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이전의 세계 -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
손민석 지음 / 바오출판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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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에 공부하느라 난도질하면서 메모, 표시를 할 정도로 열심히 읽었다. 재미있는 독서 경험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책값 이상은 충분히 했다)



별점을 4개 주려다가 결말이 실망스러워서 3점을 주게 됐다. 모든 글은 저자의 배경과 관련있다고 생각하며 서평도 마찬가지라고 보기 때문에 관련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겠다. 손민석 씨는 나랑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많이 다르다. 1991년생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아마 나보다 한 학번 위일 거다. 10년 넘게 마르크스를 공부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손민석 씨가 다루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전들 다수도 내가 논문을 쓰면서 많이 다루었던 텍스트들이다. 나는 특히 석사논문을 쓸 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전들을 중심으로 비판적 문헌 검토를 진행했는데, 그때 당시의 텍스트들과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텍스트에 대해 관심두는 부분도 정말 흡사해서 많이 놀랐다.

이상의 점들이 공통점이고 차이점들을 열거하자면 우선 정치적인 차이가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고 이것이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 사회적으로 내 정체성을 가늠하는 1차적인 규정이다. 이에 비하면 손민석 씨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닌 듯하다. 손민석 씨는 자신이 우파로 전향하더라도 마르크스를 버릴 수가 없다고 하는데(그러면 우익 마르크스주의인가?), 그 입장 자체는 존중할 수 있지만 그 존중과 별개로 다른 사람들이 손민석 씨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인정하는 게 온당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마르크스와 완전히 동기화가 되었다는 손민석 씨는 이런 말을 하면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나는 손민석 씨의 그 입장 자체는 존중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한테 마르크스주의자가 맞냐고 할 때 손민석 씨가 그것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선 스스로 좀 더 자기객관화가 된 상태에서 그 상황을 조망해보는 게 어떨지 조심스레 말을 건네본다. 이 문단은 손민석 씨를 설득하기 위한 게 아니라 서평을 읽을 독자한테 하는 말이므로 참고삼아 하는 것이라는 점도 양해바란다.

자본 이전의 세계는 임금노예제를 넘어 임금농노제로 가는 방향을 제시하는데 나는 이 또한 의의는 있다고 본다. 다만 내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또한 얘기하자면 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이라면서 공산주의를 말하지 않고 임금농노제를 얘기하는가? 나는 이 지점에서 이 책을 읽지 않고 반공주의자들이 폄하하는 게 부당하며, 다른 한편에서 이 책이 체제에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임금농노제 개념이 어휘상으로는 매우 새롭기는 하지만 개혁주의의 또 다른 이름 아닌가? 혹자의 비판대로 임금농노제와 자본주의가 결합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100%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런데 무엇보다 마르크스는 임금 제도의 철폐를 주장한 사람 아닌가(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의의는 있다고 본다. 비판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사람도 있어야 하고 학문적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학문의 다양성과 발전은 밀접한 관계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만 더 첨언하면 누군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할 때 어디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 볼 것이냐는 정치적인 문제기도 하다. 학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150여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손민석 씨도 온당하게 그 안에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학문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것과 정치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대표적으로 사민주의자가 마르크스를 아무리 인용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자냐 아니냐(강신준 교수 같은 경우), 이건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걸 손민석 씨가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다면 더 해줄 말은 없다만 대략 3가지로 나뉠 것 같다. 정치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경우, 사민주의 경향(비공산주의)도 마르크스주의일 수 있다는 경우, 그리고 소수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수용할 수 없지만 학문적으로는 수용할 수 있다는 나 같은 경우다. 정치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건 나로선 당연한데 안 그러면 어떻게 공산주의-레닌주의-혁명정당 노선을 유지하겠나? 학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제나 나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며 이론적인 확장 가능성에 제약을 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손민석 씨가 이 정도에도 분통이 터진다면 미안한 얘기지만 난 더 해줄 말이 없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진지하게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사람은 공산주의자 아니면 거의 없다. 앞으로도 계속 억울한 감정을 갖고 살아갈 게 아니라면 좀 더 상황은 냉정하게 인식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내 별점이 왜 4점에서 3점으로 내려왔는지를 설명해야겠다. 마지막 장을 인용해보자.

 

이제 자본에게 남은 길은, 임금노예제적인 특질로부터 벗어나 생산자를 직접적으로 장악하지 않고 생산수단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장악하여 생산을 조직하는 새로운 생산조직 기제, 임금농노제로 이행하는 것밖에 없다. ... 이제 자본제는 임금노예제를 임금농노제로 이행시킴으로써 대경영생산양식에 기초한 공동체적 소유를 고차원적으로 재현하는 조건을 형성해야 한다. ... 자본이 유통과정에서 생산과정으로의 침투를 반복하는 사회적 기제라면 그에 대한 저항은 유통과정이 아니라 자본이 가장 뒤늦게 장악하는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자의 자율성과 독립성의 확보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 생산과정 내에서의 집단 노동에 기초한 집단경영의 성립, 달리 표현하면 경영하는 노동자의 형성에 기초하여 확복한 생산과정에서의 생산자의 독립성과 자립성이 자본의 침투를 제한하며 그것을 극복할 계기를 제공해줄 것이다. 지금의 논리적 분석에서는 이 이상 언급할 수가 없다. 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레닌의 글로 갈음하고자 한다. “‘혁명의 경험을 쌓는 것이 그것에 대해 쓰는 것보다 더 즐겁고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본 이전의 세계는 이렇게 끝난다. “자본에게 남은 길표현이 좀 그렇다. 그래도 좀 더 공정하게 말하면 자본을 ... 극복할 계기를 언급하고 있으니, ‘나도 혁명을 논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룩셈부르크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며 사회주의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비판이 이 문장들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물론 이 얘기에도 손민석 씨가 억울해할 수 있을텐데, 나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읽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일까? 적어도 룩셈부르크는 그렇게 안 읽을 것 같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손민석 씨는 지금 레닌 같은 그런 혁명가가 아니다. 레닌은 진짜로 혁명을 하면서 체제를 만들어간 사람이고, 왜 글쟁이가 글쓰다가 마지막에 혁명하는 게 더 유익하다는 말로 끝내는 건가. 얼마나 대단한 활동을 해서 바쁘길래... 577쪽까지 읽은 독자니까 이 정도 불평은 말하겠다. ‘임금농노제를 논리적으로 도출한 건 좋은데 이게 구체적으로 뭔지 상이 잘 안 잡힌다. 문제는 손민석 씨 본인도 그래 보인다는 거다. 그리고 이런 모호함에 기반해서 손민석 씨 결론에 대해선 앞으로도 협동조합주의나 노사협조주의 같은 것이 아니냐는 식의 질문이 계속 제기될 것이다. 난 솔직히 뭔지 잘 모르겠고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자의 자율성과 독립성의 확보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 같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긴 책을 썼다는 것도 실망한 지점이다. 어쩌면 저자는 자본제 하에서의 투쟁 자체보다는 근대화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실망한 점을 얘기했으니 별점 4개를 주려 했을 정도로 좋았던 점도 얘기하자면 본원적 소유 개념은 정말 좋았다. 크게 인정한다. 생산수단만 조명한 게 아니라 생활수단에 대해 조명한 것도 좋았다. 인용문을 보니 확실히 인정해야겠다. 2차적 소유와 본원적 소유 간의 관계 설정도 괜찮다(아직 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괜찮은지 확신까진 없다). 봉건제와 농노제를 개념 구분한 것도 중요한 탈출구였다. 본원적 소유와 연관지어서 본원적 축적을 설명한 것도 크게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관계를 다루면서 역사 전개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대목도 백미였다. 나머지 민사재판권 관련한 분석 등도 탁월했다. 내가 느끼기엔 이 책의 핵심 기여점들인데, 내가 자세히 설명하긴 그렇고 직접 읽어보고 느껴보기를 권한다. 다만 이 책의 각 시대 구분 개념이 페리 앤더슨 같은 학자들의 논의나 공납제 논의 등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가에 대해선 아직 유보적이다. 책 한 권 읽었으니 아직 생소해서 그럴 수도 있으니 이 점에 대해선 나도 차차 소화해가면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려 한다(다만 내 스스로는 아직 손민석 씨 논의를 내 논의에 어떻게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을지 잘 찾지 못했다). 나머지 내가 언급하지 않고 비판도 하지 않는 부분들은 대체로 동의한다고 보면 된다. 손민석 씨는 우리 사회의 보물 중 하나일 정도로 역량있는 지식인이다. 내가 다른 대목에서 아무리 비판을 하더라도 이 평가는 진심이다. 나는 원래 언제 어디서든 기본적으로 거짓말을 안()하고 완곡어법도 쓰지 않으며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과장을 못한다(그럴 만한 사회성도 없다).

다음으로 손민석 씨는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는 모양이지만 기본적으로 학계에 진입하지 않고 대중성 있는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할 생각인 듯하다. 그렇다고 사회운동에 열심인 운동권도 현재는 아닌 듯해 보인다. 내가 가보지 않았고 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21세기 현재에 해당 방향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유의미성을 획득하고 족적을 남길지는 잘 모르겠다. 폄하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잘 모르겠어서 하는 말이다. 나는 sns를 많이 하는 것도 귀찮아서 못하겠던데 참 양질의 글도 많이 올린다. 나는 사회학 박사를 최근에 마치고 수료생 시절부터 시간 강사를 하면서 생업을 하고 있다. 대학원에서 주로 공부한 건 비판적 실재론(과학철학이자 방법론이자 메타이론)이었다. 공부 배경을 밝히는 건 서평 내용에서도 관련 부분을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런 지점에서까지도 정말 다르다. 손민석 씨가 관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논문은 본인이 쓰고 싶으면 쓰는 거고(그런데 논문 쓸 거면 단정짓는 말투는 정말 고쳐야 한다. 나도 논문 문체가 익숙하지 않은 편이지만 학술적 글쓰기의 통상적 기준에 비춰볼 때 손민석 씨의 단정짓는 어투는 학계에서 수용되기 꽤 힘들 정도다) 연구소 등 연구 공동체에 관심이 있다면 인적 인프라를 연결해서 발표 자리 등을 제공할 용의도 있다.

손민석 씨가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는 건 내 짐작이지만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는 배경이 자리해있지 않나 싶다. 이 점도 나와는 정말 다른 부분인데 조선인들은 일본에게 근대화가 뒤처졌고 식민지화가 됐다는 식민지 콤플렉스 내지는 근대화 콤플렉스가 있다. 근대화가 늦었고 식민지가 됐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다. 한반도의 지식인들에게 관련한 콤플렉스는 꽤 강력한 것이었다. 일반 대중들이라고 크게 다르겠나? 그런데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서구중심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국내의 대중들 상대로 서구 지식 장사를 하는 것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해결하며 출세할 수 있었다. 손민석 씨는 그런 식의 유럽중심주의와는 다르다. 손민석 씨가 마르크스를 익히고 아시아적(비유럽적) 생산양식 등에 천착하며 근대화의 아시아적(비유럽적) 경로에 관심을 두는 건 나름대로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경향의 발로, 그 연장선상이라고 본다. 근대에 대한 숭배적인 근대주의도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아시아도, 한국도 근대화적 경로가 있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다(많은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우파로 전향한 것도 그들이 사실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근대화를 갈망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북한이 근대화를 잘 못했고, 따라서 나라를 잘 못 키웠고, 박정희가 산업화를 했으니 박정희를 따라가고 그런 식이다. 박정희에서 일본으로 바꿔도 말이 된다. 여기서 자세히 쓰지는 않겠지만 뉴라이트에 대한 내 생각이다. 그래서 손민석 씨가 뉴라이트 열전을 쓰면 어떤 내용을 쓸지, 내 생각과 얼마나 같거나 다를지 관심이 크다).

