안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과 처지가 달랐다. 그는 누군가를 고문 중이었다.

잡아다 놓은 놈의 몸에 신나게 전기를 흘려보내고 있던 것까지 기억해 냈다.

인내력이 대단한 놈이었다. 끝까지 입을 다물고 신음소리를 내지 않다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본능적으로 입을 떨며 신음을 흘렸다. 그 순간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는 것을 직감하며 살짝 쾌감에 젖었던 것까지 기억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수많은 놈들을 고문하고 죽여 왔다. 이젠 처음에 듣던 비명소리의 짜릿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젊은 놈, 늙은 놈, 여자나 어린 것까지, 수도 없이 비명소리를 들었지만 이젠 어떠한 형태로든 처음 느꼈던 강렬한 희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어서 기억이 살아났다. 한참 전기고문이 진행되던 중 번쩍거리며 점등하던 전등이 터지고 갑자기 뭔가 폭발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폭탄이 터졌던 걸까. 전기고문기에서 오작동을 일으켰나. 그리곤 정신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닫힌 감옥 문을 슬며시 밀어보았다. 문은 아무 저항도 없이 열렸다. 그는 잠시 주춤하다 밖으로 나왔다. 그의 앞으로 길게 펼쳐진 복도가 있었고 양옆엔 수도 없이 많은 감방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인기척은 없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밖으로 나온 그는 잠시 놀랐다.

삭막할 것으로 기대했던 외부는 공기부터 온화했고 잘 정돈된 잔디가 드넓게 깔려있었다.

높은 담장도 없었다. 다만 지평선 부근은 뿌연 안개가 끼어있어 그 너머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곧 큰 대자로 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1시간쯤 흘렀을까. 한편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내들의 실루엣이 뿌연 안개구름 저편에서 점점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어떤 공포나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그들의 접근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들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잘 것 없는 사내들이었다. 허약하고 굶주린, 숱하게 그에게 당하고 죽어갔던 인간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놈들인지도 몰랐다. 무리의 숫자는 대충보아도 여섯 정도로 보였다. 그들이 작심하고 그에게 덤비면 승산이 없었지만 그는 두렵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은 떼거지로 몰려와도 별게 없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여기가 어디요.

 

그가 누운 채로 그들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앞니가 빠져서 발음이 정확하지 못한 사내 하나가 그의 말을 흉내내더니 고개를 돌려 무리에게 야 여기가 어디라고 묻는다, 라며 킥킥 댔다.

 

멍청한 새끼.

 

그는 무리 중에서 누군가가 그를 두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오냐. 니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 어디에도 아픈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잘 먹고 잘 잔 사람마냥 에너지가 충만했다. 190가까이 되는 키도 그대로였고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체중도 그대로였다. 그는 옷을 몇 번 툭툭 털고는 무리 앞으로 나갔다. 그들이 조금 움찔하는 듯 보였다. 그는 주먹을 쥐어 보았다. 어느 놈부터 보내버릴까. 그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한 놈을 지명했다. 멍청한 새끼라고 말했을 만한 놈이었다. 눈이 죽 찢어진 것이 교활해 보였다. 저런 놈은 일단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그는 천천히 사내 앞에 섰다. 눈이 찢어진 사내는 마치 심판을 받기 위한 이처럼 어떠한 방어 동작도 없이 담담히 그의 앞에 섰다.

그는 한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둘은 멍청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갑자기 무리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킥킥 거리던 웃음은 잠시 웃음을 억누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곧 박장대소로 바뀌었다. 그는 어리둥절했지만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웃던 그들은 다시 무리를 이루어 천천히 오던 곳과 반대방향으로 사라졌다.

 

뭐가 잘못된 거지.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깨달았다. 그에게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분노가 아니면 하다못해 짜증이라도 생겨야 자신의 폭력에 시동이 걸릴 것이 아닌가. 거대한 자동차도 최초에 약간에 스파크가 있어야 움직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지금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솟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 새로운 곳에 와서 적응이 안 된 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또 다시 그놈들을 만나겠지. 이번에 만나면 가만 두지 않겠어.

 

그는 주먹을 감싸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번엔 어떤 인간들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선가 낄낄거리는 소리는 들리는 듯 했지만 막상 고개를 돌려보면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한참을 걷다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놈들이라도 따라 갈 걸 그랬나.

그래 맞아. 그놈들을 따라갔었어야지. 가만, 아까 어느 방향으로 갔더라.

그는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그놈들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뛰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지친 것도 아니고 목이 마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깨달았다. 이번엔 절망감과 공포감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절망감과 공포가 있어야 몸에 지속적으로 드라이브를 걸 수가 있는데 말이다. 마치 자동차에 가속페달이 필요한 것처럼. 그에게 이상할 정도로 평온함과 담담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다시 뛰어보았지만 얼마 못가 다시 걷게 되거나 서게 되었다.

 

절박함이 없는 추적이란 가능하지 않았다.

 

그는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자욱한 안개는 더욱 짙어져 있었다. 작은 물체가 잔디밭을 기어가는 소리였다. 때론 느리고 때론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벌레처럼 바짝 몸을 바닥에 붙이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배를 대고 기었다. 잔디를 스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전진 했다. 곧이어 움직이는 실체가 보였다. 아직 걸음마도 못하는 아기였다. 벌거벗은 아기는 어떤 목표지점도 없이 기어 나가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그 아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빨리 뛰어가면 아기를 안을 수 있을 것이다.

 

아기가 향하는 앞으로 절벽이 드러났다. 그는 뛰기 시작했다. 거리는 약 100미터쯤이었다. 빨리 달리면 아기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곧 뛰던 그는 멈춰 섰다. 이번에도 절박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기는 더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조금도 빨리 뛰지 않았다. 곧 아기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조금의 동정심도 생겨나지 않았다. 아기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도 없었다. 인간들을 학살할 때, 처음 엄마 품에 안긴 아기까지 죽이고 나서 그는 눈물을 흘렸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 괴로웠던 순간들. 그땐 그런 감정을 잊기 위해 몸부림쳤었다. 그래서 수없이 죽이고 고문한 끝에 이뤄낸 덤덤한 승리들. 그러나 이젠 다시 끄집어내고 싶어도 끄집어 낼 수 없는 감정이 되어버렸다.

 

아, 이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릴 수 없단 말인가.

 

그는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처음 있던 감옥으로 들어갔다.

감옥 안은 그대로였다. 아무도 없었고 그 누구도 들어올 기미도 없었다.

그는 감옥 문을 걸어 잠그고 바닥에 누웠다.

그리곤 중얼거렸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세상이군.

싫지도 좋지도 않은.

설렘도 없고 우울도 없는.

차라리 슬퍼지는 것은 축복이 되고.

화를 내고 폭발하는 감정은 지복이 되는.

그러니까 아무런 내적 분비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인 거지.

 

지난 생에서 너무 많이 써버린 거야.

그 아드레날린 따위의 물질 말이지.

몇 생에 거쳐서 쓸 것들을 다 써버린 거야.

 

그렇군.

이게 바로

지옥이군.

 

그는 본능적으로 눈물을 기대했지만

예상대로 눈가에 맺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