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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 ㅣ 사계절 1318 문고 56
박채란 지음 / 사계절 / 2009년 5월
평점 :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죽는다, 죽인다, 죽겠다를 입에 달고 사는 현대인, 과연 그 말의 빈번한 사용 만큼이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얼마 전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을 온 국민이 애도할 때도 나는 그 죽음이 자살이라는 사실이 편치 못했다. 물론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한 개인의 고통은 타인이 왈가왈부할 차원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난 자살을 통해 무언가를 호소하거나 얻으려 한다는 것에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어린 아이라면 떼라도 쓰고, 어른이라면 자기 의지나 능력으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지만 손발이 묶인 죄수'와 마찬가지기에 목숨을 걸지 않고선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여고생 3명,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 싶어서 만나면 등짝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이들의 속깊은 상처를 알게 되기에 그저 숨죽여 그들 옆에서 듣고만 있는 나를 본다.
신비로운 몽상가 하빈이가 식물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하는 말은 곧 우리 모두에게 주는 삶에 대한 격려와 통찰, 코끼리가 아카시아를 돕는 방식처럼 '애쓰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기만 해도 우리는 서로 돕게 되는'거라는 말이 얼마나 고맙고도 정겨운지.
인생은 늘 예측불허이듯 자살 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거나, 자살로도 자신의 가장 절실한 것을 얻을 수 없는 이들의 모습이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하빈이(곧 작가)가 얼마나 이들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절절한 목소리로 이들의 삶을 응원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다소 황당하긴 해도 안전요원 K-758 하빈이처럼, 또 다시 누군가 자살을 생각할 때 그것을 막기 위해서, 그의 삶은 자신의 선택이며 어떤 어려움이든 끝까지 지켜낼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천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른들은 철없다고 하지만 철없는 청소년들이 아무리 철든척 애를 쓰며 살아도 대한민국의 현실은 청소년들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못하다. 가정과 사회에서, 학교에서 끝없이 소외 당하고 갈등하고 좌절할 때 '목요일, 사이프러스'처럼 그곳에 가면 나처럼 울고 싶은 또 다른 친구가 있고, 나의 질문을 친철히 답해 주는 하빈이 같은 언니가 있다면 삶을 포기하는 청소년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지 않을까?
태정, 새롬, 선주의 삶을 조금은 가볍게, 하지만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고 하빈이는 다음 임무를 향해 떠났다. 인생을 새로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새로 발견한 이들의 평온함이 엔젤윙베고니아 꽃향기처럼 사이프러스 안을 가득 채운다. 나도 그들과 함께 하빈이의 빈자리가 아쉽기는 하지만 언젠가 내가 삶에 지쳐 절망하고, 후회할 때 하빈이의 목소리는 다시 들릴 것만 같다.
"잊지마. 사랑이 제일 중요한 거야. 작은 민들레 홀씨 하나에게도, 수백 년을 살아 낸 메타세콰이아 나무에게도, 그리고 너희들에게도, 똑같이 사랑이 가장 중요해.
사랑이란, 너희가 선택한 바로 그 삶 안에서 살아 있으려는 마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