내 넘겨짚기기 때문에 아니면 말고식이지만 혹시 모르니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자신의 연구 관심이 어디에서 시작됐기에 마르크스주의를 밀고 있는지. 사회과학에서 근대 사회가 자본제임을 규명하고 그로써 큰 족적을 남긴 건 마르크스다. 따라서 좋든 싫든 근대화를 다룬다면 이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 점에서는 베버조차 마르크스의 자장 아래 연구한 셈이다. 그런데 나는 애초부터 민족주의에도 관심이 없고 식민지화나 근대화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콤플렉스도 전혀 없다. 관심이 없다. 나는 그런 거를 진심으로 내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만큼 남들이나 주변 환경에 동화되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 요즘 세대들은 대부분 식민지ㆍ근대화 콤플렉스가 없다고 본다. 이미 선진국에서 살았는데 굳이? 그런 점에서 손민석 씨는 식민지-근대화 콤플렉스 지식인의 마지막 후예이자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한국의 자장 아래서 자신의 이채를 발하는 독특한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서 고유한 매력 또한 발산할 수 있을 테다. 말 그대로 아니면 말고긴 한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뭐 내가 틀렸다면 내가 어떻게 오독(오해)했는지를 손민석 씨가 열렬하게 설명해줄 텐데, 그걸 보고 나나 남들이 모두 납득할지는 잘 모르겠긴 하다. 하여튼 만약에 내 추측이 어느 정도 맞다면 나와 손민석이 다른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근대화 얘기를 좀 더 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근대화를 암묵적으로 좋은 것으로 전제한다. 여기에 대해 가장 크게 이견을 제기한 마르크스주의자는 내 생각에 아마도 채만수다. 채만수는 근대화를 좋다, 나쁘다의 가치 판단이 가능한 영역으로 보지 않는다. 근대화는 자본주의화고 자본주의화는 긍정적/부정적이라는 이분법적 판단이 아니라 변증법적 사고를 요하는 사회 현상이다. 또한 자본주의화가 굉장히 고통스러운 과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실례들이 있고 손민석 씨 본인도 본원적 축적을 설명하며 꽤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손민석 씨는 이를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좋은가, 나쁜가 혹은 가치 판단이 가능한 영역인가 등에 대한 얘기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왜일까? 나는 여기에 목적론적 역사관이 있다고 본다(여기 대한 손민석 씨 입장이 sns에 있던데, 도중에 그걸 확인하고서 글을 계속 썼다. 그러니 끝까지 읽어보기 바란다).

이 대목에서 헤겔 철학의 영향이 짙게 드러나는데, 손민석 씨는 인류의 역사를 개인의 자유의 발전(전개-과정)으로 본다. 이것 자체가 헤겔식 사고와 매우 닮아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헤겔주의와 반()헤겔주의가 지속적으로 대립해왔는데, 나는 후자에 속한다. 내가 비판적 실재론을 통해 정립한 입장은 마르크스는 헤겔과 대립되는 새로운 과학철학의 프로토타입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의 사회 이론을 개진할 때 당대의 최신 과학철학이기도 하였던 헤겔 철학의 용어를 빌려서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매우 논쟁적인 사안이고 서평에서 해소할 수 있는 논제도 아니다. 비판적 실재론은 1970년대에 로이 바스카에 의해 제안되어서 현재는 주류 (사회)과학철학으로 자리매김했는데, 마르크스의 과학철학을 재해석하고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관련 동향들을 알아보고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큰 지적 자극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내가 보기에 헤겔 철학의 한계점 그리고 마르크스 철학과 다른 점은 헤겔 철학에는 관계론이 부재하거나 거의 없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헤겔은 자꾸 내적 모순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관계론에 따르면 다르다. 관건은 내적 모순과 함께 외부의 기제가 함께 작동하는 양상을 포괄해 설명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흥했는가를 설명할 때, 손민석도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을 언급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사례를 손민석은 역사적접근이라고 보고 논리적접근과 비교하면서 역사적 접근이 논리적 접근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결국 논리적으로 따지면 내적 모순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건데 이것 자체가 헤겔주의의 특징이다(일례로, 상품-화폐-자본의 전개를 헤겔주의가 아닌 비판적 실재론 관점에 의해 논리적으로 구성한 논의로 https://www.youtube.com/watch?v=nP5gwykZxF8&t=753s 을 참고하라).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자생적으로 이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이론적 노력이 기울여져 왔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레닌과 트로츠키의 불균등-결합 발전 개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다만 레닌과 트로츠키도 당대의 단계론적 인식을 완전히 벗어난 적은 없는데 여기서 자세히 쓸 게 아니니 언급만 해둔다).

마르크스가 헤겔 철학을 뒤집었다는 건 그저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뒤집은 정도가 아니라 변증법적 방법 자체를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헤겔의 추상에서 구체로 전개하는 방식과 마르크스의 추상화 활용 방식을 비교해보자.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은 무조건 추상에서 구체로 논지가 전개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공장법에 관해서 얘기할 때 마르크스는 현실의 아주 구체적인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전개한다. 이게 학계에서는 헤겔주의자들이 미스터리로 흔히 지목하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비판적 실재론으로 해석하면 문제가 없다. 추상화로 포착한 기제를 잘 설명하려면 당연히 그 기제의 발현까지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론 곳곳에도 추상에서 구체라는 순서대로면 한참 나중에 나와야 할 것 같은 부분들이 언급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자본 이전의 세계 저자는 정말 추상에서 구체로만 가는 서술 방식을 고집한다. 다 읽어야 전체가 파악되고 한번 더 읽으면서 음미해야 잘 이해할 수 있는 구조다. 손민석 씨가 오해받는 이유 중 하나도 나는 이 서술 방식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각설하고 근대화로 돌아가서 나는 손민석 씨가 암묵적으로 근대화를 목적론적 역사 인식에 따른 전자본제 사회의 다음 단계로 설정함으로써 전자본제 인민들이 달성해야 할 목표처럼 다루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전자본제 인민들이 자본제를 원했을까? 자본제가 뭔지도 몰랐을 거다. 그리고 그 과정이 고통스러운데 왜 해야 하나? 어느 나라가 먼저 자본제가 되어 제국주의적 침략을 하면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그것과 자본제가 인민들의 역사적 목표처럼 설정되는 건 다른 문제다. 예컨대 원시인들은 농업 혁명을 원했을까? 1850년까지 농민이 원시인에 비해 건강, 수명, 영양, 행복 등 측면에서 더 열악했는데? 수천 년 후에는 후손들이 번성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농사를 지었을까? 다른 집단에 비해 농업이 도입되지 않아서 결국 농경으로 인구가 늘어난 사회에 의해 쫓겨났다면, 그게 농업이라는 목표를 이뤄야 할 이유가 될까? 이런 건 마치 외래종한테 침범당하기 싫었으면 토착종이 알아서 뿔도 잘 진화시켰어야지, 하는 얘기랑 다를 바가 없다. “이 땅에 근대화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이 서평을 쓰고 나서 손민석 씨의 최근 sns 글을 보니 아시아는 근대화하기 위해서 식민지화가 필연이었다고 하고 있다. 정말 근대화주의자 그 자체 아닌가)

다음은 한형식 씨가 마르크스 철학 연습 책에 쓴 일부 대목을 발췌한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목표가 역사 이전에 미리 존재하고, 인류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으로 공산주의를 향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관념론적 주장이다.” 여기서 공산주의를 자본제로 바꾸면 손민석 씨가 자본 이전의 세계에서 전개한 서술 방식과 무엇이 다를까? 내가 오독했을 수도 있다. 또 목적론적 역사관은 일종의 딱지처럼 작용하기도 하기 때문에 불편한 감정이 들 수 있는 부분인데, 나는 이 책이 목적론적 역사관을 전제하지 않고 있다고 여길 만한 결정적인 지점은 못 느꼈다. 자본제라는 역사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여러 경로가 있다는 얘기는 단선론적 역사관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뿐이지, 목적론적 역사관에 기반해서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역사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과 목적론적 역사관을 승인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얘기다.

진화론 얘기를 했으니 이걸로 비유하자면 진화론은 목적론이 아니다. 역사 법칙이 있다는 당연한 주장과 목적론도 당연히 다른 것이다. 법칙에 무슨 목적이 있나? 또한 여기서 목적이란 문자 그대로 목표 설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창조론은 명백하게 목적론이다. 진화론자는 보통 유물론자인데 유물론자도 목적론을 가질 수 있다. ‘자본 이전의 세계저자가 목적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서술상의 뉘앙스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일까? 어떤 진화론자가 목적론자인지는 창조론과 달리 따져봐야 할 문제기 때문에 나는 내가 오독했을 여지도 열어두지만, 단순히 헤겔 변증법적인 서술상의 뉘앙스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 아닌 듯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자신의 역사관이 목적론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방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저자의 sns를 보니 그냥 목적론과 진화론도 혼동하고 있고 역사 법칙과 목적론도 혼동하면서 그걸 헤겔 철학으로 옹호하고 있다. 역사의 의미를 운운하는데 의미는 인간이 부여하는 것이다. 실재하는 역사 (법칙)과 인간의 사유 속의 역사 (법칙)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데 저자는 이걸 섞고 있다.

