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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역사를 경계하여 미래를 대비하라, 오늘에 되새기는 임진왜란 통한의 기록 ㅣ 한국고전 기록문학 시리즈 1
류성룡 지음, 오세진 외 역해 / 홍익 / 201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렇게 역사서를 진지하게 읽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역사 속에
담긴 스토리자체는 매우 흥미롭고 호기심을 끄는 것이 사실이다.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역사서를 읽지 않는다. 학교를 다니며
교과서에서 읽었던 역사는 받아들이기에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교과서를
읽으며 얼굴을 붉힌 기억이 있다. 덕분에 역사에
대한 지식이 그리 많지 않다. 역사에 대해
잘못된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해 사극 드라마나 역사 소설은 일부러 읽지 않는 편이다. 내가 역사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이는 창구는 오로지 신문뿐이었다.
징비록을 읽게 된 건, 평소 바빠서
책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엄마가 노트에 메모까지 해 가며 징비록에 관심을 두었던 게 시발점이었다. 그렇게
엄마에게 선물할 책으로 점찍어뒀었다. 그리고 바로
그 주에 참여하고 있는 독서 모임에서도 징비록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징비록은
소설만 읽던 내가 처음으로 내 손으로 구입한 역사서가 되었다.
징비록을 읽으면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징비록은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경계하고 대비하고자 기록된 임진왜란 통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징비록을 기록한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군무를 총괄하던 임시 벼슬인
도체찰사였다. 그는
도체찰사로서 전쟁과 관련된 중요한 임무들을 맡았고, 여러 중책을
맡은 신하들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토록 자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그는 훌륭한
정치가이자 행정가였는데, 왜란 당시
그의 제안은 전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을
추천한 것도 류성룡이었다.
징비록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읽은 단어는 '도망'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선은 지금의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관리의 자식이
관리가 되는 세습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왜란
당시 중요한 임무를 맡은 이들은 대부분 엘리트 코스를 밟고 편하게 그 자리를 꿰찬 자들이 많았다. 더욱이 당시
조선은 오랫동안 매우 평안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을 얕잡아 봤다.
하지만 막상 일본과 마주하니 일본은 그 수가 매우 많았고, 조총이라는
좋은 무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장수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겁을 집어 먹고는 도망치기 바빴다. 꼬리가 잘리면
살아남을 수 있지만 머리가 잘리면 살아남지 못한다. 머리부터
도망치니 조선의 군사들 또한 활 한 번 쏘아보지 못하고 모두 도망치기 바빴다. 징비록 전반의
내용이 그렇다. 조선의
군사들은 활 한 번 쏘아 보지 못했다. 심지어 저항도
없이 일본인의 칼을 받았다.
물론 모두가 도망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나라를 생각해 열심히 싸운 이들도 많다. 하지만
웃기게도 그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에 의해서 그들의 머리가 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조선이라는 나라보다 본인들의 허울좋은 권력과 자존심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온 이후 첫 승리를 이끈 신각은 조정에 의해 참수되었다. 김명원 휘하에
있던 신각은 김명원이 왜군에게 패한 후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갔고, 왜군을
무찔렀다. 그 후
김명원은 신각이 마음대로 자신을 떠났다며 보고하였고 조정은 그를 참수하기로 한 것이다. 징비록 속에는
이러한 예가 셀 수 없이 많다.
당시 임금인 선조부터가 그러했다. 선조는 한양을
지키고 있지 못하고 결국 피신했는데, 그리 떳떳하지
못했다. 본인은 결국
피신을 했는데 나라를 위해 열심히 싸운 이들을 못 마땅해했다. 그 안에는
이순신 장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종3품 종성 부사인 원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내막에는, 원균은
우수영의 배를 버리고 이순신 장군에게로 도망쳐나왔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에게 경상도 해역의 왜군을 치러 가자고 부탁한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명령이 없었기에 그 부탁을 거절하고 출진을 보류했는데, 그 거절이
원균의 우월감에 상처를 낸 것이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더욱이 이순신
장군은 첫 번째로 출전한 전투인 옥포 해전에서 원균을 누르고 주장이 되었는데, 이에 원균과
원균의 부하들이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지휘 통제를 무시한다고 고발해 버린 것이다. 그 이후
계속되는 승전에도 둘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순신 장군이
수군의 전력이 모자라 왜군을 한 번에 몰아내기에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왜군의 함대를 유인해 함포로 궤멸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따라서
접근전을 피하고자 했는데. 이를 본
원균이 이순신 장군이 곧바로 왜군을 토벌하지 않는다고 모함했다. 이 말을 들은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해임했으며 원균이 그 자리를 꿰찼다. 그
후, 원균 또한
지금은 왜군을 피해야 할 시기란 걸 알았으나 곧바로 토벌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순신 장군을 해임시켰기 때문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군과 싸웠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선조는 전란 와중에도 무책임했던 기득권 인사들의 행동을 미화하며 그들의 공로를
강조했다. 자신의
무책임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본인이
떳떳하지 못하니 본인과 같이 떳떳하지 않은 이들을 가까이 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
해임 후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완패했음에도 선조는 원균을 일등 공신에 책봉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 같은
의병장들은 외면하며 선무공신으로 선정하지 않았다.
징비록을 읽으며 한바탕 눈물을 쏟아냈다. 만약 현재의
우리나라에 큰일이 터져도 똑같은 실패를 반복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라보다
본인의 권력과 체면만 중시하는 기득권들이 스스로의 행동을 부끄러워한 나머지 진짜 훌륭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본인과 같은 무책임한 사람들을 미화하며
나라를 갉아먹는 역사가 반복될 것 같다. 이러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한다. 장난스레
들려오는 '전쟁나면 외국으로 튀어야지',
'가장 돈 많은 정치인이 장기간 외국에 있으면 전쟁 나는
거다' 등의 말을
장난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