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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1년
이인화 지음 / 스토리프렌즈 / 2021년 2월
평점 :
책을 고르는데 불편한 사건들이 오버랩됐지만 《영원한 제국》에 대한 깊은 인상이 그의 소설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미묘함이 뒤엉켰는지 아님 나의 편견 탓인지 첫 페이지를 펼치고 한동안은 억지스러운 거부감이 지배적이었다.
세계 언어학자들이 한글에 보내는 찬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상상으로 뻗쳐나갈만한 힘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한글에 대한 우수성을 내적인 가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평가로만 알고 있는 탓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이도 문자는 한글 이전, 지금은 우리가 쓰지 않는 순경음, 반치음, 아래아 등을 포함하고 있는 창제 당시의 15세기 표기법을 그대로 따르는 문자다.
이도 문자는 인간어와 동물어는 물론 기계어 등 세상 복잡한 소리를 다 담을 수 있는 유일한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이도 문자로 의미가 사라지는 단어 이하의 단위까지 계산되자 입력된 데이터로 없던 새로운 지식과 감정이 나타난다.
이도 문자가 대세가 되며 세계 공용어가 되고 그것을 이용해 빅브라더와 같은 체제를 재현하려고 한다.
국가 간의 대립이 아닌 이도 우파와 이도 좌파, 반이도파가 대립한다.
1896년 조선의 제물포와 2061년 미래를 오가는 시간 여행.
역사와 SF, 스릴러, 판타지를 오가며 처음에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겉도는 느낌이었지만
차츰 다채롭게 펼쳐지는 이도 문자에 얽힌 사건들과 인물 등이 등장하며 극적인 재미와 흥분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작가의 풍부한 지식과 상상력에 감탄.
2061년은 인간과 인공지능 그리고 혼종이 뒤섞여있다. 인간이 뇌에 칩을 심어 인공지능에게 몸을 대여해 주고 돈을 받는다. 시간 여행은 몸이 아닌 의식이 전기신호로 변환되어 과거의 인물에 침투하는 방식이다.
막강한 이도 문자라는 데이터를 가졌음에도 한국은 분열과 전쟁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국제방역연합의 인공지능 에마는 사상 최악의 아바돈 팬데믹을 예고하고,
이도 문자로 바이러스 체계를 데이터화한 완전 방역 시스템, 이도의 무지개를 계획한다.
바이러스 팬데믹을 명목으로 모든 소리를 데이터화해 관리함으로써 결국 독립된 자유는 사라지게 된다.
진화된 1984다.
혼종인 미국 대통령 다말은 백신 개발을 위한 팬데믹 바이러스를 확보하기 위해 최초 근원지인 1896년 제물포로 시간여행 탐사자를 보냈지만 모두 살해당했다.
다음 탐사자로 심재익을 지목하고 바이러스 확보와 함께 이도의 무지개를 무산시키기 위해 훈민정음해례본을 없애라고 한다.
과학, 역사, 지리, 언어학 등 영역을 넘나드는 전문성이 신비로움을 더했다.
워낙 방대하고 심도 있어서 어디부터 어떻게 짚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현재 상황과 맞물려 다양하게 그려지는 미래 속에 이도 문자가 있었다.
태종 이성계와 세종, 여진과의 관계는 이것이 내가 아는 역사일까 의심도 들고,
문득 지나간 역사 속에 내가 모르는 수많은 진실들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북방민족, 여진족, 차별, 4군 6진, 백두산, 함경도, 샤먼, 파스파 문자와 산스크리트어, 제물포, 의병, 조계지, 여의원과 경무관, 세계어 운동가 영국인, 동학, 일본 순사, 청일전쟁.
픽션과 논픽션 그 어디쯤의 상상을 더듬으며 색다른 역사소설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여진어에 대한 신비로움도 떨칠 수 없다.
창작자가 분명한 이도 문자는 데이터 저작권이 생긴다.
이도 문자의 데이터 저작권료를 기본 소득처럼 누리며 사는 한국.
상상만으로도 참 감격스러운 일이다.
안타깝게도 소설 속에서조차 자멸로 이도의 자손으로서 가지는 저작권도 압수당한 채 실현되지 못했다.
이도 문자의 창제 목적이 그대로 실현되었더라면 조선이 그렇게 무능하게 침략당하지 않았을까.
광복 후 80%에 달하던 문맹률에서 벗어난 지, 백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도약한 현재의 모습을 보면
그런 기대가 마냥 허황되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언어는 생각을 지배하고 생각은 운명을 바꾼다.
한글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흥미로운 상상을 하게 된다.
지금은 사라진 문자를 복구시키는 건 어떨까 생각도 해본다.
아이와 한글 박물관 갔을 때 찍어둔 세계 석학들의 한글 찬양이다.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완전한 글자"
"세종의 한글 창제는 인류사의 빛나는 업적"
"전적으로 독창적이고 놀라운 음소문자, 세계 어떤 나라의 문자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과학적인 표기 체계"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문자를 발명하였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해마다 한글날을 기념하고 있다. 세계 언어학계가 한글날을 찬양하고 공휴일로 기념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381. 한글은 가장 발달된 문자, 모든 언어가 꿈꾸는 알파벳이라고 한다. 이런 알파벳을 대영제국이나 미합중국 같은 지구 문명 중심부가 아니라 한국인이 사용하고 있는 사실을 '문자학적 사치'라고 말해진다. 나의 소설은 이 '문자학적 사치' 대한 탐구이다.
'문자학적 사치'
너무나 과분한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미쳐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극적인 재미도 재미지만 한글에 대한 나의 무지를 일깨워주는 의미심장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