역사의 의미를 찾는 것과 목적론적 역사관은 다른 것인데, 양자도 혼동하고 있다. 역사의 의미, 역사적 의의 이런 걸 찾는다고 해서 목적론을 승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마치 유신론자들이 신이 없으면 이 세상의 의미가 없다, 인생의 의미도 없다 이러면서 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보사관과 목적론적 역사관도 다른 것이다. 생산력 발전을 축으로 진보사관을 주장할 수 있다. 다시 진화론 얘기를 하면 인간의 출현에서 의의를 찾고, 인간이 자연을 변형시키는 특별한 동물이고 인류 문명에 의의를 둔다고 해서 진화론에 목적론적 함의를 부여해야 하나? 사이비 과학 중에 인간이 진화의 최종 형태(도착지)라고 보는 목적론을 품는 사람 중에는 인간의 유전자만 분석하면 모든 생물의 유전자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있는 사이비 과학 주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손민석의 목적론에 대한 입장이나 역사관을 아주 형편없는 것으로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태도도 위험하다. 비유하자면 비진화론이나 창조론보다 목적론이 가미된 진화론이 낫듯이, 역사에 법칙이 없다는 역사관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보다는 손민석 같은 입장이 더 나을 수 있다(참고로 마르크스의 진화론에 대한 관점도 현대 진화론에서 보면 비판 지점이 있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나오는 내용이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를 위한 하나의 열쇠이다. 반대로 하등 동물의 종류에서 나타나는 고등 동물의 징후는, 그 고등 동물 자체가 이미 알려져 있을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비유가 나오는데 비유가 가리켰던 사회과학적 내용이 옳은 것과는 별개로 현대 진화론 관점에서 보면 이건 진화론에 대한 오해를 반영한다. 1.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한 게 아니라 원숭이와 공통 조상을 가진 것이다. 2. 사실 복잡한 동물보다 단순한 동물이, 복잡한 동물에 대한 해부학적 단서를 잘 준다. 예컨대 쥐를 통해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유추하는 실험을 하지, 역으로 인간을 통해 쥐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다윈조차 알보다 나비가 고등하다는 등의 얘기를 했는데 현대 진화론은 알->애벌레->번데기->나비->알 같은 순환론적 형식을 빌려 다윈의 명제를 뒤집었다. 엥겔스도 자연변증법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부시맨은 선천적으로 수학을 잘 못한다고 뻘소리 한 적 있다.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해당 문장들은 다 초고 상태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목적론은 오류다. 중력의 법칙이나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에 목적이 없듯이 역사 법칙에 목적론이 가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내적 목적론(헤겔 식의 내적 목적론과 다르다)과 외적 목적론은 다르고 흔히 얘기하는 건 후자인데, 내적 목적론은 인간이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거기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다. 대부분의 목적론자들은 문제가 없는 내적 목적론과 문제가 있는 외적 목적론을 왔다갔다 한다. 이렇게까지 얘기해도 안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다. 유신론자들도 절대 입장 안 바뀌더라.

하여튼 이 정도의 입장 차이가 있으면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상태니 더 거론 안 하겠다. 독자들이 각자 알아서 판단하겠지. 그럼에도 손민석 씨가 입이 근질거리고 단순한 감상 등이 아닌 반론을 하고 싶다면 비판적 실재론을 읽고 공부해라. 거기 관련한 답들이 있다. 이런 거 말고도 내가 보기엔 일일이 거론하진 않겠지만 공부해보면 교정될 게 상당히 많다. ‘공부하고 오라는 식으로 기분 나쁘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손민석 씨 책을 다 읽고(물론 한번 읽었다고 완벽히 파악할 수 있는 책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깊이가 있다) 긴 서평을 쓰는 노력을 기울이듯이 손민석도 마찬가지의 일을 능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정도는 해야 어느 정도 상호간에 예의일 수 있으므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진심으로 소득이 있는 독서 여정이 될 거다. 물론 용의만 있다면 나도 얼마든지 소스를 제공할 생각이 있다. 죽이는 비판적 실재론자들 알고 있다(헤겔 철학 자체야 손민석 씨가 더 잘 알테니 내가 상대를 너무 단순화해서 비판한다고 반론할 수는 있을 텐데, 손민석 씨 본인이 sns에서 비판적 실재론 잘 모른다고 밝혀놓고서 철학책 던지라고 한 걸 스스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철학책 던지라면서 헤겔은 또 왜 허구한날 얘기하나).

방법과 방법론 관해서도 저자는 방법과 방법론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sns 글을 보면서 그걸 더 확실하게 알았는데, 사실 방법과 방법론을 정교하게 구분하는 논의는 방법론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면 하는 걸 거의 못 봤다. methodmethodology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방법에 대한 이론이 방법론이다. 양자를 혼동하는 것은 20세기 중반까지 풍미한 실증주의 입장의 결과다(아직도 연구 현장에서는 암묵적으로 실증주의를 전제한 채 진행되는 연구가 많지만 1960년대 이후 실증주의는 주류 과학철학에서 파산했다). 저자가 방법론 파트에서 설명하고 있는 방법론이 방법인가, 방법론인가? 내가 보기엔 저자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 같다. 저자의 방법은 기본적으로 문헌 검토다. 자동적 객체(실재하는 객체)도 거의 다루지 않고 다뤄질 때도 기존의 문헌에 나타난 게 반영되는 식이다. 따라서 타동적 객체(사유 속의 객체)를 논리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주되게 사용하며 그것을 상당히 치밀하게 전개한 노작이다. 다만 그에 따른 약점이라면 자동적 객체에 대한 설명이 약하다. 저자 스스로가 제한한 연구 범위뿐만 아니라 방법론과도 관련된 지점으로 보인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과학철학 용어들을 남발했는데 관련해서 참고해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쓴 거고 이 얘긴 더 이상 안 하겠다(비슷한 사안인데 역사유물론과 역사 이론도 다른 것이다. 역사유물론은 유물론의 일종이다. 역사유물론이 옳다는 당연한 명제가 역사유물론의 이름 아래 행해진 역사 이론이 모두 옳다는 도그마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https://community.dbpia.co.kr/ko/article/209 참고).

사실 이 정도만 전체적인 얘기를 쓰고 나머지 지엽적인 비판 지점들을 정리한 후 서평을 끝내도 좋을텐데 손민석 씨가 요구하는 비평(비판)의 수준이 높으므로 내 연구 작업과 관련한 얘기를 하는 것으로 손민석 씨의 논의와 대비해보겠다. 손민석 씨는 많은 지점에서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데, 나는 비판적 실재론에 따른 방법론적 전체주의(파시즘이랑 다른 논의니까 헷갈리는 사람 없기를)로 대비되며 또한 석사논문에서 전개한 사회학적 사회생물학 및 그에 기반한 마르크스 인구학이 내 연구 테마다. 19세기에는 인구학이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았고 마르크스도 경제학과 인구학의 구분없이 (정치)경제학이란 말로 맬서스 등도 다 엮어서 비판하고 있다. 경제학과 인구학의 분리 이후 인구학 분야는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상대적으로 덜 탐구되었으나 마르크스 경제학만큼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으며 사회과학적으로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게 내 입장이다. 그리고 손민석 씨는 자신의 부계제적 일부일처제가 중요한 개념이며 이 부분이 비판되어야 제대로 된 비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실제로 내 연구 작업에서 일부를 가져와 대립시켜 보겠다는 뜻이다.

우선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 개념에 대해서 간단하게 짚고 시작하면 가부장제는 사전적 의미로도 남성 연장자가 가족 내에서 우대받는 제도의 의미를 갖는다. 가부장제는 나이주의 차별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성차별과 다르다. 1970년대 이후 서구 페미니즘에서는 이 같은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자본 이전의 세계는 장자와 차자 얘기부터 시작해서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논의는 전혀 없고 일반론적인 가부장제 개념을 명확한 정의없이 재사용하고 있다. 적자, 서자, 장자, 차자 차별이 성선택과 자식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가족의 재생산 욕구로 설명이 되나? 혈연선택론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장자한테는 유전자가 더 많이 가나? 이건 저자가 전혀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내친김에 말하면 소유와 점유도 먼저 사전적 정의를 언급하고 나서 자기 얘기를 하면 좋을 텐데 자기 논리로만 설명하고 있다. 논의가 너무 독자적이다. 학문의 진보는 기존 논의에 추가해서 나아가는 게 기본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소유권은 사용권, 수익권, 처분권을 포함해서 대상에 대한 총체적인 소유권을 지니며 점유권에서는 처분권이 제외되어 있다. 중층적 소유는 농노도 자식한테 대물림할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처분권이 인정되며 자본주의적 소유의 총체적 소유권과는 대비된다. 저자가 더 잘 알겠지만 이런 논의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기존 논의의 기본 전제가 되고 있다. 추가하면 소유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기도 하다는 것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밝히는 내용이다. 사유지이므로 출입하지 말라는 얘기를 떠올리면 된다. 물론 저자야 나보다 훨씬 더 연구해서 풍부한 배경 지식을 통해 더 깊은 이해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계속 기본을 건너뛰는 게 책 전체에 걸쳐 있다. 이와 연관해서 자본은 자기 증식하는 가치라는 게 마르크스의 정의인데 왜 그건 언급하지 않고 에두르면서 사회적 기제 같은 긴 설명을 늘어놓을까? 가독성이 떨어지는 대목들이다).

일부일처제 개념도 별로 정교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다. 내가 엥겔스의 가사국기를 좋아하면서도 불만인 점 중 하나가 엥겔스 당대에 정착된 일부일처제를 고대 가족에 대해서부터 쓰고 있다는 거다. 아내한테는 일부일처제지만 남편한테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란 식의 서술도 문제가 있다. 가족 제도는 그리고 결혼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독점 그리고 그를 위한 전방위적인 예속이 핵심이지 일부일처제가 아니다. 이따가 더 자세히 쓰겠지만 일부일처제는 근대적 현상이다. 그 전에는 여러 아내를 거느릴 능력이 있으면 다처인 거고 없으면 일처거나 혹은 처가 없는 거다. 일부일처제 용어를 무분별하게 쓰고 그걸 본받아서 부계제적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면 곤란하다(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성적 자유도 엥겔스는 미래 세대의 몫이라면서도 일부일처를 낭만화하면서 설명한다. 그냥 엥겔스도 당대 사회문화의 영향을 받은 거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대목이라고 본다).

여기부터는 내 연구 작업에서 빌려온 대목을 상기한 사정에 따라 일부 풀어서 얘기해보려고 한다. 우선 나는 가부장제를 발생학적으로 신분제 사회에서의 지배 계급 내의 인구 관리 기법 중 하나라고 본다. 나는 전자본제 사회를 신분제 사회라고 보는 게 기본적 규정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노예제/농노제 등의 얘기를 할 수 있겠고 저자의 논의를 그런 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 나는 그런 논의가 필요 없었고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지는 잘 모르겠다(서두에서 얘기한 게 그거다).

신분제든 자본제든 경제의 근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두고 보는 게 그 사회를 분석할 때의 1차적인 규정이다. 여기서부턴 잠깐 내가 수업할 때 쓰는 교재 내용(그래서 존댓말이다)을 복사 붙여넣기하고 적절히 추가하면서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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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근본 문제: 어떤 사회든지 사회적으로 필요한 총생산물이 있고, 그것을 생산하기 위한 총노동이 있다. (-> 생산관계)

 

예컨대 10만 명이 있다면 10만 명이 먹을 식량, , 주거 등이 필요합니다. 이 필요는 어느 정도 유동적이지만 1만 명치의 식량만 필요하다거나, 1000만 명치의 식량이 필요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10만 명의 노동력을 통해 각각의 필요한 생산물들을 생산하고 분배해야 하죠. 10만 명 중 4만 명은 10만 명이 먹을 식량을 만들고, 3만 명은 옷을 만들고, 3만 명은 집을 만들고 서로의 생산물을 분배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죠. 1명이 의식주 등을 다 만들고 혼자 알아서 살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렇게 혼자서 자급자족하며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죠.

