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치열한 무력을 -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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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황스러웠다. 책 표지에 쓰여진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빠져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도무지 이건 너무 어려운 것이다. 몇 번이나 읽고 다시 읽어봐도 이해가 잘 안되고, 이해되었다고 생각했음에도 책을 덮고나면 내가 진정 이해를 했는가 갸우뚱. 뭐랄까. 읽긴 읽었으나 정말 내가 이 책을 읽었는지 스스로 의문이 생겼을 정도? 특히나 앞부분의 <말이 태어나는 곳>에 대한 좌담이 너무 어려워서 그만 힘이 빠지고 무력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이 치열한 무력을"인가 하는 우스운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리뷰를 쓰러 들어와보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 책이 어려웠나보다.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며 리뷰를 쓰기 시작한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계속 읽게 했던 힘은 바로 이 책에서 나왔다. 이 책의 54페이지에서부터는 <모르는 것은 재미없다?>라는 주제로 좌담을 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면 "더 알기 쉽게 말해!"라고 화를 낸다는 것이다. 소설이나 만화같은 경우에는 "어려운 건 재미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곧 내가 모르는 것은 시시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경우에서는 완전히 그와 반대였다. 어려운 것이 재미없기는 하지만 내가 모르기 때문에 시시해하기 보다는 자신의 무지에 조금 절망한다고나 할까? 어찌되었든 이들은 '내가 모르는 건 시시한 거야'라는 생각은 독서에 '권력욕'을 투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아-'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료함, 시시함을 즐기는 이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 중 사사키 아타루의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사사키는 작가 호사카 가즈시의 "소설은 울음을 받아주는 엄마 품속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빌려 "예술은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으면 초콜릿을 넣어주는 할머니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얼마 전까지 꽤 오랫동안 미술관에서 일을 했었는데 매번 전시가 바뀔때마다 전시가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아 조금 꽁해져 나중에는 아예 전시장에 잘 올라가지 않게 되었던 경험이 있다. 사사키의 말은 예술을 접하는 데 있어 마음가짐을 고치게 해주는 말이었다.

 서두에서부터 책이 너무 어렵다는 말을 계속했지만 책이 내내 어려웠던 것만은 아니다. <연애의 시작>에 대해 쓰여진 부분은 재미있기까지 했다. 나는 무교에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신으로부터 시작한 '사랑'이 어떻게 지금의 연애가 되는지에 대한 짧막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신의 사랑 혹은 신에 대한 사랑만이 '진짜'고, 그 창조물인 인간끼리의 관계는 육욕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지만 트루바두르라 불리는 음유 시인들에 의해 "연애가 발명"되고 난 후, '궁정 연애'가 성립되었다는 이야기는 특히나 더 흥미로웠다.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하고 있기에 유럽 문학에 대한 수업을 들으면 항상 처음 배우게 되는 부분이 이 궁정문학 부분이다. 대부분 기사가 귀부인을 사모하는 내용인데 그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나 불미스러운(?) 일은 전혀 없다. 귀부인의 남편은 기사가 자신의 부인을 사모하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이러한 귀부인에 대한 기사의 숭고한 사랑의 모습이 흡사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유사하게 느껴져 신으로부터의 사랑이 지금의 연애가 되기까지 그 변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있었던 것이다. 또 사사키가 연애에 관해 인용한 사카구치 안고의 『연애론』의 구절이 정말 멋있어서 몇 번을 읽었다. 참으로 공감되었다.

 

교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앞 세대가 그 때문에 실패했으므로 후세 사람은 그걸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교훈이 하나. 앞 세대는 그 때문에 실패했고 후세 사람도 실패할 것이 뻔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교훈이 또 다른 하나.

 연애는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결국은 환상이고, 영원한 연애 따위는 거짓 중의 거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는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삶 자체가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니까. 이는 "사람은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면 빨리 죽어라"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는 영원한 연애, 영원한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는데 그것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환상이고 거짓이라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면 빨리 죽어라"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듯이 "영원한 연애란 없다. 어차피 헤어진다면 빨리 헤어져라"라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거겠지?

 

 대부분이 철학을 어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다. 철학에 대해 알고 싶어서 관련된 강의를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철학이 어렵다. 때문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책 표지의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책을 펼치기 두렵기도 했다. 이 책은 철학에 대해 지혜와 친구로 지내는 것이라 답한다. 대등한 관계에서 지배하지 않고 친구 같은 사이로. 나는 철학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나, 친구처럼 일상적으로 곁에 두려하지 않고 몇몇 강의에 의지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이 책은 여자들의 '철학적 의문'에 답하고 있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철학이 "언제까지 '꾸미는' 혹은 '예쁜' 나로 존재해야 할까?", "이 시대에 출산은 옳은 것일까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자원봉사나 모금을 안 하는 것은 죄일까요?", "일하는 의미를 모르겠다" 등의 일상적인 질문과 만나니 참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이런 것도 철학이구나. "일하는 의미를 모르겠다"에 대한 사사키의 대답 중 일에서 '안정'이나 '자극'을 구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잘못된 게 아닐까란 부분에 대해, 일이란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주어진 일들을 누군가는 해야하는 상황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정한 일에 보람을 느끼고 의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일은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직업이라는 것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니만큼 원한다면 안정이나 자극 정도는 구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자원봉사나 모금을 안하는 것은 죄라는 난폭한 생각에 대해서는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시아준수의 선행이 떠올랐다. 그는 캄보디아 도시빈민을 위해 주거수리 및 개선 사업을 하고 소외계층 이웃을 위한 사랑의 집짓기 사업을 후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와 관련한 댓글에 왜 캄보디아 빈민들만 도와주느냐는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보아 그런 난폭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매우 적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사사키가 파울 첼란을 읽어보자고 하는 부분이 참 인상 깊다. 독문학도로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파울 첼란의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는데 그의 부모는 수용소에서 살해당하고 첼란은 극적으로 도망쳐 나오게 된다. 그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모든 후유증세를 다 지니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 가지는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이었다. 사사키가 언급했던 '줄 서기'에서 첼란은 그가 줄을 옮기면서 그 대신 죽게 된 자에 대한 죄책감에 빠져 평생을 속죄하고자 했다. 첼란의 시는 고통을 표현하고 고통을 언어로 감당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즉, 현실에 상처를 입은 채 현실을 찾고 얻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원전 사고로 위기를 맞은 일본인에게 파울 첼란을 추천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사키는 읽을 책을 고를 때 "또 읽게 될까?" 여부로 정한다고 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책을 반복해 읽음으로써 몸에 배게 한다. 마지막으로 내게 그런 책을 당신이 만들었다고 사사키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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