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곶의 찻집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모리사와 아키오라는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어봤다. 화창한 날, 커피 한 잔과 함께 여유로움을 즐기며 읽기 딱 좋은 소설이다. 표지에 적힌대로 힐링하기 좋은 소설이었다. <무지개 곶의 찻집>은 저마다의 걱정거리를 안고 찻집을 들른 손님들과 에쓰코씨의 따뜻한 이야기다. 


찻집의 주인 에쓰코의 남편은 화가였다. 그는 타계하기 전 그림 한 폭을 남기고 갔는데,  그 그림엔 무지개 곶의 놀과 무지개가 담겨 있다. 에쓰코는 그 무지개를 보기 위해서 무지개 곶에서 찻집을 운영하며 무지개를 기다리고 있다. 에쓰코씨는 저녁만 되면 창밖을 바라보며 무지개를 기다린다. 

에쓰코의 조카 고지는 지금 이대로라면 에쓰코씨가 영원히 무지개를 볼 수 없다는 것과그림과 똑같은 무지개를 볼 수 있는법을 알고 있지만 에쓰코에게 말하지 않는다. 에쓰코가 그 사실을 알게되면 지금처럼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지의 행동을 보며 난 며칠 전에 읽은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의 `목적론`이 떠올렸다.  <미움받을 용기>에서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단어 자체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며 떠올린 것이다.


에쓰코의 목적은 무지개를 보는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곶에서 살고 있다. 고지는 에쓰코의 목적 자체보다는 그 목적을 위한 과정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 꿈을 꾸는 것과 꿈을 이루는 것, 어느 쪽이 더 달콤할까. 보통은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행을 갈 때는 그를 위해 준비할 때가 가장 즐겁고, 크리스마스도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이 가장 즐겁다.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 중에서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꿈이 이뤄진 상태`를 배제할 순 없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정도 소중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에쓰코에게는 기존의 단골 손님들과 소설 속 화자였던 사람들 그리고 조카인 고지까지 마음 따뜻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모두 본인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찻집에는 에쓰코씨만 남겨진다. (고타로의 집은 찻집 밖에 있다.) 밤이되면 외로운 시간을 홀로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런 에쓰코에게 무지개를 보는 것과 무지개를 보기 위한 시간 중 그녀에게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볼 만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문득, 내가 아직 교복을 입고 있었던 시절, 내가 쓰고 싶었던 소설이 이런 소설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전해줄 수 있는 소설 말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전공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소설보다는 전공자들을 위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지개 곶의 찻집>은 클리셰를 깨지 못한 소설이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메타포가 난무한다. 전혀 생각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시간들은 소설이 전해주는 그대로 받아들이게끔 되어 있다.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이유도 그때문이다. 수준 높은 작법들이 가득한 소설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가끔은 이런 편안히 읽을 수 있는 소설도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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