농업사회는 낮은 식량생산성 때문에 대부분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해야 합니다.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있죠. 농업이 나라와 사회의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비단 식량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인구가 농업(식량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사회라면 농업의 중요성이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배 계급들은 그런 농민들을 착취하면서 여가를 즐깁니다. 대부분의 평민, 농민들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해뜰 때부터 해질 때가 허리가 굽어지도록 농사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지배 계급은 그러지 않아도 되죠. 농사 외의 다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지배 계급을 기생적이라고 무조건 욕할 수만은 없습니다. 이 지배 계급들은 과학, 예술, 철학, 기술, 정치 등을 발달시키는 일을 하게 되거든요. 즉 피지배 계급들이 지배 계급의 생활을 부양해주기 때문에, 지배 계급은 문명을 발달시키고 생산력의 발전을 도모하는 과정의 핵심적인 일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 신분제의 성격을 말하자면 신분제는 경제의 근본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하는 전근대 계급 사회의 시스템이었습니다. 대대로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기 때문에 나름의 노하우도 발달시킬 수 있었죠. ...

지배 계급이 없으면 문명을 발달시킬 인구 집단이 없기 때문에, 지배 계급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배 계급이 아예 없어서도 안 되지만, 지배 계급이 너무 많아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신분제 사회가 평민은 만 명밖에 안 되고 귀족은 100만 명이나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사회가 과연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무너질 겁니다. 참고로 프랑스 대혁명기 1신분(성직자)2신분(귀족)은 전체 인구의 1%대였다고 합니다. 이런 식이어야 사회가 유지됩니다. 만약 왕족이 너무 많아지면 백성들의 삶이 궁핍에 빠지겠죠. 이에 따라서 역성혁명이 일어나 새로운 왕조가 생겨나고, 새로운 소수의 왕족들로 재출발합니다. 고려와 조선 간의 관계, 조선이 고려 왕족을 몰살시킨 것도 사회과학적으로 본다면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의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성계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건 아닐 수 있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이성계가 그런 일을 수행했던 겁니다. 실제로 고려는 태초부터 정략결혼을 주되게 활용하면서 생긴 너무 많은 왕족들로 인해 잦은 불안정을 겪었습니다. 저는 이성계의 학살에 가까운 몰살을 도덕적으로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사회과학적 입장에 따라 고려-조선 간의 관계 및 사회 변동을 해석하자면 이런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지배 계급이 너무 많아지지 않게 하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지배 계급이 자신의 특권을 자기 자식에게만 물려주는 것입니다. ... 이것이 씨족과 구분되며 씨족을 해체시킨 가족이 발생한 계기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보면 자기 자식한테 재산을 물려주고 싶은 이기적 욕망의 발전이고 실제로도 그러하긴 하지만(방법론적 개인주의),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특권층이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하는 작업이 덩달아 수행됐던 것입니다(방법론적 전체주의. 즉 방법론적 전체주의는 개인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양자를 종합한다). 이렇게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서 사회 전체를 망라하는 관점이 바로 사회과학적인 시각입니다. 이외에도 신분제 사회는 지배 계급 내의 인구를 제한하는 인구관리기법을 발달시키게 됩니다.

 

1. 자식 금지: 성직자, 스님, 환관

 

지배 계급이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지배 계급의 인구를 제한하는 가장 원천적인 방법입니다. 역사적으로 천주교는 이 방법이 굉장히 오래 행해진 사례 중 하나에 속합니다. 성경에는 원래 성직자가 자식을 못 갖게 하는 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는 다른 종파에서는, 예컨대 목사가 자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성직자의 자식을 금지하는 교리는 1123년에 회의를 거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성직자들이 자기 자식한테 부유한 교회를 물려주려고 인민들을 착취했기 때문이죠. 오늘날에도 한국의 대형 교회를 보면 목사들이 자기 자식한테 교회를 물려주는 경우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곤 하죠? 그런 일들이 옛날에도 발생했던 겁니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천주교를 믿는 사회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겠죠. 성직자 개개인은 자신이 신에게 더 충성하고 시간을 쓰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지만, 개인의 그런 믿음과 별개로 사회적 차원에서는 인구가 통제되고 있었던 겁니다.

스님도 마찬가지죠. 오늘날 스님은 무소유, 해탈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과거에는 달랐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묘청의 난이라는 유명한 스님의 사례가 있죠? 이를 봐도 알 수 있듯 스님은 성직자처럼 지배 계급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와 불교는 유사한 점들이 있죠. 이들 종교는 신분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지는 단골 집단이지만, 대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기가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그렇지만 종교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고, 집단을 통합하는 강력한 신화를 제공합니다. 또한 성직자와 스님은 교리를 통해 나름대로는 욕심을 통제하였고 다른 지배 계급들에게도 권하였습니다. 다만 이들은 부동산(不動産은 움직이지 않는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즉 토지와 건물에 대해서는 큰 욕심을 부렸죠. 그건 신분제 사회에서 주된 권력이 토지에서 나오고, 건물은 상징적 역할도 겸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욕, 식욕, 부동산 외의 물욕은 강하게 작용할 경우 천주교와 불교의 생존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부동산만은 강하게 쥐면 쥘수록 통상적으로 천주교와 불교의 생존, 자신들의 생존에 좋은 거죠. 특히 이 지점이 평민들의 삶과 모순적으로 대치되곤 합니다(저자는 가신들의 존재에 주목하던데 그것도 중요한 관점이라고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종교는 체제를 안정화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대로, 인간은 왕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선천적인 능력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설령 어떤 뛰어난 왕이 있다 해도 몇 세대를 거치면 그 자손은 평균적인 재능을 지닌 상태의 인간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왕과 귀족은 평민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온갖 신화가 만들어지고 종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조작이 없다면 허구한 날 반란이 일어나서 나라가 너무 혼란스러워지겠죠. 한편 사회적 동물 중에는 개미, 벌처럼 거의 선천적으로 기능이 분화된 동물도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도 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같은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굉장히 여러 형태의 사회가 성립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사회적 동물이죠.

성직자, 스님과 달리 환관은 아예 물리적으로 거세를 해서 자식을 못 만들게 한 무지막지한 사례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아마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을 거세하는 이유는 왕의 소유인 후궁을 임신시킬까봐 왕이 질투해서라는 설명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 설명이 틀렸다고까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사회과학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너무 개인의 감정에 치중한 설명입니다(-> 방법론적 개인주의). 사회과학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만약 환관이 생식 능력이 있어 후궁을 임신시키면,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왕족이 늘어나 버리죠. 왕족이 늘어나면 그 왕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문제, 그리고 환관이 자기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서 왕위 다툼을 벌이는 문제 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모두 사회적 문제의 소지가 되죠. 이런 문제들을 원천 봉쇄하는 방법이 바로 환관을 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2. 동성애 권유: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 아테네 같은 도시국가는 동성애를 찬양하는 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실 동성애는 17세기까지 전세계 많은 지역에서 금기시되지 않고 만연했던 문화입니다. 그중에서도 고대 그리스는 아주 유명한 사례니 이를 중심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이들은 동성애를 얼마나 찬양했냐면 이성애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여기곤 했습니다. 플라톤은 동성애를 가장 고귀한 사랑으로 서술하기도 했죠. 스승-제자가 동성애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흔했으며 교육적인 의미와 연결되어 장려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는 왜 그렇게까지 동성애를 찬양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문제를 인구 조절 문제와 연관지어 설명했습니다(베벨도 여성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며 이를 인정한다). 도시국가는 그 규모상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동성애를 권장한다는 것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동성애는 임신ㆍ출산의 위험이 없다는 것입니다(하지만 결혼은 상속자를 구하기 위한 것이므로 남자와 여자가 한다. 동성혼 법제화 운동은 연애결혼, 결혼의 낭만화가 일어난 후에야 사회적 운동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권력을 쥐어진 지배 계급 남성의 성욕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인류 사회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 성욕을 1번의 경우에서처럼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금지하는 방법도 있지만, 성욕의 밸브를 다른 데로 돌려버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성애에서 동성애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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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부장제: , 장자가 아닌 아들, 서자, 사생아(혼외자)를 차별

 

가부장제란 무엇일까요? 한자를 살펴보겠습니다. 家父長制, (집 가), (아버지 부), (어른 장/길 장), (제도 제)입니다. 여기서 은 연장자(年長者)의 장()과 같습니다. 한자어 풀이와 사전을 참고하면, 우선 가부장제란 남성 연장자가 가족 내에서 우대받는 제도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정의내려 볼 수 있겠습니다. 장자상속, 맏아들 우선을 반영하는 기본적 정의입니다. 제가 이 절 제목에 썼듯이, 가부장제의 권력자인 아버지는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도 자식들 사이에 차별을 둡니다. 이것은 생물학ㆍ진화론으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맏아들이라고 해서 아버지의 유전자가 더 많이 담겨있고, 다른 자식들이라고 해서 덜 담겨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부장제가 왜 각 자식들을 차별하는지, 그 이유를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자가 왕이 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남자 후궁들을 들인다고 생각해보죠. 당연한 얘기지만, 인간이 성욕이 강한 것은 (설혹 성차가 있다 하더라도) 기본 사항이기 떄문에 여왕이 남자 후궁들을 들인다는 가정은 비현실적인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 남자 후궁이 있는 상황에서 여왕이 임신했을 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신분제 사회에서는 굉장히 문제가 됩니다. 신분제 사회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아는 게 중요합니다. 설령 가부장적인 부계 사회라고 해도, 어머니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은 건 전혀 아닙니다. 처인지 첩인지, 양갓집 규수인지 등이 당연히 중요하죠. 신분제 사회는 그 사람의 신분(간단히 말하면 부모가 누구인지)을 통해 그 사람에게 어떤 자원을 얼만큼 할당할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임신ㆍ출산을 하니 자연히 자식의 어머니가 누군지 알 수 있으므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알기 위해선 남자가 여자를 성적으로 독점하는 제도, 결혼 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달리 여왕이 남자 후궁들을 들인다면 누가 자식의 아버지인지 알 수 없어 후궁들 모두 외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엥겔스가 가사국기에서 성차별이 지배계급 내에서 더 심하게 작동한다고 하는 거다)

일처다부제가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자가 왕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여자가 선천적으로 무능해서가 아닙니다. 즉 여성이 지능이 떨어지거나, 감정적이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인 것이죠. 신분제 사회에서는 구조적으로 지배 계급 내일수록 여성을 차별합니다. 반대로 평민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평등했습니다. 균분상속이라고 하지요, 조선시대 후기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도 아들 딸 구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상속하는 경우가 평민들 사이에 많았습니다. 물론 지배 계급이 딸(여성)을 차별하니 그 영향을 받아서 차별하는 경우 등이 있었지만, 지배 계급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평등했습니다.

