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타자의 현존과 관련된 것이라면 재미는 타자를 소비한다.

소수자들이 느끼는 고통은 그 이외의 다른 존재로 존재감을 가질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존재감이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고유함에서 온다고 한다면, 소수자들은 각각의 자기 이름을 가진 개별적 존재, 즉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언제나 범주화된 집단의 이름인 ‘소수자’로만 불리고 사회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심지어 그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조차 그가 말해야 하는 고통은 소수자로서의 고통이지 그 외의 다른 고통은 무시되고 삭제된다. 소수자를 비하하고 조롱하여 얻는 웃음은 이들의 개별성, 즉 인격과 존엄을 파괴한 고통의 등가물이다.

그리고 놀림감이 된 사람에게는 즉각 ‘존경’을 표해야 한다. 전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조롱거리로 내어준 것에 대해서 말이다.
암묵적인 동의하에 자신을 비하와 조롱의 대상으로 내어줄 때조차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것은 존재감의 하락이다.

조롱과 폭로를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비참의 전시’를 통해 재미를 유발하려고 한다. 타인의 인격과 존엄을 파괴하고 그 비참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사람, 이들을 우리 사회는 ‘관종關種’(‘관심 종자’의 준말, 지나치게 주목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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