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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자살론 - 자살국가와 사회정의
김명희 지음 / 그린비 / 2025년 8월
평점 :
『다시 쓰는 자살론』은 개인의 비극으로 치부되던 자살 문제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재해석한 사회학적 탐구서다. 에밀 뒤르케임의 고전적 논의를 21세기 한국 맥락에 맞춰 확장한 이 책은, OECD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 뒤에 숨겨진 국가의 무능과 사회 시스템의 결함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저자는 6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속에서 자살을 단순한 심리학적 사건이 아닌, 거대한 사회적 병폐의 결과물로 조명하며 독자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1) 자살은 ‘사회적 죽음’이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자살이 개인의 나약함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구조적 폭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 양극화, 신자유주의적 경쟁, 젠더·세대·지역 불평등 등 사회 전반에 깔린 구조적 모순이 어떻게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지 다층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사회적 보호 기능을 상실한 국가를 ‘자살국가’ 또는 ‘국가 없음’으로 개념화하며, 책임과 연대를 잃어버린 한국 사회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개념은 국가가 통치 기능만 남기고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방기한 채 비극을 방치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예리한 통찰이다.
2) 이론과 현실을 아우르는 탁월함
『다시 쓰는 자살론』의 탁월함은 추상적인 사회학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현장 취재와 풍부한 사례를 통해 그 이론을 생생하게 구현해냈다는 점이다. 저자는 5·18 피해자, 탈북민, 교사, 재난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자살 사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각기 다른 고통이 어떻게 사회적 구조와 연결되는지 해부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단순한 통계 자료를 넘어 독자에게 깊은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고, 자살 문제를 더 이상 나와 무관한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단적인 예로 이 책이 제공하는 교사의 업무 수행과 관련된 신공공관리론 비판은 교권과 학생 인권의 이분법적 대립을,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풀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 책의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몰입감 있게 읽히는 이유들이다.
3) 사회정의와 연대, 유일한 해법
이 책은 단순히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살을 막기 위한 해법으로 의료·심리 중심의 예방책을 넘어, 사회정의의 실현과 생존권 보장을 근본적인 대안으로 제시한다. 복지 확충, 노동권 강화, 주거 안전 보장 등 사회 시스템의 대대적인 전환을 촉구하며, 자살 문제를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재구성해 독자에게 행동을 촉구한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죽음의 메커니즘을 냉철하게 해부하고, 연대와 정의 없는 삶은 불완전하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선언문이다.
『다시 쓰는 자살론』은 학술적 가치와 사회적 울림을 동시에 갖춘 역작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더 이상 자살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고,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강력한 비판이자 동시에 연대의 촉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