 

장자가 아닌 아들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가부장제는 딸만 차별하지 않습니다. 장자가 아닌 아들도 차별하죠. 따라서 가부장제와 성차별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장자가 아닌 아들을 차별하는 건 어떠한 의미로도 성차별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죠. 가부장제와 성차별은 교집합이 있을 뿐이지 동의어가 아닙니다. 이는 가부장제가 성차별을 포함한 더 큰 개념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성차별에는 성소수자 차별도 포함되죠. 그런데 앞서 살펴본 고대 그리스의 사례처럼, 가부장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않는 경우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부장제와 성차별은 교집합과 차집합이 있는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오늘날에는 가부장제와 성차별을 혼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흔합니다. 그러나 이는 위에서 논증하였듯이 명백히 오류입니다. 왜 이런 혼동이 생겼을까요? 이는 서구 페미니즘의 영향이 큽니다. 제가 페미니즘을 까려는게 아니라, 서구 사회와 우리 사회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부장제를 영어로는 Patriarchy라고 합니다. 어원상 아버지가 다스리는 체제라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보면 서구에서 Patriarchy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체제정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한 서구 사회는 대개 우리만큼 가족주의가 강하지 않고, 우리처럼 나이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같으면 서로 잘 몰라도 친구라고 하고, 한 살만 차이가 나도 위아래가 나뉘잖아요. 다른 나라는 이런 경우가 거의 없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나이주의가 가장 강한 나라입니다.

한국은 서로 가족이 아니어도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처럼 유사가족주의적 호칭으로 서로를 부릅니다. 제 예전 친구가 저를 브라더라고 해서 얘는 왜 이렇게 나한테 친한 척을 하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원래부터 서로를 그런 용어로 부르고는 했습니다. 나이에 따른 차별은 원래 장자상속제의 영향입니다. 한국이 이처럼 극심한 나이주의를 겪는 걸 유교의 영향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흔한데,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조선 시대는 상팔하팔(上八下八)이라고 하여 위아래로 8살까지는 친구라고 할 정도로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우리의 나이주의는 일제강점기의 산물입니다. 일제는 조선인을 천황의 서자쯤으로 취급하며 천황제 대가족주의를 이식했죠. 천황제 대가족주의란 사회 전체가 천황을 아버지로 하는 하나의 대가정이라는 의미입니다. 일제 통치의 편의성을 위해 도입된 것이죠. 조선인들 사이에 위계질서를 만들어 놓으면, 윗사람만 잘 통제해도 그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을 잘 통제해줄 것 아닙니까. 비슷한 이유로 동물의 경우에도 위계질서가 있는 동물이 인간의 가축으로 선택되곤 했습니다. 자유로웠던 아메리카 인디언도 근대 유럽의 가혹한 (인종주의적) 노예제에 적응하지 못하고(유럽에서 옮겨온 전염병에 면역이 없어서기도 했지만), 자꾸 죽고 나자빠지는 바람에 먼 아프리카 대륙에서 흑인 노예를 아메리카까지 데려왔다는 것 아닙니까. 비단 나이만이 아니라 군대의 짬밥문화 등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일제가 심은 것입니다. 그것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으며, 현재는 일본보다도 더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해소하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가진 언어 중에도 일본식 용어가 많은데, 예컨대 상속도 일본에서 이식된 용어입니다. 우리가 우리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일본 전래가 정말 많아요. 제가 빠른 생일(13)이라서 나이가 한 살 차이인 사람들 사이에서 족보가 꼬인다는 얘기도 듣고 살았는데, 여기서 족보란 게 뭡니까. 이건 일제가 이식한 문화를 조선시대, 우리 전통의 것으로 착각했다는 방증이죠.

, 그렇다면 이런 한국의 가부장제와 서구의 Patriarchy’가 같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서구 페미니즘의 기여가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히 사회상이 다른데, 우리 실정에 맞는 이론을 발전시키기보다 서구 페미니즘의 이론을 열심히 옮기고자 하면 그것은 오류입니다. 우리가 가부장적이라고 하면 그건 권위주의적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잖아요. 또한 우리나라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나이주의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성이 다른 사람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우대합니다. 즉 여자도 나이가 많으면 누나고 ‘()윗사람입니다. 참고로 한 살만 나이가 차이나도 존비어(존댓말과 반말)가 갈리는 문화는 신분제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원래 존댓말은 신분이 높은 사람한테 하는 거고, 반말은 신분이 낮은 사람한테 하는 겁니다. 왕이 나이가 어려도 신하가 반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영어에 존댓말이 없다고 하는데, 영국에도 궁궐 용어로의 존댓말은 있었습니다. 신분제가 타파되면서 사라진 거죠. 이런 차이를 보면 한국은 위아래가 있는’, ()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많은 나라입니다. ‘넌 위아래도 없냐?’가 욕으로 쓰이잖습니까.

한국에서 성차별은 도전받은 적이 많지만, 나이주의는 공식적이고 전면적으로 도전받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또 한국에는 재벌이라는 독특한 현상이 있지만(재벌은 영어에 상응하는 용어가 없어서 chaebol이라고 발음을 옮겨서 씁니다) 서구에는 그만한 직접 경영하는 가족주의적 대자본이 기본적으로 없습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서구의 이론을 그대로 가져와 우리나라 실정을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편협한 혹은 부족한 분석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론틀로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오히려 우리나라의 진지한 학자들의 분석이 우리나라 실정에 더 맞고 더 유의미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과거 사회 얘기로 돌아가보죠. 유럽에는 프랑크 왕국이라는 국가가 있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서로마가 멸망한 후 서유럽에 있었던 국가죠. 그런데 프랑크는 나라가 세 개로 쪼개져 각각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쪼개진 이유는 원래 왕위를 장자상속하려고 했는데 다른 왕자들이 반발하며 세 개로 나뉘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평민들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게 되었죠. 역사적으로 평민들은 균분상속을 선호했지만, 평민들은 지배 계급이 안정적인 장자상속을 하는 걸 더 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평민들이 차별주의자들이어서? 아니지요, 평민들은 알고 있는 겁니다. 왕위 같은 것이 안정적으로 장자상속이 되지 않으면 결국 자신들이 더 고생할 것이라는 사실을요.

 

서자, 사생아(혼외자)

 

서자는 첩의 자식이지요. 현대 사회는 많은 곳이 일부일처제를 채택하지만 가부장제 사회는 기본적으로 일부다처제였습니다. 일부일처를 하는 가족조차 일부일처제여서 그렇다기보다는 처를 한 명밖에 못 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성비는 남자가 조금 더 많이 태어나지만 거의 5050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둘 수는 없는 법입니다. 가부장제 일부다처제 사회에서는 지배 계급을 중심으로 서자가 생깁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서자인 홍길동도 아버지가 대감(고위 관료)이죠. 그런데 홍길동의 어머니는 노비입니다. 그래서 홍길동은 엄밀히 따지면 그냥 서자도 아니고 얼자입니다. 얼자는 어머니가 천한 신분인 사람입니다. 홍길동전을 보면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호부호형)도 못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보며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눈시울을 붉혔을 법도 합니다. 그런 감수성은 굉장히 고귀한 감정이며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과학은 그런 감수성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회과학은 그에서 좀 더 나아갑니다.

서자를 차별하는 이유도 살펴봅니다. 우리나라 소설 홍길동전을 보면 얼자(노비인 첩의 자식)여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사연이 나옵니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슬픈 사연을 전해 주지요. 그런데 사회과학의 시선에서 보면, 그처럼 감수성 깊은 감상에서 그쳐선 안 됩니다. 물론 그런 감수성은 매우 고결하고 숭고한 것이지만, 사회과학은 그에서 좀 더 나아갑니다.

만약 홍길동 같은 사람도 양반댁 자제라면서 최고급 대우를 해주면, 백성들은 더욱 허리가 굽도록 그들을 부양해야 할 것입니다. 즉 지배 계급의 숫자를 소수로 제한하는 일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나라가 휘청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홍길동에겐 가족의 슬픔, 가족의 비극이지만, 일반 백성들에겐 그야말로 생존의 문제, 먹고사는 문제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홍길동에게만 감정이입해서 서자 차별을 매도해야 할까요? 서자를 차별하는 것은 사실 전근대 사회의 낮은 생산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죠. 현대 사회와는 물질적 조건이 전혀 다릅니다. 앞에서 장자상속이 왜 정당화되었는지를 프랑크 왕국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서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일관적입니다. 사생아(혼외자)도 마찬가지의 논리를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니 적절한 경제적 재산을 받기 어렵고, ‘문란한 여성의 자식이라는 비난을 받기 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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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에 있었던 내용들 군데군데 가져왔다. 여기서는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방법론적 전체주의가 드러나있고 성직자ㆍ스님이라는 종교 기제, 고자 및 여성의 임신ㆍ출산이라는 생물학적 기제, 도시국가라는 지리적 기제 등이 검토되고 있다. 다양한 층위의 기제들을 고려하면서 관계론적 설명을 시도하고, 또한 이것들을 1. 자식 금지, 2. 성욕의 경로 변경(동성애 권유), 3. 가부장제(자식 차별)로 분류화해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손민석의 부계제적 일부일부처제 개념은 전자본제 지배 계급의 인구 관리라는 중요한 대목이 설명되지 않는다. 생산자 개인의 발전 그리고 성선택 같은 납작한 말들이 있을 뿐이다. 주류 경제학의 논의를 따와서 장자상속제가 인적 자본을 계발했다는 얘기를 인용(나름 비판은 하지만 그 비판은 내가 다루는 것과는 다른 부분이다. 일단 인정하고 다른 부분에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게 손민석의 입장이다)한 손민석은 지배 계급일수록 장자상속제가 강력했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 내가 놓친 게 아니라면은 책에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다음으로 근대 사회인 자본제 사회를 보자. 이것도 굳이 내 논의를 가져오고 싶진 않았는데 손민석 본인이 하도 비판을 하려면 이런저런 내용들이 다 있어야 한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결과적으로 쓸데없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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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상품 생산이 주가 되는 사회+노동력의 상품화

 

(이건 마르크스가 공식처럼 자본론에 쓰고 있는 얘긴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손민석 저자가 독자적인 분석을 전개하는 건 좋은데 왜 가장 기본인 이런 정의 자체는 간명하게 제시해주지 않을까? 후술할 가치 법칙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정리하지 않고 장황한 건 그만큼 개념을 더 잘 파악하고 있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상품 생산이 주가 되는 사회란 무엇일까요? 여러분,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 주위에 무엇이든 물건들이 보일 텐데, 그 물건들 대부분, 혹은 전부가 상품일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상품이었던 것이겠죠. 여러분이 입은 옷, 그것을 스스로 지으신 분이 있으십니까?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아마 단 한 분도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이 전자본주의 사회와 다른 자본주의 사회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구매하여 이용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첫째 가는 규정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이를 가격표 시스템과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경제적 법칙을 통해 알아봅시다. 우선 연필 1개 만드는데 1시간이 들고 1천 원에 팔리며, 지우개 1개 만드는데 1시간이 들고 1천 원에 팔린다고 해보죠. 그런데 어떤 이유로든 갑자기 연필이 유행해서 연필의 수요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계시겠죠. 수요가 증대하면 가격이 증대합니다. 그러니 연필의 가격이 늘어날 것입니다. 이에 따라 연필 1개 가격이 12백 원 으로 늘었다고 해보죠.

