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장의 용도
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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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장의 용도 - 함윤이 소설집

자개장의 용도에 수록된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차원이 다르거나 살아생전 처음 읽어보는 이야기였다.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어림짐작하면서도 얼마만큼의 뒷심을 지녀야 난생처음 보는 이야기를, 선뜻 시작했더라도 결국엔 완벽히 끝마칠 수 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천사들(가제)을 읽을 땐 특히나 그랬다.

1. 자개장의 용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문. 돌아올 길은 스스로 개척해야 하지만 떠나는 길만큼은 ‘달칵’하고 자개장을 닫는 간단한 행위로 시작할 수 있다.
처음 자개장을 가졌던 여성은 자개장의 용도를 깨닫고는 지레 겁을 먹고 버리려 했다. 여성이 자기 인생의 주체로서 살아가기엔 부족했던 시대에 내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놓고 떠나갈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깨지 못한 금기를, 아니면 내가 얻지 못한 자유를 어쩌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을 아이들에게 준다며 어떨까. 자개장은 깨지 못할 금기이면서도 동시에 누군가는 깨트려줬으면 하는 숙원이었을지 모른다.
돌아올 길을 알아야만 떠날 준비를 마치는 게 아니라 돌아올 길을 생각지 않고 떠나야만 제대로 자개장을 사용하는 것이다. 남은 이들의 마음은 오로지 그들에게 넘겨주고 갈망을 마음으로만 두지 않기를 바라며 딸들에게 물려준 게 아닐까? 떠나는 딸을 붙잡지 않을 또 하나의 용기를 아로새기면서. 자개장의 용도에서 정우는 내게 있어서 만큼은 그저 지나가는 조연이었다.

1. 구유로
연예인을 꿈꾸던 보배, 사라, 위리, 공희라는 4명의 여성이 나온다. 그들이 바랐던 삶과는 달리 적산가옥에 살고 그들이 설 수 있는 무대엔 추레한 손님만이 가득하다.
보배는 그들을 떠난다. 떠나는 보배를 보며 위리는 비아냥거리며 가끔 그런 삶을 살았지, 하며 자신들을 절대 회상하지 말라 소리친다. 그에 더해 다음에 마주치면 죽여버린다는 말까지 한다.
함께 불행하던 사람이 덜 불행한 삶을 위해 떠나는 모습을 보는 건 어렵다. 떠나는 상대가 자기 몫의 불행을 두고 가는 것만 같아서 그 불행까지 껴안아야 할까 봐 목이 죄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여성들은, 협박 비슷한 말을 했던 위리까지도 떠나가는 보배가 두고 가는 불행을 껴안는 듯 숨이 막히지만, 동시에 떠나는 보배의 모습이 결국엔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니 살짝 희망을 보기도 한다. 그의 탈출은 언젠가 나의 모습일 수도 있으니까.

이런 문장이 나온다. “너무 끔찍했어.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정상으로 돌아간다. 결국엔 그 순간부터 끝없는 검열을 피할 수 없다. 난 원래 비정상이야, 하면서 가끔은 나를 위로하던 자책을 방패 삼을 수 없어지니까. 비정상보다 더 못 된 건 정상이 되었다가 다시 비정상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인상 깊은 문장이었다.

일곱 개의 이야기 중 가장 좋았던 두 글이다. 연대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염원하며 끝없이 걷거나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거나 그저 그들의 말을 들을 준비를 하거나. 함께 있다는 눈길 한 번만으로도 할 수 있다. 두 글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절대 경험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고 나대신 경험해봤으면 하는 것도 있다. 나의 연대는 이런 마음이 시작이었다.

함윤이는 글을 쓸 때 마치 재채기를 하듯 자기 생각을 에취!하며 슬쩍 툭 뱉어놓는다. 그럼 나는 함윤이처럼 에취!하며 그의 말에 호응한다. 우리 동네에는 재채기를 참을 때 파인애플을 소리 내 말하거나 마음속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함윤이가 에취!하며 시작해 줬기에 나는 참기위해 파인애플을 외지 않고, 아니 오히려 더 빨리 에취!하기 위해 백색 형광등을 노려본다. 그가 그려낸 인물들을 다 사랑해버렸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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