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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재단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20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창 일본소설에 푹 빠져있을 때가 있었는데 참 오랜만에 느껴본다. 소설 자체가
오랜만이라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 《여름의 재단》
시마모토 리오의 장편소설로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주인공 치히로가 어린 시절 겪은 성적 학대의 트라우마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치유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섬세한 묘사와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앞에 한 편의 영화가 펼쳐질 만큼 빨려 드는 책이다. 인물들에 녹아들어 함께 숨쉬는 듯했다. 누구나 크고 작은 트라우마가
있지 않을까 싶다.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수록 더 옭아매는 덫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누구는 외면하고 살고, 누구는 매몰되어 허우적대며 산다. 다른 누구는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이겨내고 나면 별거 아니었다는
해방감에 삶을 더 사랑하게 된다. 온전한 나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먼저 불완전한 나를 인정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작가인 치히로는 편집자 시바타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마치 그녀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도 아는 듯 마구 뒤흔들 뿐 매번 차가운
얼굴로 돌아선다. 비정상적인 관계에 왜 끌려다닐까. 이해할
수 없지만 치히로도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막연히 몸이 기억하는, 참고 비밀을 강요당하며 억압받았던 불쾌함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결국
시바타에게 상처만 입고 본가로 돌아가 할아버지의 책을 재단하며 여름을 보낸다. 종이책을 데이터화하기
위해 재단하는 행위는 작가인 치히로에게 자해와 같다는 느낌을 준다. 괴로울 것을 뻔히 알면서도 트라우마를
마주함으로써 그 안에서 진정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소설은 네 편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시바타와의 만남이 어린 시절 어두운 기억을
되살려 뜨거운 여름 제 살을 깎는 듯한 재단을 하게 만든다. 자신이 지키고 있던 무의미한 것들을 잘라낼
결심을 하며 마치 새로 태어나는 느낌을 받은 여름. 여우비처럼 스쳐 지나가는 가을의 남자들. 조심스럽고 비밀스럽지만 푸근한 세이노를 만나며 다가오는 변화를 느끼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함을 떨칠 수 없던
겨울의 침묵, 새싹이 움트듯 아름다운 봄의 결론. 그렇게 29살 치히로는 이전과는 다른 30살이 된다.

162. 그러나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 거부하지 못하는 나약함을 혐오할
만큼, 빼앗긴 걸 되찾으려 필사적이었다.
빼앗겼다고 여긴 것 따위는, 사실은 벌써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인데.
집착이라고 하나.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끝을 예감하면서도 끝내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면을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삶이 한결 부드러워질 텐데 평범한 사람에게는 쉽지 않다. 그렇게 세월의
흔적을 남기며 성장해 가야 하는 것 같다. 그래야 할 때를 알아챌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않을까.

218. "복습요"
그때 어떻게 하면 좋았을지. 전혀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았을까. 내게 없는 것과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손을 뻗었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그걸 알고 싶어서 나는 세이노 씨와의 만남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몹쓸 짓을 했던 인간을 찾아가 당당히 드러낸 치히로. 상처를 그렇게
도려 낸 듯하다. 힘껏 낸 용기는 치히로의 삶을 응원하듯 벅찬 설렘으로 안내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린 시절의 정신적 충격이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경우를 많이 본다. 두렵더라도
포기하지 말길.
상상조차 하기 싫은 사건들이 실제로도 벌어지고 있으니 가지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누구보다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올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