이제 여러분이 상품 생산자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연필을 만들겠습니까, 지우개를 만들겠습니까? 지우개를 만들면 1시간에 1천 원인데 연필은 1시간에 12백 원이니 당연히 연필을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연필의 공급이 늘어나겠죠. 그럼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연필의 가격이 내려갈 것입니다. 경제학 얘기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저는 여기까지 단순한 예이긴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했습니다. , 연필 가격은 어디까지 내려갈까요? 우리의 예시에서는 연필의 가격은 지우개의 가격과 같아질 때까지 내려갈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연필을 1개 만드는데 들어간 1시간과 지우개를 만드는데 들어간 1시간은 동일한 가격을 표현하여 동일한 대가를 받게 되겠죠.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상품을 만드는데 들어간 노동(시간)이 상품 생산의 본원적 비용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종교가 욕망을 통제하는 신분제 사회와 달리 욕망이 통제되긴 커녕 자극되고 수요가 시시때때로 변동하는데, 가격표 시스템은 그것에 대응하는 위와 같은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가격표 시스템과 연관된 일물일가의 법칙을 알아보겠습니다.

 

일물일가의 법칙: 똑같은 상품은 똑같은 가격을 가진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똑같은 연필은 모두 같은 가격에 팔린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의 예시에서처럼 1천 원에 팔립니다. 그렇지만 각각의 연필 생산자는 숙련도에 따라 연필 1개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노동시간이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연필을 빠른 시간 안에 잘 만들고, 어떤 사람은 평균 속도로 연필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숙련도가 떨어져 느린 속도로 연필을 만들겠죠. 구체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이 1시간 걸린다면, 누구는 2시간, 누구는 30분 만에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연필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들었든 전체적으로는 평균 시간으로 환원됩니다. 연필 1개 가격은 1천 원이었는데 그 예시대로 보죠. 연필 1개 만드는 데에 2시간 걸리는 사람은 1시간에 500원 밖에 못 법니다. 30분 걸리는 사람은 1시간에 2천 원을 벌어갑니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작동하는 이유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신분제 사회는 기본적으로는 능력주의 사회가 아닙니다. 신분제 사회는 능력이 중요한 사회가 아니라 부모가 누군지가 중요한 사회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종놈 자식이면 종놈이고, 왕의 장자면 다음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부모가 누군지는 중요하지만 신분제 사회만큼이나 극단적이지 않고, 가격표 시스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회 곳곳에까지 능력주의가 작동합니다. 이런 능력주의는 근대 사회에서 장애인이라는 범주가 만들어지고 장애인 차별이 만연해진 근본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 능력주의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 봅시다. 가격표 시스템은 가치 법칙이란 것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치 법칙: 실제 노동시간이 평균 노동시간으로 전화

 

말이 좀 어렵지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연필 1개 만드는데 2시간 걸리는 사람이 지우개 1개는 30분 만에 만들 수도 있죠. 누구는 연필 만드는데 재능이 있고, 누구는 지우개 만드는데 재능이 있는 겁니다. 그럼 이 지우개 만드는데 재능 있는 사람은 지우개를 만드는 것이 돈을 벌기 좋겠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각자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을 선택해서 하게끔 유도됩니다. 제가 앞서 신분제가 경제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분업 시스템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가치 법칙이 경제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분업)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신분제 사회보다 생산력이 더 높은 거죠.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끔 유도하니까요. ... 이 분업 시스템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신분제 사회와 달리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그건 반쪽자리 자유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서 하기보다 돈을 잘 버는 일을 선택해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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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력의 상품화는 다들 잘 아는 얘기니 생략하겠다. 관건은 경제의 근본 문제로부터 출발해서 각 사회가 이걸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그 사회를 규정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게 마르크스의 얘기인데 자본 이전의 세계 책에서는 그 핵심 주변을 계속 빙빙 돌고 있다. 아예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쉽고 명료한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일부일처제와 같은 가족 얘기를 더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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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한 의미에서의 가부장제는 신분제 사회에서나 온전히 발휘될 수 있습니다. 일부다처제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 핵가족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새 첩, 서자가 있나요? 물론 아직도 이슬람권 같은 곳에서는 있긴 있습니다만, 많은 곳에서 법적ㆍ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가 일부다처제를 밀어냈습니다. 이 절에서 차차 살펴보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가부장제 사회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가부장제는 가부장적 문화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유산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 서자도 재벌가 등에서는 몰래 남아있어서 가끔 문제가 되긴 하지만 그조차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공식적인 일부다처제에 비할 바는 안 됩니다.

일부다처제는 낡고 후진 것이며 일부일처제는 진보적이고 평등하다는 인식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적어도 일부 측면에서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다처제에서 일부일처제로 이행한 것은 사람들이 착해져서’, ‘성도덕이 발달해서그런 게 아닙니다. 역사를 그런 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조야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만큼 성매매가 활발한 사회는 없었습니다. 재벌들의 성매매도 드러난 것도 있고 드러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과거의 일부다처제보다 통상 성적으로 덜 복잡하다는 건 그다지 근거가 없을 것 같습니다. 피임이 발달해서 사생아는 적어졌을 수 있지만, 과거라면 처첩이 되었을 성적 파트너가 반복되는 일회성의 성매매 대가로 치환되었다는 게 저는 현상을 더 적절하게 설명하는 듯합니다. 지배 계급 남성의 성욕이 공식적인 결혼 제도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성매매를 통해서 해소되는 것이지, 지배 계급 남성들이 금욕적이 된 게 아니겠죠. 물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어떤 페미니스트는 일부일처제보다 일부다처제가 여성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주장도 합니다. 결혼이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독점하는 제도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결혼은 여성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한 명하고만 결혼을 하니, 첩이라는 형태로나마 신분 상승을 할 길이 사라지는 거죠. 그 한 명도 정략결혼이나 상위층끼리의 결혼일 가능성이 높겠죠. 이게 성적인 얘기고 민감한 얘기긴 하지만, 정말 기본적인 사실만 짚고 보자면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있다는 겁니다. 사실 일부일처제가 올바른 성적 관계인 것처럼 여겨지는 문화 자체도 인류사에서 보면 극히 최근에 발생한 것이고, 한국은 더 그렇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충격을 받으실 분도 있겠지만, 그래도 사실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는 성적 도덕 중에 강간 같은 성폭력을 제외하면 보편성을 띤 성도덕은 없습니다.

...

자본가도 사람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가 오면 보통 자기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하죠. 그런데 가부장제 일부다처제처럼 자식이 많으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현대 사회는 장자상속이 구조적으로 장려되는 사회가 아닙니다. 과거와 달리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었고 경제가 발달하면서 토지의 지위가 이중으로 낮아졌습니다. 즉 토지를 분할 상속한다고 해서 국토가 나뉘지 않고, 토지보다는 기계 같은 발달한 생산수단 등의 동산이 중요해졌습니다. 화폐도 동산(動産, 움직이는 재산)입니다. 자본가들은 더 많은 토지를 원한다기보다 근본적으로 더 많은 화폐(교환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며, 토지 획득도 화폐 추구의 수단입니다. 따라서 토지가 부차화되었기 때문에 한 명한테 재산(토지)을 몰아줘야 할 근거가 약해졌습니다.

토지는 분할하면 기능이 떨어지기 쉽지만(토지에 접근하는 도로의 문제 등도 있습니다), 돈은 분할해도 교환수단으로써 돈인 것은 동일합니다. 즉 장자가 아닌 자식들도 주요 재산인 동산(화폐 등)에 대한 자기 몫을 요구할 요인이 커지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주요 생산수단인 토지의 상속만 주로 중요했다면, 나머지는 다른 자식들에게 조금씩 주어도 좋았습니다. 나라(국토)는 당연히 제1왕자에게 줘야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자식들을 굶겨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갈수록 상속 다툼에 모든 자식들이 동참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가부장제).

하지만 토지와는 사정이 달라도 돈 또한 다다익선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많은 돈은 적은 돈을 겸하며, 많은 돈을 추구하는 자본의 특성상 분할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죠.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기보다, ‘자본의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피임을 중시하죠. 성매매할 때 피임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처첩 제도 때와는 다른 거죠.

이처럼 장자상속에 대한 유인이 약해졌다면(한국에서 장자 등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던 법적 제도는 점차 약해지다가 1991년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아들 딸 구별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차피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건 20세기 초부터 발달한 혈액형 검사 및 현재의 정확도가 높은 친자 검사로 가능하고, 예전과 달리 남성의 근력 등 신체적인 강인함의 중요성도 떨어졌습니다. 발달한 도구가 그 중요성을 대신하고 있죠. 요즘에는 오히려 여성에게 강요된 사회성 때문에 여아를 더 원하는 현상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존재한 가부장적 문화까지 한번에 다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저는 구조적인 변화가 어떻게 진행됐으며 또 진행되고 있는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재벌가 내에서 여성 CEO도 나타났고, 앞으로는 재벌 그룹 자체를 여성이 대표하는 일도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가 문제이며 반동적인 저항이 얼마나 강한지가 문제이지, 이런 경향들이 나타나는 것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와 달리 교육받은 여성들의 여성 인권 운동도 물론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지배 계급의 가족에 관한 것이라면, 피지배 계급, 노동자 가족의 상에 관한 것은 약간 다릅니다. 물론 지배 계급의 가족관, 가족상은 당연히 피지배 계급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하위 계급은 상위 계급의 문화를 부러워하게 되고 모방하고자 함으로써, 문화적 상승감을 느끼고 싶어 하니까요.

앞서 제가 자본주의 사회의 분업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가치 법칙에 대해 말씀드린 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노동자는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을 선택해서 하게 됩니다. 물론 자기가 선호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노동자도 있지만, 너무 그런 구체적인 부분까지는 일단 고려하지 말고(개인의 선호를 제가 일일이 파악할 방법도 없습니다), 추상적으로 봤을 때는 이론상 이런 가정을 하는 게 얼마든지 타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돈 잘 버는 일이겠죠. 이 돈 잘 버는 일이란 산업상의 구조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어떤 직업은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직업은 생겨나기도 하죠. 또 수요와 공급의 변동에 따라, 어떤 직업은 일시적이나마 돈을 잘 벌게 되고 어떤 직업은 경쟁이 심해져 돈을 잘 못 벌게끔 변화합니다. 이런 변동은 단순히 단기적이지만은 않고, 여러 사정으로 인해 장기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해당 직업의 진입장벽이 높을 수도 있고요.

