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 신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9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자신만의 논리적 설득력을 가진 해석보다는 다른 사람의 해석된 말을 찾아 읽고 저명한 인사의 말이나 언론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말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말을 가지기 위해서는 끊임 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지식을 알 필요가 있다.

국어 시간에 배운 시를 시험 문제로 풀면서 학생들은 흔히들 왜 우리가 느끼는 대로 그 감상을 말하는 시를 시답게 느끼면 안되는 것인가하는 말을 하고들 한다. 물론 시험 점수에 대한 넉두리겠지만 이 말을 들으면 공감이 가면서도 웬지 모를 허전함이 느껴진다. 그것은 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익혀두면 자신의 감상을 어떻게 표현을 했느냐에 관해 작가의 세상을 해석하는 눈을 더 가까이에서 드려다 볼 수 있음에 있다. 그래서 배움은 또 다른 눈을 낳고 그 안목이 또 다른 배움을 잉태하는 것이다.

그림도 한 편의 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예술의 창조성은 예술가의 혼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그 혼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창조의 고통만큼은 아닐지라도 그와 흡사한 창조의 시간을 역추적하는 일이 필요하다. 창조를 역추적하는 일은 창조의 과정보다 더 힘겨울 수 있다. 그것은 화가의 붓이 끝낸 작품은 그 모습 그대로지만 그 붓질을 읽어내는 사람들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화가가 남긴 붓길을 거꾸로 따라가며 논리적 설득력을 지닌 해석들과 조우하는 것은 또 다른 창조물을 만나는 일과 같다. 작품이 한 사람의 시선을 사로 잡아 해석을 낳고 그 해석이 작품을 새롭게 하고 그런 새로움이 모여 또 다른 작품을 낳는 변증법적 상생관계 속에서의 다양성이 그림을 말하게 한다.

요즘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바람의 화원'이라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만나는 것 같아 더욱 흥미를 끄는 책이다. 특히 풍속화의 본색에서 만날 수 있는 혜원의 그림은 "은근한 내숭과 도발적인 몸짓이 공존하는 화면을 통해" 혜원의 기지를 엿볼 수 있다. 혜원의〈사시장춘〉이란 그림에 대한 해석으로 '관음의 관음 구조'에 대한 논의는 이색적인 에로티시즘을 느끼게 한다. 숨김의 드러냄이라고나 할까?

돈 깨나 있는 고상한 양반들만 화랑에 들러 그림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일상인들도 책을 읽 듯 그렇게 그림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그림 읽기를 위해서는 이런 해석(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들을 보며 그림을 읽는 법을 조금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그림 읽는 법에 눈 뜰 필요가 있다. 그림이 다양한 말로 나에게 춤사위를 던질 때 주저하지 않고 손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은 세상을 눈으로 본다. 누구나 사람이라면 대상을 눈으로 본다. 모든 사람이 사물을 눈으로 본다고 해서 모든 사물이 같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눈을 통해 마음과 머리로 걸러진 세상을 표현하는 방식은 각양각색이다. 그런 다양한 표현들을 읽어내는 법도 가지각색이다. 이런 다양성이 공존하는 시대에 설득력 있는 나의 해석을 말할 수 있는 비판적 안목을 지닌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 그 출발을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로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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