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양면성을 띤다. 뛰어넘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넘지 못할 땐 앞에 두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쉽게 넘을 수 없기에 그 아래에 숨을 수 있는 벽처럼. VOL. 1 얼음에서 누군가는 꽁꽁 얼어붙은 세계를 누군가는 끝이 없는 무한한 더위를 그려냈다. 두 번째 주제가 ‘벽’이라니. 작가들은 벽을 넘어서려 했을까 그 아래에 숨으려 했을까, 궁금했다. 여섯 개의 이야기 중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아밀의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칭찬을 받으며 자란 나윤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곳에서 마주한 건 함께 선의의 경쟁을 할 동료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싶은 동경의 상대도, 꼭 뛰어넘고 말거라 다짐하게 하는 비등한 실력의 경쟁자도 아닌 수많은 벽이었다. 작은 손이라면 갖은 기교를 부려야 간신히 쳐낼 수만 있는 곡이라든가, 허영만 가득한 줄 알았던 상대의 엄청난 실력이라든가, 그 모든 걸 넘지 못하는 순간 나윤을 옭아매는 ‘동양인’, ’여성‘이라는 수식어라든가. 그렇게 평생의 노력이 허무해지는 순간 차원을 넘나들 수 있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받는다. 나윤은 그 선택으로 일반 성인 남성의 손 크기로도 치기 힘든 곡을 쳐내며 자신을 묶고 있던 올가미를 벗어 던진다. 그렇게 비상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나윤을 주춤하게 했던 수식어인 ‘동양인 여성’ 같지 않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한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넘어서는 순간 모든 고민은 끝이 날까? 아마 모두가 그렇듯 또 다른 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또 나타난 벽 앞에서 잠시간 좌절하기도 하지만 한 번 해본 ‘벽 무너뜨리기’에 우리들은 또 한 번 부딪히려 한다. 나윤이 차원을 넘나드는 능력과 맞바꾼 ‘모든 가능성’이란 또 한 번 마주하게 된 벽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나윤이 느낀 건 좌절감도 패배감도 아니다. 그저 넘을 필요가 없다는 마음이다. 넘을 수가 없다는 마음이 아닌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마음. 가끔 벽 앞에서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나윤처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내가 벽 하나를 넘어서도 모든 긍정적 우연이 겹치지 않는다면 바라는 끝에 닿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 때문에 한 발 내딛고 뒤돌아 도망친다. 그 벽들이 두드리면 열리는 문이 되길 바라며 하염없이 기다리다 뜬구름이라며 벽을 두드리는 것조차 주저한다. 가능성이 아직은 남은 나는 필요성을 찾을 수 있을까. 이제는 두드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