아무튼 이런 직업의 이동성은 실제로 지역적 이동성을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임업은 나무가 있는 곳에 가서 하고, 수산업은 물이 있는 곳에 가서 해야죠. 계속 같은 회사에서 일하더라도 (지역적) 파견을 나가게도 됩니다. 따라서 현대 사회는 이동을 많이 해야 하죠. 헌법상 보장된 거주 이전의 자유라는 게 있는데, 이것은 일정 정도 이동이 제한된 신분제 사회를 부르주아 혁명이 타파하면서 적극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자본주의적 지배 계급에 의해서 토지에 혹은 재산으로 속박된 노동력을 고용하기 위해 해방시킨 결과물 중 하나인 거죠.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고 산업이 발달한 북부로 이동할 수 있게 되는 것, 이런 사례를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 이것과 가족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요? 가족은 규모가 작으면 작을수록 이동에 유리합니다. 즉 이런 점에서 보면 핵가족 형태가 제일 좋은 것이죠. 부모ㆍ자식으로 이루어진 핵가족은 생물학적 재생산의 가장 기본 단위(작은 단위)일 뿐만 아니라, 지역적 이동을 하기에 좋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중에 부모님의 직업이 바뀌거나 파견이 되면서 덩달아 같이 이사를 하게 된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럴 때면 주위의 학교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지 않았나요? 혹은 이런 사례를 들어보신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 그래서 부모님한테 나는 이사가기 싫다고 를 쓰신 분도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가족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이런 지역적 이동이 힘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자식이 있는 장성한 부모고, 노부모와 같이 살고 있다면, 이분들을 설득해서 데리고 이사가는 게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부담은 커지는 거죠. 자식이 장성하면 독립시키는 게 상식이 된 이유도 자본주의 사회와 연관이 있는 겁니다. 이 내용 자체는 가족사회학의 유명한 산업화테제인데, 애초에 보수적인 기능주의 사회학에서 처음 제기되었으며 좌우를 크게 가리지 않고 유명한 테제입니다(물론 어딜 가나 있듯 학문적 논쟁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만, 그렇게까지 자세히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 논쟁 지점이 있다는 걸 언급만 해두겠습니다)[Elliot(1993)가족사회학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생물학적 재생산의 단위를 가장 작게 만들 수 있는 결혼 형태는 누가 뭐래도 일부일처제죠. 또한 과거에는 가족이 주로 생산 단위였는데(소농[농민] 가족), 그래서 어느 정도 가정 내에 농사를 위한 노동력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현재는 생산의 기본 단위가 기업이 되었죠. 이 측면에서 또한 가족의 규모가 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부일처제, 핵가족이 주된 가족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가족(가문)’, 가부장제는 과거에는 지배 계급에서 더 강력한 제도였지만, 현재는 피지배 계급의 노동력 재생산을 관리하는 데에서 더 원활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선 생산력이 발달하여 지배 계급의 인구를 자원 문제 때문에 제한해야 할 필요가 사라졌습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는 건 자원 부족 문제가 아니라 분배 문제 같은 것 때문입니다.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여유롭게 살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은 발전했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지배 계급의 인구를 관리하는데 집중하느라 전체 인구를 관리하는 건 뒷전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때도 인구 조사가 있었지만, 일부러 인구를 적게 조사하여 세금을 적게 거두는 게 선정(좋은 정치)’으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양반의 족보는 현대의 주민등록제도를 방불케 하죠. 그렇지만 귀한 가문이 아닌 이상 족보 같은 정도의 조사가 없었습니다. 현재는 모든 인구가 인구학과 통계학의 조사 대상이 됩니다. 그게 가능한지가 국가의 국력을 좌우하는 척도 중 하나기도 하죠. 사실 인구라는 사람을 숫자로 세는 개념 자체가 신분제 사회에서는 통용되기 어려웠던 개념입니다. 왜냐? 신분제 사회에서는 형식적으로 사람이 똑같을 수가 없잖아요. 귀족이랑 평민이 어떻게 같은 사람입니까? 신분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어떻게 똑같이 숫자로 세겠습니까? 감히? 그러니까 인구는 근대에 이르러서야 대두될 수 있었던 개념인 겁니다.

다른 한편 무한한 화폐 증식 추구를 위해 노동력이 중요해지죠. 이와 관련해 낙태는 재미있는 역사적 차이를 보여줍니다. 과거에, 예를 들어 조선 시대 때도 낙태죄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그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낙태죄와는 다릅니다. 다른 사람을 폭행해서 낙태시킨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었고, 임신한 여성이 스스로 낙태(임신 중단)하는 것은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다른 사람을 낙태시킨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오늘날과는 많이 다르죠? 자기낙태를 처벌하는 낙태죄 자체가 근대 형법의 산물입니다. 자기낙태는 원래 원시 부족부터 근대 이전까지 기본적으로는 처벌해야 할 범죄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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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측면에서 정리하면 가족은 엥겔스가 규정한 대로 1차로 사적 소유의 재생산 기제다. 만약 가족이 사회화되고 가사노동이 사회화된다면 가사노동을 분업과 협업을 할 수 있으므로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더 싸질 것이다(가사노동에도 노동력이 필요하고, 그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필요하므로 가사노동은 부불노동’, ‘공짜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적 소유의 근간이 의심받으므로 안 하는 거다. 토지 국유화가 자본주의에도 이롭지만 안 된다고 마르크스가 설명한 것과 비슷한 이유다. 그리고 이 가장 기본적인 가족의 규정 위에 자본주의적 일부일처제라는 규정이 추가된다. 작은 인원수의 규모로 가구가 분할되어 있으면 그만큼 가전 제품도 집집마다 많이 팔 수 있다. 또한 직장은 정서적 기능을 제공하지 않고 가족이 정서적 기능을 담당하도록 되면서 가장은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 가족이 생산의 단위가 아니라 기업이 되면서 생기는 일이다. 이건 뭘 반박하려고 쓴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거다.

이로써 일부일처제로 역사 전반을 보는 게 왜 조야한지까지 설명했다. 근대화 관련한 얘기를 추가해보겠다. 근대화를 간단하게 얘기하면 자본주의화지만 전근대/근대화로 비교하면 전근대(신분제) 탈피가 근대화다. 즉 사회주의화도 근대화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해당 사례를 찾기는 어려우니 편의상 자본주의화라고 해도 일단은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내가 근대화를 이렇게 폭넓게 보는 건 마르크스주의가 근대를 비판하면서도 그 긍정성까지 포함하여 변증법적으로 사고하고, 마르크스가 근대의 아들이라고까지 불린 맥락 등을 반영하고자 해서다. 물론 더 세세히 얘기하면 원시 공산사회 부족이 근대화가 되는 것도 있겠지만 논지를 집중하기 위해 생략한다.

근대화는 1. 토지 소유에 기반한 신분제 철폐와 2. 소농(농민)의 노동자로의 전환, 두 가지 이뤄지는 것으로 성사된다. 전자의 대표적인 형태가 민주화, 후자의 대표적인 형상이 산업화다(추가로 2번을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게 농업혁명이다. 식량 생산 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있어야 산업상의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자유로운 노동자가 생기므로 농업생산성이 우선 발달해야 한다. 이것도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밝힌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어떤 방법으로 이뤄졌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이후 행로에 대한 경로의존성이 정해진다. 크게 세 가지 경로를 보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1. 유럽: 흑사병으로 봉건제가 타격을 입었고 노동력이 귀해졌다. 프랑스 혁명 같은 신분제 타파 혁명도 일어났다. 인클로저는 소농 혹은 농민을 노동자로 만들었다(본원적 축적과 연관). 오늘날 유럽이 상대적으로 민주주의 풍토가 강하고 반권위주의적 문화가 더 큰 것은 혁명 같은 방법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2. 현실 사회주의: 사회주의화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화로 귀결되었다. 토지에 대한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토지 소유에 기반한 신분제가 철폐된다. 농민의 노동자로의 전환은 집단농장, 국영농장 그리고 산업화로 이뤄졌다. 이 영향으로 국가주의적ㆍ권위주의적인 영향이 크게 나타난다.

3. 한국: 식민지화로 신분제에 대한 1차 타격이 일어났지만 제국주의 착취ㆍ수탈의 보조 형태로 전근대적 잔재가 이용된다. 토지의 유상몰수ㆍ유상분배,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토지 보상의 유야무야로 신분제적 잔재가 많이 해소된다. 이후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 운동 등 산업화로 농민의 노동자로 전환이 일어난다. 한국의 근대화는 먼저 일본화였고, 그 이후 서구화였기 때문에 일제 잔재가 전통인 줄 아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살아 있는 자들의 머리 위에 악몽처럼 짓누른다.”

러프하게만 얘기한 거지만 내가 근대화를 보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경로와 형태였으며 그로 인해 어떤 경로의존성이 생겼는지다. 관심 두는 부분이 저자랑 차이는 있을 텐데, 그렇다고 이건 진지하게 크게 대립시키려고 한 말은 아니다. sns에 비평하려면 근대, 근대화에 대해서도 자기 생각을 얘기해야 한다고 그러기에 써봤다. 손민석 씨 이쯤 되면 얼마나 많은 분량의 비평을 요구하신 건지 좀 아시겠죠? 이걸 다 해주려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정말 어떤 분이 혼냈다고 한 것처럼 독자들 입을 막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의견 갖고도 또 손민석 씨가 뭐라 할 테고 또 그것 갖고 내가 또 뭐라 할 거 생각하면 벌써 골치가 아프다.

참고로 마르크스는 자본론 서문에서 자신의 자본론 서평을 인용하며 각 시대(사회)마다 다른 인구 법칙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것과 원시 모계 사회 이후 부계제적 일부일처제가 전개돼왔다는 저자의 설명이 일치할까? 아닌 듯하다. 여기까지가 저자의 기본 논지에 대한 나의 핵심적인 반론이다. 더 할 이야기들도 많지만 서평은 내 연구 개진하는 곳이 아니니 이만하겠다. 나머지는 책 내용들 지엽적인 부분들에 대한 비판 남겨두겠다.

 

1. 상인자본을 화폐자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게 맞는 걸까? 상인자본은 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으로 나뉘며 상품거래자본이 상업자본이 되고 화폐거래자본이 현대적 은행으로 발전한다. 자본론 2권에서 생산자본, 상품자본, 화폐자본을 얘기하고 있는데 전자본제니까 생산자본은 없다고 치고 그럼 상인자본과 고리대 자본이 있다는 게 마르크스의 설명인데, 고리대 자본은 화폐자본이겠지만 상인자본이 화폐자본인가? 적어도, 화폐자본만 있는 건가? 상품자본은 어디로 갔나? 저자가 마르크스의 어느 구절에서 발견해가지고 말하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마르크스가 말기에 쓴 자본론 2권이 가장 생산자본, 상품자본, 화폐자본 개념을 엄밀하게 전개하고 있다.

 

2. “자본주의적 생산이 평균이윤율을 매개로 하여 끊임없이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가격을 하락시키며 초과이윤의 획득을 꾀한다”(570-570)

특별잉여가치를 얘기하는 건데 이게 왜 생산가격인가? 시장가격이 부문 내에서 작용하는 거고 생산가격이 부문 간에서 작용하는 것이며 두 개를 합쳐서 현실의 가격에 더 가까운 형태가 시장생산가격이다. 특별잉여가치를 얘기하는 거면 당연히 시장가격(개별가치-시장가치-시장가격, 여기서 더 다루진 않겠다)을 얘기해야지, 왜 엉뚱하게 생산가격을 얘기하고 있나? 부문 내에서 특출하게 생산성이 높으면 수취하는 특별잉여가치는 생산가격과 다르다. 생산가격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율이 평균과 다른 자본 간에 평균 이윤율이 형성되는 것으로 부문 간을 의미한다(당연히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개념이므로 언급만 하겠다). 차라리 그냥 가격이라고 얘기하면 모든 사람들이 더 이해하기 쉬웠을텐데 그냥 자기가 자본론 읽고 공부했다고 자랑하려고 생산가격이라는 개념을 (잘못) 쓴 것 아닌가. 좋지 않은 글쓰기 습관이고 내친김에 언급하면 책 전체도 가독성이 떨어진다. 자본론의 지대편에서 저자가 혼동하기 쉬웠을 문장들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건 맥락이 다르다. 절대지대 얘기 다음에 한 얘기인 데다가 특별잉여가치/차액지대가 다른 것이고, 마르크스 자신이 초고라 내용이 난잡하고, 생산가격이라고 써놓고 여기서의 생산가격은 사실 무엇무엇을 얘기한다, 이런 식으로 퉁치고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자본 간 가치 구성이 다른 데서 발생하는 생산가격은 분명하게 다른 건 저자가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기에 더 이상은 생략한다.

 

3. 월러스틴 논의를 인용하며 임금 상승을 얘기하는데 여기서 임금이 실질임금(상품량으로 환산한 임금)인가, 명목임금(화폐임금)인가? 마르크스가 상대적 잉여가치를 주장하며 하는 얘기가 소비재 생산성이 오르면 실질임금은 증가하지만 명목임금은 하락한다는 것이다. 즉 착취율은 올라가지만 실질임금은 올라가는 게 기본이라고 밝혔고 자본주의의 임금 동학은 실제 대체로 그런 방향대로 흘러갔다. 그리고 전형적인 임금 상승-이윤 압박설의 재탕을 하고 있는데 그건 이렇게 쉽게 할 얘기가 아니다. 실질임금을 보는 게 맞냐, 명목임금을 보는 게 맞냐를 두고 이윤율 저하설도 걸리고 오키쇼, 폴리 같은 경제학자들이 다 한마디씩 얹었고, 임금 상승-이윤(자본) 압박 이야기도 경제학적으로 큰 논쟁거리다. 얼마나 공부했어서 이렇게 간단히 처리하는지, 해당 쪽수들의 너무 짧은 이야기들로는 파악도 불가능하다. 독자들에게 괜한 오해만 야기하기 쉽다. 추가로 노동력 재생산 비용 전가하는 건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노동자에게 전가해서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올라가면, 결국 생계비->임금이 올라가는데, 그게 이윤이 줄어드는 거 아닌가?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주는 것과 노동력 재생산 비용 전가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경제학적으로 전혀 엄밀하지 않은 것이다.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주면 노동력 재생산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는다. 당장 손민석 본인도 전가한다고 하고서 가계의 재생산 비용도 상승하여 출산율이 급락”, “... 더 이상 장악할 노동력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똑같이 월러스틴을 인용하며 임금수입 말고 다양한 수입 원천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도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채만수는 노동자들의 월급에 부가되는 이자, 주식 소득 같은 금융소득도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기 때문에 경제학적으로 임금이라고 포함시킨다. 계급 대 계급으로 보면 전체 필요노동 대 잉여노동이 구분되기 때문에 전자에 해당하면 임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손민석은 방법론적 전체주의와 대비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빠져 있다. (이 얘기에 동의하든 말든 생각난 김에 첨언하자면) 채만수, 노사과연, 강성윤 이런 사람들 스탈린주의자들이라고 마냥 무시하지 말고 배울 건 배워라. 나도 트로츠키주의자지만 강성윤 자본론 강독만 10년 가까이 수백 번, 지금도 계속 듣고 있다. 지금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학계 밖에서 연구로 살아남았고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사람이 채만수 말고 있긴 하나? 손민석 씨가 따라갈 수 있을 만한 선례는 채만수 정도밖에 없다. 자기 책은 색안경끼고 보지 말고 읽고서 평가하라는 사람이 왜 자기는 잘 모르는 사람들 논의 쉽게 보고 폄하하나. 강성윤 서울대 강의 폐강돼도 되지 않냐고 한 거 보고 하는 소리다. 남한테 엄격하고 자기한테 관대한 태도, 이중잣대는 극복해야 한다.

 

4. 단순상품생산 개념 사용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원래는 단순상품유통이다. 자본론 본문에서 단순상품생산이 딱 한 번, 자본론 3315장에 나오는데 그것도 사실은 엥겔스가 쓴 것이다.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엥겔스가 단순상품유통을 단순상품생산으로 바꿔서 쓴 것인데 단순상품유통은 마르크스가 아직 (자본의) 생산과정도 들어가기 전에 쓴 개념으로, 이걸 아무 이유없이 바꿔서 써야 할 필요가 없다. 나아가 단순상품생산이든 단순상품유통이든 이걸 소상품생산과 혼동하는 것도 개념적으로는 착오가 있다고 생각된다. 손민석 저자는 소상품생산이라고 써야 할 것을 단순상품생산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에 대한 타당한 이유도 제시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넘버링된 이야기들 등에 대해선 손민석의 공부 배경이 나와 달라서 내가 모르는 뭔가를 쥐고 있을 가능성도 무시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그냥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파악 부족이라고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사소한 잔소리 두 가지만 더 하겠다.

출판한 책에 오타가 너무 많다. 어느 정도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솔직히 이 정도로 심한 책을 별로 못 본 것 같다. 오타는 저자의 책임도 있지만 편집자의 책임도 있다. 오타는 희한한 게 저자는 자기 책임이라고 하고 편집자는 자기 책임이라고 하는 게 출판업계라는 곳의 생리 중 하나인데(정상적인 저자와 편집자라면), 사실 당연히 둘 다 책임이 있다. 오타는 지엽적이라면 지엽적인 거니 이 이상은 더 말하지 않겠다.

원전 인용을 왜 이렇게 옛날 번역 버전으로 했는지 의문이다. 자본론 1권의 김영민 역 1990이라니 이거 강신준 교수가 가명으로 낸 거 아닌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주석으로 설명해주면 좋지 않았을까? 게다가 최근 버전도 있는데? 저자 본인은 독일어 원전도 읽는 모양인데 그래도 인용을 옛날 번역서로 하면 신뢰성이 떨어진다. 한 두 권이 이런 것도 아니고 전체적인 인용이 거의 다 옛날 번역본으로 보인다. 이것도 위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론서로서는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 트집 잡는 걸로 생각하지 말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바란다. 나름 학술서로 냈을 텐데, 이런 식으로 책 쓰는 사람이 없다. 아마 본인이 옛날 번역본으로 구했고(헌책방에서?) 그게 익숙해서 했을 텐데, 어느 정도는 도서관을 이용하는 발품을 팔면 좋지 않았을까?

 

이상이다. 서평을 길게 썼는데 솔직히 이렇게 공을 들일 만한 일도 아니었다. 원고료도 안 나오는데... 그렇다고 본격적인 학술적 글쓰기를 한 건 아니라 분량 말고는 노력 낭비하지 않았으니 뭐. 내가 쓴소리한 부분들에 대해선 손민석 씨가 기분 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을 들인 서평은 옳든 그르든 결국 저자에 대한 응원의 마음에서 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책 쓰고, 연구 잘 해나가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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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pdlakstp 2026-02-22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글에 감사드리며 개인 SNS에 관련된 글을 적었습니다. 답변이 되었기를 바라며 임정빈씨도 좋은 연구 계속 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https://www.facebook.com/sonminseog.23629/posts/pfbid05fUEyvkhKRHGNmf4w6m9cQcrr1KUo34tGr4CtR4ZmsMqYRb9oSZ4HRFVUzpDw5Mrl

마님 2026-02-22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손민석님이네 감사합니다!!

마님 2026-02-22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s://www.facebook.com/share/p/1H84paFCNu/ 답글입니다~
 
다시 쓰는 자살론 - 자살국가와 사회정의
김명희 지음 / 그린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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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쓰는 자살론은 개인의 비극으로 치부되던 자살 문제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재해석한 사회학적 탐구서다. 에밀 뒤르케임의 고전적 논의를 21세기 한국 맥락에 맞춰 확장한 이 책은, OECD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 뒤에 숨겨진 국가의 무능과 사회 시스템의 결함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저자는 6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속에서 자살을 단순한 심리학적 사건이 아닌, 거대한 사회적 병폐의 결과물로 조명하며 독자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1) 자살은 사회적 죽음이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자살이 개인의 나약함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구조적 폭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 양극화, 신자유주의적 경쟁, 젠더·세대·지역 불평등 등 사회 전반에 깔린 구조적 모순이 어떻게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지 다층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사회적 보호 기능을 상실한 국가를 자살국가또는 국가 없음으로 개념화하며, 책임과 연대를 잃어버린 한국 사회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개념은 국가가 통치 기능만 남기고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방기한 채 비극을 방치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예리한 통찰이다.

 

2) 이론과 현실을 아우르는 탁월함

 

  『다시 쓰는 자살론의 탁월함은 추상적인 사회학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현장 취재와 풍부한 사례를 통해 그 이론을 생생하게 구현해냈다는 점이다. 저자는 5·18 피해자, 탈북민, 교사, 재난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자살 사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각기 다른 고통이 어떻게 사회적 구조와 연결되는지 해부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단순한 통계 자료를 넘어 독자에게 깊은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고, 자살 문제를 더 이상 나와 무관한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단적인 예로 이 책이 제공하는 교사의 업무 수행과 관련된 신공공관리론 비판은 교권과 학생 인권의 이분법적 대립을,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풀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 책의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몰입감 있게 읽히는 이유들이다.

 

3) 사회정의와 연대, 유일한 해법

 

  이 책은 단순히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살을 막기 위한 해법으로 의료·심리 중심의 예방책을 넘어, 사회정의의 실현과 생존권 보장을 근본적인 대안으로 제시한다. 복지 확충, 노동권 강화, 주거 안전 보장 등 사회 시스템의 대대적인 전환을 촉구하며, 자살 문제를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재구성해 독자에게 행동을 촉구한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죽음의 메커니즘을 냉철하게 해부하고, 연대와 정의 없는 삶은 불완전하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선언문이다.

 

  『다시 쓰는 자살론은 학술적 가치와 사회적 울림을 동시에 갖춘 역작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더 이상 자살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고,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강력한 비판이자 동시에 연대의 촉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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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지 않다 - 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
박원익.조윤호 지음 / 지와인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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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말 쉽다. 그리고 기존에 바라보지 못했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준다. 물론 이 책의 내용에 전부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나조차도 PC주의에 대한 비판을 읽다 보면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갸우뚱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의 무엇보다 큰 장점은 기성 세대의 편견을 가차없이 깨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대중 문화, 젊은 세대 문화에 대한 저자들의 해박한 지식과 높은 이해도는 젊은이조차 놀라게 만든다. 20대가 궁금하다면, 그리고 20대가 보수화되었다는 말에 반감을 가지는 젊은이라면 꼭 이 책을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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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스 2011.8
찬스 편집부 엮음 / 학산문화사(잡지)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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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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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묵시록 카이지 39
후쿠모토 노부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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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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